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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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림속에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림수산은 밀영둘레를 순찰하다가 흠칫 놀라 멎어섰다. 어딘가 멀리에서 쇠바줄의 떨림과도 같은 웅- 하는 둔중한 소음이 분명히 울렸는데 귀를 강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정적… 정적… 그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냥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는 때없이 문득 찾아든 이 정적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느 계절에나 무변광대한 수해속은 온갖 소음과 굉음의 왕국이다. 새움이 트는 소리, 나무잎사귀들의 설레임소리, 메새들의 우짖음소리, 맹수들의 함성, 비바람과 눈바람의 아우성, 거목들이 쓰러지고 얼어터지는 굉음, 혈전의 총포성, 뢰성벽력의 메아리…

그것은 거창하고 무궁한 생명세계의 웨침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적막하고 괴괴해질수 있는가?…

그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재앙의 조짐이 아닌가싶은 생각도 들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재난의 그림자가 영악한 메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여드는것 같기도 하였다.

어찌 생각하면 이 모든 불안은 잡았다가 놓아준 백계로씨야인들때문이였다.

그날 오백룡중대장은 우리가 백인포로들을 사살해버리면 혁명군의 얼굴에 흙탕칠을 하여 위신을 떨어뜨린다고 하였다. 일제는 사실을 외곡과장하여 김일성공산군은 세계에서 가장 잔인무도한 무장집단이라고 대대적인 악선전을 벌릴것이라고 하며 그자들을 살려보낸것을 정당화하였다. 그처럼 과단성이 있고 우직하게까지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 나오자 더 신중해져 주춤거리다가 종당에는 마음을 돌리였다.

림수산은 그 조국배반자의 자식들이 앞에서는 굽신거렸지만 돌아가서는 선대에서 물려받은 반역의 피가 끓어올라 《토벌대》를 끌고올것만 같아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그는 하마툰과 상촌에서 공작해들인 군량을 비밀장소들에 갈라서 은페시키고 언제 《토벌대》가 달려들어도 대응할수 있도록 감시를 강화하는 한편 전투준비를 빈틈없이 해놓았다. 오백룡중대장이 박주호를 비롯한 몇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또다시 식량공작에 나간 다음 그는 자신이 직접 밀영의 멀고 가까운 주변수림속을 자주 순찰해보기도 하였다. …

림수산은 아름드리나무그루밑에 퍼더버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무가지들사이로 어디론가 시름없이 둥둥 떠가는 구름송이들이 보였다.

바로 가까이에서 수풀이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목갑총에 갔는데 수풀속에서 마영복이 걸어나왔다.

《참모장동지, 식사…》

《응?》

《빨리 갑시다. 식겠습니다. 챠- 이거…》 마영복은 어리광부리듯이 어깨를 흔들며 어줍게 웃어보였다.

옛 전령병에게 끌리다싶이 걸어가던 참모장은 밀영 아래쪽 잡관목덤불속에서 《무산아재》가 허리를 구부정하고 무엇인가 찾고있는것을 띄여보았다.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 대답없이 그한테로 다가와 들고온 바가지를 내밀었다. 그안에는 서너줌가량의 기장쌀이 들어있었다. 요전날 새벽 식량운반을 할 때 흘린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녀자가 보기와는 달리 깐깐한데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며 다 주어모으면 끼니에 보탬이 되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지나갔다.

귀틀막 온돌방아래목에서는 푸짐하면서도 산뜻하게 차린 저녁식사가 기다리고있었다.

참모장은 음식그릇들이 넘치게 놓인 소반상을 일별하고는 꾸중을 피하려는듯 황황히 돌아서 나가려는 마영복을 불러세웠다.

《그만큼 말했는데 또 이렇게 차렸소? 나를 뭘로 만들자고 이래? 주력부대에서는 지금 낟알구경도 못하겠는데…》

《참모장동지…》

《다 걷어내가오. 안먹겠소!》

《챠- 이거…》

《동무들이 뭐라고 하겠소.》

《거울을 좀 보시우다. 얼굴이 어떻게 됐는가. 빨리 몸을 추세워야 할게 아닙니까. 성한 몸도 아닌데 일있습니까, 누가 뭐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않소.》

《박주호소대장두 식량공작에 나가 이제는 별나게 생각할 사람도 없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주호동무가?…》

마영복은 얼결에 말실수를 했다고 여겼는지 얼굴이 벌개졌다.

《아닙니다. … 공연히… 제가…》

《그가 뭐라고 하던가?》

《…》

《일없소. 말해보라구.》

《별소리를 안했습니다. … 존경하는건 좋지만 그렇게… 따로… 특별히 대접하면… 정말 어이없어서… 사상감정이 변해 대감님이 된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으흠…》

《박주호소대장은 사람이 좋다가두… 어떤 땐 별나게 생각한단 말이우다. 제가 가만히 있으니까 글쎄 나중엔 기고만장해서 사령관동지는 한홉의 미시가루도 대원들과 똑같이 나누어 드시였다. 이러면서 훈시를 시작하는데 내- 참-》

《그 말이 다 옳소! 옳아… 이걸 당장 내가오!》

마영복은 고개를 수굿하고 씨근거리다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항변했다.

《참모장동지는 환자… 환자가 아닙니까! 에익-》

그리고는 문을 차고 뛰여나갔다.

림수산은 얼굴이 해쓱해져 앉아있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허공의 한점을 지켜볼뿐… 이마며 목에서 피줄이 뛰고 무릎에 놓인 주먹이 알릴듯말듯 떨었다.

이윽고 문이 조용히 열리며 한명찬소대장이 들어왔다.

그는 방안공기에서 무엇을 느꼈던지 들어오지 않을데로 들어온 사람처럼 어정쩡해진 얼굴로 말도 못하고 쭈밋거리기만 하였다.

림수산이 먼저 말을 건네였다.

《어떻게 왔소?》

《식사전인걸 몰랐습니다.》

《천천히… 좀 있다 먹겠소.》

《잠복초에서 웬 수상한 포수를 잡았습니다.》

《포수?!》

한명찬은 골안치기쪽에서 내려오는걸 잡았다고 하였다.

림수산은 얼굴색이 대뜸 달라져 지나가게 내버려들것이지 잡기는 왜 잡는가, 잠복초를 보고 가까이에 밀영이 있다는걸 눈치채지 않겠느냐고 나무랐다. 포수가 잠복초앞으로 바싹바싹 다가와서 눈길이 마주치는 바람에 어쩔수 없었다고 하였다.

《밀정이 아니요?》

잠복초에서 좀 떨어진 너럭바위에 구레나룻을 더부룩하게 기른 오십쯤 돼보이는 로인이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로인은 벙거지를 벗어쥐고 자기한테로 다가오는 림수산과 한명찬 두사람을 번갈아 여겨보다가 머리를 공손히 숙여 인사했다.

로인은 무산군 삼장쪽에 사는 포수로서 이름은 엄항섭, 동네 송아지를 물어간 짐승의 발자취를 찾아 보름동안 헤매다가 그만 놓쳐버리고 귀가하는 길이라는것이였다.

너럭바위에 기대여 세워놓은 낡은 쌍신렵총, 닳아빠진 도로기, 아마포의 행전, 팔목에 낀 여우가죽토시, 산판에 딩굴어 람루해진 솜덧저고리, 회색천을 크게 오려붙인 바지무르팍 등… 어느모로 뜯어보나 산짐승사냥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벽지 포수의 궁색한 몰골이였다.

《산에서 싸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시유…》 하고 포수는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짓고는 자기도 젊어서 한때 화승대나 38식을 메고 김좌진과 서일의 독립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싸우다가 로령땅도 밟아본적이 있어 혁명군어른들의 수고와 고생을 짐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흑하사변》후 총대를 꺾어버리고 고국에 나와 숨어살면서 감자농사도 짓고 사냥질이나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다가 간혹 산중에서 혁명군어른들을 만나면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그런 말에도 림수산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포수의 동정을 살피며 우리는 북만쪽에서 나와 김사령부대를 찾아가는데 혹시 이 일대에서 혁명군부대가 움직이는것을 띄여본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포수로인은 웬일인지 그의 팔소매며 바지가랭이에 흘깃 눈을 던졌다가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저는 짐승들한테 정신이 팔렸던지라 다른데 눈길을 팔 경황도 못되였습니다. 한두번인가 먼 총소리를 들은것 같은데 혹시 잘못 들은게 아닌지…》

《예…》

《신령님의 가호를 받아 부디 몸성히… 휴- 언제면 국운이 틔여 모두 이 고생들을 안하게 되겠는지…》

그리고 로인은 너럭바위에 벗어놓은 꼴망태를 끌어당겨 그안에서 자그마한 꾸레미를 꺼내여 림수산에게 내밀었다.

《받으시우.》

《이게 뭡니까?》

《별게 아니오다. 다른 생각 말구 받으시우. 만병에 효험이 있는 큰 약재오다.》

《어거 곰열이 아닙니까?》

《그쯤 알구 받으시우. 나한테두 공짜로 생긴거웨다.》

림수산은 굳이 사양했다.

《총대를 꺾어버린 후로는 노상 속이 켕겨 울적하게 세월을 보낸 놈이웨다. 속죄의 뜻으로 드리니…》

림수산은 그 갸륵한 심정에 가슴이 쩌릿해졌지만 께름한 느낌도 없지 않아 움쭉 일어섰다가 실눈을 짓고 빤히 여겨보는 원망의 눈길에 그만 사로잡혔다.

도로 앉았다.

《젊은이, 받는게 좋을거요. 초면에 불길한 소리를 해서 안됐소만… 반년안으로 이 세상을 아주 하직할수 있는 화를 입을수 있기에 드리는게오다.》

《…?》

《군사한테 그런 화란 뭐겠소. 급소를 총알에 맞는게지요. 하늘이 도와 급사를 면하고 치명상이면 이 명약을 쓰시오. 나는 곽풍헌대선사님 문하에서 관상학과 도술도 좀 익힌 사람이올시다. …》

그날밤 림수산은 자정이 썩 지나도록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리에서 뒤채기는가 하면 일어나 담배도 피우고 천정을 멍하니 쳐다보기도 하였다. 옛 민화에서처럼 신비적인 기운을 풍기며 나타났다가 사라진 포수로인이 엮어내린 이야기속의 《총알》이 딱장벌레처럼 마음 한구석에 붙어 그냥 야릇한 소음을 냈던것이다.

지난날 자신을 철저한 유물론자로, 과학적사회주의사상이 투철한 혁명가로 자처하며 미신따위는 가까이 범접하게도 못했던 그였건만 이 가을밤에는 그 《딱장벌레》를 털어버릴수 없었다.

불면증에 허덕이며 딱장벌레의 소음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그 청승맞은 소리는 점점 크게 공명되여 마음속을 휘저어 착잡한 불안감들을 불러일으켜 한갈래로 이어놓았다. 백계로씨야인들… 마영복이 차린 저녁식사와 박주호… 수풀속에 흘려진 낟알들… 포수로인의 예언… 총알…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 크게 뜬 눈으로 등잔의 스러져가는 불꼬리를 지켜보았다.

(흘린 낟알… 기장쌀… 그게… 바로 그게 우환거리다! 그렇다! 백계놈들이 《토벌대》를 끌고 오다 길을 잃었다. 기장쌀이 흘려진것만 발견하면… 군견들이 그 냄새를 따라 달리고… 놈들이 그 뒤를 따라 달려오면 끝장이다!)

그는 으스러지도록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누가 흘렸는가?… 누가 기장쌀가마니를 지고 왔던가? 누가… 누가… 누가?…)

그날 이른아침 참모장은 한명찬소대장을 불러 밀영에 남은 대원들을 모조리 낟알줏기에 동원하라고 지시하였다.

한명찬은 6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식량을 운반해온 길을 따라 십리나마 내려가며 수풀속을 샅샅이 뒤지면서 흘린 낟알을 주었는데 수확이 별로 없었다. 어떤 대원은 반줌, 어떤 대원은 스물대여섯알밖에 줏지 못하였다.

뒤따라 내려온 참모장이 한명찬에게서 결과를 알고 좋지 못한 얼굴로 말하였다.

《건성건성 했구만. 올라가며 다시 줏소.》

그리고는 문득 이렇게 물었다.

《동무는 그날밤 무슨 가마니를 지고 왔소?》

《예?…》

《좁쌀이요, 기장쌀이요?》

《저는 궤짝을…》

《어, 그랬던가, 박주호동무는?…》

《모르겠습니다.》

《기장쌀이 아니요?》

《생각나지 않습니다.》

《무산아재》는 의아한 얼굴로 그들쪽을 돌아보다가 흘린 낟알을 모아쥔 자기 손을 펴보았다.

대지처럼 검스럼한 손바닥에서 여라문알의 쌀알이 반들거리고있었다.

그날 오전 림수산은 한명찬소대장을 데리고 밀영의 앞골짜기로 15리가량 올라가다가 여태 사람의 발걸음이 미치지 못한듯한 원시림속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천험의 요새처럼 골안을 둘러막은 산새험한 바위투성이의 산릉선, 아름드리거목들이 빼곡 들어차 해빛도 겨우 스며드는듯한 울울창창한 숲, 어딘가 가까운 락엽의 퇴적층밑에서 샘물이 돌돌 흘러내리는 소리…

림수산은 두손을 허리에 올린채 한명찬소대장을 돌아보며 말을 건네였다.

《그전에 우리가 동기학습을 했던 마당거우밀영자리보다 지형이 어때?》

한명찬은 좀 어리둥절해졌다.

《… 지형이요? 더 좋습니다.》

《여기다 밀영자리를 빨리 닦아야겠소. 주력부대가 도착하기전에… 우선 공작해들인 식량부터 옮겨와야겠소. 움을 깊이 파고…》

《여기서 올겨울을 나게 됩니까?》

《사령관동지께서 주력부대를 이끌고 왜 여기로 오시겠소. …》

《예…》

한명찬은 얼굴빛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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