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2 장 특종기사를 찾아서

22

 

《… 김지우라는 한 인간에 대해 말하자면 아무래도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리승만정권시기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4. 19봉기에 의해 리승만정권이 거꾸러질 때 나는 실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따지고보면 리승만이 친일, 반민족세력과 손잡고 자유당정권을 세운것은 무서운 정권욕때문이였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일본의 앞잡이로 천황만세를 부르던자들이 리승만치하에서 정계, 법조계, 재계, 학계, 문화계 등의 요직을 차지했을 때 리해가 되지 않아 머리를 기웃거렸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리승만이 왜 친일세력들을 포섭하였겠습니까? 이것은 권좌를 노린 정치음모군으로서는 피할수 없는 선택이였고 운명의 길이였습니다. 해외에서 미국이 임대해준 군용기를 타고 8. 15해방후에야 서울에 나타난 리승만으로서는 김구, 려운형과 같은 반일애국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누르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기의 정치지반을 닦아야 하는것이 필수적이였는데 자기의 보잘것없는 명성과 경력으로는 이들을 압도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리승만은 당시 배척을 받아 멸망의 위기에 놓였던 친일세력들을 걷어모았습니다.

<누가 친일을 하고싶어했는가? 먹고살자고 친일을 했는데 그게 죽을죄야 아니지.> 하고 그들의 등을 두드려주니 몰락하던 친일파들의 숨구멍이 열리게 되고 곧 리승만 만세를 부르게 되였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잔명을 구제하기 위해 친일세력을 규합하여 리승만을 도와 한짓이 애국인사들에 대한 테로였고 독재정권을 위한 파쑈적폭압이였습니다. 또한 친일파를 깨끗하게 숙청해버린 북의 정책에 대해서는 광기를 품고 반항하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분렬주의로 신식민주의정책을 실현하려는 외세의 환영을 받았고 이 땅우에 그대로 동족을 주적으로 하는 불행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였던겁니다. 그후 친일을 싹으로 하여 이 땅우에 배양된 보수세력은 궁지에 몰릴 때마다 반공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위기를 모면하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리승만정권의 부패와 타락은 종당에 4. 19봉기라는 력사적판결을 받았습니다. 1960년 3월 중순에 있게 될 대통령선거에서 리승만의 4선당선을 위해 자유당정권이 로골적인 선거부정을 조작한것은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부정선거는 극치를 이루어서 어느 면에서인가는 등록된 투표자수보다 훨씬 많은 지지표가 나와 사람들을 경악케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선거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중시위가 발생하게 되였는데 경찰의 야만적인 탄압이 가해지자 시위는 곧 봉기로 넘어갔고 마른 장작에 불이 당기듯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주요도시들에로 퍼져갔습니다. 한달 가까이 치렬하게 봉기가 진행되고있을 때 4월 11일 행방불명되였던 김주렬학생의 시체가 마산앞바다에 떠올랐습니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있는처참한 모습이였습니다. 그 시체가 발견된것을 계기로 제2차 마산봉기가 터지면서 그것은 료원의 불길로 이 땅을 통채로 휘감았습니다. 경무대앞까지 진출한 봉기자들속에서 경찰의 발포로 수백명의 부상자와 사망자가 생겨났으나 민중은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함으로써 결국 4월 26일 리승만은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드디여 민주화의 봄이 왔다고 믿었습니다. 나라의 통일도 곧 이룩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그런데 당시의 민주당정권은 외세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 권력을 다지는데만 열중하고 민생, 통일 등 중요하고도 절실한 문제들은 혀끝에만 올려놓고있었습니다. 결국 동족인 북과의 평화통일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들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애국적인 언론들도 정부의 일처리가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련일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정권이 바뀌였어도 부정부패가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으니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남과 북의 협상과 교류, 민족자주, 평화통일을 강력히 주장하며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 로동자대중의 권리와 리익을 옹호하는것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일보>라는 신문이 출현하였습니다. 그 신문은 자기의 창간지에 <우리는 앞으로 민족은 하나라는 의식과 그 하나인 민족의 번영된 장래를 저해하는 여하한 세력과도 과감하게 싸울것을 말해두고싶다.>라고 서술할 정도로 혁신적이였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협력, 단합과 통일을 지향하는 이 신문의 론조들은 독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당시로서는 판매 1위에 도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답니다. 그 신문을 창간한 사람은 정영수라고 일본에 건너가 재일거류민단에서 활동하다가 4. 19봉기이후에 귀국한 사람이였고 현철의 친아버지라는 김지우는 당시 그 신문사의 일본특파기자였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참된 일을 해보자던 그들의 꿈은 5.16군사쿠데타의 군화밑에 산산이 부셔졌습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세력은 곧 <혁명공약>이라는걸 내놓았는데 반공을 국시의 첫째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인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것이였습니다. 국시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없이는 나라가 존립할수 없는 근본적인 바탕, 이에 따른 리념을 뜻하는건데 반공을 나라의 국시라고 한다는건 얼토당토않은것이였습니다. 론리적으로 따져도 공산주의가 있기때문에 반공이 있는것인데 만일 공산주의가 없어져버리면 반공이 필요하지 않게 되여 나라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때 반공말고도 우리가 할 일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무엇때문에 반공을 국시로 삼았는가? 이것은 바로 리승만처럼 동족과의 대결로 권력을 유지하며 이 땅의 보수세력을 포섭하고 미국을 등에 업어 그것을 보호, 연장하자는것이였습니다. 해괴하기 짝이 없는 반공국시를 실행하자니 타도해야 할 공산주의자와 용공주의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혁신파들까지도 모두 용공분자로 몰아대는 현대판 중세기마녀사냥과 같은걸 벌려놓게 되였습니다.

이제부터 중요하니 잘 들어주십시오. 언론계에서는 그 첫 희생자가 김지우가 일본특파기자로 있던 <하나일보>였습니다.

당시 김지우는 일본에 있은탓에 오라를 면했지만 신문사 사장이였던 정영수는 구속되였습니다. 독재란 원래 언론을 눈에 든 가시로 여기는 법이라 우선 언론인들의 혀바닥에 바늘을 꽂고 그들의 손에 수갑을 채우려는 심사였습니다. 또한 반공국시를 공약의 제1항으로 내세웠으니 평화통일을 부르짖던 신문사를 페쇄하는것이 우선이였습니다. 그런데 정영수사장에게 어떤 죄명을 씌우겠는가? 그게 바로 이북의 간첩설입니다. 소위 <혁명재판소>라는것이 정영수가 당시 일본에 있는 간첩으로부터 두차례에 걸쳐 공작자금을 받고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다가 락선되였으며 <하나일보>를 통해 북을 고무찬양하고 동조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해외에서 죄명이 타당치 않다고 치렬한 구명운동을 벌렸지만 그해 겨울 사형이 집행되였습니다.

그로부터 몇해가 지나 김지우가 별안간 일본에서 서울로 날아왔습니다. 실은 정영수사장의 부친의 부탁을 받고 부부동반하여 들어온것이였습니다. 기실 <하나일보>는 여러 지인들의 투자로 이루어진 주식회사였습니다.

당시 김지우는 일본에서 투자를 이끌어내는 일에도 관여하여 신문사의 창간자금을 마련하는데도 기여를 했나 봅니다. 그런데 정영수사장이 사형당하자 사장의 부친이 신문사의 법정대리인으로 되였는데 전 재산을 치안국에 압수당한 상태였습니다. 사장의 부친은 오래전에 다리를 상한 불구의 몸인데다가 집에는 10여명이 넘는 어린이와 늙은이들만 남았던터라 빚단련에 집기둥마저 뽑힐 정도였나 봅니다. 그래서 변호사를 선정하여 비록 자식이 처형되였더라도 재산만은 환부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하고 일본에 있던 김지우에게도 도움을 청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김지우는 서울에 와서 해당 기관에서 압수한 재산을 환부할데 대한 지시문을 발급하도록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정사장이 모함당한 사실을 해명하려고 은밀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김지우가 정사장에게 공작자금을 보내준 북의 간첩이라는 고발이 있었던것입니다. 그리하여 김지우는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정사장의 뒤를 따르게 되였습니다.…》

긴 이야기를 마친 강정웅은 잠시 숨을 돌리였다. 라경숙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듣고있었다. 강정웅이 말을 이었다.

《참으로 민족분렬의 력사가 가져온 슬픈 이야기입니다. 어쨌든간에 김지우사건은 정영수사장의 사건과 맥락을 같이하고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속에서 당시의 <하나일보>사건은 정권찬탈과정에 계획된 사법살인이였다는 주장들이 모아지고있습니다. 이젠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특별법>도 제정되였으니 <하나일보>사건재판과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정영수사장의 처형이 불법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현철의 친아버지인 김지우의 억울한 죄명도 벗게 됩니다.》

라경숙은 가슴이 찢어지는듯싶었다. 슬픈 이야기였다. 자기의 심정이 이럴진대 이런 과거를 알게 되는 순간 현철의 마음은 어떨가싶었다.

《아직은 김지우라는 사람에 대해 이 정도로밖에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영수사장에 대한 판결이 부당하였다면 그 공판의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려고 한 김지우의 행동이 정당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김지우가 이북의 간첩이였다고 증언한 사람들을 찾아내고 만나보면 과연 무엇이 김지우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알수 있을것입니다.》

강정웅은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낸 다음에 때를 보아 현철에게 알려주는것이 좋겠다면서 라경숙을 위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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