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6 장  《보감》

5

 

오백여리의 수레길과 배길을 이어 그들은 드디여 곡도에 이르렀다. 박응규의 말대로 정말 외인들이 들어오면 빤드름히 알릴 섬이였다. 약 오십여호의 민가들이 있었는데 박응규가 소개해준 집은 민가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에 자리잡고있었다.

주인집로인이 소개신을 읽고나서 물었다.

《헌데 어인 일로 이 외진 섬에 걸음을 하였나?》

칠성이가 거침없이 말하였다.

《로인님, 저의 어머니와 색시올시다.》

분명 나이가 두세살우인 달래를 제 색시라고 시치미를 뚝 따며 칠성이가 소개하는 바람에 달래가 어처구니없어 칠성이에게 눈을 흘겼다.

《제 색시가 신병을 앓고있는데 조용하고 공기가 좋은 바다바람을 쏘이면 치료에 효험이 있다 하여 제 어머니와 같이 걸음을 하였소이다. 저의 어머니는 유능한 의원이올시다.》

로인이 칠성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웃었다.

《허허허… 젊은이, 내 눈은 못 속이네.

이 한적한 섬에서 대체 무슨 치료를 한다고 셋씩이나 이렇게 줄줄이 동행한단 말인가?》

칠성이의 얼굴이 대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달래와 설유도 자못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로인의 신통한 관찰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자네들은 분명코 이 섬에 정배살이를 온 사람들을 보러 온 사람들일세.》

설유가 차분한 어조로 수긍하였다.

《옳소이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맞소이다.》

로인이 백발수염을 내리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터이지. 헌데 누굴 보러 왔나? 여기서 정배를 사는 사람들은 여섯명이네, 그리고 위리안치된 중죄인이 또 한명 있네. 임자네들의 행색을 보아서는 중죄인을 만나러 오지는 않았을거구.》

설유는 불쑥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정배살이에서도 가장 중하게 취급되는 위리안치의 참혹성이 그 말에 그대로 나타난듯싶었다. 그러나 설유는 인차 마음을 다잡고 솔직히 터놓았다.

《아버님, 그 중죄인이 바로 저의 주인입니다.》

《아니, 대체 무슨 역적질을 했기에 그런 중죄인취급을 받나?》

칠성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로인장! 말씀 삼가하시우. 대체 뉘가 역적질을 했다는거요. 우리 의원님처럼 마음이 착하신분을 이 세상에서 한번 찾아보시우. 나나 여기 이 누이 아니, 우리 처도 그 의원님이 아니였더라면 이미 황천객이 된지 오랬단 말이요!》

로인의 눈은 더욱더 휘둥그래졌다.

《헌데 왜 그렇게 위리안치되였나?》

설유가 조용히 입을 열었으나 말끝을 흐렸다.

《아버님에게 그 사연을 다 말씀드리자면…》

로인이 뒤말을 잇지 못하는 설유의 심정을 알겠다는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말 못할 사연이 많을테지… 내 이곳에 태를 묻은 사람인데 확실히 이 섬에는 귀양오는 사람들이 많았어.

저 고려시절엔 왕건태조대왕의 충신이였던 유금필장군도 간신들의 모함에 들어 이 곡도에서 정배살이를 했다고 하더구만. 그런즉 억울하게 모함에 걸려 이 섬에 류배온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말일세.》

달래가 손벽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유, 이제야 할아버지가 우리 마음을 알아주시네요!》

칠성이도 한결 마음이 누긋해졌는지 로인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헌데 로인님, 그 중죄인을 위리안치한 곳이 어딘지 모르시오이까?》

《모르긴 왜 몰라. 내 이 섬의 지형은 손금보듯 다 아네.》

《그럼 우릴 그곳으로 안내해줄수 있소이까?》

《그야 뭘 그렇게 힘들겠나.》

칠성이가 벌떡 일어서며 성급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당장 우릴 좀 안내해주시오이다.》

《아니, 아직 려장도 풀지 않았는데 원로에 일없겠나?》

《로인님, 그 가시울타리안에 있는 사람의 고생에 비하면 그게 대수겠소이까. 한시가 급하니 어서 떠나시오이다.》

달래가 그 말에 부채질을 하였다.

《옳소이다. 어서 떠나시오이다.》

설유는 칠성이와 달래를 고마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단순히 저들의 목숨을 살려준 그 신세갚음으로부터 출발한것이 아니였다. 허준에게 진심으로 공감되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한 사심없는 지지가 아니면 도저히 흉내낼수 없는 아름다운 마음이였다.

일행은 로인을 앞세우고 곧 길을 떠났다. 자그마한 둔덕에 오르면서 로인이 한마디 당부하였다.

《다 왔네. 그러니 마음들을 굳게 가지라구.》

설유의 가슴은 널뛰듯 활랑거리기 시작했다. 둔덕정수리에 올라선 로인이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가 중죄인이 거처하는 곳이네.》

약 오백보가량 떨어진 무정한 가시울타리 덤불속에 자그마한 초가집이영이 바라보였다.

달래가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비명을 질렀다.

《에구머니나- 산 사람을 저런 곳에다 가두다니?》

설유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눈앞이 뽀얗게 흐려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마음의 준비는 하고 왔으나 정작 눈앞에 닥치고보니 눈물이 앞을 가리우고 안개가 낀것처럼 주위의 모든것이 흐릿하게 안겨들었다.

(아! 그러니 저안에 그이가 있단 말인가?)

칼로 저미는듯 심장이 아파났다. 설유는 입술을 옥물고 가까스레 자기를 지탱하였다.

칠성이가 펄썩 주저앉으며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죽일 놈들같으니! 저런 곳에 생사람을 가둬놓다니. 저게 사람이 할짓이야?》

그러더니 칠성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질렀다.

《내 당장 달려가서 저 가시울타리를 넘어가겠소!》

로인이 기겁하여 칠성이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이보게, 그렇게 헤덤벼서는 안되네!》

《그럼 저안에 갇힌 선생님을 보고서도 가만 있으란 말입니까?》

《내 말을 좀 들어보게. 저기 저 커다란 후박나무밑을 한번 좀 보라구.》

로인이 가리키는쪽을 바라보니 커다란 나무밑둥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꺼떡꺼떡 졸고있는 파수군졸 한명이 보였다.

《저 군졸이 바로 중죄인을 지키는 파수일세. 저 파수병한테 들키면 재미가 적네. 만일 가시울타리를 벗어나 한발자욱이라도 움직이다가 들키면 그 사람은 더 험한 벌을 받네. 영 셈판을 모르누만. 이젠 알겠나? 그렇게 헤덤비다가는 일을 망쳐먹을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이까?》

《자, 이리 와서 앉으라구.》

로인이 설유와 칠성이, 달래를 둘러보았다.

《저안에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어가지 못하네. 왜냐면 위리안치라는 형벌은 중죄인에게 주는 형벌이기때문일세.

그러니 저안에 자네들처럼 막 들어가면 영낙없이 한패당으로 몰리운단 말일세. 역적으로 개죽음을 당하고싶나? 또 저안에 있는 사람한테도 좋지 않지.

내 보니깐 저렇게 위리안치되였다가 다시 살아돌아가는 사람도 있더군. 그러니 그렇게 헤덤비지 말구 차근차근 의논해서 저사람한테도 피해가 없구 임자네들도 화를 당하지 않게 처신함이 좋을걸세.》

로인의 말이 앞뒤사개가 꼭 들어맞아 모두가 함구무언하였다.

한참만에 설유가 로인의 두손을 잡으며 사례하였다.

《아버님, 정말 고맙소이다!》

《고맙긴, 임자네들은 가만히 보니 좋은 사람들같아. 내가 그쯤한거야 도와주지 못하겠나. 헌데 저 포졸은 어떡하지?》

달래가 눈을 빨며 생긋거렸다.

《할아버지, 그건 괜한 걱정이와요.》

로인은 해사하면서도 곱살하게 생긴 달래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허허, 임자가 꽤 해낼가? 헌데 말일세, 래일 오도록 하게나.》

《왜 말이오이까?》

《음. 저기 파수는 세명이 번갈아서 교대로 지키네. 헌데 래일 나오게 되는 파수군이 나이도 지숙하고 그중 마음이 너그러우이.》

《아, 알겠소이다. 그렇게 하겠소이다.》

일행은 로인의 집으로 내려갔다.

그 다음날 진시(오전 7~9시)경 이들은 다시금 둔덕에 올랐다. 달래는 술방구리를 옆에 끼고있었다.

달래가 설유를 돌아보았다.

《사모님, 제 그럼 먼저 가겠소이다. 제가 손을 저어 시늉을 하면 그때에 제꺽 내려오도록 하시오이다.》

설유가 종이봉지 한개를 내밀었다.

《이걸 달래의 술방구리안에 넣어요.》

《이건 뭣이오이까?》

《살맹이씨(메대추씨)를 약간 닦아 가루낸것이예요. 원래는 불면증치료에 쓰이는 특효약인데 용량을 좀 많이 했으니 술속에 섞으면 아마 취한 후에 사각이상은 실히 푹 잠들수 있어요.》

달래가 생긋 웃었다.

《사모님, 이것이면 문제없소이다.》

이어 달래는 치마자락을 나풀거리며 릉선아래에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시울타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달래의 심장은 활랑거리기 시작했다. 나무밑둥에 기대여 파수군이 꺼떡꺼떡 졸고있었다.

생각같아서는 졸고있는 파수군의 귀뺨을 한대 쳐갈기고싶었다.

침착하게 코앞에까지 다가간 달래는 파수군을 향해 큰소리로 불렀다.

《이봐요, 이봐!》

달래의 챙챙한 목소리에 끄덕끄덕 졸고있던 포졸이 흠칫 놀라 깨나서 눈이 퀭해 달래를 쳐다보다가 얼른 옆에 세워놓은 장창을 집어들었다.

《아유! 참, 사람 웃기네. 나같은 계집이 뭘 무섭다고 창까지 잡으며 그러시우?》

그러거나말거나 파수군은 눈알을 부라렸다.

《다가오지 말아! 넌 대체 사람이냐 아니면 여우귀신이냐?

원참, 계집이 이런 곳에 다 오다니! 넌 도대체 뭘하는 년인데 여기서 어물거리느냐?》

《이 아주버님 말버릇 좀 봐라. 처음 보는 나인보고 년이라니? 그게 어디 도리가 있는게요?》

《썩 물러가질 못할가! 여기가 어디라구 함부루 다가와?》

《글쎄 하도 답답해서 이 섬을 두루 돌아보다가 이상한 가시퉁구리가 보이기에 구미가 동해서 예까지 왔소이다.》

파수군이 어처구니가 없는듯 고개를 외로 틀었다.

《뭐, 뭐라구? 너 이안에 무슨 사람이 있는줄 알구 함부루 오는가 말이야. 당장 사라져!》

달래는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걸음 더 다가섰다.

《이안에 사람이 있소이까?》

《됐다, 됐어! 시끄럽게 굴지 말구 빨리 없어지라!》

그러나 달래는 지꿎게 달라붙었다.

《아니, 이안에서 어떻게 사람이 사오이까?》

《아, 이거 정말 시끄럽게 놀겠는가!》

파수군이 창을 앞으로 내밀며 두눈을 부라렸으나 달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유, 이 아주버님 좀 봐! 그렇게 두눈을 뚝 부릅뜨면 누가 무섭대? 호호호-》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놀아대는 달래의 행동에 파수군도 어이가 없는지 탕개를 늦추고 그자리에 펄썩 주저앉았다.

《별년이로군. 헌데 내 이 섬에서 널 처음으로 보는데?》

처음에는 좀 엄포를 놓으면 무서워 물러날줄 알았는데 샐쭉거리며 다가드는 품이 싫지 않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긴긴세월 사람을 지키는 놀음에 싫증이 날대로 난 파수군이였다.

중죄인을 지킨다는것은 말뿐이지 하루종일 나무밑둥에 기대여 조는것이 업이였는데 이렇게 꽃같은 나인이 제발로 찾아왔으니 무료감을 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것이다.

《며칠전에 뭍에서 들어왔사와요.》

《이 외진 섬엔 왜?》

《경치가 하도 좋다기에 놀러 왔지요.》

《뭐, 경치가 좋아? 천진하군. 여긴 정배살이를 하기에 딱 좋은 섬이란 말이야.》

달래가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소이까. 그럼 저 가시덤불안에도 정배를 사는 사람이 있소이까?》

《그렇다고 할수도 있지.》

《아니, 저안에서 대체 어떤 사람이 사오이까?》

《중죄인이야. 그저 그안에서 살만큼 살다가 죽으라는게야.》

《에그, 쯔쯔쯔- 그러고보면 아주버님은 사람이 아니군요.》

《뭐, 뭐? 난 왜?》

《이게 어디 사람이 할짓이오이까?》 ·

《아, 우리야 하라는대로 하는 사람들인데 알게 뭔가? 중죄인이라면 중죄인인줄 알고 지키라면 지킬줄이나 알지. 그밖에 더 간참할게 있나.》

《그러다가 저안의 사람이 죽으면요?》

《음, 그건 우리와 상관없어. 우린 그저 중죄인을 저 가시울타리안에 처넣고 도망치지 못하게 지키다가 죽은담엔 꺼내면 되니까.》

달래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등골에서는 가벼운 전률이 일었다. 파수군이 달래의 옆에 놓여있는 술방구리를 목을 기웃하고 넘겨다보았다.

《헌데 이건 뭔가?》

《보고도 모르겠소이까, 술방구린데요.》

《뭐, 술방구리?》

파수군이 코를 흥흥거린다.

《헌데 대낮에 그건 왜 옆에 끼고 다니나?》

《아, 아주버님두 참, 이건 왜 끼구 다니겠수. 이렇게 소풍이나 하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같이 말동무나 하면서 즐기자구 그러지요.》

《그런가? 헌데 난 좋은 말동무가 될것 같지 않은가?》

《아유! 내가 아주버님과 같은 령감태기를 돌아나 볼것 갈수?》

달래가 일어서려 하자 파수군이 술방구리를 덥석 잡았다.

《이보게, 그러지 말고 여기에 앉아 말 좀 하다가 가지.》

달래가 술방구리를 잡고있는 포졸의 손을 탁 쳐버렸다.

《됐소이다. 난 이자리에 주저앉고싶은 생각이 없소이다. 이 가시울타리만 봐도 입맛이 싹 돌아서오이다.》

이제는 말이 퍼그나 오간지라 포졸은 체면도 엄엄한 기상도 다 집어던져버렸다.

작히나 좋은 기회인가? 시간이 더디고 지루하게 흘러 몸살이 날 지경이였는데 아릿다운 녀인이 술방구리를 옆에 끼고 척 나타나지 않았는가.

포졸이 손가락을 곧추 세워 달래의 얼굴가까이에다 내흔들며 사정하였다.

《이보게, 딱 한잔만, 한잔만 주게나.》

《딱 한잔만 주면 아주버닌 내게 뭘 주겠수?》

《말동물 해주지.》

《아니? 나하고 말동무가 되우?》

《아, 될수 있지, 내 이래뵈두 옛말을 구수하게 곧잘하지.》

달래는 못 이기는척 하며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술방구리를 들여다보며 입술을 감빨던 파수군이 넌지시 물었다.

《헌데 술안주는 뭐가 좀 없나?》

달래가 괴춤에서 마른명태 한마리를 꺼내놓았다.

《에이, 모르겠다. 내 오늘 한턱 쓴다. 자요!》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술이 들어가 흥취가 동하자 파수군이 무엇이라고 계속 주절대더니 잠시후에 술방구리를 끌어안은채 끄떡끄떡 졸기 시작하였다. 곧 그자리에 어푸러져 코를 골아댔다.

달래는 발딱 일어서서 둔덕쪽을 향하며 손을 저었다. 설유와 칠성이가 황급히 둔덕우에서 달려오고있는 모습이 눈에 띄웠다.

달래쪽으로 달려온 칠성은 재빨리 포졸옆에 나뒹굴고있는 삽짝문열쇠를 들고 가시울타리쪽으로 달려갔다. 커다란 열쇠가 삐꺽거리며 칠성의 손에 열려졌다.

《누이! 빨리!》

달래가 먼저 삽짝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칠성은 설유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달래의 뒤를 따랐다. 마당안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방안을 기웃거리던 달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폴싹 주저앉았다.

《아이구머니나!》

설유와 칠성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유의 가슴속에 불길한 예감이 서려들었다.

(혹시 그이가?)

칠성이 역시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설유의 손을 놓고 뛰여갔다. 방안을 기웃 들여다보던 칠성이도 외마디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설유의 가슴은 더욱더 떨려났다. 그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마당을 꿰질러 방안쪽을 바라보았다. 설유의 몸 역시 뚝 굳어져버렸다.

(아니?!)

머리가 하얗게 센 허준이 허리를 구부정하고 벽에 매달려 정신없이 한자한자 글을 새기고있었던것이다.

설유의 두눈에 눈물이 샘솟듯 고이더니 그만에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칠성이가 격정에 넘쳐 소리쳤다.

《의원님!》

그 부름에 허준이 뚝 굳어졌다. 천천히 벽에서 손을 떼고 마당쪽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밖을 내다보던 허준이 그제야 그들을 알아보았는지 손에 든 나무가지를 떨구며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달래가 정신없이 방안으로 뛰여들어가며 소리쳤다.

《의원님!-》

그뒤로 칠성이가 나는듯이 달려갔다.

《선생님, 칠성이옵니다!》

칠성이와 달래가 허준의 두손을 부여잡고 목이 메여 연방 소리쳤다.

《의원님!-》

허준의 몰골은 너무도 처참하여 차마 바라볼수가 없었다. 머리는 새하얗고 얼굴은 너무도 살이 빠져 광대뼈만 남아있었다. 말이 사람이지 바싹 마른 장작에 누데기를 걸쳐놓은것 같았다. 그 누데기 여기저기에 살이 들여다보였다. 마치 산속에서 홀로 방황하며 야생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만 눈만은 정기가 살아 반짝이고있을뿐이였다.

《아니?! 너희들이 대체 웬일이냐? 이게 꿈이냐, 생시냐?》

허준은 목이 메여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방안에 들어온 설유가 허준의 앞에 무너지듯 꿇어앉았다.

《예영이 아버지!》

그 한마디 부름을 쏟은 설유는 허리를 굽힌채 오열을 터뜨렸다.

이런 사람, 고지식하고 대바른 이런 사람을 이 지경에 몰아넣다니? 너무도 가슴이 아파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런 험악한 환경속에서도 벽에 한자한자 의서의 내용을 쓰고있는 그 모습이 설유를 더 아프게 하였다.

허준은 세차게 떠는 설유의 어깨를 꽉 그러안았다. 뭉클 설유의 체취가 가슴에 안겨왔다.

설유가 와락 허준의 무릎우에 얼굴을 박고 부르짖었다.

《예영이 아버지!-》

허준이 설유의 머리우에 자기의 얼굴을 묻으며 목메여 불렀다.

《여보!-》

《예영이 아버지!》 ·

설유는 달래와 칠성이가 보고있다는것도 잊은듯 허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몸부림을 쳤다. 이런 험악한 조건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남편의 모습앞에서 설유는 그렇게도 진중하고 정숙하던 본래의 자태를 잃고말았다. 그리고 너무도 가슴이 쓰리고 아파 몸부림을 쳤던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사람을, 이런 훌륭한 남편에게 모진 고통과 불행을 들씌운단 말인가.

이윽고 설유는 허준의 품에서 머리를 들고 깊숙이 절을 하였다.

《예영이 아버지! 저의 이 큰 절을 받아주세요.》

허준이 황황히 설유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이러지 마오! 바로 당신의 그 믿음이 있어 그리구 저 칠성이나 달래의 믿음이 있어 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의서를 쓰는게 아니겠소.》

칠성이와 달래도 눈물을 닦으며 격정속에 한참이나 허준과 설유를 지켜보았다.

이어 달래가 보짐을 풀었다.

《의원님, 사모님께서 만든 닦은 찹쌀가루이오이다.》

허준이 달래가 내놓은 작은 마대를 얼핏 띄여보더니 설유에게 얼굴을 돌렸다.

《여보, 지필은 안가져왔소?》

설유가 아직도 물기가 어려있는 눈으로 허준을 바라보며 지필을 싼 꾸레미를 내놓았다.

《여기 가져왔어요. 지필과 의서에 관한 자료들이예요.》

《정말이요?!》

허준은 흥분해서 덥석 꾸레미를 잡아당기더니 성급히 풀기 시작하였다. 평상시에 침착한 허준이답지 않게 덤벼치는 그 모습을 보는 설유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핑 돌았다.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이 험한 곳에서 애오라지 남편의 생을 버티여준것은 다름아닌 저 높은 뜻과 의지가 아니던가!

무심한 세월아, 넌 어이하여 이런 사람에게 벌을 내렸느냐?

천만금을 주어도 세상에 다시 태여날수 없는 이 훌륭한 사나이에게 부디 복을 내려다오!

설유가 애써 눈물을 감추며 거들어주었다.

보짐속에서 그득하게 층층이 쌓인 하얀 참지묶음과 벼루, 먹, 붓이 나왔다. 그것을 덥석 그러안은 허준의 볼편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 꾸레미에 여윈 볼을 비벼대는 그 모습이 설유와 달래, 칠성이의 가슴을 또 한번 울려주었다.

칠성이가 울먹이며 허준의 앞에 꿇어앉았다.

《의원님, 이제 당장 우리와 함께 이곳을 탈출하시오이다.》

허준이 흠칫 놀라 칠성이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안되네.》

그 어조가 단호하였다. 칠성이가 눈을 크게 뜨고 허준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럼, 언제 죽을지 모를 이 사지판에 그냥 계시겠단 말씀이오이까? 우리와 함께 나가시오이다.》

《아니, 그러면 안되네. 칠성이! 달래! 언젠가 내가 한성부 옥에 갇혔을 때 하던 말이 생각나나? 내가 이제 이곳을 탈출하면 일생을 중죄인의 오명을 들쓰고 숨어살아야 하네. 그렇게 되면 내가 쓴 이 의서도 당당하게 세상에 내놓을수 없고말지.…

이 의서는 나의 재부이기전에 이 나라의 재부이고 모든 사람들의 재부일세. 헌데 저 하나의 목숨을 살리겠다구 그 의로운 일을 망칠수야 없지 않나. 그건 여기서 내가 죽는것보다 더 처참한 죽음일세!

난 여기서 의서집필만 할수 있다면 이런 고생도 달게 여기겠네. 이젠 내 말뜻을 알겠나?》

설유가 조용하나 침착하게 허준의 말을 수긍하였다.

《그래요. 그 결심이 옳다고 생각해요.》

《역시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만.》

칠성이와 달래의 가슴속에서는 자기들보다 아득한 높이에서 생을 이어가는 그들부부에 대한 공경심이 그득히 차넘쳤다.

잠시후 허준은 벽을 가리키며 칠성이에게 당부하였다.

《칠성이! 저 벽면들에 쓴 글들이 〈잡병편〉 6권과 7권에 대한 원고들일세. 이젠 종이와 붓이 있으니 내 며칠안으로 종이에 다 옮겨놓지. 그때 자네가 다시 들어와서 의서를 받아가도록 하라구.》

《알겠소이다. 헌데 어떻게 련계를 가질가요?》

《음, 서신을 쓴 종이를 돌멩이에 싸서 이 마당에 던져넣으라구. 그럼 내가 그걸 읽어보구 다시 서신을 써서 가시울타리를 넘겨보내겠네.》

《알겠소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게. 괜히 뜻밖의 일이 생길수 있네.》

달래가 생긋이 웃으며 나섰다.

《의원님, 너무 걱정마소이다. 파수군은 소녀가 다 삶아놓았소이다.》

《그래두 안돼. 그건 오히려 내 의서집필에 방해로 될뿐이야. 난 이 지필과 찹쌀가루만 있으면 족하이. 그러니 위험한짓은 삼가하고 그저 의서집필이 되는 차제로 한권씩 넘겨가는 일이나 착실히 해달라구.》

잠시후 이들은 눈물속에서 허준과 헤여져 가시울타리를 벗어났다.…

그날부터 허준은 무서운 속도로 네 벽면을 꽉 채운 의서의 원고들을 종이우에 옮기기 시작했다.

대엿새만에 《잡병편》 제6권과 제7권의 원고가 전부 참지우에 옮겨졌다. 그 의서의 원고를 넘겨받자 설유는 칠성이를 한성부의 기동의 집으로 보냈다. 의서의 원고를 착실하게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한성부의 기동의 집에 도착한 칠성은 기동과 함께 《잡병편》 제6권과 제7권을 집 앞마당의 항아리속에 유지로 정히 싸서 묻었다.

이번에는 칠성이를 대신하여 기동이가 곡도로 떠났다. 기동이가 도착하자 설유는 달래를 설복하여 한성부에로 떠나보냈다. 떼를 쓰며 가지 않겠다는 달래에게 설유는 말했다.

《달래, 의서를 잘 간수하는 일은 여기 일보다 더 중한 일이예요. 지금 의서를 노리는 놈들은 왜놈들이예요. 전번에 우리 집에 왔던 년놈들속엔 나의 친부모님들을 학살한 그 왕사마귀놈도 있었어요. 그 왜놈들이 의서를 노리고있단 말이예요! 알겠어요?

그러니 빨리 돌아가서 칠성이와 응규와 함께 의서를 잘 간수하도록 해요. 그 일은 달래가 이곳에 있는것보다 더 중한 일이니 속히 떠나요!》

설유로부터 후유꼬와 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동이와 달래의 눈에 긴장한 빛이 흘렀다.

결국 곡도에는 설유와 기동이가 남고 한성부의 기동의 집에서는 칠성이와 응규, 달래가 교대로 의서를 지키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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