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3 장

10

 

버선을 신은 발이 눈속에 푹 빠지는 바람에 우습강스러운 활개짓을 하며 겨우 몸중심을 바로잡아야 했다. 무명천으로 지은 솜두루마기와 가랭이가 넓은 바지가 시끄럽게 너펄거린다. 좋은 길을 곁에 두고 어쩌다가 이런 도랑창에 빠져들었는지 모를 일이였다.

석고명은 며칠째 면도질도 못해 구레나룻이 시꺼매진 턱우에 돋은 팥알만 한 기미를 뜯어낼것처럼 손바닥으로 힘껏 문대고나서 빠졌던 눈구뎅이에서 힘겹게 발을 뽑았다. 앞날이 훤히 트이게 하는 길한 복기미라고 동네사람들앞에서 자랑삼아 내보이군 하던 그것이 손바닥과 마찰을 일으키며 열을 받아 벌개졌다. 원래 석고명은 이마가 훤칠하고 살갗도 희여멀쑥한것이 어딘가 모르게 농사군이라기보다는 도회지의 글방샌님 같은 인상이 더 짙게 안겨오는 사람이였다. 그런데 이 며칠째 가혹하다고 할수 있는 고민거리가 덮쳐들어 거기에 시달리는 바람에 십여년은 더 늙은것처럼 모습이 퍼그나 변했다.

고명의 곁에는 농한기의 겨울잠에 든 한적한 벌판이 드러누워있었다. 자연마저 주인잃은 빈땅을 동정하는듯 내리덮인 흰눈이 추위에 얼어든 땅을 포근히 감싸고있다. 고명은 눈에 덮인 이 땅이 자기의 옛 주인을 흰자위만 남은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는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사람도 많고 땅도 많은 이 금천일판에서 오직 자기만이 죽고사는 문제가 결정되는 낭떠러지에 서있는것이다.

가을이면 풍요한 곡식바다가 설레이는 기름진 옥토벌이 가슴이 후련하게 펼쳐져있었건만 거기에 자기의 땅은 한쪼각도 없으니 석고명에게는 그림의 떡같은 이 벌판이 볼수록 기가 막히기만 했다.

더는 걸어갈 맥도 없어 그 자리에 쭈그리고앉아 풀려나간 고매끼를 북두갈구리같은 손으로 거칠게 잡아맸다.

마누라가 흰 무명천으로 정성담아 바느질해준 고매끼가 발목을 묶어놓는 쇠사슬처럼 여겨진다.

그런 쇠사슬로 만든 족쇄퉁구리를 내흔들던 군내무서장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상기되여 석고명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여보, 석령감! 다시한번 여기저기 간부들을 찾아다니며 신소질을 한다, 시비질을 한다 복잡하게 놀았다간 이 족쇄를 차게 될줄 아오. 우리 사회에선 령감같은 개인리기주의자가 발붙이고 살 땅이 없어!》

아침에 군내무서에서 부른다기에 언제인가 우에서 내려왔던 내무성 부국장이라는 사람에게 토지몰수문제를 놓고 신소를 한것이 은을 내여 땅을 되찾게 된것이 아닐가 하는 어리석은 기대를 품고 찾아갔던 고명에게 차례진 응당한 《세례》였다.

마누라는 며칠째 고개를 몇개나 넘어가야 있는 례배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느라 여념이 없다. 하늘에다 대고 아무리 기도를 하고 우에다 대고 아무리 신소를 해야 차례지는것은 더 험악한 위협과 욕설뿐이였다.

고명이 보기에는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된것이 분명했다. 군인민위원회에서 관개공사에 동원되라고 할 때 말을 듣지 못한것은 물론 잘못이였다. 독실한 그리스도교신자로서 읍이나 해주에 있는 교회당에 다니느라고 군에서 로력동원을 조직할 때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던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관개공사를 구실로 그 무슨 추가현물세라는것을 또 물라고 했을 때에는 도저히 응할수 없었다.

사실 석고명의 땅은 옆으로 시변천의 물줄기가 흐르고있어 밭관개이건 논관개이건 지장이 될것이 별반 없었기때문에 군에서 조직하는 관개공사에 직접적인 리해관계는 없었다. 그런데 관개공사에 소요되는 자재확보때문이라며 추가현물세까지 물라고 하니 고명으로서는 이것이 분명 농민들을 우대해주는 나라의 정책과는 거리가 먼것이라고 느껴졌던것이다.

고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준대로 지금껏 남에게 해를 입힐 일은 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추가현물세를 못 물겠노라 배짱을 부리면서도 후과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남에게 해를 입힐 일은 아니니 남들도 자기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은 어떻게 되였는가. 토지몰수라는 청천벽력같은 일을 당하고 오늘은 또 손목에 족쇄를 채워놓겠다는 위협까지 받았다.

그까짓 족쇄는 무섭지 않으나 땅이 없이 살아갈 일은 정말이지 막막했다. 쥐였던 물건을 잃은 아쉬움이 애초에 가지지 못했던것보다 더한 법이다. 차라리 해방전처럼 소작이나 부치며 고달프게 살아가던 참이면 별로 아쉬울것도 없겠지만 토지개혁덕분에 제 땅을 공짜로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다가 그 땅을 졸지에 잃고말았으니 하늘이 무너져내리는것만 같았다.

이제는 신소도 시비도 할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땅을 되찾을 방도가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마누라는 군위원장이라는 사람에게 뭘 좀 꿍져가지고 찾아가 용서를 비는게 어떤가고 하는데 관개공사에 불응한것으로 하여 성이 독같이 난데다 우에서 내려온 사람에게 신소까지 했으니 당장 주리를 틀겠다고 펄펄 뛸 그 사람앞에 나설수가 없었다.

(과연 이젠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석고명은 나라에서 자기와 같은 신자들도 차별없이 대해준다고 하던것이 다 거짓이 아니였는가 하는 의심까지 갈마들었다. 땅이 꺼질듯 한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엉치에 묻은 눈을 툭툭 털며 지척지척 일어났다.

그는 마을 한가운데 억새를 엮어 지붕을 얹고 들어앉은 자기 집을 향해 터벌터벌 걸음을 옮겼다. 땅을 몰수당하는 바람에 동정은커녕 저밖에 모르는 리기주의집이라고 소문이 나 될수록이면 사람들 눈에 뜨이기 싫은데 집은 또 동네 한가운데 떡 틀고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잡아끄는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오늘은 날씨가 맵짜서 그런지 동네에 나다니는 사람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래 도망치듯 황급히 제 집 뜨락으로 들어서는데 토방에 보지 않던 녀자구두 한컬레가 놓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이 열리고 어둑시그레한 방안에서 도시물을 먹어 더 이쁘게 번진듯싶은 딸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버지!》

길게 늘이고있던 외태머리를 자르고 요즘 녀학생들의 추세에 맞게 중발을 한 날씬한 처녀가 제가 낳은 자식같지 않게 별로 더 고와보였건만 반가와할 계제가 못되였다.

《이게 누구냐, 반월이구나!》

고명은 애써 웃음지어보려 했지만 집안이 어수선한 때 찾아온 딸을 맞이하자니 눈굽이 시큰하게 저려나 기뻐하는지 시끄러워하는지 알수 없는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한걸음 다가서다 굳어져버렸다.

반월이 역시 토방에서 신발을 급하게 꿰고 달려나오다가 몇걸음 못미처 떡 굳어진채 아버지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는것이였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딸애의 희고 부드러운 손길이 옷깃에 서린 성에를 조심히 어루쓸었다.

고명은 함구무언으로 까만 외투를 입은 반월의 어깨를 다독여주기만 했다.

뒤따라나온 마누라가 딸의 등뒤에 가만히 서서 자기를 기대어린 눈길로 바라보고있는 모양이 언짢게 안겨들었다.

(군내무서에 불리워갔던걸 이 애에게 다 말해준 모양이구나. )

입빠른 로친에 대한 고까운 감정에 사로잡히다나니 오래간만에 만나게 된 딸자식에게도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헌데 어떻게 기별도 없이 찾아왔냐?》

《방학이 돼서 집에 놀러왔다누만요.》

마누라가 걸음을 내짚어 딸과 나란히 서며 대답하는 소리다. 어서 내무서에 불려갔던 일을 말해달라는 안타까운 재촉이 깃든 어조였다.

마누라와 딸을 억지로 돌려세워 일단 더운 방에 들어가앉은 다음 석고명은 무던히도 뜨직뜨직 대통에 담배잎을 다져넣고 불을 달았다. 희뿌연 담배연기와 함께 그것처럼 앞날이 희미해지는 이야기를 별수없이 처자들앞에 쏟아놓았다.

《당장은 땅을 되찾기가… 힘들것 같소.》

기대를 안고 잔뜩 움츠리고있던 마누라가 무릎을 떨구며 폴싹 주저앉고 반월은 망연하여 자그마한 입술을 봉싯하게 벌린채 다물줄 몰랐다.

한동안은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점심을 차릴 시간이 된것이 다행이였다.

마누라가 끝없이 내쏟던 한숨을 억지로 거두고 오래간만에 찾아온 딸자식에게 별식을 해주어야겠다며 부엌으로 내려간 뒤 고명은 반월에게 쭈밋쭈밋 물었다.

《너희 학교에까지 소문이 퍼지진 않았겠지?》

《그야 뭐… 시간문제지요.》

반월이 고개를 소곳한채 대답하다나니 고명에게는 딸자식의 정수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 관개공사엔 왜 그렇게…》

반월은 차마 왜 그렇게 등을 돌려대서 집안을 이 꼴로 만들었는가고 따지지는 못하고 말끝을 흐리였다.

고명은 변명같지만 딸도 구체적인 사유를 알고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구구하게 설명을 하였다.

《그럼 아버지, 어머닌 아직도 례배보러 다니세요?》

정수리만 보이던 반월의 하얀 얼굴이 쳐들렸다.

《음?!》

안타까움과 원망이 실린 눈길이 아버지를 향해 곧바로 육박해왔다.

《아버지, 이 딸의 생각도 좀 해주세요. 면에서도 군에서도 간부들이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데 왜 부디 예수를 찾아다니면서 그래요? 결국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나요, 네?! 아버지!》

《그만해라, 공화국법에는 신앙을 자유롭게 택할수 있다고 되여있다. 그리구 예수라도 믿지 않으면 그래 누굴 믿고 살라는거냐?》

《네?!》

《어떤 사람들은 왜놈세상땐 살아갈 일이 막막해서 별수없이 예수를 믿었지만 이젠 예수가 아니라 나라를 믿고 살아야 한다고 말은 잘하더라. 그래서 나도 너에겐 구태여 신자가 되라고 하지는 않았다만 그래 우리가 믿어야 할 군위원회가 땅을 몰수하고 내무서가 위협을 하는건 어떻게 보라는거냐?》

고명은 자기가 품고있던 감정을 애매한 반월에게 신경질적으로 쏟아놓았다.

《그러니까 이젠 예수에게 잘 보일게 아니라 정권기관 간부들의 눈밖에 나지 않게 살아야 할게 아니예요.》

《됐다됐다, 그만하자. 나도 일이 이리될줄은 몰랐다고 하지 않냐. 땅만 돌려준다면 나도 이제부턴 례배당도 그만두고 군에서 하라는 일은 쓰든달든 군말없이 응할 생각이다. 이제야 별수 있니? 예수고 뭐고 군위원장이 죽어라 하면 죽을수밖에…》

반월은 소 잃고 외양간 고쳐보려고 하는 자기 집안의 처지가 안타까운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만 했다. 무슨 말인가 더 할듯말듯 하다가 부엌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바람에 아버지앞에서 물러났다.

부엌으로 내려가는 딸의 걸음걸이가 처녀다운 탄력을 잃고 휘청거리는것이 고명의 눈에 아프게 날아들었다.

고명은 꽁한 성미탓에 아버지를 마음놓고 원망하지도 못하고 혼자서 묵새기느라 속에 재만 앉았을 딸의 정상을 차마 눈뜨고 그냥 지켜볼수가 없어 독한 써레기를 또다시 대통에 꾹꾹 박아넣었다.

 

X

 

땅은 몰수당했지만 아직은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그냥 유지하고있었다. 늦어진 점심이긴 하지만 딸에게 주려고 남겨두었던 절인 송어도 오르고 닭알부침이나 버섯 같은것도 올라 식탁은 그만하면 꽤 풍성한셈이였지만 반월은 저가락을 들고 장난질하듯이 이것저것 고르기만 할뿐 어느것 하나도 맛나게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겸상을 하고 마주앉은 어머니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어머니, 익수동무도 이 소식을 알가요?》

《글쎄, 거야 모르지. 듣자하니 그 사람이 요새 소대장으로 승급해서 여기 가까운 저 송악산초소의 소대장으로 왔다더라. 왔던김에 만나보고 가지 않으련?》

《어머니도 참, 집안이 이 꼴이 되였는데 제가 이제 그 동무를 찾아가서 무슨 소릴 하겠어요?》

반월은 건넌방에서 독상을 마주하고앉은 아버지에게 애원했다.

《아버지, 제발 이제부터라도 남의 눈밖에 나게 살지 말아줘요. 네?! 부탁이예요.》

《알겠다, 알겠어. 넌 그런 걱정은 말고 학교공부나 열심히 해라. 네 외삼촌이 학교만 졸업하면 맞춤한 일자리도 거기 어디서 골라보겠다고 했는데 어디서 훈장질이나 서기노릇이라도 할수 있으면 좀 좋으냐. 애비에미처럼 일생 농사나 지으며 살아선 이런 괄세밖에 받을게 없어. 옛말에 명산대천에 불공말고 타관객지에 나선 사람 괄세말라고 했다만 그저 농사나 짓는다고 내무서까지도 우릴 업수이 보니 너만은 이런 일을 당하지 말아라.》

《참, 혹시 익수 그 사람이 나서면 일이 좀 펴이지 않을가요? 내무서와 경비대는 사촌간이나 같다던데 그 사람더러 자기 지휘관들을 좀 내세워보라고 권하면 좋을것 같수다.》

어머니가 무슨 큰 책략이라도 생각해낸듯 눈을 반짝이며 하는 소리에 반월은 《아이참.》하며 고개를 외로 틀고말았다.

자기는 집안이 당한 수치가 부끄러워 면회조차 가기 꺼려하는판에 물에 빠진자 지푸라기 잡는 격으로 아직 잔치도 하지 않은 사위감을 붙들고 늘어져보려는 어머니의 처사가 어이없기만 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아버지의 반응이였다.

국을 뜨던 숟가락을 상우에 내려놓고 올방자우에 두손을 모두어얹으며 한참이나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는것이였다.

《그것두 될법 한 일임즉한데…》

《네?!》

반월이 놀란 소리를 지르자 아버지가 대뜸 이마살을 찌프렸다.

《왜 그러느냐? 그래도 명색이 경비대 소대장이라는데 제가 직접 나서지는 못해도 지휘관들에게 부탁쯤이야 할수 있지 않겠냐. 난 네가 그 사람을 한번 찾아갔으면 한다.》

《아버지, 그렇겐 못해요, 절대로 못해요.》

반월은 비명치듯 부르짖어 부모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나서 수저를 내던지고 방안을 뛰쳐나갔다.

그러지 않으면 부모님들에게 어떤 자식답지 못한 막된 소리를 내뱉을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입안에서 꾸역꾸역 솟구치는 허연 입김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핥으며 사방으로 부서져나간다.

반월은 자기의 운명이 하늘의 별자리에서 떨어져나온 별찌처럼 얼마 못가서 사그라질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키워준 부모들에게 행패를 할수도 없었다. 혼자서 묵새기자니 하늘을 쳐다보며 통곡이라도 하고싶을만큼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하늘은 지금 보기가 베찰만큼 눈부시다.

변익수가 그리웠다. 그리워하면서도 달려가지 못하는 처지였다.

원래 변익수와 석반월은 한동리에서 살아오면서도 별로 자별하게 지낼 사이가 없었다.

변익수는 해방전에 부모들이 장질부사에 걸려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부터 지주집 머슴으로 들어가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창나이에 지주집 소여물에서 콩쪼각을 주어먹으며 고된 로동속에 자라다나니 키는 크지 못했어도 뼈대가 굵고 뚝심이 셌다. 해방이 되자 토지문서를 꿍져가지고 남조선으로 달아나려던 자기 《주인》을 제 손으로 붙잡아 동네 한가운데 끌어다앉혔을 때 사람들은 늘 외양간의 오물을 들쓰고 얼굴 한번 변변히 못 들고 살아온 익수의 눈동자에 비낀 증오의 번개불을 보고 놀랐었다. 변익수는 3. 7제투쟁때도 앞장섰고 토지개혁때에는 꽁무니에 곤봉을 하나 차고 밤새도록 준비위원회 사무실을 지키군 했다. 성인학교에 다니며 피나게 공부하여 우리 글을 익힌 후에는 무익하게 흘러가버린 자기의 청춘을 봉창하는 심정으로 청년들의 민청조직사업에도 뛰여들었다. 그는 말로써가 아니라 보다 호소적인 자기의 이신작칙으로 청년들을 이끌었다. 체구가 단단하고 못하는 일이 없는데다 무던하고 총명하여 해방후 몇달사이에 머슴군으로부터 민청분조장으로 재빨리 성장한 그를 동네처녀들이 은근히 사모해왔다. 다만 석반월이만이 그에 대하여 아무런 호감도 관심도 가지지 않고 지내였다. 그만큼 반월은 자존심이 강했고 웬간한 총각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실 원래의 석반월은 그런 처녀가 아니였다.

반월은 가뜩이나 가난한 살림에 할아버지때부터 그리스도를 숭상하는 가정적영향까지 받다나니 해방전까지는 음달의 봉선화처럼 피여도 피여도 그늘을 뿌리칠수 없어 변변히 고개 한번 쳐들어보지 못했고 아무 총각이든 손목을 덥석 잡고 너는 내 사람이라며 끌어가면 두말 못하고 끌려갈 무맥한 처녀였다.

넘쳐나는 젊음과 더불어 생겨난 청춘의 열정과 때를 같이하여 해방을 맞이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한껏 쳐들고 활짝 핀 꽃잎을 흔들며 울밖을 내다보게 되였다. 잠재하고있던 석반월이라는 처녀의 진짜모습은 그때부터야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반월은 노래많은 처녀, 웃음많은 처녀로 되였고 제 또래 동무들속에서 제일 발랄하고 쾌활하고 다사스러운 처녀로 번져갔다. 게다가 토지개혁의 혜택으로 가정살림이 기름 져가자 부족한것 없는 처녀로서의 은근한 도고함까지 생겨나 동리 총각들이 봉선화에도 가시가 생겼다며 혀를 차게 되였다. 때마침 녀자들에게도 남자들과 꼭같은 자유와 권리를 안겨준 남녀평등권법령까지 발포되였다. 반월은 자기에게도 이제는 마음에 드는 사람과 정을 나눌수 있는 애정의 자유가 생겼다는것을 의식했고 그 나이 처녀들의 숫된 열망 그대로 이따금씩 제딴의 이성세계를 그려보게 되였다. 반월이 그려보는 애정세계에 비껴드는 총각들중에는 변익수 같은 사람도 없었고 자기가 알고있는 그 어떤 다른 총각도 없었다. 반월은 보다 리상적인 남자를, 그러면서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만나보지도 못한 가상적인 인간을 사랑하였다. 반월은 무엇인가 파격적인것을 좋아했고 자기의 사랑도 그렇게 비상한 그 어떤 계기에 의하여 불쑥 생겨나리라고 예측했다. 그러한 때 김일성장군님의 조치에 따라 38도선지구에 경비대가 조직되였고 변익수는 동네의 여러 젊은이들과 함께 선참으로 입대를 탄원하였다.

그가 경비대로 떠나는 날 반월이 다른 처녀들과 함께 동구밖까지 따라나가 배웅해주었는데 그저 처녀들앞에서는 말 한마디 붙이기도 힘들어하는 사람으로 알고있던 변익수가 문득 반월을 따로 만나자며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소나무밑으로 데리고갔다. 그리고는 투박하면서도 뜨직뜨직한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였는데 반월은 그의 말을 인내성있게 다 듣고나서야 자기가 그에게서 사랑의 고백을 받았다는것을 의식했다. 녀자의 마음이란 꿈속에서처럼 애매몽롱한것 같다. 익수의 진정어린 고백을 듣는 순간에 반월의 심장속에 지금껏 자리잡고있던 가상적인 남자와 드높은 자존심은 홀연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후날에도 반월은 익수가 과연 자기의 무엇을 보고 사랑했는지, 자기는 또 언제한번 남다른 관심속에 두지 못했던 익수의 무엇을 보고 고백을 받는 순간 대뜸 응해버렸는지 종시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하긴 그것은 알 필요조차 없었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며 자기와 익수가 서로 사랑한다는 그자체가 중요한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재빠르고 발랄한 세상에 없는 가시투성이 봉선화와 터실터실하면서도 계절에 관계없이 변색을 모르는 소나무와 같은 두사람이 미래의 운명을 한배에 실은것이였다.

후날 석고명은 자기 딸이 변익수와 사랑을 언약했다는것을 알고 부모도 모르게 그런짓을 했다고 나무람하다가 종당에는 승인하고말았다. 아무리 둘러봐야 그래도 아근에는 그만한 총각이 없고 또 익수가 앞으로 경비대군관도 될수 있는데 농사군한테 가는것보다는 경비대군관한테 가는것이 훨씬 나음직하다는 타산밑에 두사람의 앞날에 동의했던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반월은 경비대에 나간 애인한테 짝지지 않겠다고 해주에까지 가서 그곳의 수양녀자고급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학창시절은 즐거웠고 반월은 점차 도시풍의 세련미를 갖춘 해맑은 처녀로 번져갔다. 반월은 하늘에 흐르는 구름도, 거리에 피여나는 가로수의 꽃잎들도 오직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고 자기와 익수의 사랑만을 축복하는듯 했다.

몇달후에는 아버지로부터 더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석고명은 반월에게 편지를 써서 네가 확실히 사람을 잘 택한것 같다고, 익수가 군대에서 복무를 잘해서 마을을 찾아오셨던 김장군님께서 익수를 칭찬해주시였다는것을 알려주었던것이다.

익수동무가 장군님을 만나뵈왔구나, 우리 마을에도 장군님께서 찾아오시였댔구나!

처녀는 이 세상의 복이란 복은 저 혼자 다 받아안은것만 같았다. 우리 집은 장군님께서 아시는 집이다, 장군님께서 칭찬해주신 집이다, 그러니 못할것이 무엇이고 주저할것이 무엇이냐, 마음껏 생활을 계획하고 마음껏 실현하자!… 스물을 갓 넘긴 애젊은 처녀가 미래를 놓고 꿈꾸는 화려한 공상은 더욱더 강렬하게 피여올랐다.

누가 말했던가? 행복의 절정은 불행의 씨앗이라고…

한달이 지나 반월이 학교를 다니며 거처하고있는 외삼촌의 집에 토지를 몰수당했다는 까무라칠듯 한 소식이 깃든 아버지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를 보고 외삼촌은 《그놈의 령감, 그놈의 령감…》하고 밤새껏 푸념을 하다가 지나치게 자기본위적인 생각만 하다가 본의아니게 나라일을 도외시하여 생긴 결과라고 하며 석고명을 끝없이 욕했다.

반월은 속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불과 2년전에 있은 토지개혁때의 지주들처럼 땅을 몰수당한 아버지! 그때에는 계급적원쑤들, 친일주구들, 남을 등쳐먹던 사악한 페물들이 몰수의 대상에 속해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자기 집이 그리된것이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하기조차 무서운것이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 총을 쥐고 계급투쟁을 벌리고있는 변익수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자고 한다. 도움은커녕 변익수가 이 사실을 알면 고민에 시달릴것이고 지휘관들의 신망도 다 잃을것만 같았다.

그래도 반월은 해주에서 인물 잘나고 직업좋은 숱한 총각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익수에게 바치기로 한 처녀의 순정만은 고이 간직해왔는데 자칫하면 그 소중한 사랑마저 깨여질수 있었다.

《동문 누군가? 여기서 왜 우는거요?》

머리우에서 갑자기 쏟아져내리는 말소리에 반월은 벼락을 맞은것처럼 와뜰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눈부시던 하늘을 가리우며 중절모를 눌러쓴 누군가의 위엄있는 너부죽한 얼굴이 처녀를 내려다보고있었다.

땀내가 물씬 풍기는 번지르르한 황부루에 올라앉은 중년의 남자가 도시물을 먹으며 아련하게 씻긴 반월의 이목구비를 호기심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

반월은 지나가던 낯선 남자가 자기의 아래우를 뜯어보는 바람에 본래의 자기로 돌아와 눈물을 서둘러 훔치고 차거운 기운을 씽 내풍겼다.

《가던 길이나 가보세요.》

반월은 무엇을 싹둑 자르는듯 한 기세로 홱 돌아섰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가만, 누군가고 묻지 않아. 내 금천군인민위원장이야.》

사나이의 저력있는 어조보다도 군위원장이라는 자기소개가 반월의 걸음을 잡아챘다.

군위원장?! 그러니 우리 집의 땅을 몰수하게 한 그 위원장이란 말인가?

반월은 그제야 누런색 말갈기속에 두손을 묻고있는 군위원장의 회색중절모와 골덴바지아래서 번쩍거리는 승마용장화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입고있는 검은 외투는 어느 외국사람한테서 선사받은것인지 몸집보다 퍽 커보였지만 그래도 허리통이 굵고 살집이 좋은 체격이여서 그럭저럭 꼴불견도 아니였고 위엄도 어지간히 돋구는듯싶었다. 리의 어느 농가에 들려 한잔 했는지 얼굴이 설삶은 말대가리같이 벌그레한 그는 반월에게 이 마을에서 사는가고 재차 따져묻고있었다.

《그래요. 여기 이 집에서 살아요.》

칼자루를 쥐고있는 군의 간부이기는 하지만 자기 집안을 궁지에 몰아넣은 당사자라고 생각하니 토라진 대답소리가 나갔다.

황부루가 달리는 속도를 따라낼수 없어 뒤떨어졌던 낯익은 리위원장이 깨끗이 빨아입느라고는 했지만 군위원장의 고급외투와는 대비도 되지 않는 솜두루마기를 너펄거리며 뒤늦게야 허겁지겁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부산을 피우며 군위원장동지가 면에 내려왔던 길에 마을들을 돌아보고계시는데 빨리 아버지를 불러내라고 독촉했다.

반월은 아버지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등거리를 걸치며 허둥지둥 달려나왔던것이다.

리위원장이 고명을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군위원장동지, 이 동무가 석고명이라고 하는 이 집 주인입니다. 그리고 이 동문 이 집 외동딸인데 지금 해주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있습니다.》

《아, 그렇소? 농사군의 딸이 도회지에 나가 공부를 다 하구… 정말 공화국정치가 좋긴 좋구만. 그래 올해 농사준비는 잘돼가오?》

군위원장은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명과 반월을 번갈아보았다.

석고명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수 없어 입을 꾹 다물고있었다.

리위원장이 군위원장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소곤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그의 귀속말을 듣느라 말안장에서 잔뜩 아래로 휘여들었던 군위원장의 허리가 대바람에 살을 날린 활시위처럼 꼿꼿해졌다.

《그러니 이 집이 그 집이란 말이요? 군의 지시를 알기를 우습게 아는 그 집이란 말이지. …》

《네,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농사야 지어야지 않겠습니까. 본인두 잘못을 느끼고있으니 내무서에 말해서 이젠 땅을 돌려주었으면 합니다.》하고 리위원장이 두둔해나서자 이때라고 생각한 석고명도 한발자욱 성급히 나서며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곁에 있던 반월도 얼결에 아버지를 따라 고개를 소곳했다.

《안돼!》

군위원장이 말채찍으로 허공을 후려쳤다.

《리위원장은 어째서 원칙도 없이 예수에 미쳐돌아가며 나라정사를 안중에 두지 않는 이런 집을 두둔하는거요? 장차로는 국경도 국가도 없는 세계적규모의 대가정을 형성하자는것이 공산주의리념일진대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맑스―레닌주의가 천명한 국가조락의 휘황한 종착점에 어떻게 도달할수 있겠소. 동문 이 령감이 사방 돌아다니며 이 군위원장을 시비질하구 군내무서에 찾아가 평양에서 내려온 내무성간부에게까지 신소질한걸 알고있소? 잘못을 안다는 령감이면 그런짓을 하겠는가?! 내무성에서도 지시가 있었소. 우리 공화국정치에 사소한 도전이라도 하는자들에게 어떤 처벌이 차례지는가를 모두가 똑똑히 알고 교훈으로 삼게 해야 한다고 말이요.》

군위원장은 말채찍으로 또 한번 허공을 가르더니 주인의 푸들거림에 놀라 곁따라 꿈찔하는 말고삐를 틀어쥐고 박차로 말배를 때렸다.

《콱 썩은 놈의 집안!》하는 판결문같은 소리를 내던지고는 말과 함께 벌써 저만치 멀어져갔다.

반월은 분노와 절망에 빠져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더는 그 자리에 서있을수 없었다. 혀를 깨물고 얼굴을 싸쥐며 집으로 뛰여들어가다가 넋이 나간듯이 멍하니 서있는 아버지를 미처 보지 못하고 왈칵 부딪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딪친 감각마저 느끼지 못한채 그냥 달려나가다 문앞의 토방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넘어질 때 어디에 짓쪼았는지 반월은 이날 밤새껏 쏘는 발목을 부여잡고있어야 했다.

이튿날 아침 그는 밤새 퉁퉁 부어오른 발목때문에 절룩거리며 해주로 되돌아가고말았다.

등뒤에서 떠나가는 딸을 차마 말리지 못하고 눈물짓는 어머니의 신음소리와 아버지의 마른 기침소리가 가슴을 파고들며 따라왔건만 끝내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반월은 무슨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몰수된 토지문제를 해결해볼 일념으로 발이 아픈것도, 가슴이 쓰려나는것도 다 잊어버린채 이를 악물기만 했다.

처녀가 걸어가는 앞길에는 눈에 덮인 드넓은 들이 눈뿌리가 모자라게 펼쳐져 다가올 운명의 간고함을 시사해주는듯싶었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mypeople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도서련재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9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8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7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6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5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4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3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2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1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0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9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8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7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6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5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4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3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2회 총서 《불멸의 력사》 중에서 장편소설 ​《보루》​ 제1회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