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7 장

 

3

 

8월에 들어서면 계절의 변화가 선명한 서울에서는 어딘지 여름이 한물 지난듯 했다. 아침저녁으로 선기가 돌기 시작하며 한낮의 하늘이 가없이 높고 푸르며 내물은 티없이 맑게 가라앉는다. 산은 더욱더 거매지고 산우에 떠가는 쪼각구름은 은비늘처럼 희디희다. 씨가 여물기 시작하는 들판에서는 메뚜기떼가 제세상을 만난듯 떼를 지어 날으고 구성지던 매미소리도 쇠소리가 나게 여물었다. 사람의 생활과 동떨어진 자연은 예나 다름없이 평화로왔다.

8월초순에 리윤재는 한달가량 려행을 하게 되였다. 그 바람에 바쁜것은 정씨였다. 옷을 빨고 밤늦도록 다듬이질을 하고 다시 밟고 다리미질을 했다. 다리미도 전기다리미가 아니라 숯불을 피워서 담아가지고 다리는것이였다. 그 다음은 옷을 깁고 저고리와 두루마기에 동정을 달고 옷고름을 달며 게다가 허리띠와 대님까지 일일이 손으로 깁는다. 한뜸한뜸 깁는것이니 조선옷손질이란 품이 이만저만 드는것이 아니다.

그래도 정씨는 남편이 한사코 입는 조선옷손질에 군소리 한마디 없었지만 그렇게도 정성을 들인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남편을 보고는 한마디하지 않을수 없다.

《아니, 옷고름은 왜 만날 그렇게 엉성하게 매세요.》 하고 정씨는 남편에게 다가가서 보기 흉하게 맨 고름을 풀고 손수 매주고 고름매듭의 주름살까지 깨끗이 펴주었다.

《매사에 녀자의 손길이 가야 하겠군.》 하고 리윤재가 빙그레 웃었다. 뒤퉁스러운 그로서는 이만 한 말도 안해의 수고에 대한 대단한 치하였다.

정씨가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번에 또 중국에 가는건 아니예요?》

《중국이라니?》 하고 리윤재가 도리여 놀랐다가 짐작이 가는듯 다시 웃고말았다.

《공연한 소리. 신문을 못 봤소? 이번 방학기간에 신문사들에서 각 학교 학생들로 문맹타파운동을 벌리고, 특히 동아일보사에서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한글순회강습을 조직하고 우리 어학회에서 9명의 회원을 그 강사로 보내기로 한거요.》

《대단한 일인데요.》

《아무렴. 힘없는 조선사람으로서 이게 어디 쉬운 일이요? 한글운동이 시작된이래 첫일이지. 우리 사람들이 한글에 대하여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한것 같소.》

그런데 정씨의 얼굴이 곧 흐려갔다.

《그렇지만 왜놈관가에서 좋아하겠어요? 또 무슨 트집을 걸어 말썽을 부리지 않을가요?》

《쉬파리 무서워 장 못 담글가.》하고 리윤재가 안해의 말을 중동무이 했다.

《왜놈들이 정식으로 허가를 해놓고도 무슨 변덕을 부릴지 그거야 모르지만, 대체로 일없겠지.》

그의 말에도 어딘지 자신은 없었다.

아침 일찌기 집을 나선 리윤재는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우선 선천으로 갔다. 강습지의 선택과 일정은 동아일보사에서 짠것인데 활동상편의를 위해서 지국과 분국이 있는 곳을 주로 고른듯 하고 또 강습날자도 그곳과 협의하여 짠것 같아 강사로서는 좀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다. 리윤재는 우선 선천에서 강습을 하고 평양에 나왔다가 다시 정주로 가고 중화와 황주를 차례로 돌게 되여있었다.

바다가의 크지 않은 고을인 선천에서는 《동아일보》지국장이 나서서 그곳의 유지들과 제자들로 환영의 밤을 열고 먼 려행길의 수고를 위로하였다. 왜놈의 치하에서 왜놈에게 대립하여 량심있는 조선사람끼리 서로 돕고 뭉치는것은 하나의 인간적의리로, 사회적기풍으로 되였으며 이것이 조선사람의 사회적운동의 큰 힘으로 되였다. 왜말을 《국어》라고 칭하고 관공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쓸것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데는 한글강습이 절실한 문제는 아닐수 있었지만 한글강습을 한다고 사람들이 흥분해서 모여오고 기뻐한것은 역경속에서도 조선사람이 조선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을 대견해하는 마음에서였던것이다.

아무리 왜적이 칼부림을 하고 친일파가 왜말을 쓰고 날쳐도 조선의 얼은 묶어놓을수도 없고 조선말은 없앨수도 없는것이다.

리윤재에게 있어서 한글강습은 단순히 국문문법의 기초지식을 가르치고 신철자법의 원리를 해설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였다. 우리 말을 지키는것이 민족의 얼을 지키는것이라는 확고한 의지에서 출발했고 그것으로 일관되였다. 경관의 립회하에서 말하는것이니 내놓고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지는 못할망정 말뒤에 숨은 이 절규를 사람들은 가슴으로 알아들었던것이다.

선천에서의 닷새동안의 한글강습은 성황리에 끝났고 그런대로 아무 말썽도 없었다. 그러나 평양에서 하게 된 강습은 사정이 좀 달랐다. 당국의 집회허가가 늦어져서 강습을 하루 늦게 시작하게 되였고 청강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여기서 특별히 하기로 한 조선문자사강의에서는 《조선민족》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무식한 림석경관의 《주의!》소리가 련발하여 장내를 어수선하게 했고 경찰의 간섭으로 강사는 이 강의를 도중에서 중단하고 신철자법강의로 넘어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강실로 쓴 숭실고보의 큰 강당은 매일 청강자로 꽉 차서 립추의 여지가 없었고 뒤와 창밖에서까지 사람들이 서서 강의를 듣는 형편이였다.

리윤재는 청중의 이 열의야말로 자기가 민족의 얼에 대하여 백번 말하는것보다 더 강력한 반일항거라고 생각했다. 조선사람이 자기 민족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무지막지한 왜경의 《주의!》라는 왜가리소리는 청중에게 도리여 민족적각성을 불러일으켰고 강의의 중단은 그들의 가슴을 억눌린 민족의 분노로 이글거리게 했다. 식민지억압자인 왜놈처럼 교활하고 간악하면서도 어리석은 놈은 세상에 없다. 놈들에게 리성이 있을수 없다. 그 비리성적인 민족적학대는 걸음마다 한줌밖에 안되는 친일파를 제외한 모든 조선사람들의 분노와 항거에 부딪치지 않을수 없다. 이 분노와 항거는 쌓이고쌓여 언젠가는 왜놈의 머리우에 불벼락을 내리고말것이다. 적어도 리윤재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주에서는 한글강습을 아예 열지조차 못했다. 경찰당국이 허가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아직도 오산고보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옛친구들과 제자들이 모여 리윤재를 위한 환송회를 가진것이 다였다. 《동아일보》정주지국장도 그런 제자의 한사람이였는데 모처럼의 한글강습이 파탄된것이 자기의 책임이기라도 한듯 몹시 안타까와했다.

《선생님, 그 일때문에 제가 경찰서출입을 몇번 했는데 그놈들이 마지막에 한다는 소리가 강습은 허가할수도 있지만 리윤재의 출연은 불허한다는것이였습니다. 선생님은 정주에서 왜놈들에게서 두번이나 실격자(법규정이나 행정처분에 의해 자격을 잃은 사람)로 되셨습니다.》

그는 리윤재가 지난날 오산학교에서 조선어강의가 문제로 되여 당국에 의하여 교원자격을 박탈당했던것을 상기했던것이다.

《두번이 아니라 일생을 나는 왜놈에게서 실격자로 점찍힌 사람이지요. 허나 왜놈의 력사도 법도 인정하지 않는 실격자처럼 마음 편한게 어디 있어요.》하고 리윤재가 빙그레 웃었지만 이 역설적인 말이 젊은 지국장의 가슴에 찡 하고 울려오는지 그는 이윽히 침묵하다가 한마디 했다.

《선생님의 순교사적생애는 저희 제자들에게 많은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고맙소.》

이튿날 리윤재는 그와 함께 지난해에 작고한 리승훈의 묘지를 찾아보고 민족의 갱생을 위하여 후비육성에 한생을 바친 자기희생적인 교육자이고 뛰여난 독립운동자인 선배의 령전에 경건한 묵도를 드리였다. 그처럼 호협하던 인물이 이제는 말없는 무덤밑의 진토로 화했음을 생각하니 인생의 무상함이 절로 그의 가슴에 마쳐왔고 눈등이 뜨거워졌다.

독립운동에 뭄을 잠그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사라져간다. 손병희와 리상재도 이미 돌아갔다. 력사학자이고 언론인으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박은식도 이역에서 한많은 한생을 마쳤다. 김좌진은 파벌싸움의 희생자로 자객의 총탄에 쓰러졌다. 절개가 대쪽같은 유학자이고 언론인인 김창숙도, 남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여 국민의회를 이끌어가던 김동삼도 왜경에게 체포되였고 오동진도 려운형도 왜놈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있다. 용명을 떨치던 홍범도는 무졸장군이 되여 씨비리를 방황하고있다. 신민회의 조직자의 한사람이고 상해림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였던 리동휘는 파란만장의 독립운동의 보람도 없이 남의 땅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은퇴해버렸고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이고 교장이였으며 3. 1인민봉기후에는 서로군정서의 부독판(직명)이였던 려준도 이제는 장백산에 은퇴하여 한많은 여생을 마쳤다.

이 나라의 독립운동이 간고한만큼 독립운동자들의 생애와 말로도 개개로 기구했다.

직접 또는 간접으로 아는 그들의 초상을 그려보는 리윤재의 마음은 별들이 사그라진 하늘처럼 어둡기만 했다. 나라를 독립하지 않고서야 이미 간 이들의 넋을 무엇으로 달래랴!

산에서 내려온 리윤재는 정주지국장의 바램을 받으며 정주를 떠났다. 두번째의 《실격자》로서.

그런데 이 《실격자》에게 지난해에 동아일보사에서는 창립 10주년에 제하여 금시계를 수여하여 그의 공로를 표창하였다. 그 금시계에는 다음과 같은 명이 새겨져있었다.

《조선어문공로자 치사. 창립 10주년.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의 그 10년은 실로 간고한 나날이였다. 1920년에 창간된 이래 10년동안에 228회의 압수처분, 2회의 정간처분으로 상처받고 찢기며 걸어온 길이였다.

이듬해 제2의 한글순회강습에는 어학회에서 12명의 강사가 동원되여 더 넓은 지역에서 벌어져 성황을 이루었고 그 다음해 3회 강습에서는 멀리 만주 간도까지 포함하여 40개 지역을 계획했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으로 불과 몇군데에서밖에는 강습을 하지 못했고 그 이듬해부터는 한글순회강습은 완전히 금지되고말았다. 이 한글강습이 단순히 한글을 가르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을 민족정신으로 단합시킨다는것을 왜놈들이 모를리 없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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