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2 장. 국강상의 가을

3

이른새벽녘에 치희는 아궁의 불을 긁어모으고 부엌 한구석에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걸터앉아 얼굴에 송글송글 내돋은 땀을 훔쳤다.

그는 일찌감치 음식조리를 끝내려고 벌써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닭을 튀기고 전을 지져냈으며 물고기를 양념에 발라 적쇠에 구웠다.

치희는 연우가 이 음식들을 좋아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어 오늘은 그가 이곳에서 식사를 하려니 하는 기대에서 명절음식을 차린것이였다.

바라고 바라던 상봉의 시각이 다가오고있는것으로 하여 마음은 마냥 설레이고있었다.

치희를 데려온 시마는 그를 왜군의 치중부대가 자리잡고있는 여기 성염성에 떨구어두면서 신라도성을 함락한 후 연우가 꼭 찾아올것이라고 하였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장에는 나오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치희는 연우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가고싶었지만 시마의 당부가 하도 절절하기에 하는수없이 여기 성염성에 홀로 떨어졌다.

성염성에는 왜군의 치중부대가 수백명가량 되였고 또한 왜병들에게 붙잡힌 신라인들과 신라에 거주하고있는 고구려사람들이 천여명이나 있었다. 그들을 지키는 왜병들의 말에 의하면 곧 그들모두를 바다건너 왜땅으로 끌고간다는것이였다.

치희는 이러한 곳에 홀로 남아있기가 싫었으나 이제 곧 연우가 찾아올것이라는 한가닥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치희는 경멸스럽고 미개한 왜인들과 함께 있는것이 고통스러웠고 더우기는 동족인 고구려사람들이 포로로 붙잡혀와 불행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것이 괴롭기 그지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으로 들떠있는 자기자신이 어쩐지 죄스럽게 여겨졌다.

치희는 이제 연우가 여기 오면 포로로 붙잡혀 끌려와있는 신라사람들과 고구려사람들을 모두 놓아줄것이라고 굳게 믿고있었다.

연우라면 아무리 교전국의 백성들이라고 해도 죄없는 백성들을 해하지 않을것이며 더우기 동족의 사람들이 왜땅으로 끌려가는것을 그냥 놓아두지 않을것이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치희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없이 웃었다.

20여년전 업성의 노예시장에서 자기를 구해주던 연우의 모습이 눈앞에 우렷이 떠올랐기때문이였다. 그때의 연우의 모습은 얼마나 미더웠는가. 얼굴도 이름도 모를 한 처녀애를 위하여, 그가 단지 노예로 팔려다니는 동족의 처녀애라는 리유 하나로 목숨을 서슴없이 내댄 연우의 모습을 치희는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였다.

하기에 치희는 그가 비록 고구려를 반대하는 전쟁판에서 살고있으나 아직도 연우를 믿고 사랑하였던것이다.

치희는 날이 밝자 옷보따리를 풀고 많지 않은 옷가지들을 헤치며 망설이였다. 대체 어느것을 입어야 할가?

전시에 그것도 항상 남복을 입고다니던 자기가 명절날처럼 차려입는다는것이 거북스러웠으나 그렇다고 여느때처럼 사내들의 옷을 입기도 왜서인지 싫었다.

치희는 어느것으로 정했으면 좋을지 몰라 이것저것 잡아보다가 마침내 마음을 정한듯 아직까지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람색저고리를 집어들었다.

그래도 그것이 그가 꿍져가지고다니던 옷가지들중에서 그중 나았다.

곁에서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깐 구노국 왜인들따위가 뭐라고…

누가 볼세라 얼른 청동거울을 들어 얼굴을 비쳐보았다. 놀란듯싶은 가벼운 미소가 입가에 흘렀다.

예쁘장한 얼굴모색과 새별같은 두눈에서는 정기가 뿜는듯 하였으나 혼기가 지난 흔적을 감추지 못한 녀인이 자기를 바라보고있었다.

치희는 주의깊게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였다. 자기의 나이가 어느덧 서른고개에 이르렀던것이다.

처녀의 나이 서른이면 꽃다운 시절을 모두 놓친것이였다.

치희는 좋은 시절을 손에 검을 잡고 사내들과 함께 살벌한 죽음의 길을 톺으며 흘려보내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남복을 벗고 아름다운 녀인으로 돌아온 지금에 와서는 흘려보낸 세월이 허망하게도 생각되였다.

치희는 점심때까지는 그럭저럭 숙소로 정해진 집에 앉아배겨있었으나 종시 참다못해 덧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왜군에게 점령당한 성안은 괴괴하다할 정도로 사람의 발자취가 엿보이지 않았다.

거의 모든 백성들이 달아나버리고 집집의 열려진 문으로 찬바람이 제멋대로 드나들어 어수선한 기운만 돌았다.

눈에 띄우는것은 골목마다 술에 취한 왜병들이 략탈할 물건이 없는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모습뿐이였다.

성안 네거리까지 나갔던 치희는 왜병들에게 전선형편을 물을가 하다가 단념하고 돌아서버렸다.

그래도 시마의 이또가야국의 군사들은 가야계 이주민출신군사들이라 말이 통했지만 구노국 야만인출신 왜병들은 상대하기조차 싫었던것이다.

치희는 3년전 구노국 사사히꼬가 배신적으로 김지수를 살해하는것을 직접 목격했었다. 그때 그는 사람의 잘못산 한생이 얼마나 허무한것인가를 알게 되였고 혹시라도 연우가 그런 운명의 경난을 겪지 않도록 하늘에 빌었었다.

치희는 오던 길을 되짚어 숙소로 향하였다.

이때였다. 오른쪽 골목에서 다급한 녀인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치희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 그 자리를 빨리 떠나려다가 다시 돌아섰다. 그저 지나치기에는 녀인의 비명소리가 너무도 처절하게 가슴을 찔렀고 동족녀인의 불행을 외면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치희는 소리가 나는쪽으로 주저없이 뛰여갔다.

저쯤 앞쪽에서 10여명의 왜병들이 한명의 녀인을 둘러싸고있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차림새로 보아 분명 포로로 붙잡혀와있는 고구려녀인이 틀림없었다.

아마 성안을 빠져나가려다가 순라를 돌던 왜병들에게 붙잡힌 모양이였다. 녀인은 모진 고초를 겪은듯 온몸이 성한데라고는 한군데도 없었다. 머리는 풀어져 산발이 되였고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만신창이 되였다. 그 녀인은 왜병들이 억지로 붙잡고 끌고가려고 하자 죽기로 항거하는것이였다.

녀인의 손에 작은 은장도가 들려있는것을 치희는 똑똑히 보았다.

왜병들이 접어들려고 지싯거릴 때마다 녀인은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은장도를 휘두르는것이였다.

치희는 이 불행한 녀인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녀인의 무모한 반항은 얼마 넘기지 못할것이였다.

상대는 발톱까지 무장한 군사들이였다.

치희는 이를 악물었다. 이때까지 춘정에 가슴을 부풀리던 연약한 처녀가 불시에 무사로 되돌아갔다.

치희의 몸이 허공중을 날았다. 불의의 타격을 받은 왜병들이 땅바닥에 너부러졌다.

《걱정하지 말아요.》 치희는 녀인의 몸을 감싸듯이 등에 세우며 낮게 말하였다.

왜병들이 악에 받쳐 창검을 휘두르며 접어들었다.

치희는 앞서 들어오는자의 창을 허리를 틀어 옆으로 흘려보내고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칠거리는 놈의 배허벅을 발로 힘껏 내찼다. 넘어진 상대에게서 창을 뺏아잡고 좌충우돌하니 순식간에 10여명의 왜병들이 헛개비처럼 나가넘어졌다.

치희의 서리발돋은 모습은 참으로 무서웠다.

왜병들은 그 어떤 공포감에 사로잡혀 무기를 내던지고 걸음아 날 살려라 모두 꽁지가 빳빳하여 달아나버렸다. 치희는 창을 버리고 돌아섰다.

녀인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무슨 말인가 하려다 그만 정신을 잃고 그자리에 쓰러졌다.

치희는 녀인을 가슴에 안았다. 비록 머리는 풀어지고 옷도 갈기갈기 찢기였어도 녀인은 아름다왔다.

나이는 치희와 비슷하게 보였으나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은듯 눈가에 알릴듯말듯 잔주름이 엿보였다.

덧옷을 벗어 녀인의 몸을 감싸주고 등에 업으려고 몸을 일으켜세우던 치희의 손이 한순간에 굳어져버렸다.

녀인의 손에 들려있는 은장도의 손잡이에 치희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어린시절추억으로 그려보군 하던 물고기를 부각한것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치희의 손이 저절로 가슴에 와닿았다. 품에 늘쌍 넣고다니던 나무칼을 꺼내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녀인의 손에서 은장도를 빼내였다. 크기도 모양도 꼭같은 두개의 물고기조각품이 치희를 올려다보고있었다.

 

고구려군의 공격은 참으로 무서운것이였다.

그 어떤 힘도 고구려군의 공격을 막아낼수 없을것이였다.

우선 력량상 엄청난 우세를 차지한데다가 고구려군을 이끌고있는 장수가 명장으로 이름이 자자해진 맹광이였던것이다.

맹광은 전부대를 3개의 타격집단으로 갈라 신라의 도성 서라벌을 향해 진격하였다. 각 방면군의 진군로정은 서로 달랐으나 타격목표는 신라의 도성에 집결되여있는 가야-왜의 주력이였다.

맹광이 이끄는 제2군은 2만명의 대군이였는데 곧장 종발성을 지나 남하하여 도성으로 통하는 서도를 막아서고있는 백제별동대를 표적으로 질풍같이 진격하였다.

1군은 동도로 강행군을 들이대여 도성을 에워싸고 신라군과 싸우고있는 가야-왜의 주력을 섬멸하기로 하였다.

3군은 곧바로 신라-가야변경지역까지 내려가 백제별동대와 가야- 왜군의 퇴로를 차단할 임무를 받았다.

고구려군은 말그대로 돗자리를 말아가듯이 맞다드는 적을 사정없이 짓뭉개면서 진격을 멈추지 않고있었다.

절풍계선에서 매복진을 펴고 고구려군의 주력인 제2군의 공격을 막으려던 백제별동대는 력량상차이로 패하여 그만에야 남쪽으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도성을 포위하고있던 가야-왜의 주력은 고구려군이 미처 당도하기전에 패주하였으며 가야변경일대의 퇴로가 차단되게 되자 하는수없이 왜군의 치중부대가 있는 성염성으로 몰려갔다.

가야-왜, 백제련합군의 우두머리인 연우는 어떻게 하나 고구려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을 멈추어보려고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련전련패하여 전선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미 절풍계선에서의 격전끝에 반수이상의 병력을 잃은 별동대는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압도적인 포위에 들어 백제로 돌아가는 길마저 끊어지자 하는수없이 가야-왜의 패잔병이 밀려들어간 성염성으로 가는수밖에 없게 되였다.

고구려군이 신라변경을 넘어 진군을 개시한지 사흘도 못되여 전선이 붕괴되고 7일째 되는 날에는 패잔병들이 비좁은 성염성에 몰리게 되였다. 미처 성염성방면으로 퇴각하지조차 못한 가야-왜군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이리 몰리고 저리 쫓기다가 처참하게 맞아죽었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성염성에 패잔병들과 함께 쫓겨들어온 구노국왕 사사히꼬는 우리에 갇힌 야수로 변해버렸다.

피발이 선 눈을 미친 놈처럼 쉴새없이 번뜩이며 비위에 거슬리면 제 부하이건 성안의 백성이건 가차없이 죽여버리였다.

성염성안에는 왜군이 갖추어놓은 식량이 한달은 족히 될수 있으나 보다 중요한것은 혈로를 뚫어 한시바삐 고구려군의 포위에서 벗어나는것이였다.

매일 매 시각 패잔병들이 밀려들어 성염성에는 어느새 수천명의 군사들이 집결되였다.

사사히꼬는 미쳐 죽을 지경이였다. 제가 끌고 바다를 건너온 왜병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반수이상이나 무주고혼이 되였으니 복통이 터질노릇이였다.

이제 철통같은 고구려군의 포위를 뚫고 고향으로 살아돌아갈자가 과연 몇이겠는가.

어느덧 사사히꼬는 이 외로운 성에서 무주고혼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 무서워졌다.

백제 아신왕의 신임으로 왜군을 모두 이끌고 신라로 진격할 때만 해도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것처럼 기세등등했으나 이처럼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해 돌구멍안에 갇혀있자니 죽음의 귀신을 기다리는것만같아 무서웠다.

사사히꼬는 사실 지금까지 해적질과 같은 소소한 싸움만을 치르어봤지 대륙의 격렬한 대격전은 한번도 치르어보지 못했었다.

더우기 이번 전쟁의 초기성과는 백제의 전략이 성공한데도 있었지만 기본은 신라군이 쉽게 무너지는통에 도성에까지 진격하였다고 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고구려의 수만대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이렇듯 무서운 섬멸적인 타격을 가할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고구려군의 위력은 상상하기조차 무서웠다. 천하에 개마무사라고 자자한 고구려철기군의 무시무시한 공격은 해적질이나 일삼던 미개한 야만인인 사사히꼬의 얼혼을 빼앗기엔 충분했던것이다.

이제 남은것은 어떤 희생을 내서라도 포위를 뚫고 구노국으로 돌아가는것뿐이였다.

그러나 사사히꼬로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패잔병들을 지휘하여 고구려군의 포위를 뚫을 자신이 없었다.

배를 타고 상선이나 덮치는 싸움과는 달리 지금형세에서 과연 어디로 길을 잡고 어떻게 뚫러야 하는지, 오합지졸같은 왜병들을 또 어떻게 휘여잡으며 어떤 방식으로 군사를 지휘해야 할지 모든것이 막연했다. 이러한 사사히꼬의 머리속에 연우가 떠올랐다.

연우라면 이 난관을 타개할수 있을것이였다.

대륙의 싸움속에서 단련된 연우, 백제와 가야에서 전쟁의 신처럼 내세우는 연우라면 능히 이 어려움속에서도 벗어날수 있을것이였다.

그러나 연우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확인할수 없었다.

하긴 연우의 별동대가 절풍계선에서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아 싸우지 않았다면 사사히꼬자신은 벌써 황천객이 되였을지 모른다.

실상은 백제별동대가 절풍계선에서 악전고투하고있을 때 사사히꼬가 용기를 내서 그 배후를 견제해주기만 했어도 형편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것이였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자기를 구원할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를 죽음의 나락속에 밀어던지고 혼자 살아 도망쳐온것은 바로 사사히꼬자신이였던것이다.

장막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사사히꼬의 이마살이 저절로 찌프러졌다.

아마 제 부하놈들이 성안의 백성들을 상대로 살륙을 벌리고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미쳤던것이다.

죽일놈들 같으니라구…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방패막이로 써먹을 인질들이니 함부로 도륙하지 말라고 그만큼 일렀건만 원래 제 상전들을 닮아 피를 즐기는자들이라 도무지 이가 먹어들지 않았다.

더우기 불안과 공포로 혼란스러운 지금 밖에서 소란을 피워 심기를 건드리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게 누구 없느냐? 밖에서 웬 소란이냐?》

뜻밖에도 동생 헤구리가 뛰여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사사히꼬가 두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노려보자 주눅이 든 헤구리는 우물쭈물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실은 치희라는 계집년이 말을 듣지 않아서 버릇을 가르치려다가… 그년이 우리가 없을 때 여기 남은것들 몇을 두들겨팼던 모양이오이다. 내 그래서 옥에 가두어두려는데 년이 어찌나 독살이 센지… 곧 끝내겠소이다.》

《치희?…》

사사히꼬는 아무래도 표상이 가지 않는지 머리를 기웃거렸다.

헤구리가 곰살궂은 웃음을 담고 사사히꼬의 턱밑에 바싹 기여들었다.

《이또가야국의 시마가 끔찍이 위해주는 계집이 있지 않소이까. 우리가 김지수를 죽였을 때 칼을 들고 뛰쳐나와 반항하던 년을 시마가 하도 간청하는 바람에 형님이 살려주신것을 벌써 잊었소이까. 그년이 백제 좌장 연우의 계집이라던지… 어찌나 지독한 년인지 칼을 목에 갖다 대여도 꿈쩍하지 않소이다.》

《하하하!》

갑자기 사사히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사히꼬가 미친 놈처럼 몸을 들까불며 웃어대는 바람에 헤구리는 아연해졌다.

《혀… 형님, 갑자기 왜 이러시오이까?》

《이젠 우리가 살았다. 연우가 반드시 이 성으로 들어와 우릴 구원할것이다.》

헤구리는 볼이 부어 불평을 터놓았다.

《연우 그놈이야 시마와 함께 벌써 어디론가 달아나버렸겠는데 어디서 찾아낸단 말이오이까?》

사사히꼬는 눈가에 배여나온 눈물을 옷소매를 들어 꾹꾹 찍어내고는 이렇게 말했다.

《연우놈의 계집인지 하는 년이 우리 손에 있지 않느냐. 어리석게 가타부타하지 말고 어디 외딴 곳에 거처하도록 놓아두거라. 그년은 우리에게 반드시 쓸모가 있을것이다.》

헤구리가 우물거렸다.

《치희년 말고도 고구려계집년이 하나 더 있소이다. 그년은 어쩔가요? 치희가 죽기로 보호하고있지요.…》

사사히꼬는 불시에 표독스러운 기색으로 돌아가 헤구리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둘 다 함께 가두어두거라. 고구려계집년은 따로 쓸데가 있을것이다.》

연우는 고구려지원군의 대장이 맹광이라는것을 안 때로부터 며칠동안 악몽같은 나날을 보내였다. 운명의 지꿎은 장난이 연우와 맹광을 하나의 끈으로 얽매여놓고있었다.

맹광은 언제나 연우를 앞질러가면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군 하였다.

이것 또한 운명인가. 하늘이 연우를 내려보낼제 맹광을 따라 내려보내여 운명에 암운을 드리우게 한것은 아닌지?…

그러나 맹광은 미워할래야 미워할수 없는 적수였다.

더우기 맹광은 연우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의 애틋한 추억을 항상 기억시켜주는 존재였던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그를 증오해야 했다. 뜻이 다른것으로 하여 서로 제손으로 직접 베여버려야 할 적이였다.

연우는 이번에 맹광이 고구려지원군의 대장으로 출전해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은 392년의 관미성대격전이후로 언제나 전장에서 그와 검을 겨룬 10년간의 참담한 세월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다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통채로 무너져내리는듯 괴로왔다.

맹광이 이끄는 고구려지원군의 맹공격은 또다시 연우를 좌절에로 몰아갔다. 연우가 그토록 소망했던 꿈이 현실로 되는것을 눈앞에 둔 때 맹광이 이것을 무자비하게 산산쪼각내였다.

연우는 이렇게 물러설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피해서 물러서면 영영 다시 일어설 기회를 놓치게 되는것이였다.

뿐만아니라 연우의 고국인 아라가야는 빛을 잃고 스러져버릴것이였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맹광을 죽이고 고구려군을 물리치는 길뿐이였다.

허나 지금의 형편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고구려군의 질풍같은 공격에 백제별동대는 적지 않은 희생을 내고 전투력이 심히 약화되였고 가야-왜군은 성염성에 쫓겨들어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있었다.

하다못해 백제 아신왕이 1~2만의 지원군만 보내주어도 전선형편을 뒤집을수 있는 자신이 있었으나 그것은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성염성에 들어박혀있는 왜군의 패잔병무리까지 모두 합쳐야 1만명밖에 안되는 무력으로 어찌 수만의 고구려군을 당해내겠는가.

더우기 고구려군의 지원으로 힘을 얻은 신라군이 또한 반격으로 나오고있어 전쟁에서 이긴다는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곳도 없었고 물러서서도 안되였다.

이젠 더 갈 곳이 없었던것이였다.

연우는 지금까지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피의 길을 헤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이제는 등을 기댈 곳조차 없게 되였다.

이번 전쟁으로 백제는 완전히 주저앉을것이고 백제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가야련합체 역시 속수무책으로 멸망을 기다리게 될것이였다.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연우는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가야-왜의 패잔병들이 집결되여있는 성염성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그 길은 자기 운명뿐아니라 수천명 부하들의 생명을 내대는 위험한 길이기도 했다.

고구려 수만대군의 포위속에 들어 함락직전의 외로운 성으로 들어간다는것은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드는 격이 될수 있었다.

하지만 성염성안에는 연우가 그토록 사랑하고있는 치희가 있었다.

죽으면 죽었지 치희를 빼앗기고싶지 않았다.

아무리 맹광과 피를 나는 오빠라고 해도 그에게 치희를 잃을수 없었다.

 

400년 3월 초하루, 드디여 고구려군은 신라에 침입하였던 가야-왜군을 모두 성염성안에 몰아넣고 대포위를 끝낼수 있었다.

성염성안에는 약 1만명의 가야-왜군의 패잔병들이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말았다.

원래 성염성은 왜군의 치중부대가 자리잡고있어 저축해놓은 군량으로 1만명에게 한달은 대줄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한달동안에 백제의 지원군이 들이닥치지 못하면 오히려 대군의 포위에 들어 모두가 굶어죽고말것이였다.

맹광이 이끄는 고구려-신라련합군은 성염성을 물샐틈없이 둘러싸고있었다.

맹광은 적의 력량을 타진해보기 위해 군사를 번갈아 성염성을 건드려보았다.

적의 반항도 필사적이였다. 죽음의 함정속에 든 1만명의 가야-왜군은 죽기내기로 대항해나섰다.

맹광은 이미 세작들을 통해 적군을 이끌고있는 장수가 아라인출신의 백제 좌장 연우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운명의 조화로 수년간 검을 겨룬 상대였다.

맹광은 적들이 비록 력량상 렬세하지만 연우만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아마 연우는 마지막까지 백제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있을것이다. 허나 그것이 헛된 기대인줄 연우는 깨닫지 못할것이였다.

이제 맹광이 할 일은 마치 함정속에 몰아넣은 맹수를 때려잡듯이 성안의 패잔병들을 전멸시키는것이였다.

맹광은 총공격개시를 3월 초엿새날로 작정하고있었다.

그날 아침 전전선에 걸쳐 총공격을 들이대여 전쟁을 끝내려는것이였다.

맹광은 고구려-신라련합군의 기치를 자주 바꾸어 적이 아군의 력량을 똑똑히 모르게 하는 한편 성염성에 대한 소규모공격을 쉴새없이 들이대여 적군으로 하여금 제풀에 지쳐 쓰러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투력이 아주 강한 군사들로 무어진 부대를 일선에서 떼여내여 공성전법을 익히도록 맹훈련시켰다.

고구려군의 련이은 공격으로 련사흘이나 꼬박 밝힌 연우는 간신히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성루에서 내려왔다.

전쟁이 일어나 지금까지 변변히 눈 한번 붙여보지 못한 연우였다.

피로에 지칠대로 지친 몸은 햇솜처럼 나른해졌고 눈시울이 연덩이를 달아맨것처럼 자꾸만 감겨졌다.

수면부족으로 피발이 선 눈이 이상한 광채를 담고 번뜩이였다.

연우는 조금이라도 쉬고싶었다. 하지만 잠시도 마음을 놓을수 없는 몸이였다. 연우는 성루에서 내려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동문거리쪽으로 길을 잡았다.

치희가 머물고있는 숙소로 가기 위해서였다.

호위무사들이 따라서는것을 손짓으로 물리쳤다. 잠간만이라도 자기 혼자서 치희의 얼굴을 바라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피로가 순간에 사라져버릴것만 같았다.

그토록 수년간 낮과 밤을 지새면서 마음속으로 주고받았던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그저 말없이 치희의 얼굴만 뚫어질듯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들의 상봉이 하도 눈물겨운것이여서인지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반백의 시마도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러나 연우는 시간이 흐를수록 치희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자기를 의식하고는 깜짝 놀랐다.

왜 내가 나의 귀중한 존재인 치희에게 더이상 다가서길 주저하게 되는가. 생사를 모르고 헤여져있은 3년간의 세월이 짧은것인가.

아니면 가슴을 찢는 고통으로 흘려보낸 날과 달이 작았단 말인가. 연우는 곧 그 대답을 찾을수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대가 바로 치희의 친오빠였기때문이였다. 바로 그러한것으로 하여 연우는 곁에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치희를 몰인정하게 동문거리의 어느 한 빈집에 가두어두다싶이 하였다. 연우에게 충실한 두명의 호위무사가 그의 명령대로 치희를 지키고있었다.

연우는 인적기 하나 없는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려면 멀었는데도 인적기가 전혀 없었고 길가에는 여러가지 잡동사니들과 쓰레기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거의 모든 성안의 백성들이 란리를 만나 성을 떠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왜군에 붙잡혔거나 죽었다.

거리 량옆의 집들은 모두 문이 활짝 열려져있어 바람만 제멋대로 드나들고있었다.

연우에게는 지금까지 익혀 보아와서인지 전혀 낯이 선 모습은 아니였으나 전쟁의 비참함이 이 거리에 집약된것처럼 느껴지는것이였다.

연우는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었다.

여기는 연우가 아라인부대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왔을 때 군영으로 정했던 곳이다. 그래도 여기 성염성에서 그중 왜군의 략탈과 파괴를 겪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연우는 오른쪽골목 세번째 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당을 가로질러가 사랑채앞에 이른 연우는 사랑방에서 도간도간 울리는 낯선 녀인의 목소리에 주춤거렸다.

분명 그 목소리의 임자는 치희가 아니였다.

연우가 어쩔가 망설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치희를 지키라고 보낸 호위무사들이였다.

《별일없느냐?》

연우가 소리를 낮추어 묻자 그들은 얼핏 시선을 마주치고나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르신대로 이 주변에 일체 잡인을 금하고 왜인들의 출입을 단속하였소이다.》

이때 사랑방 문틈에서 또다시 낯선 녀인의 맑은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연우의 묻는듯 한 시선에 호위무사중 하나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잘 아는분 같소이다. 하도 간청하길래 소인들이 왜군병영에 포로로 붙잡혀있는것을 데리고왔소이다.》

《신라녀인이냐?》

《아니오이다. 고구려녀인이오이다. 후에 사연을 들어보니 도망치다가 왜인들에게 잡혀 욕을 볼번한것을 아가씨가 구원해낸가보오이다.

구노국왜왕 사사히꼬가 아가씨와 면목이 있어 아가씨를 보호해주지 않았더라면 무지한 왜인들에게 큰 화를 입을번 하였다고 하오이다.》

《사사히꼬?…》

연우는 모를 일이라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나서 호위무사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밖을 잘 지켜라. 어떤 위험이 닥쳐도 치희를 꼭 보호해야 한다.》

부하들이 물러가버린 후에 연우는 어쩔가 망설이다가 사랑채앞 평상우에 주저앉았다.

녀인들만 있는 사랑방에 들어가기가 무안스러워 잠시 앉았다 가려는것이였다.

따뜻한 남풍이 불어왔다. 연우의 눈앞에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살기띤 고함소리와 피비린내나는 아비규환의 전장과는 전혀 딴세상이 펼쳐져있었다.

연우는 피로에 지친 눈을 들어 눈석이물에 잠긴 마당가의 감나무우듬지며 축축히 젖은 토담과 수레바퀴자리가 눈녹은 물에 씻겨버린 길을 바라보며 시름을 잊은듯 깊은 상념에 빠져들어갔다.…

엷은 구름장사이로 얼굴을 기웃하고있는 하늘이 저녁을 맞이하여 누렇게 물들어가고있었다.

연우는 사랑방에서 울려나오는 치희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여났다.

《…난 언니가 오라버니와 그토록 깊은 인연을 맺고있은줄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이것도 운명의 장난일가요? 이런데서 처음으로 만난 고구려녀인이 우리 오빠의 사랑하는 녀인일줄이야.…》

《상이 오라버님은 반드시 살아있을거야.… 아니, 살아있어. 그이는 절대로 우릴 두고 가시지 않아. 하평아저씨가 말하였듯이 아마 지금쯤이면 고구려를 위해 큰일을 하고계실거야.…》

연우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마루우에 뛰여올랐다.

사랑방문에 가져갔던 손이 주춤거리다가 맥없이 떨어졌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가.

두 녀인은 자기들의 세계에 빠졌는지 밖에서 나는 동정에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에만 옴해있었다.

또다시 사랑방 문틈으로 고구려녀인의 청아하고도 다감한 목소리가 도간도간 새여나왔다.

《맹광오라버니는 다섯살때 헤여진 누이동생을 못 잊어 항상 이 은장도를 품에 품고계셨나봐.… 다시 만나면 주자고, 다시는 헤여지지 않기 위해서 물고기장식의 은장도를 가슴에 간직하고있은것이지.… 상이도 반드시 유주에서 헤여질 때 가지고있은 나무칼을 잊어버리지 않았을것이라고 확신하고있어.》

《아!… 정말 꿈만 같애요. 오라버님을 만나게 되면 날 알아보실가?…》

《알아보지 않구… 이때까지 기다려온 세월이 얼마였나. 상이 오라버님은 첫눈에 동생을 알아보실게야.…》

녀인은 웬일인지 말끝을 흐리였다.

아마도 애틋한 사랑의 추억이 그를 괴롭히는 모양이였다.

이번에는 치희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오라버님은 날 용서하지 않을거예요. 고국을 배반하여 검을 들었으니…》

《왜 그렇게만 생각하니? 악몽같은 세월은 모두 잊어라. 상이 네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잖니. 오라버님은 널 웃으며 받아줄거야.》

녀인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어머니의 다심한 손길같이 정에 주린 치희의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는듯 했다.

연우는 녀인들이 일어서는 기척을 느끼자 도망치듯 물러나 사랑채뒤에 몸을 숨겼다.

연우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지 갑옷자락을 끄르고 차겁고 눅눅한 공기를 게걸스럽게 들이마셨다.

사랑방문이 열리면서 치희와 나란히 고구려녀인이 밖으로 나와섰다.

얼굴의 륜곽이며 키와 몸매가 신통히도 치희와 꼭같았다.

순간 연우는 흠칫 놀라며 비명이 터져나오는것을 가까스로 눌러참았다. 연우가 1년전 림치의 성안에서 보았던 그 고구려녀인, 신라도성의 왜군병영앞에서 포로로 붙잡혀있던 녀인의 얼굴을 보게 되였던것이였다.…

성루의 지휘처로 돌아온 연우는 밤이 깊도록 오래동안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연우는 착잡한 생각에 깊이 잠겨있었다. 과연 치희를 놓아보내야 하는가.

연우는 혼란된 머리를 부여잡고 긴 신음소리를 내였다.

절대로 치희를 놓아주어서는 안된다는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고있었다.

갑자기 어지러운 발자국소리에 연우는 비로소 깊은 생각에서 깨여나 머리를 들었다. 구노국왜왕 사사히꼬와 시마였다.

《무슨 일이오이까?》

장군, 이젠 살았소. 방금 전령이 도착했는데 이달말까지만 견지해주면 아신왕이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올것이라고 하오. 백제변경을 넘어온 고구려군이 싸움을 포기하고 퇴각하고있으니 곧 전선에서 무력을 돌릴수 있을것이라고 전해왔소.》

먼저 사사히꼬가 교활한 웃음을 띄우고 성급하게 말을 꺼냈다.

《허- 설사 그렇다 해도 두고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거던.… 우리가 패해서 이렇듯 궁지에 몰린터에 백제가 구원병을 낸다는것이 믿어지지 않네그려. 판은 벌써 글렀는데 아신왕이 이기지도 못할 싸움판에 다시 뛰여들자고 할가?… 한산성이북지역이 쑥대밭이 됐을터인데…》

시마가 석연치 않은듯 머리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역시 늙은 소가 길을 안다고 시마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며 연우는 결론을 내렸다.

《외삼촌의 말씀이 옳소이다. 지금같은 처지에선 누구의 도움도 받을수 없소이다. 내가 직접 별동대를 이끌고 이밤으로 고구려군영을 습격하겠소이다.》

《?!…》

시마와 사사히꼬는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연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시마가 더듬거리며 간신히 입을 뗐다.

《저…정신이 나갔느냐? 버…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스스로 들이밀겠다니 도무지 리해가 되지 않는구나. 적은 수만대군이요, 별동대의 남은 인원이 다해서 2천명이니 이건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들겠다는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허나 연우는 막다른 처지에 들어선 이때 무엇을 주저하랴 하는 생각에 리성을 잃고있었다.

야음을 타서 맹광이 있는 중군영을 습격하자.…

하늘이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이 짧은 순간에 연우의 머리를 번개처럼 지나쳤던것이였다.

혹시 이것이 연우에게는 마지막 최후의 선택이 될지도 몰랐다.

연우는 시마와 사사히꼬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한번 해보려오이다. 날이 밝을 때까지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 세상에 없는줄로 생각해주소이다. 그럼 성을 부탁하오이다.》

이렇게 말하는 연우는 마음속으로 죽어도 치희를 맹광이에게 보내지 않을 유일한 선택을 찾았다고 단정하고있었던것이다.…

날이 밝았다.

치희는 처마밑으로 떨어져내리는 고드름을 하나하나 세여가며 한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그는 지금 운명의 갈림길우에서 방황하고있었다.

연우가 삼경무렵에 자기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사대 2천명을 이끌고서 고구려군영을 기습하러 떠났다는것을 안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한자리에 못박힌듯 이대로 서있었던것이다.

소운이에게서 오빠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치희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꿈결에도 잊지 못해하던 유일한 혈육인 오빠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한다.

물론 소운이도 그 이상 오빠의 행적을 잘 모르고있었다.

그러나 오빠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치희는 어떻게 하나 오빠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것을 체념하였다.

연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것인가?!

드디여 치희는 모든 사실을 연우에게 터놓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연우는 떠나갔다. 치희의 고국인 고구려를 반대하여, 어쩌면 치희의 오빠가 있을지도 모르는 고구려진영을 기습하러 떠나갔던것이다.

연우의 행동은 모진 운명의 방황속에서 갈길을 못 찾아 헤매이는 치희에게 그가 선택해야 할 길을 가르쳐주었다.

치희는 결심했다. 아무리 사랑이 소중해도 고국과 혈육을 찾는 길을 외면할수 없었던것이다. 하여 치희는 소운이에게 먼저 성밖으로 나가있으라고 하고는 연우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가 돌아오면 마지막작별인사를 남기고 소운이와 떠날 생각이였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돌아온다던 연우는 해가 중천으로 치달으는데도 감감무소식이였다.

치희는 불안으로 떨리는 가슴을 눅잦히기 위해 마당가에 못박힌듯 서서 연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있었다.

연우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그가 들어설 대문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치희는 이 한가지 생각에만 옴해있어 성안이 온통 발칵 뒤집힌것도 모르고있었다.

대문밖이 소란스러웠다. 치희의 창백한 얼굴이 부지중 환한 미소로 밝아졌다. 하지만 대문이 부서질듯 벌컥 열리며 뛰여들어온것은 그렇게도 고대하던 연우가 아니라 이또가야소국의 왕 시마였다.

시마는 정신이 나간듯 허등지등하며 치희에게 뛰여왔다. 투구도 없이 맨머리바람에 손에는 피묻은 검이 들려있었다.

《어… 어서 떠나자. 우… 우린 패했다. 고구려군이 공격해오고있다.…》

다짜고짜 치희의 손목을 잡아끌던 시마는 그가 손을 뿌리치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성안은 온통 수라장이다. 가야군은 이미 성문을 열고 고구려군에 투항하고 남은것은 우리와 사사히꼬의 구노국 왜인들뿐이다.》

치희는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이렇게 떠날수 없나이다.》

시마는 가슴을 두드리며 웨쳤다.

《이젠 망했다. 고구려군영을 기습하러 갔던 연우는 패하고 그의 부대는 모두 전멸되고말았다. 연우의 생사도 알수 없는 형편이다. 여기서 속절없이 이러고만 있을수 없다. 어서 나와 함께 성을 떠나 몸을 피해야 한다.…》

시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살기띤 고함소리로 골목안이 어지럽더니 불쑥 사사히꼬를 선두로 하는 수십여명의 구노국왜인들이 우르르 마당으로 밀려들어왔다.

사사히꼬는 대바람에 눈을 부릅뜨고 시마에게 달려들었다.

《너희네 가야놈들에게 속아 우리가 이 꼴이 되여버렸다. 연우놈은 고구려군영을 기습한다 핑게를 대고 사라지고 또 가야놈들은 성밖에서 싸우겠다고 성문을 열고 나가서는 곧장 투항을 해? 이번에는 너희 이또 가야국놈들 차례인가본데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듯싶은가?》

《네놈이 감히 나한테 이럴수가 있느냐? 표리부동한것으로 말하면 너희 왜종자가 김지수를 죽이고 우리 이또가야국을 쑥대밭으로 만든것이 아니냐? 그래도 연우는 너희같은 왜종자들을 살리려고 성을 나섰다가 불행을 당했는데 뭐 감히 네놈들이 그를 모독해?》

시마가 맞받아 소리쳤다.

《닥쳐! 내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것이다. 죽어도 모두 함께 죽겠다. 뭣들 하느냐? 이것들을 묶어라.》

사사히꼬가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순간 치희가 비호처럼 날아 시마에게 뻗치는 사사히꼬의 손을 쳐내고 몸으로 시마를 막아섰다.

《나이든분에게 이게 무슨 행패예요?》

사사히꼬는 빨갛게 충혈되여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거적눈을 치뜨고 치희를 잡아먹을듯이 노려보았다.

《네년이 연우를 믿고 내앞에서 방자한 모양인데 내가 연우 그놈을 만나게 해주지. 그동안 연우 그놈에게서 야만인이라고 멸시당한 분풀이를 너에게 해줄테니 그리 알아라.…》

사사히꼬의 부추김을 받은 구노국왜병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치희는 날래게 몸을 빼여 앞장서 들어오는자의 팔을 잡아꺾고 재차 돌아서며 뒤에서 접어드는자의 면상을 힘껏 발로 올려찼다.

나가너부러진 왜병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든 치희가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치희의 날랜 무술동작에 벌써 세놈이 비명을 지르며 땅에 나딩굴었다. 시마도 치희의 등을 지켜서서 검을 휘둘렀다.

《뭣들 하느냐? 한꺼번에 덮쳐라.》

사사히꼬가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자 왜병들이 무리로 달려들었다.

이때 연우의 호위무사들인 치주와 손이가 달려와 합세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사사히꼬는 이를 부드득 갈고는 제가 직접 검을 비껴들고 앞장서 들어왔다. 놈은 치희의 몸을 막아선 치주의 가슴을 베고 손이를 정면으로 찔렀다.

시마는 치희의 등을 지켜선채 혼자서 다섯명의 왜병을 상대하고있었다. 치희는 연우의 호위무사들인 치주와 손이가 쓰러지자 이를 악물고 사사히꼬에게 곧장 짓쳐들어갔다.

창을 들고 막아서는자의 몸을 베고 사사히꼬를 싸고도는자의 가슴을 일직선으로 찔렀다.

쓰러진자의 몸에서 검을 빼내는 찰나 머리우에서 휘익- 죽음의 휘파람소리가 들리며 사사히꼬의 장검이 곧장 떨어졌다.

위급한 순간 시마가 치희의 몸을 덮치며 대신 칼을 받았다.

치희가 몸을 일으켜 뒤돌아보니 등에 칼을 맞은 시마가 털썩 무릎을 끓으며 천천히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치희의 눈에서는 불길이 일었고 손에는 죽은 왜병의 검까지 쌍검이 잡혀있었다. 치희는 비호같은 동작으로 닥치는대로 치고 찌르고 베며 시마에게 접근해갔다. 마당에는 죽은 왜병들의 시체가 한벌 뒤덮이였다.

공포에 질린 왜병들이 우르르 물러가버리자 치희는 시마의 곁에 끓어앉았다.

《아저씨, 어서 눈을 뜨시오이다.》

치희의 부름에 간신히 눈을 뜬 시마는 괴롭게 딸꾹질을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치희야, 어서… 떠나거라. 너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살아서 연우를 만나거들랑 전해다오. 지금까지 우리가 기대한것이 모두 헛된 꿈이였다고… 우리의 야망이나 이루자고 동족간에 싸운것이 결국은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말이다. 하늘의 순리를 거슬리면…》

시마는 가까스로 이 말만을 남기고는 맥없이 두눈을 감았다.

《아저씨, 아저씨의 마지막당부를 반드시 그이에게 전해주겠나이다.…》

치희는 떨리는 소리로 속삭이고는 량손에 검을 갈라쥐고 일어섰다.

드디여 치희는 자기가 가야 할 곳을 찾았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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