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회)


제 4 장


어진 사람 등용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재주따라 일맡김도 쉬운 일이 아니라네

(리익의 악부시 《서압록의 노래》중에서)


(1)


국상이 되여 처소로 돌아오는 을파소에게는 새롭게 깨달아지는것이 있었다.

아무리 식자일지라도 늙어죽을 때까지 배우고 부닥치는 정황이 다양해질수록 세상을 대하는 안목도 트인다더니 국상의 지위에 오른 오늘 국력에 대한 견해가 이전과 달라지는것이였다.

그전에는 국력이라고 할 때 자기 강토를 지키려 애쓰는 그 나라 백성들의 의지가 크게 관계된다고 생각하였었다.

물론 국력은 강토의 크기며 인구수와 군사의 수, 나라의 재력 등에도 달려있는것이다.

그러나 지금 누가 국력에 무엇이 또 관계되는가고 묻는다면 두말없이 임금과 그를 받드는 재상의 자질이라고 말할것이였다.

지나온 력사에서 그에 대한 대답을 얻을수 있는것이다.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세울수 있은것은 천제의 아들로서 남달리 뛰여난 재주와 수완이 있었기때문이고 또한 오이와 마리 같은 뛰여난 인재들이 그를 떠받들었기때문이였다.

대주류왕(고구려 4대임금)이 강토를 크게 넓히고 항우에게 몰리우던 류방에게 정예군을 보내여 전장의 형세를 역전시키고 한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한것도 마로, 추발소 같은 충신들이 있었기때문이였다.

류리명왕이 천하대국이라 뽐내던 신나라의 변방을 들이치고 크게 이길수 있은것도 을소와 같은 충의지사들이 정사를 도왔기때문이였다.

대무신왕에게는 을두지, 태조대왕에게는 고복장과 같은 명재상들이 있었다.

신대왕이 임금이 되여 외적을 쳐부실수 있은것도 명림답부가 있었기때문이였다.

고구려가 국력을 떨친 시절에는 례외없이 현명한 임금과 명재상이 있었다.

결국 국력이란 임금과 재상에게 달려있다는 답이 나오게 되는것이다.

이 진리에 오늘을 비추어보면 어떠한가. 임금이 선왕대때처럼 애를 썼건만 어이하여 국운이 기울었던가.

독불장군이란 말도,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구친다는 말도 있다.

바로 그것이다. 불우하게도 임금에게는 조정을 옳게 통솔할만 한 재상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임금이 국상의 자리를 십여년이나 비워두었겠는가.

충신은 열명이라도 적고 간신은 하나라도 많다 하였다. 란신이 무리를 이루면 반드시 저희들의 탐욕을 다스리려드는 사람이 설사 임금이라 할지라도 반기를 들기마련이다.

그래서 연나부가 들고일어났던것이 아닌가.

이것을 념두에 둘 때 국상의 일감이 명백하다. 강대한 고구려를 일떠세우려는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는자, 탐욕밖에 모르는자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이에 불응하는자는 결단코 목을 쳐야 한다.

조정을 충의지사들로 꾸린다면 강대국을 이루는것이 무엇이 어렵고 외적을 짓부시는것이 무엇이 어렵다 하겠는가.

명백히 할바를 깨닫고보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배심도 든든해졌다.

다음날 임금이 준 보검을 차고 대궐앞의 국상부에 들어선 을파소는 신선궁에 온듯 한 심정이였다.

고구려의 초대국상이 바로 여기에서 백살의 몸으로 조정을 쇄신했고 나라에 기여든 후한군을 전멸시킬 통쾌한 구상을 하였으니 신선궁이라면 이보다야 별스러울것인가.

명림답부가 돌아간 후 10여년세월 닫고있던 국상부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보니 그처럼 임금을 모시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벅찬 길을 가리라는 마음이 더더욱 굳어지는것이였다.

을파소는 이날 하루종일 여러 방들과 뜨락을 돌아보며 옛 국상의 체취를 더듬어보았다.

내 반드시 명재상을 본받아 고구려의 국상부가 어떤 곳인줄 천하가 알도록 할테다.…

이튿날 이른아침부터 국상으로서 을파소의 하루일과가 시작되였다.

이날 을파소는 국상부에 받아들인 관리들과 관속들을 한명한명 만나 그들의 재주에 알맞는 자리들을 맡겨주었다.

모든 관청들과 모든 관리들을 원만히 통솔할수 있자면 부하들이 절반나마 모자랐지만 당장은 그들을 데리고 첫 정사를 바로할 생각이였다.

이틀째 되는 날 을파소가 펼친 첫 정사로는 전국의 모든 관리들이 연나부것들의 세상에서 비법적으로 사취한 나라의 재산, 남의 재산을 한달기간안에 반환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한다는 공문서를 만들어 모든 관청들과 고을들에 시달한것이였다.

그날부터 국상부에서는 자정이 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시급히 나라에 기강을 세우자면 무엇보다도 국상부의 권능을 선대국상때처럼 세워야 했다.

하기에 을파소는 국상부에 관리등용을 보는 관청, 군사를 보는 관청, 법을 맡은 관청, 조세와 호구를 다루는 관청, 토목공사를 맡은 관청, 례의와 교육 그리고 대외관계를 맡은 관청은 말할것도 없고 중외대부부까지 종속시키는 엄격한 질서부터 세워놓았다.

또한 안류에게 령을 내려 중외대부부에서 모든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는 제도를 엄하게 세우도록 하였다.

아무리 옳은 법을 내리여도 그 법을 어기는자들을 내버려둔다면 언제 가도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울수 없었다.

그와 함께 국상부에 모든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는 부서를 새로 내왔다.

이렇게 해야 반역을 꾀하는자들을 미리 솎아낼수가 있었다.

을파소는 그 부서를 내부라고 불렀다.

이렇게 국상부의 지휘체계부터 세워놓은 을파소는 이어 인재등용을 강하게 밀고나갔다.

을파소는 먼저 안류와 고우루는 물론 변방에 가있는 우거와 연인에게도 사람을 보내 충의로운 인재들을 천거하게 하였다.

충신이 충신을 알아보고 인재가 인재를 가려본다고 이렇게 쓸만 한 사람들을 골라내는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례였다.

을파소자신도 농사군시절에 파악한 서압록고을의 구실아치 덕문을 추천하여 그를 그 고을 처려근지로 임명하였다.

을파소는 인재등용을 제 혼자의 생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임금을 찾아가 의논을 하였고 때로는 상주문을 올리고 어지를 받아 처리했다.

이렇게 조정에서 탐욕의 무리를 몰아내니 국상부의 령이 아래에 쭉쭉 내리먹을수 있었다.

지금은 나라의 리익을 자로 하여 모든것을 재여가며 내리는 을파소의 결심이자 임금의 결심이였다.

밤낮을 따로없이 애면글면 국사를 붙안고 씨름한 결과로 두달만에 바른 정사의 기틀을 마련해놓은 을파소는 보다 원만한 조정쇄신에 달라붙었다.

조정을 임금의 뜻대로 하나로 움직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면 인재등용을 보다 널리 해야 하였다.

을파소는 모든 관청들에서 제가 쓸 인재를 선발하여 공문서로 올리라는 령을 내렸다.

인재선발의 기준도 하달하였는데 반드시 경당을 나와야 하고 문무를 겸비했을뿐아니라 품성이 좋은 사람을 공문서에 올리게 하였다.

만일 인재가 아닌자를 추천하여 그가 후날 관리로서 무능하거나 죄를 짓는다면 그를 추천한 사람도 함께 벌을 받는다는것도 선포하였다.

인재선발명단은 먼저 중외대부부에서 출신과 경력으로부터 현재의 동향에 이르기까지 재확인한 다음 국상부로 보내게 하였다.

국상부에 올라온 추천명단은 을파소가 검토하고 중요관직에 등용할 사람은 직접 만나본 후 결심을 내리였다.

여기서도 법도를 세워놓았는바 평민출신은 주로 관속으로, 특출한 인재라면 지방관으로, 귀족출신은 벼슬아치로 배치하였다.

국상부로 끼식을 날라다먹으며 반년나마 애쓴 결과로 충의로운 인재들로 지방관까지 어지간히 꾸릴수 있었다.

그제서야 숨이 좀 나갔다.

바쁜 속에서도 을파소는 료동에 묻어둔 눈과 귀를 통하여 후한군의 움직임을 살피는것을 잠시도 잊지 않고있었다.

을파소의 몸은 날로 쇠약해져갔다.

젊은이도 아닌 늙은이가 그처럼 무리하게 일하고있으니 몸이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몸이 어찌나 쇠약해졌던지 정신이 어리어리해지고 다리가 다 휘친거렸다.

이를 헤아린 임금은 을파소에게 며칠간 일체 국사를 단념하고 처소에 돌아가 쉬라는 어지를 내리였다.

임금의 령은 곧 법이라 을파소는 하는수없이 국상부를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처소에 돌아와 방에 들기 바쁘게 묵은 피로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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