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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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 초평덕국수집마당으로는 느닷없이 싸리로 엮은 삽짝문을 밀어제끼며 박순기가 들어왔다. 그는 빈 물동이를 들고 부엌문밖에 나서시는 김정숙동지앞으로 곧장 걸어왔다.

그이께서 분이를 구원해준 다음부터는 사나운 눈찌도 거두고 건성으로나마 아는척도 하는 박순기였다. 그러나 항시적으로 감시의 눈초리만은 떼지 않고있었다. 더우기 그이께서 읍거리에 머물러계시거나 어제밤 초평덕으로 돌아오실 때까지도 진드기처럼 떨어지지 않고 뒤를 밟아왔던것이다. 그가 아침에 급작스럽게 나타난것은 결코 좋은 일이 못된다.

《주재소에 좀 가야겠소.》

《주재소엔 왜 가야 한다는거예요?》

박순기는 눈길을 떨구며 대답을 피했다. 부엌칸에서 임북술이 허둥지등 달려나와서는 그이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낯색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니, 우리 아지미가 무슨 죄를 졌다구…》

《조사할 일이 있수다.》

박순기는 임북술의 앞에서는 감히 떽떽거리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양보를 할 기색은 전혀 없었다.

임북술도 순순히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박순사, 이러지 마오, 분이를 생각해서라도…》

《어머니, 그만하세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빈 물동이를 임북술에게 넘겨주시였다. 박순기와 같은자한테서 선의를 바란다는것은 어리석은짓이였다.

《난 잘못한게 없으니 인차 돌아올거예요.》

그이께서는 침착하게 삽짝문밖으로 걸어나가시였다. 생각은 착잡하시였다. 박순기가 갑작스레 나타나 그이를 주재소로 끌어가려고 하는것은 매우 심상치 않은 조짐이였다. 무턱대고 이런짓을 할리는 없었다. 추석날 신정윤의 묘소로 가시였을 때부터 놈들이 특별한 주목을 돌리면서도 다치지 않은것은 아직 체포할만 한 구실이 마련되지 못했기때문일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예상을 뒤집어놓고있었다.

혹시 홍설란이한테서 무슨 단서를 쥐였을가? 아니면 주경포한테서?

원제민이한테서 또 어떤 일이 불거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허병팔이가 새 단서를 쥐였을수도 있는것이다.

만약 어느 고리에서든 놈들한테 뒤를 밟히워 로출될 형편이라면 그이께서는 즉시 몸을 피하시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였다. 박순기의 옆구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그놈을 방패삼아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가실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임북술의 생일놀이라는 명분으로 각지의 조직관계자들이 모여오게 되여있다는데 있었다. 벌써 용석이와 분이까지도 그때문에 련락을 떠났던것이다.

어떻게 결심을 세워야 할가?

한가지 이상한 일이 그이의 주의를 끌었다. 박순기란 놈이 수갑을 채우거나 포승을 지울 생각도 않고 그이보다 한발 앞서 태연히 걸어가고있었다. 그이께서 로출되였다면 결코 이런 관용이란 있을수 없었다.

좀더 정황을 살펴보자.

의문은 인차 풀리였다. 그이께서 박순기를 따라 걸어가시는데 마을의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경찰놈들에게 끌려나오고있었다. 주재소의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박순기는 그이를 마당에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돌담장으로 둘러싸인 주재소의 앞마당에는 벌써 여러 사람들이 끌려와있었다.

우리의 일때문은 아닌것 같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지으시였다.

주재소의 마당으로는 계속 새라새로운 사람들이 끌려들어왔으며 하나하나 안으로 들어가 문초를 받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얼마 안되고 대부분이 수전공사장에서 일하는 젊은 인부들이였다. 주재소의 크지 않은 건물에는 이 많은 사람들을 다 가두어둘데가 없어서 앞마당을 류치장처럼 써먹는셈이였다.

주재소안에서는 방들마다 경찰놈들이 사람들을 문초하느라 야단법석이였다. 군에서도 여러놈들이 쓸어내려온것 같았다.

호통소리, 매질소리, 비명소리 …

마당의 여기저기 몰켜서있거나 퍼더앉아있는 사람들도 모두 이 뜻하지 않은 소동의 실상을 파악하느라 쑤군거리고있었다.

《별일이거던. 혹시 초평덕주재소것들이 어디 가서 떼죽음을 당한게 아닐가?》

《글쎄말이야. 군경찰서놈들까지 쓸어와 설개는걸 봐선 큰일이 생긴것 같기두 한데…》

《또 작년 초겨울처럼 사람들을 무리로 감옥에 끌어가는 변이 터지지 않겠는지 모르겠거던.》

모두들 나름대로 벌어진 사태를 점치고있었다.

어쨌든 놈들의 살기띤 움직임으로 보아 지난 밤에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것만은 틀림없었다. 이미 큰 재난을 입은 이 풍산지구에 놈들의 새로운 검거선풍이 불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이 크시였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번져간다면 이미 소집하기로 한 조직관계자들의 모임도 엄중한 난관에 부닥치게 될것이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순경 하나가 그이를 불러들였다.

책상 하나에 쪽걸상 두개가 마주하고있는 주재소안의 안침진 방에서 박순기가 그이를 맞이하였다.

《거기 앉으시오.》

그이께서는 묵묵히 책상의 맞은켠에 놓여있는 쪽걸상으로 걸어가 앉으시였다.

《몇가지 조사를 할게 있어서 불렀소.》

박순기는 펜으로 먹줍을 묻히였다. 심문내용을 기록할 소임까지 맡은 모양이였다.

《이름부터 말하오.》

《순옥이라구 해요, 안순옥.》

《나이는?…》

《스물다섯이예요.》

《고향은 어디요?》

《북청 솔골이예요.》

솔골은 임북술의 고향이였다. 그리고 안순옥이도 임북술의 이웃집 소녀였다.

임북술은 그전날 늘 그 애를 업고 다니였다고 한다. 지금은 솔골이란 동네도 없고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도 없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임북술의 피눈물나는 과거사를 들으시고 자신을 솔골태생으로 위장하리라 마음먹으시였다. 경찰의 신원확인이 있는 경우 얼마간은 안전할것이라 타산하셨던것이다. 임북술이와도 그렇게 약속되여있었다.

《고향엔 누가 있소?》

《아무도 없어요. 내가 어렸을 때 옘병이 돌면서 솔골사람들은 거의다 잘못됐어요. 살아남은 사람이 겨우 일곱이구 솔골동네도 다 없어지고말았어요.》

《남편은 어떤 사람이요?》

《없어요. 3년전에 부전강발전소공사장에서 그만…》

《흠, 그렇다.》

박순기는 그이의 대답들을 마디마디 다 기록해두면서도 믿지 않는다는듯 코웃음을 쳤다.

《좋소, 이제부턴 어제밤에 어디서 무얼했는가를 말해보오.》

어제밤의 행적에 대한 박순기의 질문은 집요하고 깐깐했다. 그이께서는 이른아침에 벌려놓은 경찰놈들의 소동이 바로 어제밤에 있은 어떤 사건과 관련되여있음을 간파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어제밤 임북술과 함께 국수집에서 보낸 사실을 그대로 대답해주시였다. 무엇을 숨길 필요도 없었으며 숨긴다면 도리여 더 큰 의심을 받을수 있었다.

박순기는 책상옆에 따로 놓여있는 종이장을 들고 깐깐히 훑어보았다.

《아주머니의 진술은 어제밤에 있은 일에 대해서만은 아주 정확하구만. 하나도 틀리는데가 없구…》

그이에 대해서는 벌써 구체적인 조사를 했다는 소리였다.

《헌데 그전 일에 대한 진술을 가또순사부장님이 믿겠는지 모르겠소.》

《…》

《아주머니에 대한 조사는 순사부장님이 직접 하게 돼있었소. 그런데 사정이 생겨 내가 대신하게 됐소. 때문에 난 순사부장님앞에서 이 조사를 책임져야 하오. 그래서 다시한번 묻겠는데 방금 한 대답들이 다 사실과 맞소? 꾸며낸것이 없는가 말이요.》

《난 사실대로 말했어요.》

《그렇다면 좋구. 헌데 그 대답들에 모순점과 의문이 적지 않소. 학교공부도 별로 하지 못했다는 아주머닌 어떤 질문에도 그시그시 아귀가 딱 맞는 대답들만 하는데 너무나 사리가 정연하고 세련되였거던. 초평덕에 와서 며칠 안된 사이 아주머니의 모든 언행이 다 그렇소. 순사부장도 그래서 아주머니한테 더 관심을 두는것 같은데… 둘째로, 아주머니의 신원은 다 그럴듯한데 상당한 품을 들이지 않구선 도무지 확인할수 없게 돼있소. 이것 역시 큰 의문점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박순기란 놈을 갓 경찰복을 입은 풋내기라고 소홀히 대해서는 안된다는것을 깨달으시였다. 박순기의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미리 짜놓은것처럼 지나치게 빈틈없었다. 시골마을에서 태여나 어릴적에 고아가 되여 남의 손에서 자라난 촌녀자의 어리숙한 표상이 안겨오게 대답을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지 모른다.

작년 도천리공작때도 그랬다. 부녀회원들의 모임장소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정안군》중대장과의 대결에서 그이께서는 마디마디 그놈의 론거를 꺾어버리는데만 정신을 쏟으시였다. 많은 부녀회원들이 금지품인 백로지퉁구리까지 수색해냈는데도 번번히 말문이 막힌 《정안군》중대장은 바로 거기서 더 의심을 품고 그이를 체포해갔었다. 좀 빌붙는척 하시였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이께서는 그런 처세술은 쓰고싶지 않으시였다.

《말뜻을 잘 모르겠군요.》

그이께서 말씀을 떼시였다.

《공부를 못한 녀자라구 묻는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이야 왜 못하겠어요. 그리고 신원을 알아본다는것도 그렇지 거기에 뭐가 어려운게 있는지…》

《아, 그만하기요.》

박순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돌아가도 되겠소. 그러나 순사부장님이 다시 호출할수도 있다는것만은 알아두는게 좋을것 같소. 참, 경포군은 요즘 뭘하오?》

《지금은 고향마을에 가계셔요.》

그이께서는 이 불의적인 질문도 박순기가 사전에 미리 준비해두었던것임을 어렵지 않게 간파하시였다.

《래일이 이모님 생신날이니까 인차 오실거예요.》

《이모의 생신날?…》

박순기는 미심쩍은 눈길로 그이를 바라보더니 다시금 순사부장이 부를수 있다는것을 곱씹어 말했다.

《그리고 우리 분이를 구원해준데 대해서는 감사히 여기며 인차 보상도 하겠소.》

《무엇때문에 이런 문초를 하는가요?》

《그건 말하게 돼있지 않소.》

박순기는 손짓으로 나들문을 가리켰다.

주재소근처에서 용석이가 기다리고있었다. 벌써 황수원에 다녀와서는 몹시 걱정하고있었던 모양이다.

《난 무슨 변이 나는줄 알았어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구나.》

가까이 다가선 용석이가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어제밤에 주재소의 총이 세자루나 없어졌대요, 쥐도새도 모르게… 그래서 군경찰서놈들까지 내려와 발칵 뒤집으며 소동을 피우는중이예요.》

경찰놈들은 아직까지 범인은 붙잡지 못했다고 했다. 밤에 세찬 비가 내린데다 열려진 문안으로 비물이 가득 쓸어들어와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렸다는것이다. 군에서 왔던 경찰놈들은 수전공사장의 죄없는 인부들을 여러명 체포하여 자동차에 싣고 가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일부 경찰놈들은 그냥 남아서 수사를 계속한다는것이다. 또한 이번 사건으로 가또는 순사로 강직되고 어제밤 아래마을의 잔치집에 가서 공짜술을 마시느라 주재소를 비워놓은 당직순사 야마다란 놈은 경찰복을 벗기웠노라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제서야 오늘 벌어진 소동의 내막을 파악하실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총을 꺼내갔을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된 습격같았다. 그들이 무사히 몸을 감춘것은 다행스러웠으나 대신 경찰놈들의 시끄러운 조사놀음으로 이제 소집될 비밀모임이 한층 더 어려워지리라는 생각에 그이께서는 긴장해지시였다.

그리고 날이 저물녘까지 어떻게 하겠는가를 두고 고심하시던중 예정대로 일을 그냥 내밀것을 결심하시였다. 아무리 생각해보셔야 인제는 물러설 길이 없었던것이다.

임북술이 그이한테로 다가와서는 가만히 귀띔해주었다.

《분이가 우물가에서 기다린다니…》

《분이가요?》

그이께서는 불길한 예감이 드시였다. 새벽일찍 련두평쪽으로 떠난것은 그이께서도 잘 아시는 일이다. 분이가 무사히 통신쪽지를 전하고 돌아오자면 래일 오후쯤에나 와닿을수 있으리라 예견하고계시였다. 그런데 백수십리길을 다녀와야 할 분이가 벌써 우물가에 나타나 그이를 기다리고있다니 불안스러웠다.

어째서 되돌아왔을가? 내가 분이를 잘못 보낸것일가?

그런데 우물가에서 만나보신 분이의 말은 더욱 그이를 놀래우시였다.

《언니, 무사히 다녀왔어요.》

《아니, 벌써?》

《오늘은 어찌나 발이 잘 맞는지 갈 때 올 때 다 차를 탔어요. 자동차랑 마차랑…》

그러면서 심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언니, 우리 집에 가자요. 꼭 할말이 있어요.》

《할말?…》

《오빠는 군에 가고 없어요.》

분이의 목소리는 소심하게 울리였다.

《오늘 오빠가 언니를 붙잡아가서 문초랑 했다는 소린 다 들었어요.》

《그 일때문에 분이가 딱해할건 없어요. 집에 가자요.》

그이께서는 내키지 않으시였으나 분이의 마음에 그늘을 던져주는것 같아 선뜻 걸음을 떼시였다.

분이네 집에서 그이를 기다리는것은 음식그릇들을 가득 챙겨놓은 두리기상이였다.

상우에는 저가락으로 집으려다가 놓쳐버리면 후치령너머로까지 미끄러져간다는 귀밀떡도 있고 당콩알이 드문드문 박혀있는 감자막갈이떡도 있었으며 금방 육수물을 부어놓은 농마국수도 있었다.

《어서 와 앉으라구.》

요사이 별로 허리가 더 꼬부라진듯 한 분이 할머니가 전에없이 살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죽었던 우리 분이를 되살려놓은 임자한테 언제부터 인사를 차린다는게 오늘까지 미루어왔다네.》

《할머니두, 그게 무슨 큰일이라구 이렇게까지…》

《변변치 못한대루 사양하진 말게. 실은 임자가 순사네 집이라구 이런 자리에 앉지 않을것 같아서 생각은 있어두 엄두를 못 내다가 데려온거라네.》

《할머니, 고맙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 뜻하지 않은 대접에 당황했으나 흔연히 할머니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가지시였다. 무척 송구하기는 했으나 모처럼 이런 자리를 마련해놓은 할머니와 분이의 성의를 마다할수 없으시였다.

그이께서 상머리에 마주앉으시자 할머니가 푸념처럼 말했다.

《임자도 모르진 않겠네만 우리 집이 편안치는 못하다네. 며늘애기란건 문턱에 발을 들여놓은지 한해도 못살아보고 달아나버렸지, 분인 큰상도 받아보지 못한채 소박을 당해서 저 꼴이니 사람 사는 집같지 않다네. 그래도 임자가 우리 분이의 목숨을 살려주고 또 사람대접을 해주니 이 늙은인 큰절을 올리고싶네.》

《할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그럼 분이하고 같이 음식들을 들어주게.》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는 부엌간으로 나갔다. 농마를 낼 감자를 갈겠다는것이다.

분이가 할머니를 따라 일어서려는 그이의 손을 끄당기며 속살거렸다. 할머니는 그이께서 불편해하실가봐 우정 자리를 피해준다는것이다.

《됐어요. 언니, 할말이 있다질 않았어요?》

분이는 저가락으로 미끌거리는 귀밀떡을 조심히 꿰여 그이께 드리였다. 어딘가 몹시 흥분되여 거동도 이전과 퍽 달라졌다.

《그런데 언닌 왜 날 련두평으로 보냈어요?》

그는 오늘 내내 그이를 매우 섭섭하게 여기였노라고 했다.

《언니야 내 마음을 잘 알지 않아요.》

분이는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자기를 련두평의 주경포한테로 보낸 일이 가슴에 단단히 옭맺힌듯 했다.

그이께서 분이를 일부러 련두평 수전공사장으로 보내신것은 사실이였다. 주경포는 말할나위도 없고 분이도 역시 나라를 찾는 성전에 나서겠다는 각오를 가진 처녀이다. 그런 두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터무니없는 리유로 잔등을 돌려대고있는것이 그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이께서는 두사람사이에 화해의 싹을 틔워주기 위해 통신련락이라는 다리를 놓아주시고 상봉의 기회를 마련해주시였다. 그런데 분이는 도리여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고있는 모양이였다.

《분인 정말 그를 용서할수 없어요?》

《용서구뭐구 할게 있어요? 인제는 남남인데…》

《내 알기엔 저쪽에서 괜히 파혼을 한다고 소리는 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것 같아요. 일이 이렇게 된걸 두고 몹시 속을 태우는것 같기도 하고…》

《흥, 백번을 후회한들 인제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언제나 부드럽고 온순한 성미인 분이는 그답지 않게 격한 감정을 마구 터치였다.

《그 사람은 자기밖에 몰라요, 남의 사정은 알려고도 하지 않구… 내가 자기와 오빠 둘중 누구를 따르겠는지를 몰라서가 아니예요. 하지만 순사의 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되면 자기 체면이 깎인다는데 겁냈던거예요. 난 인젠 일없어요. 그전날의 나약하던 분이는 이미 죽었어요. 언니가 목숨을 건져준 분이는 그전날의 분이가 아니예요. 난 다신 어리석게 죽으려고도 하지 않고 누가 뭐라든 떳떳이 고개를 들고 내가 갈길을 가겠어요.》

사람이란 불행속에서 더 빨리 성숙되고 완성되는 법이다. 첫사랑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여 인생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분이는 괴로움과 절망의 언덕을 넘어 인제는 자기의 존엄을 지킬줄 아는 사람으로 변한것이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분이와 주경포의 결렬을 바라지 않으시였다. 그것은 혁명전사들의 세계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비정상적이며 불행한 일이였다. 하기에 그이께서는 그들 두사람의 일을 방임해둘수 없으시였다.

《분이의 말을 듣고보니 그 사람은 꽤나 마음고생을 해야 할것 같군요.》

《나하군 상관없는 일이예요.》

《문조리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분이는 의문어린 두눈을 치뜨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이께서는 문조리의 주경포네 집에서 벌어지고있는 소식을 전해주시였다.

《분이를 무작정 가마에 태워가지고 가겠다는데…》

《설마…》

분이도 문조리의 소식에 크게 놀란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는듯 하더니 고개를 쳐들었다.

《언니, 우리한텐 그런 일에 마음을 쓸 형편이 못돼요. 당장 여길 떠나야 해요. 난 아까 오빠를 만났는데 언니를 어느 시각에 가또가 붙잡아갈지 모른다는거예요.》

지금 가또는 순사로 강직되였으나 주재소의 수석자리를 그냥 타고앉아있는데 몇갑절 더 포악해졌다고 한다. 박순기가 그이를 데려다 문초를 한것도 다 가또의 명령에 따르는 일이였다는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중으로 떠나자는거예요. 난 차비를 다 해놓았어요.》

《차비라니?…》

《장군님부대로 갈 차비지요. 난 총까지 구해놨어요, 세자루씩이나…》

그이께서는 수저를 상우에 떨구다싶이 하시였다. 총을 구해놓았다는 분이의 어망처망한 소리에 가슴이 섬찟해나시였다, 그것도 세자루씩이나…

《분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어요?》

《내가 주재소에 들어가 총을 꺼내왔단 말이예요.》

《누구하고 같이?》

《누구긴 누구겠어요? 나 혼자 했어요.》

분이는 그런 일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할수 있느냐고 했다.

롱담도 아니고 잠꼬대도 아닌것 같았다.

그이께서는 분이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혹시 분이도 놈들의 모략에 걸려든것이 아닐가?

침착해지려고 애쓰시였으나 마음속으로 불안은 시시각각 더해만 지시였다.

이것이 놈들의 모략에 걸려든 일이라면…

《언니, 왜 그래요?》

《좀 자세히 말해주겠어요?》

분이는 흥분어린 두눈을 반짝이며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제밤은 날씨가 흐려서 별빛 한점 찾아볼수 없었다. 바람도 잠잠했다. 분명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올것만 같았다.

분이는 손에 노루발장도리를 꼭 틀어잡은채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둠속을 더듬어 주재소로 가고있었다. 그는 이 시각 주재소가 비여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밤경비인 야마다순사가 아래마을 방실이네 잔치집에 가있다는것도 알고있었다. 공짜술이라면 양재물도 마신다는 야마다는 녹초가 되기 전엔 절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법이 없으니 자정때까지는 주재소를 비워놓기마련이다.

분이는 주재소에 몰래 들어가 놈들의 총을 꺼내올 작정이였다. 오빠와 마지막으로 조용히 마음속 이야기나 나누어보려고 주재소로 찾아갔다가 우연히 무기고와 총을 띄여본 순간부터 분이는 한시도 총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었다.

총만 있으면!

자나깨나 김일성장군님부대의 녀대원이 될 꿈만 꾸고있는 분이였다.

총만 있으면 장군님부대로 찾아가도 얼마나 떳떳하겠는가. 더구나 혁명군부대에는 제 손으로 총을 구해가지고 온 녀대원들도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빨래방치로 경찰놈을 요정내고 총을 빼앗아냈다는 녀인, 술로 만취시켜놓은 놈한테서 총을 빼앗아냈다는 녀인… 그들이 지금은 모두 어엿한 혁명군의 녀대원들로 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분이라고 왜 총을 구하지 못한단 말인가. 안타까운것은 분이가 담이 크지 못한것이였다. 걸핏하면 자그마한 일에도 토끼처럼 깜짝 놀래기가 일쑤였다. 그렇다고 총에 대한 욕망을 단념할수 없었다. 어떻게 하든 총을 구해야 했다. 어릴적부터 분이는 무슨 일이나 꼭 하겠다고 결심한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기어이 해내고야마는 강단을 가지고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짜내며 모색하던 끝에 분이는 한밤중에 기회를 타서 주재소에 들어가 몰래 총을 꺼내올 궁리를 해내게 되였다. 빨래방망이같은것을 들고 경찰놈을 때려눕힐만 한 담은 못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결심이 서자 그는 남모르게 장도리로 문고리를 뽑아내는 련습까지 부지런히 하면서 때를 기다려왔다. 뜻밖에도 기회는 너무 빨리 찾아왔다.

술미치광이 왜놈순사가 당직을 서는 날 방실이가 잔치를 하는것이다.

당직경찰놈이 벌써 잔치집에 가앉아있다는것은 이미 확인되였다. 만일 오늘 밤같은 기회를 놓치면 일생의 한이 될것이다.

분이는 입술을 감쳐물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갑자기 가슴이 후두둑 떨리였다. 눈앞에는 주재소의 거뭇한 형체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주재소의 현관에 걸려있던 남포등도 꺼진채로 있었다. 잠시 서서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했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귀에도 들리는것만 같았다.

이러다간 안되겠구나.

분이는 몇번이나 숨을 크게 들이긋고는 주재소의 뒤쪽으로 돌담장을 끼고 돌아갔다. 정문으로 들어가자니 아무래도 용기가 모자랐기때문이다. 뒤켠의 돌담장도 가슴노리만큼 높았다. 그래도 발끝으로 딛고 설만 한 걸턱들이 많아서 돌담장을 타고넘어가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어 온몸이 귀가 되고 눈이 되여 주변동정을 살피며 건물벽을 따라 한발두발 조심스레 걸어나갔다. 벽모서리를 돌아서자 인차 정문의 현관이 나타났다.

토방우의 넙적한 돌멩이를 겨우 찾아냈다. 그러나 그밑에는 열쇠가 없었다. 당직경관이 그대로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간 모양이였다.

실망은 컸으나 다행히 손에는 장도리가 있었다.

나들문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매달려있었다. 나들문고리와 문틀에 박혀있는 쇠고리를 한데 모아들이고있는 자물쇠였다. 분이는 문틀에 박혀있는 쇠고리를 만져보았다. 바로 그 쇠고리를 장도리로 뽑아내야 주재소로 들어가는 나들문을 열수 있었다. 그는 쇠고리에 노루발장도리를 든든히 걸어놓고는 숨을 고르었다. 산언덕을 바삐 치달아오른것처럼 어찌나 숨이 찬지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감때문이였다. 너 죽고 나 죽고 할판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덤비지 말아야 한다.

주위를 돌아본 그는 힘을 모아 끙! 내리눌렀다.

뿌지직! 벼락을 치는것 같은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너무나도 놀란 분이는 아주 넋이 나가 화닥닥 뒤로 물러섰다. 쇠고리가 뽑혀지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했던지 잠자던 동네의 집들에서 놀라서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다보는것만 같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맴돌이쳤으나 온몸이 땅에 딱 들어붙은것처럼 꼼짝 움직일수 없었다. 대신 가슴은 들뛰다못해 금시 터져나갈것만 같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지내느라니 주위는 다시금 고요한 정적속에 잠겼다. 마음이 얼마간 진정되자 차츰 공포가 물러가면서 용기가 용솟음쳤다.

얼마후 분이는 가련한 몰골을 하고있는 자신을 비웃으며 쇠고리를 만져보았다. 쇠고리는 이미 절반나마 뽑혀져있었다. 이번에는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장도리에 물린 쇠고리가 쑥 빠져나왔다.

나들문을 살며시 잡아당기니 소리없이 열리였다. 성공한셈이다.

분이는 희열에 몸을 떨며 몇발자국 더듬어나갔다. 또 하나의 문이 손에 닿았다. 무기고의 문이였다. 예상했던대로 무기고의 문은 출입문보다 훨씬 수월하게 떨어져나갔다. 무기고안을 손더듬으로 더듬다가 보총이 손에 잡히자 분이는 가슴이 뭉클했다. 눈물이 쿡 솟아났다.

총! 분이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수 있는 총이였다. 바로 그래서 분이는 필사의 각오를 가지고 총을 얻기 위한 모험의 길에 자기를 서슴없이 내댄것이다. 손에 총을 넣고보니 인제는 죽어도 한이 없을것 같았다.

언니, 나도 총을 구했어요! 총을!…

무기고에는 보총이 두자루나 더 있었다. 그것들마저 가지고 가자는 욕심이 굴뚝같이 생겨났다. 총을 세자루씩이나 가져가면 언니가 무척 대견해하실것이다.

분이는 세자루의 총을 다 걷어안았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오면서도 장도리만은 잊지 않고 꽉 틀어쥐고있었다. 절대로 어떤 단서를 잡힐 물건을 남겨두어서는 안된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주재소에서 나왔으며 또 어떻게 돌담장을 넘어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총은 어디에 건사했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분이의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도 믿을수 없으시였다. 헛간에 건사했다는 분이의 대답은 그이를 더 아연케 했다.

《누가 본 사람이 없어요?》

《할머니밖에…》

분이가 총들을 걷어안고 경황없이 돌아왔을 때 사립문가에서 할머니가 질겁할 정도로 깜짝 놀라더니 본능적인 보호의식이 작용했는지 사연을 물을새도 없이 헛간으로 끌어들이더라는것이다.

《어디서 난거냐고 묻지도 않았어요?》

《물었어요. 그래서 난 다 말했어요, 장군님을 찾아가겠다구…》

분이의 그 말에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그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하더라는것이다. 모름지기 할머니는 앞날이 암담해만 보이던 손녀의 놀라운 결단을 막을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은 감자엿도 달이구 귀밀쌀로 미시가루도 만들겠다고 저렇게 서두르는거예요.》

《분이도 참…》

그이께서는 분이의 소행을 장하다고 칭찬해주기도 난처하시였다.

장군님을 찾아가겠노라며 주재소의 총까지 꺼내온 결단은 대견하기 그지없었으나 대신 너무나 단순하고 무경각한것이 몹시 걱정되시였다. 더구나 분이는 비밀관념에 대해서는 주의도 돌리는것 같지 않았다. 가또나 박순기라면 분이의 이런 약점을 얼마든지 악용할수 있는것이다.

만약 그 총이라는것들도 분이의 약점을 리용하여 던진 놈들의 미끼라면!…

또다시 가슴이 선뜩해지시였다.

《총들을 좀 보자요.》

분이는 인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이의 손을 잡고 헛간으로 들어가신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치한치 어둠속을 더듬어나가시였다.

장독뒤켠에 넝마같은것들이 쌓여있었는데 그것들을 헤치자 기름이 번질번질한 보총 세자루가 켜든 성냥불빛에 드러났다.

이렇게 허술하게 총을 건사하고도 태평스레 보낸 분이를 배포유하다고 해야 할지 철없이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말이 나가지 않아 허구픈 웃음을 지으시였다. 하나하나 격발기를 당겨보니 보총마다 탄창에는 탄알들도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그이께서는 안도의 숨을 지으시였다. 놈들이 미끼로 던진것이라면 총탄까지 만장탄하여 보낼리가 없는것이다. 그러나 모략은 아니라고 해도 이것은 그이의 공작에 새로운 장애를 조성해놓은것이나 다름없었다. 놈들은 무기도난사건을 그이와 련결시켜 생각할것이며 더욱 쌍심지를 켜고 그이의 일거일동을 지켜볼것이다. 비밀모임소집도 상당히 어렵게 된셈이다.

그이께서는 분이와 함께 봇나무껍질로 마대에 넣은 총들을 꼼꼼히 싸서 묶은 다음 뒤뜰안의 터밭에 묻어놓으시였다.

《분이.》

일을 다 끝내고 다시 분이와 조용히 마주앉으신 김정숙동지께서는 부드럽기는 하지만 매우 준절한 어조로 분이를 책망하시였다.

《총을 가지고 장군님부대로 찾아가겠다는 분이의 마음은 리해돼요. 그렇다고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한다면 큰 화를 불러올수 있는거예요. 오늘도 분이가 저질러놓은 일때문에 수전공사장의 수많은 인부들이 경찰놈들한테 시달림을 받았구 또 여러명이나 군경찰서로 끌려갔어요. 그들이 어떤 악형을 당하겠는지 생각해봤어요?》

《아니, 그런 일은…》

분이의 낯색이 대뜸 하얗게 질렸다. 자기가 단행한 《장한》 일이 그런 후과를 가져올줄은 짐작조차 못한것 같았다.

《그럼 인젠 어떻게 해야 해요?》

《당분간은 바깥출입도 삼가하고 조용히 지켜봐야겠어요. 나도 뒤일을 예측할수 없으니 극력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요.》

분이가 총을 탈취해온 일로 하여 무엇보다 예정되여있는 비밀모임이 커다란 장애에 부닥치게 되였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멈춰세울수도 없게 되였다. 벌써 임북술의 생일놀이의 명목으로 비밀모임참가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것이다. 그이의 생각은 점점 무거워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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