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8


해빛을 받아 기름처럼 번들거리며 흐르는 청천강 물줄기가 한눈에 보이는 제방뚝의 버드나무아래에서 두 처녀가 누군가를 기다리고있었다.

송화와 정향이였다.

공장에 온 첫날 통성을 한 두 처녀는 인차 자매처럼 친숙해졌다.

아침에 송화는 창근으로부터 정향을 데리고 낮 12시까지 여기에 와있으라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가고 물으니 만나면 알게 될거라며 전화를 끊었다.

싱겁기 짝이 없는 전화였지만 어쩔수 없이 창근이 하라는대로 하는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때문일가 하는 의문을 풀어보려고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녀인의 머리타래처럼 실실이 가지를 드리운 아름드리 버드나무그늘밑에는 버섯모양으로 땅속에 뿌리박은 두개의 돌이 의자처럼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뒤늦게야 그것을 본 정향이가 신기해서 입을 열었다.

《언니, 이 돌은 원래부터 있던걸가요? 아니면 누가 길가던 사람들이 쉬고가라고 일부러 박아놓은걸가요?》

《글쎄…》

말끝을 여물구지 못하는 송화의 얼굴은 달아오르고 마음이 야릇해졌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돌이여서 정향이에게 솔직히 터놓기가 쑥스러웠다.

인민학교(당시)와 중학교시절 송화와 창근은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멀지 않은 여기 방천에 나와 공부를 하였다.

수학공식과 외국어단어도 함께 외웠고 새로 나온 책들을 읽은 독후감도 나누었다.

그래서인지 여기는 그들에게 정이 들대로 든 곳이였다.

군대에서 제대되여 왔을 때에도 송화는 창근이와 여기에서 감격적인 회포를 나누었다.

《어디 앉을 자리가 없어요?》

무심히 던진 그 말에 앉을 자리를 찾듯 주위를 두릿거리던 창근은 그만 당황해하였다.

철없던 시절에는 아무데라도 퍼더버리고앉았지만 지금은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해하는 창근을 보는 송화는 공연한 소리를 했다는 후회를 하였다.

며칠후 이 장소에서 창근을 만났을 때 송화는 깜짝 놀랐다.

새로 생긴 두개의 돌의자를 본것이다.

웬간한 힘장사도 다루기 힘든 큰돌을 땅속에 박아넣은것이 자연미가 나면서도 보기에도 멋스러웠다.

《어마나! 이건 뭐예요?》

《하늘에서 떨어졌나?》

하늘의 조화이기라도 한듯 능청을 부리는 창근을 보는 송화는 며칠전의 일을 잊지 않고 이렇게 자기를 위해 품을 들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찌르르해났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요?》

《송화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창근의 얼굴에 어줍은 웃음이 어려있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어느것이 내 자리예요?》

《송화마음에 드는것을 골라잡으라구.》

《아니, 동무가 정해주세요.》

이돌 저돌 살피던 창근은 웃면이 반듯한것을 짚었다.

《이게 좋겠구만.》

창근이가 정해준 돌우에 앉은 송화가 상긋이 웃었다.

《이 자린 영원히 내 자리예요. 동무도 앉으라요.》

그런데 웬일인지 창근은 선뜻 앉지 못하고 주밋거렸다.

《아니, 왜 그래요?》

《응, 그저…》

주저주저하다가 송화의 곁에 앉은 창근의 얼굴이 붉어졌다.

《좋구만!》

창근과 수년만에 어깨를 나란히 한 송화의 마음은 이상하게 두근거리였다.

철없던 시절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송화는 세월의 흐름이 자기들이 그전처럼 허물없이 대할수 없는 나이에 이르게 했음을 깨닫고 저도모르게 부자연스러워졌다.

불쑥 오늘부터 생활을 새롭게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그 생활은 소꿉시절 각시놀이를 하던것도 아니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교정을 나설 때 무지개같은 희망을 론하던것도 아니였다.

그것은 목전에 부닥친 사랑과 결혼, 가정이라는 일생문제로서 쥐여짜면 앞날의 행복에 대한 중대사였다.

하다면 창근과 일생을 함께 하면 행복할수 있을가.

본인을 앞에 놓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것은 좀 미안스러운 일이지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닌 송화로서는 그 신성한 권리를 누구에게도 빼앗길수 없기에 어차피 창근을 사랑과 결혼이라는 저울우에 올려놓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어릴 때 아버지들이 송화와 창근의 앞날에 대하여 길을 그어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들의 의사를 무시한것이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전면부정할수 없었고 또 어째서인지 창근이가 싫지도 않았다. 자식이 부모의 뜻을 따르는것은 인륜이 아닌가.

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를수는 없는것이다.

그사이 뼈대가 굵어지고 미남자로 번져진 창근이가 그전처럼 열정적이고 순진한 인간이라면 구태여 앞날에 대하여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허나 알겠는가. 인간이란 성장과정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한다는데…

《송화, 난 오늘 송화와 중요한 문제를 토론하고싶어.》 하는 창근의 조심스러운 소리에 상념에서 깨여난 송화가 얼굴을 쳐들었다.

《뭘 토론한단 말이예요?》

《응, 그건…》

다음말을 떼기가 두려운듯 주춤거리며 송화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창근의 두눈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리였다.

창근의 거친 숨소리에 송화의 몸이 부서질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가늠한 송화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겁질린 소리를 하였다.

《저, 꼭 오늘 그 소릴 해야 해요? 갑자기…》

그 순간 창근의 두손이 송화의 손을 와락 덮쳤다.

《나하구 일생을 함께 하지?》

창근에게 두손을 맡긴 송화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기습》 이여서 숨이 꺽 막히였다.

《대답해, 찬성한다고.…》

얼굴이 활딱 붉어진 송화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아이, 새빠지게 그건 무슨 소리예요?》

《오, 그러니 찬성한다는거지? 글쎄 송화가 누구라구.》

슬며시 송화의 손을 놓는 창근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어리였다.

《저기 창근동지가 나타났어요.》

정향의 탄성에 생각에서 깨여난 송화가 휘우듬히 뻗어간 제방뚝쪽으로 눈길을 던지였다.

멀리서 량손에 무거운것을 든 창근이가 강가로 나가는 오리마냥 몸을 뛰뚝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향이가 급히 마주 걸어갔다.

그 자리에 그냥 서있기가 멋해진 송화도 어쩔수 없이 정향의 뒤를 쫓았다. 두 처녀와 마주선 창근이가 땀투성이가 된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

정향이가 눈치있게 창근의 량손에서 구럭지를 받아쥐며 놀란 소리를 했다.

《어마나, 이건 뭐예요?》

《응. 그건…》

송화가 제꺽 정향의 손에서 구럭지 한개를 넘겨받았다.

《도대체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아침부터 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거예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이며 목덜미에 즐펀한 땀을 씻어낸 창근이가 버드나무그늘로 향하며 벌씬거렸다.

《응, 오늘이 정향이 생일이야.》

《정향이 생일?》

어마지두 놀란 송화가 묻는듯 한 눈길로 정향을 쳐다보았다.

그보다 더 놀란것은 정향이였다.

《예? 내 생일?…》 하던 정향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내 생일은…》

《알아, 래일이라는걸… 하지만 난 오늘 정향이 생일을 쇠주고싶었어. 음… 그건 래일은 공장에서 생일을 쇠줄테니까.… 안 그래?》

시뜻해서 자기 주견을 세우는 창근을 놀란 눈길로 쳐다보던 송화가 감심해서 물었다.

《어떻게 정향이 생일을 다 알았어요?》

《응, 그건… 정향이가 공장에 오던 날 경비원에게 내보이는 시민증을 슬쩍 훔쳐보았지.》

창근의 진정에 정향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사한 마음에 목소리가 떨리였다.

《창근동지, 고마워요.》

《고맙긴, 자, 모두 출출하겠는데 상을 차리자구.》

송화가 구럭지에서 접혀져있는 흰종이를 꺼내 땅바닥에 펼쳐놓고 음식들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과일이며 빵이며 떡, 당과류, 단물 등 없는것이 없었다.

《송화와 정향인 의자에 앉으라구, 난 여기에 앉구…》

두 처녀를 돌의자에 앉힌 창근은 이번에는 구럭지에서 큼직한 《봄향기》 화장품곽을 꺼내 정향의 앞으로 내밀었다.

《자, 받아. 이건 송화가 마련한건데… 처녀들의 생일기념품은 화장품이 제일이라나.》

그 소리에 송화는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어마, 그건…

자기는 오늘의 이 자리가 정향을 위해 마련된걸 알지도 못하였는데 생일기념품을 마련했다는건 무슨 엉터리없는 소리인가.

아닌게아니라 처음 정향의 생일소리가 나왔을 때 그것을 알려주지 않은 창근이가 원망스럽고 빈손으로 정향이앞에 나선게 미안스러웠는데 이렇게 엉큼한 수로 내세워주니 다행스럽기도 하였다.

창근은 밉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는 송화에게 한쪽눈을 끔뻑해보이며 땅바닥에 퍼더버리고앉았다.

화장품을 받아쥔 정향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송화동지, 고마워요.》

공치사를 받은 송화가 급한 소리를 하였다.

《아니, 그러지 말아. 사실 그건…》

그때 창근이가 얼른 흰목을 뽑으며 송화를 추어올렸다.

《정향이, 송화가 괜찮지?》

《예.》

《그렇다는 의미에서 우리 축배잔을 들자구.》

날쌔게 마개를 딴 단물병을 고뿌마다 기울여 쏟은 창근이가 두 처녀에게 하나씩 쥐여주며 자기 고뿌를 높이 쳐들었다.

연분홍빛액체가 담긴 세개의 고뿌가 동시에 부딪쳤다.

《야, 정말 모두들 고마워요. 난 이제부터 친언니와 친오빠로 믿고 따를래요. 일없지요?》

정향은 고운 두눈에 눈물을 가득 채워가지고 울먹이였다.

《그럼, 내 진짜 친오빠가 되여줄게.》

저도 별스레 코허리가 매여난듯 창근이가 눈길을 떨구면서 돋구는 목청이였다.

송화가 분위기를 가셔내려는듯 우정 눈을 흘기며 한마디 했다.

《친오빠가 차려준 생일음식앞에서 우는 울보동생이 어디에 있니?》

그 소리에 창근이가 긍정을 했다.

《그러게 말이야, 친동생이라면 응당 기뻐해야지.》

모두가 즐겁게 단물고뿌를 비우고 음식들을 들었다.

정향은 오늘을 영원히 잊을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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