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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5일

평양시간


(제 12 회)


12


며칠째 사무실에 붙박혀 콤퓨터에 마주앉아있는 정향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여느때 같으면 식사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식당취사원아주머니들에게 미안하였는데 요즘은 때식때마다 특식을 사무실까지 날라다주어 더더욱 옹색하였다. 그러지 말라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겠다고 아부재기를 쳤지만 그렇게 하면 자기들은 지배인동지한테 처벌을 받는단다.

그리하여 어쩔수 없이 특별대우를 받게 되였다.

취사원아주머니들은 지배인의 지시를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지만 정향은 지배인이 준 과업을 집행하지 못하면 체면을 세울수가 없게 되였다.

정향이가 사무실에 《연금》된것은 며칠전이였다.

지배인이 찾는다기에 그의 방에 가니 중요한 과업을 준다면서 뽐프설계연구소에 가서 설계원들을 만나보라는것이였다.

영문을 모르고 설계연구소 부소장을 만나니 류체력학전문가가 왔다고 반가와하며 초고압으로 150메터이상의 높이에 물을 안전하게 쏘아올리자면 뽐프날개의 각도와 두께, 날개의 개수, 흡입과 배출의 량적관계, 뽐프본체의 두께 등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를 계산해달라는것이였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콤퓨터로 고양정뽐프모형을 빚고 특성모의시험과 해석을 하는 작업이였다.

두뇌의 모든 지식을 깡그리 짜내며 수십개의 모형을 빚어보았으나 확신할수 있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안타까왔다.

속이 타다못해 졸아드는것만 같았다.

자주 방에 찾아와 기웃거리는 지배인을 대할 때마다 정향은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졌고 초라하게 생각되였다.

즙이 빠진 풀대처럼 나른해진 심신에 기력을 모아 다시, 또다시 작업에 전심하였다.

고심참담하여 연구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접근한 답을 찾은것 같은데 그것이 그들을 만족시키겠는지…

어쨌든 그들과 만나 토론을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정향은 밖으로 나섰다. 오래간만에 해빛을 보니 눈이 시그러웠다. 연구소로 향하던 정향은 등뒤에서 누군가가 찾는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다. 사물거리는 눈을 비비고보니 저앞 정양소쪽에서 창근이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보는 정향의 얼굴에 반가움의 미소가 피여났다.

사무실에 《연금》되여있을 때 창근은 정향에게 후방사업을 한다면서 과일이며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가지고 몇번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정향은 진정이 넘치는 창근에게서 뜨거운 정을 느끼였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스러운것은 일부 사람들이 하는 창근에 대한 평가였다.

돈버는 재미에 공장일에는 몸을 적시기 싫어한다는…

그것때문에 요전날 청년동맹회의때 비판을 받았다던지.

도저히 믿을수 없는 소리여서 어느날 사무실에 온 송화에게 그게 사실이냐고 캐물었더니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이 사람들의 평가는 공정하다고 하였다.

부정할수 없는 사실임을 느낀 정향은 실망감을 금할수 없었다.

창근동지가 그런 인간이란 말인가. 섭섭하였다. 옥에 티라면 크게 흠이 아니지만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사회와 집단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명백히 그 인간의 결함으로 된다. 어떻게 하면 창근동지의 결함을 고쳐줄가.

몇번 기회를 마련하여 말을 해주고싶었는데 왜서인지 입이 열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꼭 한마디 할테야.

속다짐을 하는 정향의 앞으로 각자와 판자가 가득 실린 손달구지채를 잡은 창근이가 다가왔다.

《일을 다 끝냈어?》

《예.》

《그새 수고했구나. 저런, 그새 얼굴이 퍽 축간것 같구나. 그 곱던 얼굴이 살이 쑥 빠진게…》

진정이 넘치는 창근의 걱정에 정향은 마음이 뭉클했다.

《영양보충을 하자. 까짓거 한 보름 카로리식사를 하느라면 되겠지.》 하며 작업복뒤주머니를 뒤적거려 돈지갑을 꺼내든 창근은 몇장의 돈을 집어 정향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 이걸로 먹고싶은걸 사먹어.》

돈을 본 정향은 당황해졌다.

《어마나! 이건 뭐예요?》

《뭐긴 뭐야, 돈이지.》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요?》

《남자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되니? 받으라니까. 이건 부정한 돈이 아니니 마음놓아.》

정향은 애절한 눈길로 창근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창근동지의 성의는 고맙지만 받지 않겠어요.》

섭섭한듯 창근의 얼굴에 노여운 빛이 어리였다.

《왜 그래? 섭섭하게…》

두눈을 내리깐 정향이가 호ㅡ 하고 긴숨을 내그으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창근동지, 난 동지가 남들의 말밥에 오르는거 싫어요.》

《누가 날보고 뭐라고 했기에 그래?》 하는 창근의 목소리는 불만으로 가득찼다.

《사람들이 말하는데 동진…》

여기까지 말한 정향은 자기가 들은 말을 꺼내기가 서슴어졌다.

창근을 노엽힐가봐 두려웠던것이다.

그래도 할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그냥 맴돌았으나 왜서인지 더이상 입이 열어지지 않는다.

그때 창근이가 갑자기 손달구지를 와락 나꾸어채며 급한 소리를 하였다.

《정향이, 후에 만나자. 내 합숙에 갈게.…》 하더니 누구에게 쫓기듯 손달구지를 끌고 잰걸음을 옮기였다.

어리둥절해진 정향은 웬일일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정문을 통과하는 리대철을 발견하였다.

그제야 창근이가 꽁지가 빳빳해서 줄행랑을 놓은 리유가 리해되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이참, 지배인이 범이라도 되는가.

저앞으로 멀어지는 창근의 뒤를 아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정향의 곁으로 어느새 리대철이 다가왔다.

《허, 오래간만에 둥지에서 나온걸 보니 일이 잘되여가는가부다.》

헌헌하게 하는 리대철의 말에 정향은 손에 든 책갈피에서 콤퓨터로 빚은 고양정뽐프의 구조단면들과 특성모의시험결과와 해석과정을 인쇄한 여러장의 종이를 뽑아 내밀었다.

《이걸 좀 보아주십시오.》

그것을 받아쥔 리대철은 호기심을 가지고 종이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150메터이상의 높이에서 초고압을 견디여내자면…》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종이장들을 한장한장 들여다본 리대철이 눈길을 들었다.

《고맙다. 고심을 많이 했다는게 느껴져. 그런데 이걸 보고야 알겠나. 콤퓨터로 보면서 토론해보자구.》

《예.》

《물론 설계연구소 동무들과 합의를 한 후에…》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뽐프입니까?》

《내 전번에 말하지 않았던가?》

《예?》

《이런, 내 정신보지. 정향이한테 일만 시킬 생각만 했지 대상이 무엇인지도 알려 안 주다니. 덜퉁하기란, 미안하다. 이 뽐프로 말하면… 참, 정향이도 평양의 창전거리에 당의 사랑과 배려에 의해 초고층살림집들을 건설하는걸 알겠지?》

《압니다. 배치받기 전에 야간지원을 몇번 나갔댔습니다.》

《저런, 대단한걸. 그 뽐프는 그 집들이 완공되면 음료수와 난방용수를 보장할 뽐프인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만들지 못한다면서 다른 나라에서 사오기로 했다는거요. 통분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 만들자는거요. 그래 정향이 보기엔 어느것이 옳은것 같애?》

리대철의 말을 새겨들은 정향의 가슴속에서는 의분이 끓었다.

다른 나라에서 사올게 따로 있지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만들수 있는것을 남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사온다는것이 말이 되는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수입병에 걸린 사람은 민족적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랑또랑 외우는 정향을 보는 리대철의 얼굴에 대견한 빛이 어리였다.

《그렇지. 우리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생산할수 있는것도 무턱대고 다른 나라에서 들여다 쓰는 사람은 민족적자존심도 애국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였지.》

부지중 정향은 무역일군인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우리자체의 힘으로 얼마든지 만들수 있는 제품을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온적은 없는지.

언제한번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하여 의심해본적이 없는 정향은 절대로 그럴수 없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아버지가 누구라고…

《정말 이 공장에서 그 뽐프를 만들수 있습니까?》

《만들수 있구말구. 만들어도 남들 못지 않게 만들지. 첨단이라는게 별거니. 바로 정향이 같은 전문가의 정신력의 발현이 첨단이라고 할수 있거던.》

리대철의 능청에 정향은 얼굴을 활딱 붉히였다.

《어마나! 지배인동지두…》

그때 손전화기의 신호음이 울리였다.

정향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리대철의 눈치를 살피였다.

어서 받으라고 눈짓을 하는 리대철에게 미안한 웃음을 지은 정향은 몇걸음 뒤로 물러서며 주머니에서 손전화기를 꺼내들었다.

현시판을 보니 아버지였다.

반가왔다. 여기로 내려올 때 아버지가 외국출장중이여서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호출건을 누른 정향이가 기쁨의 환성을 터치였다.

《아버지! 저예요. 그새 안녕하셨어요. 어머니도 잘있나요? 아이, 미처 전화를 하지 못해 미안해요.》

응석부리듯 하던 정향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뭐라구요?!》

외마디 소리를 하던 정향은 리대철이 엿듣기라도 한듯 더 멀찍이 물러섰다.

《야! 넌 왜 하필이면 그 공장에 내려갔느냐?》

아버지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정향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마나! 이 공장이 어때서요?》

《네가 발을 잘못 들여놓아서 하는 소리다.》

《아이참. 아버지, 무슨 소릴 하는거예요? 내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알아요? 지금 이 공장에서는 수입병에 환장이 된 사람들이 절대로 만들지 못한다고 하는 첨단급고양정뽐프를 자체로 만들기로 하였는데 나도 한몫 한단 말이예요. 이 딸이 장하지요, 호호호.》

제 흥에 떠서 호들갑을 떠는 정향을 놀래우며 아버지의 노성이 귀를 쑤셔댔다.

《그만하지 못하겠니? 철딱서니없는것…》

무안을 당한 정향은 발끈하였다.

《뭐예요?!》

했으나 아버지는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

정향은 방금전 아버지의 언행이 도저히 리해가 안되였다.

아버지한테서 그런 몰풍스러운 말을 들어보기가 처음이였다.

여느때는 정향이 말이라면 잘한다 잘한다 하며 등을 두드려주던 아버지였다.

정향은 여기로 떠나오기 전날 동주뽐프공장 파견장을 보고 달가와하지 않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렇게도 발목을 잡지 못해 안달아하더니… 아버지는 왜 또 그러실가?

다시 아버지를 찾아 왜 그러는가고 따져묻고싶었으나 저쪽에서 서성거리고있는 지배인 생각에 그만두었다. 후에 꼭 따질테야.

정향은 아무 일도 없은듯 태연하려 애쓰며 지배인에게로 주저주저 다가갔다.

《무슨 기쁜 소식이라도 왔나?》

중떠보듯 넌지시 던지는 물음에 아직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적이 없는 정향은 얼굴을 붉히며 중언부언하였다.

《글쎄… 아버지가… 아버지가…》

전화내용을 알리 없는 리대철은 부녀의 상봉을 제일처럼 반가와하였다.

《그러니 아버지한테서 온 전화였구나. 그래 뭐라던, 보고싶대? 보고싶을게요. 자식을 외지에 내보낸 부모는 늘 걱정을 한다니. 일은 힘들지 않는지, 식사는 제대로 하는지, 잠자리는 편안한지. 나도 평양에 출장갈 때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보고싶어 꼭꼭 들려보군 한다니. 자식가진 부모들은 다 그렇다니까, 허허…》

제 흥에 떠서 저 혼자 부르고 쓰고 하던 리대철은 생각난듯 물었다.

《아버진 어데서 무슨 일을 하나?》

정향은 한동안 즘자리다가 아버지가 일하는 직장이름을 댔다.

그 말에 리대철은 온몸이 긴장해졌다.

거기는 지금 한창 건설되는 창전거리살림집들에 리용할 뽐프수입을 담당한 단위가 아닌가.

혹시 이 처녀의 아버지도 그에 관여한것은 아닌지.…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따져물을수가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순진한 처녀에게 그늘을 던지고싶지 않았던것이다. 후에 얼마든지 알수 있을것이다.

《가보라구.》

《예.》

《가만, 설계연구소 동무들과 토론해서 그 모형이 승산이 있다면 나한테 제꺽 알려야 해. 참, 이제부턴 설계연구소 동무들과 함께 일하라구. 이제부턴 모든걸 설계에 기준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총총히 걸어가는 정향을 이윽토록 지켜보는 리대철은 처녀가 여간만 대견스럽지 않았다.

처녀가 참 용탄 말이야.…

문득 리대철은 정향을 며느리로 삼았으면 하는 욕심이 들었다.

저만한 처녀면 아들녀석과 맞세울만 하지.

제대군인이겠다, 대학을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 제 몫을 할텐데 어느 처녀인들 마다하겠는가.

자기 아들과 정향을 나란히 세워놓고 벙싯거리던 리대철은 인차 머리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공상을 잘하는군. 평양처녀가 지방에 내려와 살겠다고 하겠는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자기뒤를 이어 뽐프전문가가 되기를 바라는 리대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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