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36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로 백학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날아예고있었다.

구수한 낟알향기가 풍기는 논판마다에서는 총알처럼 여문 벼이삭들이 선들바람에 노래를 부르듯 와슬렁거린다.

논벌 한가운데 설치한 립체록음기에서 울려나오는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벼가을을 하는 공장 로동자들은 신바람이 나서 일손들을 놀리였다.

호함진 웃음이 꽃보라처럼 날리는 로동자들과 동떨어져 혼자서 벼베기를 하는 정향의 얼굴표정은 침울해보였다.

그것은 며칠전 집에 가서 만나본 아버지에 대한 불쾌감이 아픈 상처가 되여 때없이 쑤셔댔기때문이였다.

그날 공장 지배인과 당비서는 정향이가 수고했다며 집에 가서 며칠 푹 쉬고오라고 승용차까지 태워주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부모들앞에서 정향은 그동안 공장에서 있은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쏟아놓았다.

제 흥에 떠서 웃고 떠들며 자랑보따리를 풀어놓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한줄기의 공감의 빛도, 한마디의 칭찬도 없었다.

어머니 역시 무표정이였다.

무엇인가 예감한 정향은 금시에 샐쭉해졌다.

《아버지, 어머닌 뭐예요? 오래간만에 만난 딸을 이붓자식대하듯 하면서…》

어머니는 무슨 속상한 일이 있는지 호ㅡ 하고 가는 한숨을 내쉬는데 말뚝을 삼킨듯 뚝해있던 아버지가 벌컥 성을 내였다.

《야, 다시는 내앞에서 공장이요, 고양정뽐프요 하는 소릴 하지 말아.》

도대체 동이 닿지 않는 소리여서 정향은 발끈해서 맞받아 소리쳤다.

《왜 하지 말란 말이예요? 뽐프공장 지배인동지와 로동자들은 제힘을 믿지 않고 자존심도 없이 다른 나라에 빌붙으며 귀한 외화를 섬겨바치는 수입병에 환장이 된 사람들을 정신차리게 하려고 떨쳐나섰는데 아버진 그들이 장하게 생각되지 않아요? 그리구 거기에 한몫 하겠다는 이 딸이 대견스럽지 않는가 말이예요.》

총알처럼 내쏘는 정향의 질책에 아버지는 한순간 입이 얼어붙었다.

애꿎은 담배만 들이빨던 아버지는 험하게 이지러진 얼굴로 정향을 노려보다가 재털이에 신경질적으로 담배불을 비벼끄고 씽하니 웃방으로 올라가버렸다.

이어 꽝ㅡ 문닫기는 소리가 정향의 귀에 폭탄터지는 소리처럼 들리였다. 삽시에 방안의 공기가 얼어붙은듯 싶었다.

아버지의 돌발적이고 몰풍스러운 언행에 정향은 아연해졌다.

아버지가 왜 저러실가.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는가.

머리속을 휘젓는 의문부호를 안은 정향은 묻는듯 한 눈길을 시름에 잠겨있는 어머니의 얼굴에 박았다.

어머니는 차마 입을 떼기가 두려운듯 정향의 눈길을 외면하였다.

그날 밤 아버지가 들을세라 숨소리마저 죽여가며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정향은 그만 까무라칠번 하였다.

그제야 모든것이 대낮처럼 환하게 리해가 되였다.

아버지가 굳이 자기를 걱정한것이 수십년전 그 공장을 배반한것은 두말할것도 없고 뽐프수입으로 하여 지배인 리대철과의 《전쟁》에서 딸이 《참화》를 입는것이 두려워서였음을…

자식을 위하는 그 심정은 리해되였으나 아버지가 기어코 강행하려는 일은 도저히 리해가 안되였다.

분명 아버지가 하려는 일은 나라와 인민의 리익에 죄되는 일이였다.

이제껏 정향은 아버지를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애국의 땀을 바치는 애국자라고 긍지높이 여겨왔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것처럼 어떤 무역일군들은 나라를 위해 일하는척 하면서 제 주머니부터 채울 꿈부터 꾼다고 하더니 우리 아버지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였단 말인가?!

물론 아버지에게 제나름의 일가견이 있을것이다.

창전거리의 중요성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서 처음 만든 고양정뽐프를 놓았다가 돌이킬수 없는 사고가 생기면 어쩌겠는가 하는 위구심때문에 동주뽐프공장을 믿을수 없다는… 그것이 책임감에서 출발한 견해일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자기의 힘, 기술을 믿지 않는 허무주의이며 나아가서 외국의것을 무턱대고 다 좋다고 보는 사대주의이다.

사람이 자기 힘을 믿으면 강자가 되고 사대주의에 빠지면 존엄도 자존심도 남에게 팔아먹는 머저리가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버지는… 이제라도 대담하게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겠는데 왜 요지부동일가.

온밤 귀신에게 쫓기듯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번민을 하던 정향은 새벽에 일어나 종이장에 《아버지! 행복은 정직하게, 성실하게 일할 때 이루어진다고 했어요. 나는 이제라도 아버지가 나라와 인민앞에 떳떳하기를 바래요.》 라는 글을 적어놓고 간다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집을 나섰다.

아빠트현관을 나선 정향은 불꺼진 자기 집 창문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세상에 태여나 처음으로 부모들을 실망시키는 일을 하는것만 같아 죄스러웠다.

조만간에 날이 밝으면 잠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 어머니가 그 편지를 보면 뭐라고 하실가.

아마 경망스러운년이라고 노발대발하실거야.

아버지, 어머니, 용서하세요. 저는 달리 처신할수가 없었어요.

정향은 눈물속에 집창가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걸었다.

그렇게 떠나온 집이였다.

《허, 정향이 벼베는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는 소리에 정향은 화닥닥 놀라며 허리를 폈다.

눈앞에 농립모를 쓰고 손에 낫을 쥔 리대철이 싱글벙글 웃으며 서있었다.

정향은 리대철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내가 윤상배의 딸이라는걸 알면 뭐라고 하실가. 경멸할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잔등에 얼음덩이를 진듯 온몸이 선뜩해났다.

《정향이 얼굴에 비구름이 낀걸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은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니?》

《아닙니다. 벼이파리에 눈이 쓸리는 바람에…》

창황중이라 왕청같은 거짓말이 튀여나왔다.

그 말을 진담으로 들은 리대철은 걱정어린 눈길로 정향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은 상하지 않은것 같구나. 주의해라. 정향이의 그 아름다운 눈이 상하면 내가 무슨 체면에 마주보겠니. 정향이 눈이야 예리하구 정확해서 사물현상을 옳게 꿰뚫어보는 좋은 눈이지.》

진정이 푹푹 넘치는 리대철의 말에 정향은 불쑥 눈물이 솟구쳤다.

《고맙습니다.》

《참, 내 일이 바빠 돌아치다보니 전번에 정향이가 집에 갔던 이야기를 듣지 못했구만. 그래 집에 가니 부모들이 반가워하던가? 무슨 맛있는걸 해주고?》

난데없는 물음에 정향은 그만 당황해졌다.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아이, 이를 어쩌나. 하필이면 그걸 물을건 뭐람. 그게 언제때 일인데. 지배인동지도 참,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담.

아버지때문에 속에 재가 꽉 찼는데 그걸 토설할수야 없지 않는가. 혹시 지배인동지가 내가 윤상배의 딸이라는걸 알고 중떠보는게 아닐가. 심연에 빠져 갈팡질팡하던 정향은 애써 용기를 내여 얼굴에 밝은 빛을 떠올렸다.

《반가워하는 정도가 아니였습니다. 객지생활이 힘들지 않는가, 공장간부들이 어떤가 하며 성가실 정도로 까근까근 물어보는데…》

본의아닌 거짓말을 퍼내는 정향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게 바로 자식을 가진 부모심정이지. 그걸 보면 정향의 부모들은 자식을 잘 키웠어. 인물곱지, 머리가 비상하지. 그런데 어떤 부모들은 그렇지 못하거던. 자식들의 거울이 돼야 할텐데… 허허, 이건 내자신에게 하는 소리이기두 하지.》

리대철이 태우는 비행기에 올라앉은 정향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숨이 꺽 막히였다.

야, 지배인동지, 이젠 그만 속태우고 가십시오, 조금만 더 있으면 난 심장이 터집니다.

애바르게 마음속으로 빌고비는 정향의 심중을 읽은듯 한 리대철이 저쪽논배미를 띄여보더니 《주물직장 녀석들은 왜 앉아뭉개는거야?》 하며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리대철의 뒤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며 정향은 긴숨을 내쉬였다.

이제 얼마나 더 숨막히는 일을 당해야 할가 하는 아뜩한 생각이 머리를 핑 돌게 하였다.

별안간 공장을 떠나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그것이 자신과 리대철지배인 그리고 공장사람들을 위해서도 마음이 편할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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