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제 6 장


8


일요일이였다.

아침이면 등교길에 오른 교직원들과 학생들로 흥성거리던 대학구내가 지금은 한적한편이였다.

오빈우는 구내길을 천천히 걷고있었다. 룡남산의 숲속을 스쳐온 솔바람이 싱그럽게 코끝을 건드렸다. 대학구내의 공기는 류달리 맑고 싱그러웠다. 대학청사가 류달리 경개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오빈우는 구내의 어느곳에 수종이 좋은 나무들을 더 심을것인가를 생각하며 사위를 살피였다. 구내의 풍치와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사업도 총장의 관심사였다.

몇걸음앞에서 어린 딸애의 손목을 잡고 한가로이 걷고있는 사람이 눈에 띄였다. 중년의 교원이 딸애와 함께 휴식의 하루를 즐기려고 대학에 나오고있었다. 대학구내는 어느 공원이나 유원지 못지 않게 경개가 좋아서 휴식일이면 교직원들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생들은 교수들의 어린 아들딸이나 손자애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고와했다. 교수들이 휴식일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대학에 나오기를 즐겨하는 까닭은 거기에도 있었다. 나이많은 교수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아이들은 휴식일 아침이면 대학으로 가자고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조르군 한다고 한다.

자식이 없는 오빈우는 남들이 누리는 그런 즐거움을 모르고 산다.

(나에게도 어린 손자애가 있다면 오늘같은 날에 그 애의 손목을 잡고 구내를 거닐면 그 행복감이 오죽하랴.)

오빈우는 가슴에 서려드는 이런 생각을 어찌할수 없었다. 젊어서는 몰랐었는데 늙어가면서 손자애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앞서가는 소녀애는 빨간 리봉을 단 등산모를 쓰고 흰 샤쯔에 까만 치마를 단정하게 입었는데 그 뒤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소녀애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숲을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무엇인가를 묻고있었다.

모르긴 해도 나무이름들을 묻고있을것이다.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친절히 대답해주군 했다.

어느새 거리가 가까와졌다. 오빈우는 소녀애의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최정택교수였다.

《최선생.》

오빈우는 조용히 불렀다.

머리를 이쪽으로 돌린 최정택은 반색을 하며 인사를 하더니 딸애한테 일렀다.

《총장할아버지에게 인사올려라.》

소녀애는 고개를 젖히고 빠끔히 올려다보더니 갑삭 허리를 굽히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그린 오빈우는 친절히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최진희예요.》

목소리가 얼마나 고운지 쌍겹진 눈을 새물거리는 소녀의 모습은 예쁘기가 그지없었다. 오빈우는 담쑥 껴안아주고싶은 충동을 느끼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불시로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이 그 충동을 짓눌렀다. 나의 그릇된 처사로 이 어린것이 오늘에 누리는 이 행복을 앗아갈번 하지 않았던가. 두번다시 소녀의 맑고 순진한 눈동자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진희야, 이 어리석었던 할아버지를 용서해라.》

오빈우는 짓눌린 목소리로 이런 말을 남기고 쫓기듯 황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진희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최정택은 그 심중을 충분히 리해했다. 역시 오빈우는 높은 지성을 가진 사람인지라 자기를 반성할줄 알았다. 지난날에 그에게 품었던 원망이 한순간에 풀리는것을 의식했다.

자기 사무실에 들어선 오빈우는 쏘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진희의 예쁜 얼굴이 눈앞에 얼른거리며 자기를 단죄하는듯 한 환각을 느끼였다. 그 어린것의 순진한 넋앞에 무슨 말로 용서를 빌랴. 그래도 제때에 자신의 그릇된 처사를 바로잡은것은 다행한 일이였다.

김정일동지의 친절한 깨우치심이 계셨기에 그릇된 처사를 바로잡을수 있었다. 그이께서는 아들 명식이와도 화해하고 혈육의 뉴대를 회복하라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어쩐지 지금은 그 간곡하신 당부가 새삼스레 가슴후덥게 안겨온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오빈우는 하루빨리 아들과의 대립관계를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랭철하게 돌이켜보면 그 대립은 오래전에 자기가 아들의 존재를 외면하였기때문이다. 잘못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데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가장 큰 문제로 나서는것은 왕수해의 태도이다. 그가 어떻게 나올것인가? 그것은 알수 없었다. 아무튼 오늘에 와서 그와 헤여진다는것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김정일동지에게도 당분간은 어차피 아들과의 관계를 비밀에 붙여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왕수해에게 진실을 터놓고 해결을 보아야 했다. 언제까지나 시간을 끌수는 없었다.

이날 일손이 잡히지 않아 점심시간이 채 되기 전에 집으로 들어간 오빈우는 점심식사를 하고나서 왕수해와 마주앉았다.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동안 갑자르던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여보, 날 용서하오.》

《뭘 용서하라는거예요?》

왕수해는 의혹이 실린 눈으로 남편을 마주보았다.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나에게는 안해와 젖먹이아들애가 있었소.》

《그래요?》

왕수해는 뜻밖인듯 몸을 흠칫했다.

오빈우는 그 어떤 무서운 선고를 예감하는 사람처럼 바싹 긴장했다.

《헤여진 후로 영 소식을 모르고있었는데 최근에 아들녀석이 나타났소.》

《본처도 나타났어요?》

왕수해는 재빨리 물었다. 지금에 와서 그의 관심사는 본처의 립장이였다.

《본처는 전쟁때 미국놈들의 폭격에 잘못되였다오.》

왕수해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아들은 지금 어데서 살아요?》

《우리 대학 학생이요. 정치경제학과 1학년생이요.》

《그럼 김정일동무네 학급이군요.》

왕수해는 부지중 반가운 기색을 지었다.

오빈우는 아들과 벌어졌던 불미스러운 사연과 김정일동지의 깨우치심을 듣고 아들과 화해를 할 생각을 가진데 대하여 말하였다.

《그런데 여적 내 눈치를 보면서 아들을 우리 집에 데려오지 않았군요. 당신은 너무해요. 여태껏 이 왕수해가 그런 옹졸한 녀자인줄 알고있었어요?》

《그런건 아니지만…》

오빈우는 어물어물 응대했다. 대학에서는 교직원들과 학생들앞에서 거침없이 열변을 토하지만 집안에서는 왕수해앞에서 조심을 두는 오빈우였다. 젊은 후처를 데리고사는 남자들이 대체로 그러한것처럼 오빈우도 그러했다.

《여보, 우리한테 아들이 있다는게 얼마나 기쁜 일이예요. 며느리를 맞으면 손자도 보게 될것이고 그러면 늘그막의 우리 생활이 얼마나 즐겁겠어요.》

왕수해는 뜻밖에 나타난 아들로 하여 앞으로 펼쳐질 가정생활을 황홀하게 그려보며 흥분하였다. 그는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녀성유격대에서 일제와 싸웠다. 그가 속한 유격대는 중국인민의 항일대전사에 뚜렷한 공적을 남기였다. 왕수해는 녀성기관총수였다. 용감히 일본군을 쓸어눕히던 그는 어느 한 전투에서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던 후과로 임신을 할수 없었다. 이것은 녀성으로서 가슴아픈 불행이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것이 늘 남편에게 죄스러웠고 자신에게도 커다란 슬픔이였다. 그런데 아들이 나타났다니 이처럼 기쁘고 경사로운 일이 또 어데 있겠는가!

《여보, 아들이름이 뭐예요?》

《오명식이요.》

오빈우는 들레는 안해를 얼없이 마주보며 대답했다.

《오명식.》

입속으로 조용히 뇌이던 왕수해의 눈이 빛났다. 명식이도 김정일동지와 함께 여러번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려보군 하였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자기 왕수해를 유심히 뜯어보군 하던 남학생의 얼굴이 기억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명식은 진작 이쪽이 누구인가를 알고있은것이 분명했다. 한시바삐 그를 만나보고싶었다. 오랜 세월 잠재해있던 모성애가 폭발하였다.

《내 이제 경제학부 기숙사에 가서 아들을 데려오겠어요.》

《그 일은 이제 내가 처리할테니 당신은 가만있소.》

《나도 명식의 어머니인데 아버지인 당신한테만 아들문제를 처리할 권리가 있다는거예요?》

왕수해의 눈이 갑자기 올롱해졌다. 가시가 돋은 물음에 오빈우는 어지간히 당황했다.

《오해하지 마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기때문이요.》

《오래동안 헤여졌던 아들을 찾는것이 서두를 일이 아니면 이 세상에 서두를 일이 또 어데 있어요?》

《당신이 찾아간다고 쉬이 될 일이 아니요. 그녀석이 여간 코대가 센 놈이 아니요.》

《나는 항일대전시기 군중공작도 해봤어요. 사람은 누구나 진정과 진실앞에서는 공감하는 법이예요.》

왕수해는 자신만만한 낯빛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앞에서 차림새를 갖추더니 인차 집을 나섰다.

오빈우는 왕수해가 사라진 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처럼 나올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를 따라 아들이 나타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나 아무튼 안해가 고마왔다.

오빈우는 고요가 깃든 방안에 홀로 앉아있었다.

《총장선생님, 명식동무의 가슴속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뜨겁게 살아있습니다!》

문득 아득한 공간으로부터 확신에 넘친 그 목소리가 울려오는듯 한 환각을 느끼였다. 언젠가 총장실을 찾아오셨던 김정일동지의 말씀이시였다.

오빈우의 가슴은 느긋한 감정으로 설레였다. 다른 그 누구의 말이라면 의혹을 가질수 있겠지만 그이의 말씀이기에 그대로 믿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학급동무들의 내심을 속속들이 꿰뚫어보시며 그들을 옳바른 길로 이끄신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혹시 오늘 명식이녀석이 계모를 따라 내앞에 나타날수 있지 않을가?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랴. 초조히 안해를 기다렸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두시간후였다. 드디여 문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였다. 귀익은 안해의 목소리와 귀설은 녀자의 목소리였다.

필경 안해가 명식이녀석은 데려오지 못하고 로상에서 이웃집 아낙네를 만나 함께 오는 모양이다. 점점 가까와오던 말소리와 발자국소리가 출입문앞에서 멎었다. 동시에 달뜬 안해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여보, 내가 누구들을 데려왔는가 보세요.》

오빈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입문이 열리였다. 안해가 두 청춘남녀를 데리고 나타났다. 청년은 아들 명식이가 분명한데 처녀는 낯이 설었다. 오빈우는 다소 어색한 낯빛으로 머리숙여 인사를 하는 명식이를 부둥켜안았다. 자기로서는 예견치 않았던 불같은 충동이 치밑었다.

《내 아들아!》

뜨거운 피의 격류가 체내에서 사품쳤다. 피는 속일수 없었다. 불시로 눈시울이 화끈 달아오르며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아들의 잔등을 쓰다듬으며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지간히 진정을 했을 때 오빈우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명식아, 이 아버지를 용서해라.》

《원, 새삼스럽게… 명식이가 용서를 하길래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나요.》

왕수해의 말이였다. 범상한 투로 말을 그렇게 하지만 이 순간의 격정을 그도 누를길 없는듯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이윽하여 오빈우는 아들의 몸에서 팔을 풀고 한걸음을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함께 온 처녀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빈우는 엉거주춤이 인사를 받고나서 처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차림새로 보아 대학생은 아니였다. 두눈을 꺼먹거리며 나직이 물었다.

《처녀는 누구더라?》

왕수해가 곱게 눈을 흘기며 깨우쳤다.

《아들과 함께 집에 온 처녀라면 누구인지 짐작을 해야지, 령감두 눈치가 무디기란 참.》

깨도가 된 오빈우는 얼굴에 대뜸 흐뭇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아들과 며느리감을 동시에 만나는셈이다. 이런 경사가 또 어데 있을가! 처음보는 처녀가 순간에 친자식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이런 경우에는 그 무엇으로써도 설명할길 없는 피줄의 견인력이 작용하는가싶었다.

《자, 모두들 앉자.》

모두가 자리에 둘러앉았다.

오명식은 고개를 높이 들고 오빈우의 낯색을 예리하게 살피고있었다. 조금이라도 기분에 거슬리면 와락 성을 내고 뛰쳐나갈 잡도리였다. 처녀는 붉어진 얼굴을 다소곳이 숙이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오빈우가 그에게 친절히 물었다.

《이름이 뭐지?》

《량기옥입니다.》

량기옥은 비로소 오빈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듣자니 전쟁때 명식이와 한부대에서 싸웠답니다.》

왕수해가 하는 말이였다.

오빈우는 곁에 앉은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속삭였다.

《당신 수고했소.》

미타하게 여겼던 오늘일을 용케 성사시켰다는 뜻이였다.

왕수해는 일순 으쓱해하는 기색을 지어보이더니 공손히 표정을 바꾸며 이렇게 말했다.

《마침 일이 될 때라 기숙사호실에 김정일동무가 있더군요. 학급 학생들도 여럿이 둘러앉았구요. 알고보니 김정일동무는 기옥동무를 기숙사동무들에게 소개하려고 그 장소를 마련하였더군요. 기옥동무는 이따금 명식이를 찾아오군 했는데 기숙사에는 나타나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리군 했답니다. 그런 불편스러움을 헤아리고 정일동무가 오늘 휴일을 빌어서 기옥동무를 동무들에게 소개하려고 했던거예요.》

오빈우는 감심하여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이께서는 젊으신 나이에 얼마나 다심하시고 사려가 깊으신가.

왕수해가 여전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내가 기숙사에 나타나서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김정일동무가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몰라요. 자기도 당신과 명식의 관계를 두고 고심해왔는데 오늘은 소원이 풀린것 같다고 하였어요. 그러면서 명식이와 기옥의 등을 떠밀어보내였어요.》

오빈우는 두번다시 감격했다. 저 코대센 명식이녀석이 어떻게 애인까지 버젓이 데리고 이리로 오게 되였는지 잘 알게 되였다.

학생들은 김정일동지의 뜻이라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른다고 하였다. 교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뜻이 천만번 정당하다는것을 알고있기때문이였다.

정당한 사상과 따뜻한 정은 누구든 공감시키기마련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비범한 사상리론적예지와 숭고한 덕망을 겸비하신 위인이시다. 그이께서 우리 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는것은 나에게 있어서나 대학에 있어서도 얼마나 크나큰 행운인가. 대학의 영예와 명성은 어떤 위인이나 인재를 배출하는가에 달려있다. 우리 김일성종합대학은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모신것으로 하여 오늘도 영예와 존엄이 빛나지만 래일은 김정일동지의 모교인것으로 하여 그 영예와 존엄이 더욱 높아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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