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제 1 장 그해 여름


2


그날 저녁 권일학은 강학선이 이끄는대로 그의 집으로 가고있었다.

밤 8시였다. 많은 부임인사며 복잡한 인계인수로 늦어지는 권일학을 강학선은 무려 2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한다.

《자, 빨리 가세.》 강학선이 독촉했다. 《뭐 따로 준비한건 없지만 집사람이 눈이 빠지게 기다릴거네.》

권일학은 소리없이 웃었다.

《원, 내가 뭐 그 집에 한두번만 다녔다구요?》

《아, 오늘이야 자네가 큰 간부로 부임한 날이 아닌가!…》

《하- 그렇습니까?…》

권일학은 강학선과장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목이 잠기는듯 했다. 강학선은 권일학이보다 여러해나 우이면서도 마치 동년배처럼 그를 대하군 했다. 그러므로 권일학은 비록 의학계에서는 서로 의술을 다투는 경쟁자이지만 생활에서는 나이를 초월하여 벗으로 가까이 대해주는 강학선을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그 강학선은 산원의 기술진영을 꾸리려고 애쓰던 임선해원장이 제1인민병원의 권일학이 여기 기술부원장으로 온다는것을 알려주었을 때 그야말로 적임자라고 환성을 질렀다고 한다.

어디선가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상긋한 나무잎냄새며 짙은 꽃향기가 뒤섞인 밤공기가 그들의 가슴에 한껏 스며들었다.

강학선이 손수건으로 땀에 젖은 목언저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 오늘 산원을 돌아보니 감상이 어떻소?》

권일학은 깊이 들이쉬였던 숨을 활 내그었다.

《정말 가슴이 뻐근합니다. 여기서 실습도 하고 강습도 받군 했지만 평양산원이 이렇게 크고 방대한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사실이 그러했다. 권일학이 맡게 될 여러개의 부인과와 부인종양, 유선종양, 실험실 등의 과장들만 해도 수십명이나 되고 매 과마다 많은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그 과장들밑에 있다. 그리고 여기 산원에는 부인과 말고도 그만한 인원을 가진 십여개의 산과, 여러개의 애기과 그리고 큰 규모의 약무부와 일반치료과, 기타 연구실들과 교육강좌, 간호원학교 등이 있는것이다.

《허, 새삼스레… 하긴 협의환자가 제기될 때마다 오군 하는 자네야 이 산원이 그렇게 큰줄은 다 몰랐을테지.》하고 강학선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산원이야 인구의 절반인 온 나라 녀성들을 다 안고있는 큰집이 아닌가!》

산원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한다. 임선해원장도 림숙정당비서(당시)도 권일학에게 말했었다, 평양산원은 온 나라 녀성들의 친정집이라고, 큰집이라고!…

권일학은 이런 산원의 부인과 기술부원장으로 왔고 지금 자리가 비여있는 산과기술부원장의 직책까지 림시로 떠맡게 된 자기의 무거운 책임감을 다시금 새삼스레 절감하고있었다.

《참, 산원에선 기술발전에 관심이 대단하더구만요. 세계의학계의 첨단이라고 하는 체외수정이나 복강경수술을 시도하는걸 보니 정말 대단합니다. 내가 제일 감동된게 바로 이겁니다.》

권일학은 자기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리는것을 알지 못하고있었다. 사실 세계의학계에서는 불임증때문에 영영 애기를 낳을수 없는것으로 확증된 녀성들을 위해 체외수정기술이 도입되고있으며 지금은 인체에 칼을 대지 않고 화면에 비쳐지는 내시경을 통해서만 수술을 진행하는 복강경수술도입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이제 우리의 평양산원에서도 그러한 복강경수술기술과 체외수정연구가 완성되여 도입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강학선은 널직한 어깨를 으쓱하고나서 느릿느릿 말했다.

《하지만 기술부원장, 그 서범천이 한다는 복강경수술은 좀 미타하네. 사람이 허파에 바람이 찬것처럼 술덤벙물덤벙하거던.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게. 그건 그렇고… 나는 주장하네. 아직은 전통적인 개복수술이 기본이라고.》

강학선은 남달리 큰 손을 들어 장검처럼 허공을 쭉 갈랐다. 더 말할게 없다는 의미였다. 권일학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스쳐보았다. 복강경수술은 외과분야에서 일어난 하나의 기술혁명이다. 오늘 발전된 나라들에서는 경쟁적으로 그 연구도입에 열을 올리고있다. 그런데 림상에서는 귀신같다는 강학선이, 한때엔 부인과 미세수술의 개척자로 소문났던 그가 복강경수술을 무시한다는것이 무등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제 보기엔…》

《아, 됐네. 그런 얘긴 그만하구… 참, 오늘 내가 말하던 그 처녀를 봤겠지?》

화제가 바뀌는 바람에 권일학은 어리뻥해졌다.

《그 처녀라니요?》

《아, 우리 산원의 녀의사 말일세, 2산과의 하경옥이라구…》

권일학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 숱한 사람들속에서 하경옥이라는 녀의사가 누군지 어떻게 알수 있었으랴.

강학선이 놀라와했다.

《그러니 몰랐단 말인가? 아, 내가 자네에게 그 처녀 사진을 보내지 않았나. 원, 이런!…》

권일학이 소리없이 웃으며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여 그 갈피에 끼여있던 사진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 처녀 말이지요?》

강학선이 호기있게 말했다.

《옳아!… 그 처녀일세. 오늘 봤지?… 맘씨곱구, 알뜰하구… 그저 정철이 엄마로는 딱 맞춤한 녀자라니까.》

갑자기 강학선은 입을 다물고 이마살을 찡그렸다. 가로등빛에서는 사진을 잘 뜯어볼수 없다고 생각한것 같다.

그때 가까운 정류소에 무궤도전차 한대가 멎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내렸다. 구럭지를 든 녀인들도 있고 가랑잎이 굴러가도 웃어댄다는 처녀들도 있다. 안경을 낀 키다리대학생이 누구에겐가 소리쳤다.

《여, 명옥동무, 약속한거 잊지 말라구!-》

《피- 난 약속하지 않았어요.》

강학선이 머리를 빼들고있는 권일학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뭘 그렇게 보나? 자네의 명옥이는 여기 있네.》

마침 무궤도전차의 밝은 불빛이 권일학이 들고있는 사진을 환하게 비쳐주었다. 권일학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몇번이나 자세히 들여다본 처녀의 사진이였다.

사진속의 녀의사 하경옥은 조용히 앞을 내다보고있는데 마치 권일학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늠해보려는것 같았다. 갸름한 얼굴과 진한 눈섭밑의 검은 두눈, 좀 맵짜보이는 꼭 다물린 입…

갑자기 권일학은 처녀의 사진을 눈앞으로 바투 가져갔다. 어디선가 꼭 본듯 한 얼굴이다. 사진을 처음 볼 때도 그랬었다. 어디서 봤더라? 출퇴근길에서? 아니면 오늘 부임인사를 할 때 혹시?… 그런것 같진 않다. 하긴 그 숱한 의사, 간호원들중에서 이 처녀만 기억해둘수는 없는것이다.

다시 자세히 뜯어보니 역시 그 녀자는 권일학이 아는 처녀가 아니였다. 아니, 처음 보는 처녀였다. 하지만 자기를 지켜보는 처녀의 검은 두눈이 어째서 아프게 가슴에 미쳐오는지 알수 없다.

《마음에 드나? 보는 사람마다 얼마나 칭찬하는지 몰라.》 강학선의 둥그런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넘실거렸다. 《참, 임자 설기떡을 좋아한다면서?》

권일학이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설기떡은 또 뭡니까?…》

《임자의 직녀 하경옥이 그렇게 말하더구만! 나두 여태 모르고있는걸 그 처녀가 어떻게 알았을가?》

권일학은 아직도 얼떠름한 표정이였다. 원, 무슨 소리인지…

강학선이 소리내여 웃어대였지만 권일학은 여전히 고개를 기웃거리고있었다. 무궤도전차가 멀어져가면서 손에 들고있는 사진은 희미해졌고 그의 마음도 불이 꺼진듯 어두워졌다.

방금 뻐스에서 내린듯 싶은 한 녀인이 그들의 앞에서 어린애의 손목을 잡고 걷고있었다. 어린애는 금방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듯 걸음마다 넘어질듯 되똑거리고있었다. 그러다가 커다란 나무잎이 발에 밟히자 놀란듯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엄마?! …》

《은미, 아빠가 기다리는데 빨리 가자요.》

그들을 바라보던 강학선이 언짢아하며 말했다.

《여보게, 언제까지 그렇게 독신으로 있을셈이나? 정철이 생각도 좀 해야지?… 그 애에겐 지금 어머니가 있어야 한단 말일세.》

순간 수백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권일학의 가슴을 쿡 찌른듯 했다. 저미는듯 한 아픔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버지, 오늘은 인차 들어오나?…》

다섯살잡이 어린 아들 정철이… 매일같이 묻는 그 어린것에게 한번도 약속을 지켜주지 못한 그였다. 정철이는 저녁밥을 먹자고 잡아끄는 할머니도 뿌리치고 밤늦도록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그냥 방바닥에 코를 박고 잠들어버리군 했다. 그럴 때면 한밤중에 들어온 권일학이 아무리 흔들어깨워도 일어나지 못하군 했다.

사실 권일학은 그 애때문에 더더욱 결혼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는때가 많았다. 하여 소개되는 처녀들을 가림없이 만나보고 그들에게서 어떻게 하나 하나라도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처녀들과의 교제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인물은 물론 지적으로도 알맞는 처녀들이 더러 있긴 했으나 정철이 어머니로서 적합한 녀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기때문이였다.

사실 그가 어린 정철이때문에 생활상 불편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가 애를 잘 돌봐주었던것이다. 그렇지만 강학선이 말하는것처럼 애에겐 어머니가 있어야 했고 나이많은 할머니도 인제는 자주 주저앉아 다리를 주물군 했다.

《에그, 인젠 이전같질 않구나. 언제면 장가를 들어 이 에밀 쉬게 하겠는지, 원…》

그제서야 돌이켜보니 권일학, 자기도 이제는 때를 놓친 로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쇠잔해진 어머니, 구석에 쌓이는 먼지, 그래서 다 큰 자식을 걱정하는 년로한 어머니가 바로 두 집안사이에 허물없는 강학선에게도 은근히 며느리감을 부탁했을지 모른다.…

습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밤부터 소나기가 내리겠다고 하더니 곧 비가 오려는듯 싶었다. 어느덧 별빛도 사라져버린지 오랬다.

강학선이 오랜 침묵에 답답해난듯 성급히 목깃을 헤쳐놓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엉?… 이거 내가 도깨비를 사귀였나? 좋다든지 싫다든지 말을 좀 하라구, 젠장!… 앞으로 이만한 처녀는 정말 고르기 힘들어.》

《그럴가요?》

권일학은 그의 진심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어린 정철이때문에 남달리 마음쓰는 강학선, 일학은 그가 좋은 처녀를 물색하느라 사방 줄을 놓았다는것도 알고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 녀의사에 대하여 극성스럽다는것도…

녀의사 하경옥, 맘씨곱고 알뜰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산뜻하고 쭉 빠진 녀자보다도 어린 정철이에게 친어머니가 되여줄 그런 헌신적인 녀자가 필요한것이다.

어느덧 그들은 강학선의 집에 들어섰다. 강학선의 안해 오기화가 달려나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이, 정철이 아버지, 늦었군요. 초저녁부터 기다렸는데…》

남편의 가방을 받아들면서 그 녀자는 권일학을 방안으로 이끌었다.

《어서 앉으세요. 오늘은 기쁜 날인데…》

이미 밥상이 챙겨져있었다.

《별로 차린건 없어요. 정철이 아버지 좋아하는 농마국수를 눌렀을뿐이예요. 참, 날이 더운데 어서 시원한 이 수박화채를 들어보세요.》

오기화가 꿀물에 재운 수박화채를 랭동기에서 꺼내며 남편에게 나무라는 눈짓을 했다.

《여보, 어서 나앉지 않구 뭘하세요?》

강학선이 옷을 벗으며 서두르는것을 보고 권일학은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번마다 이렇게 마음써주어서…》

《원, 별소릴 다 하는구만요. 우리가 뭐 남이라구… 난 그저 정철이 아버지가 애엄마를 빨리 데려오길 바랄뿐이예요. 참 여보, 어떻게 됐어요, 우리 하경옥선생 말이예요?》

강학선은 수술장에 들어서는 의사들처럼 상우의 젖은 수건으로 꼼꼼히 손을 닦으며 시답지 않게 대꾸했다.

《나도 모르겠소.》

《아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글쎄, 이 사람이 끝내 대답을 안하는구만.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오기화가 손에 든 화채그릇을 상우에 놓으며 권일학에게 몸을 돌렸다.

《원, 그럴수가 있나. 정철이 아버지야 잘 몰라서 그러겠지요. 우리 하선생같은 처녀가 또 어데 있다구요! 좀 깔끔하긴 하지만 알뜰하고 성실하구 인정은 또 얼마나 많다구.… 녀자들에 대해선 남자보다 녀자가 더 잘 알아보는 법이예요. 정철이 아버지, 어때요, 우리 하선생이?》

《글쎄요.…》

《그럼 아직 못 봤어요?》

《예.》

《원, 저런!…》

그때 요란스러운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강학선의 안해는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예, 그래요. 방금 집에 들어서는 참인데요.… 예- 바꾸어드리겠어요.》

그는 손으로 송화기를 막으며 낮게 말했다.

《여보, 무슨 일인지 구급과에서 아까부터 당신을 계속 찾고있어요.》

안해에게서 송수화기를 넘겨받은 강학선의 얼굴이 차츰 긴장해지기 시작했다.

《림상적협골반?… 음, 알겠소. 당장 환자를 수술장에 내려가시오. 내 곧 가겠소!》

송수화기를 놓은 강학선은 미안한 눈빛으로 권일학을 쳐다보았다.

《이거 정말 안됐구만.》

권일학은 미소를 지었다. 묻지 않고도 무슨 일인지 알수 있었던것이다.

《어쩌겠습니까, 의사들이란 늘 그런걸요.》

사실 산원에서는 수술에서 막힘이 없고 그 어떤 정황도 능숙하게 처리할줄 아는 유능한 강학선을 어려운 모퉁이마다 찾군 했었다. 강학선은 그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고있었다. 하루에 수십건씩 진행하는 수술에서 구급정황이 생기는것이 당연한것처럼 유능한 의사들중의 하나인 자기를 찾는것을 그는 당연한 일로 여길뿐아니라 긍지롭게 생각하고있는것이였다.

권일학이 따라나서자 강학선이 나무람했다.

《자넨 왜 그러나, 응?…》

《저야 기술부원장이 아닙니까. 함께 갑시다.》

그들을 지켜보고있던 강학선의 안해가 맥풀린 어조로 말했다.

《일두 참, 어쩌다 왔는데.… 가만, 먼저 가보세요. 내 인츰 꾸려가지고 나갈게요.》

강학선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정철이한테두 뭘좀 보내오. 기다리고있겠는데.…》

신발을 신던 권일학은 한순간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이제나저제나 자기를 기다리고있을 어린것의 얼굴이 눈앞에 밟혀왔던것이다.

《아버지, 오늘은 인차 들어오지?》

기대어린 목소리… 권일학은 아버지가 오지 않는다고 할머니에게 떼를 쓰고있을 아들애를 생각하며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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