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그해 여름


6


수직의사인 하경옥은 수직일지를 들고 입원실을 차례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1호실, 환자 몇명이예요?》

갓난애기를 안고있던 산모가 대답했다.

《세명입니다.》

인계받은 임신부와 산모들을 확인한 하경옥은 해산환자의 맥박과 체온을 재여보았다.

《언제부터 열이 났어요? 한시간전부터?… 오로정체증이니까 열이 날수 있어요. 오늘 밤엔 별일 없겠지만 그래도 열이 더 오르면 저를 부르세요.》

다음호실로 향한 하경옥은 복도에서 반사되는 대리석바닥에 눈길을 박은채 고개를 짓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어째서인지 방금전 기술부원장과 마주쳤던 그 일이 생각났다. 그때 권일학은 그에게 례사로운 투로 직일이냐고, 그럼 수고하라고 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경옥은 다음입원실에 들어서면서도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지 못한채 기계적으로 물었다.

《이상환자가 없어요?》

입원실에서는 수직의사가 들어선것도 모르고 어머니인듯 한 중년녀인이 산모에게 덧옷을 입힌다, 머리에 수건을 씌워준다 하더니 부산스레 더운국을 떠먹이고있었다.

《숭어국은 뜨거울 때 훌훌 불며 떠먹어야 제맛이야. 밥그릇밑에 산삼이 있다구 뭐니뭐니해도 산모는 그저 많이 먹어야 젖이 잘 나온다니까.》

땀을 흠뻑 흘리며 뜨거운 숭어국을 입에 넣던 산모가 문가에 서있는 하경옥을 알아보고 황급히 녀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극성스레 숭어국을 권하고있던 중년녀인이 그제야 반색을 하며 수다를 떨었다.

《에그, 의사선생, 수고합니다. 이 애는 내 막내딸이우다. 어제 해산을 했다우. 글쎄 이렇게 입원실까지 들어오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하두 걱정되던 막내딸이 순산을 했기에 막무가내로 떼를 썼지요. 이렇게 꿀두 가져오구 숭어국도 먹이고싶어서… 원참! 조막만한 아이를 하나 낳아놓구선 그게 그리두 장해서 이렇게 떠들지 않소.》

하경옥은 미소를 그렸다.

《어머니, 괜한 걱정을 하십니다. 우리 산원에선 위대한 장군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시는 사랑의 꿀이 모든 산모들에게 다 골고루 공급된답니다. 미역국도 떨구지 않구요. 그런데 철저히 무균이 보장되여야 할 입원실에 이렇게 규정을 어기고 막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면역이 약한 갓난애기들은 물론이고 금방 해산한 산모에게도 외부접촉은 대단히 나쁘답니다.》

《글쎄, 그런걸 다 알면서두 이 늙은게 자꾸 오고싶어서…》

《어머니, 우리 의사들이 산모와 애기를 잘 돌봐드릴테니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다음번에 오시면 어머니의 막내딸과 손녀를 제일먼저 찾아드릴테니 꼭 텔레비죤면회실을 리용하도록 하세요.》

《고맙수다. 의사선생, 말 한마디에 천금이 오르내린다더니 참 마음씨두…》

하경옥은 등뒤에서 연방 혀를 차며 칭찬하는 그 녀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입원실에서 나왔다. 이럴 때 새로 온 기술부원장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가?… 어째선지 아들애를 품에 꼭 껴안던 그의 다정한 눈빛, 캐득거리던 어린 아들…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것을 왜 강학선과장은 말하지 않았을가?

그러나 다음순간 권일학의 날카로운 코마루와 주의깊은 눈빛은 인정에 무른것 같은 그 모습을 가뭇없이 지워버리고말았다.

하경옥은 처음부터 《멋쟁이》라는 권일학에 대하여 커다란 기대를 가진것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존경하고있는 강학선과장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사람이니 혹시 정말 그런 사람일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를 지켜보았었다. 하지만 정작 그를 상대하면서 실망했다기보다는 그 어떤 안정감을, 늘 부정하고싶던 겉 《멋쟁이》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에 그 어떤 정당한 리유와 근거가 있다는것을 확인한것으로 하여 마음이 편안해지는것을 느끼고있었다.

하경옥이 바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강학선과장이 말하던 《멋쟁이》는 더더욱 아니였다.

한순간 하경옥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인 일인가. 불현듯 한 남자의 얼굴을, 다시는 기억에 떠올리고싶지 않던 한사람의 모습을 또 상기하게 되는것은?…

어느해 추운 겨울밤, 그들은 대동강유보도에 마주 서있었다. 둘 다 이윽토록 말이 없었다. 그날따라 강바람이 셌다. 찌프린 하늘에서는 싸락눈이 흩날리며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엇비듬히 후려치군 했다.

이윽고 그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좀 생각해보오, 이제 지방에 내려가면 부장동지가 성책임일군으로 다시 올라올것 같소? 인젠 나이도 다되여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진 자진하여 내려가시는데…》

《답답하구만. 부장동지가 내려간다구 거기 일이 뚝 부러지게 잘되는것도 아닌데… 아버지를 위해주던 제 딸 생각두 좀 해야지.》

《…》

그 사람은 담배를 꺼내여 입에 물었다. 몇번이나 라이터를 켜댔으나 불을 붙이지 못하자 담배대를 휙 집어던졌다.

《할수 없지. 인젠 동무도 아버지를 설복할수 없다니까. 참, 우리 두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끝나게 될줄은 몰랐구만.》

《아니? 그건… 무슨 뜻인지?》

《난 지금껏 동무 아버지인 부장동지를 존경해왔소. 그 딸인 동무도 사랑했구… 부장동지가 지금직책에 그대로 남아있다면 나의 발전에도 좋았을것이고 또 동무에게도 나쁘진 않았을거요. 하지만 인젠… 동무나 동무 아버지나 전혀 내 생각은 하지 않으니 우리가 더이상 이렇게… 만날 필요가 있겠는지?》

별안간 숨이 꺽 막혔다. 어쩌면!… 차고도 매운 강바람이 놀란듯 그를 쳐다보는 처녀의 파리한 입술을 얼구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난 말이요, 생각하기를…》 그 사람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보았소. 그러나…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문제인것 같소. 결혼은 심중해야 하는거요.》

《?!…》

찬바람이 휙- 불어치며 처녀의 언 볼을 때렸다. 이번엔 바람만이 아니라 싸락눈까지 뒤섞여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니 동문?…》

《경옥이, 난 동무를 사랑했소, 진심으로.… 그러나 우린 아무래도 인젠…》

《헤여져야 한다… 그거지요?》

정작 이 말이 나오자 그의 가슴은 무너져내리는것만 같았다. 사랑을 약속하던 그날 자기의 손을 꼭 잡고 한생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그토록 열렬히 다짐했던 사람, 깨끗한 처녀의 가슴에 온 우주처럼 꽉 들어차있던 사람!…

하경옥은 믿을수가 없었다. 중앙기관의 어느 한 부장이였던 아버지가 직책상 조동으로 하여 지방의 한 국장으로 내려가게 되였다고 하여 아무 미련없이 별안간 자기와 갈라질것을 요구하고있는 그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결심을 가지고온 사람이였다. 그는 처녀를 외면하고있었다. 가슴이 아픈듯 한숨을 길게 내쉬고있다.

아버지가 사위감으로 점찍어두었던 그는 말그대로 미남자이고 멋쟁이였다. 그쯘한 이목구비와 례절바른 몸가짐,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와 표정. 얼마나 열정적이였던가.

외국어뿐아니라 문화적소양도 있었던 그는 여기 유보도를 거닐며 자기가 지은 자작시도 소리내여 읊군 하였다.


이 세상 단 하나

타산을 짓디딘 사랑이며

리기를 짓밟은 애정이며

계산을 짓누른 련정인

나의 정 나의 사랑


그는 말하군 했다. 모든것은 열매로 맺어야 한다고, 화려한 리상은 성공으로 되여야 하며 아름다운 희망은 현실로 되여야 하며 맺었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그러던 그 사람이 애인인 하경옥을 단 하루사이에 배반한것이다.

처녀는 울었다.… 배반당한 희망, 배반당한 믿음, 배반당한 사랑이 가슴을 허비여 쓰라린 그 아픔에 울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이런 인간을 가려보지 못한 자신을 저주했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가슴아픈 실련은 오래동안 처녀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있었다. 흔히 위선은 겉멋으로 드러나고 진짜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마음속깊이에 숨어있는 법이다. 하경옥은 그때부터 오늘까지 그 어떤 미남자나 멋쟁이도 믿지 않았다.

그후 경옥은 부모들과 함께 내려가 자강도의 어느 한 온천료양소 의사로 일하다가 일년후 아버지가 다시 본직무에 소환되면서 부모들과 함께 평양으로 또다시 올라오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어느덧 삼년세월이 흘러갔다. 삼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자고 애써온 처녀에게 있어서 그 몇년이 얼마나 길고 또 짧은 나날이였던가.…

그동안 하경옥은 누구보다 자신에 대한 요구를 높이고 이악하게 맡은 일을 해왔다. 시간을 쪼개며 림상기술과 수술수기를 습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힘든줄 몰랐다. 자신을 깡그리 바치는것, 배신을 모르는 갓난애기들과 환자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쏟아붓는것, 이것은 하경옥에게 있어서 의사의 신성한 본분이고 의무이기 전에 환자들에 대한 그의 사심없는 정성과 사랑이였었다.

사람들은 헌신적이고 말없이 이악한 이런 하경옥을 누구나 칭찬했고 표준으로 내세웠으며 인정해주었다. 환자치료에는 물론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무통제도 연구하여 그 나이 처녀치고는 남다르다는 인정도 받고있었다. 이러한 하경옥이였기에 가까운 사람들은 그에게 모든것을 갖춘 처녀로서 응당 그에 맞는 훌륭한 대상자를 선택하여야 한다고 귀띔했고 하경옥자신도 그렇게 믿고있는것이였다. 그러나 강학선과장이 그토록 칭찬해온 권일학은 지금 처음부터 처녀가 바라고 기대하던 그런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것이다.…

어디선가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가 여러 입원실을 돌았으며 지금은 마지막호실앞에 와있다는것을 깨달았다.

하경옥은 머리속에 맴도는 귀찮은 생각을 털어버리듯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마지막입원실에 들어섰다.

호젓한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코를 찌르는 향긋한 향수냄새… 맵시를 부리느라고 레스달린 잠옷을 입고있는 녀자도 있었다. 대체로 산모들이란 젊은 녀자들이여서 크레졸냄새가 배여있는 입원실에 종종 이런 고급향수내를 풍기거나 청높은 웃음이 그치지 않을 때도 있군 했다.

하경옥은 호실안의 산모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입원실에선 환자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구 호실에서 떠들지 말아야 하고. 그런데… 이건 뭐예요?》

누군가 방 한가운데 내리드리운 형광등스위치에 크고작은 긴 끈오래기들을 이어 침대머리맡에 비끄러매놓았던것이다.

《저, 불을 끌 때 시끄러워서…》

하경옥은 알만 하다는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어느 환자의 꾀바른 장난이였다. 누워서 당기면 불이 꺼지고 또 당기면 켜지게… 여느때 같으면 환자들의 이런 장난에 제먼저 웃어버리거나 가벼운 핀잔이라도 했을 그였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래일 아침엔 기술부원장선생의 회진이 있어요. 그때 눈에 띄우면 혼날거예요.》

수직일지를 덮은 하경옥이 입원실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울먹이는 소리로 그를 찾았다.

《선생님…》

걸음을 멈추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녀자들보다 좀 애티나보이는 산모가 울상이 되여 쳐다보고있었다. 애젊은 산모는 포단에 싸인 갓난애기를 처진 백자루처럼 어설프게 그러안고 젖을 물릴줄 몰라 애쓰고있었다.

《첫애기예요?》

《예, 그런데 애기가 자꾸 울기만 하면서…》

《그래요?!》

애젊은 산모에게 다가간 하경옥은 침대에 있는 베개를 끌어다 산모의 무릎에 고여준 다음 애기를 가슴에 바싹 안겨주었다.

《그렇게 멀찍이 안으면 어떻게 애기가 젖을 먹겠어요? 엄마도 힘들고… 애기에게 엄마가 따라가는게 아니라 애기를 엄마젖에 가까이 당겨와야지요. 그렇게 습관시켜야 해요. 자, 이젠 알겠어요?》

그가 하라는대로 하자 산모의 자세가 편안해지고 애기도 쉽게 젖을 먹기 시작했다. 너무 단순한 리치인데 그걸 모르고있다니…

《어때요? 이젠 일없지요?》

그제야 얼굴이 밝아진 산모가 눈물이 그렁해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하경옥은 방긋 웃었다.

《애기가 참 깜찍하군요.》

그는 젖을 물고있는 갓난애기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실 갓난애기들은 절대 곱지 않다. 아직 형태도 잡히지 않아 생김새가 분명치 않은데다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피덩이같은 생명, 그러나 이 세상 가장 귀여운 모습이기도 하다. 조그마한 입을 오무작거리며 끝없이 무엇인가를 웨치는 모습, 사랑해주세요, 사랑해주세요! 하고 자기의 당당한 권리를 부르짖는 그 모습을 볼 때면 누구나 절로 미소가 피여나군 하는것이다.

이 순간 하경옥은 가슴깊이 묻혀있는 그 어떤 아픔이 맑은 샘물에 씻기여 정화되고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있었다. 그 숫저운 청신함과 따스함… 그것은 방금전에 그를 괴롭히던 그 멋쟁이에 대한 회상도, 새로 온 기술부원장 권일학에 대한 싸늘한 인상도 모두 가뭇없이 날려버리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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