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제 6 장


2


해체해놓은 재단프레스앞에 설계도면을 펼쳐놓고 앉은 김세천은 한경철이 지켜보는줄도 모르고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다. 장치제작부분을 맡은 김세천은 밤낮을 잊고 끼니마저 잊은채 자기 일에 열중했다. 수자조종설비에 대한 파악이 부족한 그로서는 걸음걸음이 초행길이였던것이였다.

그것은 프로그람개발을 맡은 한경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프로그람개발은 장치제작전문가와 긴밀하게 협조할 때에만 가능한것이였다. 하지만 김세천은 그런 면에서 한경철에게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감정상으로 보아도 그와 자유롭게 말을 나누게 되지 않았다. 지금도 한경철은 그에게 무엇인가 물으러 왔지만 사색에 잠긴 그를 방해할 용기가 나지 않아 돌아선것이였다.

한경철은 점점 더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심정이였다. 김윤화지배인은 약속대로 증부가마개조를 해주었다. 증부가마는 개조되였고 학위론문의 우점과 현실성은 증명되여갔다. 하지만 고마운 편지를 해준 처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와서는 그것이 김해옥이 쓴 편지라는 생각마저 점점 사라져갔다. 자기에게 풍기는 김해옥의 랭기는 정도이상의것이였다.

하다면 그 처녀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어느날 정문에 어떤 처녀가 찾아와서 자기를 찾는다는 바람에 나가보니 고무바닥운동화를 만드는 어느 자그마한 신발공장의 3대혁명소조원 처녀였다. 증부가마개조경험을 듣자고 찾아왔던것이였다. 자기에게 편지를 보낸 미지의 처녀에 대한 호기심과 알지 못할 자격지심 그리고 하루속히 일을 끝내고싶은 조급성으로 한경철은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는 결정적으로 김해옥을 이 사업에 인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로서는 그가 가장 적임자였다. 장치제작을 전공한 전문가일뿐만아니라 실습기간 일반공작기계들을 수자조종공작기계로 전환한 경험도 가지고있었다. 김윤화지배인은 해옥이만 오겠다고 하면 그의 공장 지배인과 토론을 해서 당분간 공장사업을 도와줄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해옥은 공장으로 오는것을 거절했다. 한경철은 그것이 자기에 대한 고까움과 질시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고 조급해진 한경철은 오늘 해옥을 만나기 위하여 그가 일하는 신발기계공장으로 왔다. 원래는 퇴근하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퇴근시간이 퍽 지나도록 그가 정문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자기 방에 있다는것이였다. 접수에 이야기하고 해옥이 있는 방을 물어서 들어갔다. 두드리고 방문을 여니 콤퓨터앞에 앉아있던 해옥이 얼굴이 해쓱해지면서 일어섰다. 마치 한경철이 보지 말아야 할것이 있기라도 한듯 급히 콤퓨터를 다룬다. 그의 온몸에서 알지 못할 경계심마저 풍겨오는것 같아 한경철은 당황해졌다. 무엇이라고 말을 떼야 할지 몰라 말없이 서있었다. 그들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해옥동무.》

한경철은 조용히 불렀다. 김해옥은 대답없이 한경철을 바라보았다.

《해옥동무, 다시 부탁하는데 공장에 와서 우릴 좀 도와주오.》

해옥은 천천히 한경철의 얼굴을 외면했다.

《아직도 산판에서 있은 일때문에 성이 났다면 내 다시한번 사죄하지.》

해옥은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난 정말 바빠서 그럽니다. 그리구…》

《그리구 또 뭐요?》

해옥은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고 서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때 공원에서두 느꼈겠지만 마음은 어쨌든 우린 사람들앞에서 남자와 녀자일뿐입니다. 절 찾아오는걸 삼가해주십시오. 저도 경철동지가 있는 공장에 나타나고싶지 않아요.》

한경철은 말문이 막혀버리는것을 느꼈다. 그때 공원에서 철부지아이가 《신랑, 색시.》하고 소리쳤을 때 어쩔바를 몰라하던 해옥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도 경철이가 그 말을 시키기라도 한듯 나무랍게 바라보던 그 눈빛도 떠오른다. 그때 한경철마저도 얼굴이 후끈해 쩔쩔맸었다. 처녀는 지금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고있는것이였다.

불현듯 처녀의 모든것, 미출한 몸매며 선이 고운 얼굴, 시름기가 어린 지금에조차 그윽하게 느껴지는 두눈을 마주보기 두려워진다. 자기들이 지금 빈방에 단둘이 있다는 생각이 까닭모를 두려움과 부끄러움마저 자아낸다. 한경철은 자기를 다잡자고 모지름을 썼다.

《해옥동무! 동무가 정 우리사이를 남녀의 사이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겠다면 난 다신 동무앞에 나타나지 않겠소. 이건 믿어주오. 하지만 우린 남녀가 되기 전에 자기들의 공장을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꾸리려는 로동계급의 한 성원이 되여야 하구 그들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소? 부탁이요! 정 날 위해서 오기 싫다면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와주오! 동무 아버지는 지금 몹시 힘겨워하고있소.》

해옥은 숨이라도 찬것처럼 가슴을 들먹거렸다. 맥이 풀린듯 스르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처녀의 손이 경황없이 콤퓨터건반을 다친것 같았다. 콤퓨터가 어떤 이상한 동작을 했는지 처녀는 당황하여 마우스를 움직여 무엇인가를 해내려고 덤볐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 마우스가 잘 움직여지지 않는듯 했다.

한경철은 호기심과 의문이 갈마들어 그의 곁에 다가가 콤퓨터의 현시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한경철은 콤퓨터의 화면에 현시된 낯익은 사진을 보았다. 공장 창립절을 맞으며 수암산에서 찍은 사진이였다. 경철을 비롯한 몇사람이 식당처녀들과 사진을 찍었는데 거기에 해옥도 있었다. 한 처녀는 그 유명한 기름튀기를 손에 들고 활짝 웃고있었다. 그옆에 앉은 해옥도 어린애마냥 웃고있었다. 한경철의 얼굴에도 웃음이 어려있었다. 즐겁고도 유정한 기운이 그 사진에서 풍겨나오는듯싶었다. 많은 추억을 안겨주는 사진이다.

그런데 한경철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자 처녀는 당황하고 안타까운듯 어쩔바를 몰라했다. 빨개진 얼굴을 숙이며 입속으로 나직하게 신음소리같은것을 내질렀다. 한경철은 처녀가 방금전까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것을 알았다.

《오래간만에 이 사진을 보는구만! 해옥동무, 우리 즐거웠던 일들만 추억하자구. 사실 지금은 그때와는 반대로 내가 힘들어서 동무에게 손을 내미는데 동문 몰인정하게 거절하는구만. 그렇지 않소?》

처녀는 문득 책상에 엎드리며 두팔에 얼굴을 묻었다. 억늘린듯 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한경철은 어쩔바를 모르고 서있었다. 방안에 서린 거북하고도 이상한 침묵과 영문을 알길없는 처녀의 완강한 거절앞에 당황해지는 심정이였다.

《제발 부탁입니다. 날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가주십시오!》

처녀의 목소리가 울듯이 울렸다. 경철은 당황하고 난감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별수없이 그는 천천히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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