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2 장 량심의 선고


7


점심시간이였다. 배구경기가 벌어지고있는 산원 뒤마당은 응원소리로 떠들썩했다. 며칠전 배구그물을 쳐놓았는데 점심시간이면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물론 여느 사람들도 흥미를 가지고 다 뛰여나오군 했다. 우정 정한것도 아니지만 대체로 편을 가르면 약무, 연구소, 부인과가 한편이고 애기과, 산과, 후방이 다른 편으로 갈라지군 했다.

갑자기 와- 하는 응원소리가 높아졌다. 공중에서 오가던 배구공이 연구소쪽으로 날아왔던것이다.

《넘어온다!-》

《야- 인섭선생, 뭘해요?》

《조겨라!-》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 극성이였다. 손을 내젓고 발을 구르며 목청을 돋구고있다. 빨간 줄무늬복을 입은 환자들도 입원실창문을 열어젖히고 자기 담당선생을 응원하느라 목이 쉴 지경이였다.

《림봉주선생, 힘을 내세요!》

《정명희선생, 잘한다!-》

그때 입원실들을 돌아보고있던 권일학은 어느 한 호실에 들어서면서 미간을 찌프렸다. 여러명의 환자들이 창문에 매달려 법석 떠들고있었던것이다.

《이건 뭐요?》

창문에 몰켜서 웃고 떠들던 환자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엄하게 지켜보고있는 기술부원장을 보자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권일학은 아직 열려져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뒤마당에서는 여전히 배구경기가 열을 띠고있다. 경기장밖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던 경리부원장 박준영이 자기 편 선수 하나를 끌어내더니 웃동을 활 벗어던지고 그를 대신하여 들어갔다. 그러자 어찌된 셈인지 기울어지던 그 편의 형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또다시 왁작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권일학은 점도록 경기장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그도 웃동을 벗어던지고 경기장에 뛰여들었을것이다. 그러나 저 박준영이처럼 멋지게 조겨댈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는 그렇게 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이때 조심스럽게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저… 부원장선생님.》

돌아보니 강학선의 모험때문에 재수술을 했던 선우금숙환자였다. 녀인은 무엇인가를 말할듯 하더니 자신없이 고개를 숙이였다.

권일학이 물었다.

《왜 그러오?》

《저… 한가지…》

《그래 수술자리는 어떻습니까?》

《일없습니다. 이젠 이렇게 걸어다니기도 하고 운동두 하구…》

체소하고 어쩐지 기력이 진해보이는 녀인이 애써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늘진 그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럴수도 있는 일이다. 간혹 큰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과민반응으로 불안한 심리에 빠져들군 하는데 그것을 그냥 두면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치료효과를 볼수 없다.

이런 환자들에게는 지금 가장 정확한 치료대책이 세워지고있으며 환자가 의사들을 전적으로 믿고 함께 노력하면 꼭 완치된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것이 중요한것이다.

권일학은 따뜻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술이 잘되였으니까 인차 건강이 회복될겁니다.》

《고맙습니다, 부원장선생님.》

녀인이 머리를 쳐들었다. 간절한 눈빛이였다.

《그런데 저… 부원장선생님, 이제 전 어떻게 됩니까? 저에게도 아이가 생길수 있을가요?》

권일학은 두눈을 흡뜨며 굳어졌다. 뭐라구?!…

녀인은 기술부원장의 한마디 대답에 자기의 온 생애가 달려있는듯 긴장한 눈길로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있었다.

권일학은 녀인의 눈길을 피해 탁우에 놓여있는 위생선전카드를 바라보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환자는 지금 그에게 생명의 담보만이 아니라 산부인과 의사로서 녀성의 간절한 소망까지도 책임질수 있는가고 묻고있는것이다.

녀성의 소망과 행복!… 강학선은 이 환자가 바라는 그 소망때문에 그를 죽일번 했다. 바로 지금처럼 이 녀인의 강렬한 호소에 못이겨 위험한 모험을 했던것이다. 그런데 나는?… 생명은 살렸지만 어머니가 되고싶어하는 한 녀성의 소망은 영영 꺾어버리지 않았는가?… 생명 그리고 어머니가 되려는 소망! 이 환자는 어느것을 더 바랐을가? 혹시 이 녀성도 어머니가 되려는 소망을 자기의 생명과 바꾸려고 한건 아니였는지?…

권일학은 가슴이 답답해오는것을 느끼며 창문에서 물러났다. 더운 공기를 들여마시고나서 지금껏 밖을 향해 떠들어대던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입원실에서 떠들면 안되겠소. 앞으론 주의하시오.》

그리고는 돌아섰다. 방에서 나가고싶었지만 여전히 타는듯 한 눈빛으로 자기를 지켜보고있는 선우금숙녀인의 앞을 그대로 지나칠수는 없었다. 그는 눈길을 떨구며 신음소리처럼 나직이 말했다.

《그 대답을 지금은… 줄수가 없구만.》

녀인이 입술을 깨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흐느낌소리가 들렸다. 권일학은 머리를 떨구고 입원실을 나와버렸다. 원망어린 녀인의 흐느낌소리가 그냥 따라오는것만 같았다.

그는 쫓기듯 복도 한끝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어서 자기 방에 내려가 문을 닫아걸고 오래동안 혼자 있고싶었다. 쏘파에 몸을 던지고 모든것을 다 잊고싶었다.

어느 한 문앞에 이르러서야 그는 자기가 제 방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복강경수술장에 왔다는것을 깨달았다. 이왕 온김에 서범천을 만나보는것이 좋을듯 했다.

그동안 그는 원장, 당비서와 토론하여 산과의 작은 방을 차지하고있던 복강경수술장을 부인과가 있는 9층의 넓은 방으로 옮기고 앞으로 과학기술축전에 나갈 복강경수술을 적극 밀어주고있었다.

이를 두고 서범천은 물론 자진하여 꾸리기에 동원된 젊은 의사들과 간호원들도 권일학을 고맙게 생각하고있었다.

권일학은 문을 열었다. 열리지 않았다.

어디 갔는가.… 배구경기장에서 아직 올라오지 않은 모양이였다.

그가 돌따서려는데 갑자기 승강기가 있는 복도굽인돌이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학선과장과 기술부원장, 모든것은 자기의 균형이 있기마련이거던. 그들은 너무 가까웠어. 그러니 때가 되여 인정도 흐름방향을 바꾼거지.》

권일학 자기에 대한 말이다. 어느 녀석인가? 저런 황당한 론리를 만들어내는 녀석이?…

비웃음이 섞인 그 목소리는 계속되고있었다.

《두고보라구. 그들은 다시 가까와져! 앞으로 갔다간 뒤로 물러나고, 또 뒤로 물러났다간 앞으로 전진하고… 이건 균형과 조화를 맞추기 위한 필요한 공정이지. 앞으로 적당히 갈줄도 알아야 하지만 뒤로도 적당히 물러설줄 알아야 한단 말이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배구경기를 끝내고 올라오는 불임증연구실 연구사 위인섭이였다.

《하, 그것 참 멋있는 론리구만!…》

누군가 그 말을 긍정하는데 반박하는 말이 뒤따른다.

《아니, 엉터리없는 론리요! 난 기술부원장선생이 더 원칙적이라고 보오.》

서범천의 목소리였다. 누군가 또 말했다. 노래부르는듯 한 목소리, 그것은 하경옥이였다.

《서범천선생은 기술부원장선생의 립장을 지지한다는거예요?》

《그렇소. 난 공감이요.》

《의사의 사업대상은 환자예요. 인간성을 배제한 원칙성이 과연 의사의 량심이라고 봐야 할가요?》

《글쎄, 결코 그렇다고만 볼수 없지만 의사가 인정에 사로잡혀 생명을 모험한다면…》

기다리기나 한듯 위인섭이 제꺽 그의 말을 받았다.

《의학적으로 절대 용서할수 없다! 이게 바로 기술부원장선생의 립장이지. 어쨌든 그들은 너무 가까왔어. 그래서 지금 조화와 균형을 맞추기 위한 거꿀법칙, 이를테면 거꿀정리에 들어간거구.》

갑자기 이야기가 뚝 끊어졌다. 굽인돌이에 서있는 권일학을 보고 모두 흠칫 놀라 멎어섰던것이다. 위인섭이 먼저 당황해하며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처녀같은 몸매에 목소리도 부드러운 미남자 위인섭, 어렸을 때 집단체조에서 공중특기동작을 했다고 늘 자랑하는 그는 자기가 바로 미세한 혈관수술이나 녀성들의 소원을 풀어주는 첨단기술을 지망하여 여기 산원으로 자원해왔노라고 하는데 특이한것은 남달리 뒤로 걷기를 잘하는것이였다. 일단 뒤를 돌아보고 목표만 정하면 열걸음, 스무걸음도 거침없이 뒤걸음쳐가군 했다.

앞으로 가는것에 못지 않게 뒤로도 잘 가는 그를 두고 사람들이 혀를 차며 감탄하면 그는 으쓱해서 말하군 했다. 거꿀정리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거꿀셈법, 거꿀차례, 거꿀흐름… 원래의 정리에 상대하여 이른다는 수학적용어이다. 그러면 수학이란 무엇인가? 수학이란 자연의 언어라고 한다. 자연을 떠나 살수 없는 인간은 이 자연의 언어에 응당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정한 흐름이 방향을 바꾸고 되돌아가게 하는 이 거꿀정리야말로 인간생활에도 꼭 필요한것이다.

뒤로도 가야 한다. 앞으로 가는것만큼 뒤로 갈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파괴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원리로부터 나는 거꿀보행이라는 새로운 의학치료법을 발명하려고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위인섭이여서 남들이 만보걷기운동을 할 때 그는 뒤로 천보걷기운동을 하군 했다.

권일학은 그처럼 익살스런 소문이 많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균형과 조화라?… 참 그럴듯하구만. 그게 선생이 발견한 거꿀정리라는거요?》

《아니, 전 사실…》

위인섭은 딱한듯 옆에 서있는 사람들을 곁눈질해보았다.

《됐소, 그건 그렇구 선생은 요즘 새로 나온 배란유발제에 대한 자료를 보았소?》

《저, 아직…》

《지금 내 책상우에 있소. 와서 가져가시오, 이제 곧.》

권일학은 아무 일도 없은듯 그의 뒤에 서있는 서범천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그는 근래에 와서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는 찌르는듯 한 눈길이 다시 자기 등뒤에 와닿는것을 느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가 하경옥이라는것을 알고있었다.

하경옥! 그는 강학선이 말한대로 드물게 보는 처녀였다. 무시로 차례지는 야간수직과 중환자들 그리고 낮과 밤이 따로없이 계속되는 수술…

산과의사들에게 겹치는 이 모든 고생과 그로 하여 쌓이는 피로를 그 처녀에게서는 찾아볼수가 없었다. 늘 밝고 친절하여 의사들과 환자들이 좋아하는 녀의사…

그러나 권일학은 여느 사람들처럼 스스럼없이 웃으며 하경옥과 마주 설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 처녀의 검은 두눈을 스쳐볼 때면 마치 따스한 등불을 켜고있는듯, 그리하여 자기의 마음도 후더워지는것을 느끼군 했지만 어쩐지 선뜻 그 등불에 다가설수가 없었다.

언제든 하경옥에게 말해주어야 할것이다. 그가 연구한 무통법, 지금 산과에서 쓰고있는 미량모르핀에 의한 경막외무통해산법의 치명적인 결함에 대하여, 그 불합리성에 대하여 터놓고 말해주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지금 권일학은 그 무통법을 두고 하경옥과 진지하게 마주앉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있었다.

사람들속에 있던 하경옥이 그를 외면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권일학은 보지 않고도 주위를 비치던 등불이 꺼진것을 알았으며 그 처녀가 복도 저쪽으로 소리없이 사라져가는것도 느끼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였다. 서범천과 마주서자 또다시 복강경문제가 그의 머리를 사로잡았던것이다.

권일학이 물었다.

《그래 동물실험준비는 다 됐소?》

《예, 실험계획서도 이미 다 세웠습니다.》

권일학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수고했소. 단계별목표부터 명백히 세워야 하오. 그래야 과학기술축전에 자신있게 나갈수 있게 되오.》

서범천이 커다란 입가에 구름같은 미소를 피워올렸다.

《걱정마십시오. 기술부원장선생이 이렇게 관심을 돌려주고 밀어주는데 꼭 해내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오.》

권일학은 그에게 다시한번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위인섭을 돌아보았다.

《갑시다.》

위인섭은 이가 쏘는 사람처럼 잔뜩 찌프린 얼굴로 마지 못해 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엇이 편치 않은지 그냥 킁킁 코소리를 내고 입술을 실룩거렸다.

방에 들어선 권일학은 위인섭에게 의자를 권한 다음 책상우에 놓았던 새 기술자료를 내밀었다.

《인섭선생, 이걸 좀 보오. 우리도 이런 유발제를 사용한다면 체외수정연구를 앞당길수 있지 않을가?》

위인섭이 권일학을 곁눈질해보았다.

《그거야… 기술부원장선생이 더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자연주기보다 다배란유발제를 쓰게 되면 채란하기 더 쉽다는걸 말입니다.》

물론 권일학이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은 다배란유발제를 쓰지 못하고 자연배란에만 매달려 채집하기때문에 연구사들이 밤잠을 못자고 배양이 제일 잘되는 새벽 3시에야 채란을 진행하고있었다. 그렇게 하면서도 다배란유발제를 쓰는것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고 성공률도 훨씬 떨어지군 했다.

권일학은 그 다배란유발제를 아직 쓰지 못하고있다는것을 알면서도 눈물에 젖어있는 선우금숙환자를 볼수 없어 이렇게 위인섭과 마주앉은것이다.

권일학이 기대어린 눈길로 위인섭을 바라보았다.

《이 다배란유발제만 있으면 해낼수 있다는거요?》

위인섭은 아직도 무엇이 못마땅한지 뿌루퉁한 얼굴로 기술잡지를 들여다보는척 하고있었다.

《그렇게 따지구드니 글쎄 뭐… 기술부원장선생두 알다싶이 연구사업에 요구되는게 어디 한두가집니까? 다배란유발제만이 아니라 호르몬측정키트도 있어야 하지, 배아배양을 위한 탄산가스부란기도 있어야 하지…》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였다. 체외수정은 첨단기술인것만큼 거기에 드는 약제나 기구들도 그에 맞게 현대적이고 값비싼것이여야 했다.

《하지만 인섭선생, 그런것이 없다고 지금껏 연구사업을 못한건 아니지 않소? 선생만 보아도 우리 나라 시약으로 배양액을 제조하는데 성공하지 않았소. 그래서 난 그 누구보다 선생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있는데…》

위인섭이 그를 쳐다보았다.

《기술부원장선생은 왜 체외수정연구에 그렇게 관심이 높습니까. 우리 연구소가 산과나 부인과에 속하는것도 아닌데…》

옳은 말이다. 위인섭은 산과나 부인과가 아니라 연구소부문 사람이다. 행정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과학부소장의 연구소산하인것이다. 하지만 불임증연구와 위인섭에 대하여 무관심할수 없는 권일학이였다.

《인섭선생, 체외수정연구가 어떻게 남의 일이겠소. 나야 산원의 기술부원장이 아니요. 난 인섭선생이 이 연구에서 누구보다 앞서나가고있다는것을 알고있소. 그래서 선생의 명석한 두뇌에 탄복하는것이고.》

위인섭이 눈을 흡뜨며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것은 거꿀정리를 론할 때처럼 불신이 담긴 그런 눈빛은 아니였다.

《글쎄, 저를 그렇게 믿어주고있다니 고맙긴 한데.》

《인섭선생,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있소. 지금 많은 불임증환자들이 선생이 하고있는 체외수정연구가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있소. 인섭선생이 하루빨리 성공하여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게 된다면 우리 녀성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소. 정말 그렇게만 될수 있다면 난 무엇이든 다 도와줄 생각이요.》

점차 위인섭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는 조금 오만해보이는 눈길로 권일학을 마주보았다.

《저를 도와주겠다구요? 전 기술부원장선생이 무엇이나 무자비하게 조겨댈줄만 아는 사람인가 했었는데… 좋습니다! 기술부원장선생이 복강경수술만이 아니라 우리 체외수정연구도 함께 밀어주겠다면 지금 하고있는 연구를 몇달내로 완성해놓겠습니다.》

권일학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했다.

《그게 정말이요?》

방금전만 해도 쏘는 이를 문것처럼 잔득 찌프러졌던 위인섭의 얼굴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였다.

《예, 장담합니다. 믿으십시오!》

권일학은 그 말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한듯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았다.

자기의 총명을 으시대는듯 한 거만한 표정과 남을 깔보는데 습관된 그의 눈빛, 이런 위인섭이 지금 그 어떤 자존심때문에 속이 빈 대답을 하는건 아닌지?…

권일학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있는 그의 장담이 어느 정도 희떱게 들리긴 했으나 곧 머리를 저으며 그 생각을 부정해버렸다. 선우금숙환자에게 행복을 주자면 그를 믿어야 하며 또 높은 요구속에 끊임없이 채찍질을 해야 하는것이다.

《인섭선생, 고맙소. 내 힘껏 돕겠소!》

그때 몸이 실한 과학부원이 들어와 알렸다.

《부원장선생님, 과학평의회성원들이 다 모였습니다.》

《알겠소.》

앞으로의 체외수정연구를 놓고 여러가지 대책안을 토론하고난 권일학은 이제 과학평의회에서 보게 될 강학선을 생각하자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날 저녁 과학평의회가 끝나자 권일학은 강학선의 집으로 향했다. 용기를 내여 떠난 길이였지만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떠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무엇때문에 여기로 걸음을 옮겼는지, 또 그를 만나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지 그자신도 알수 없었다. 그 어떤 충동에, 그를 꼭 만나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으로 이렇게 강학선의 집을 찾아왔으나 정작 문앞에 서니 그전처럼 스스럼없이 종을 누를수가 없었다.

문득 과학평의회에 참가했던 강학선의 어두운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한쪽구석에 고개를 떨구고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강학선, 그는 지금 처벌을 기다리고있지만 아직 과학평의회성원이므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던것이다.

과학평의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과학평의회가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 식의 피멎이약을 만들어낸 고려과 전재운의사의 새 기술도입과 그의 론문이 어떻게 심의에서 론의되고 통과되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야 황급히 구석에 놓인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재빠른 눈길로 강학선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먼저 방에서 나가버린 뒤였다. 권일학 자기를 피하고있는것이다. 꼭 하고싶은 말이 있었는데…

권일학은 오늘 강학선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는 영영 그와 마주서지 못할것만 같아 과학평의회가 끝난 다음 그길로 이렇게 달려왔던것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권일학은 종을 누르려던 손을 멈추고 그만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좀더 세게 두드렸다. 너무 크게 두드린것 같다.

이어 갈린듯 한 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예요?》

《예, 권일학입니다.》

동안이 지나서야 강학선의 안해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녀자는 문앞에 서있는 권일학을 떨리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철이 아버지군요. 그런데 어떻게?…》

《과장선생을 만나러 왔습니다.》

잠시 눈길을 떨구고 망설이던 오기화가 고개를 들며 그에게 미안한듯 나직이 말했다.

《저, 그인 지금… 술을 많이 마셔서…》

《예?》

권일학은 그만 자리에 굳어졌다. 갑자기 두다리가 뻣뻣해지고 손끝이 저려났다. 강학선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사람이다. 절제가 강한 사람이다. 누구보다 이런 강학선을 잘 알고있는 권일학이였다.

사실 그는 과학평의회에 참가했을 때 회의가 끝나면 꼭 강학선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서로 만나 진심을 터놓고 말하고싶었다. 의사의 량심과 생명에 대해서, 림상리론과 실천에 대하여 그리고 진정으로 되는 비판과 동지적충고에 대하여 가슴을 활 열고 이야기하고싶었었다. 그래서 회의가 끝난 다음 그를 눈여겨 찾아보았고 그가 보이지 않자 이렇게 밤늦어 집에까지 찾아왔던것이다.

오기화가 죄스러운듯 그를 쳐다보았다.

《정철이 아버지, 미안해요.》

눈물이 그렁한 그 녀자의 두눈은 그 어떤 원망과 괴로움으로 하여 흐려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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