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3 장 사랑하면 무엇이든 다 열린다


1


찌물쿠던 더위는 물러가고 하늘은 높아져갔다. 나날이 거리의 가로수들에서는 많은 단풍잎들이 떨어져내려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발밑에서 부시럭거리군 했다. 가을이 시작된것이다.

그날도 하경옥은 여전히 환자치료에 여념이 없었다. 위급한 환자를 수술하고 산부의 해산을 방조한 다음 처치를 끝내고 새 환자에게 위생지식과 해산전 아픔덜기상식을 설명해주고났을 때는 거의 점심시간이 되여오고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산모의 기능진단반복검사를 끝내고 환자와 함께 복부초음파실을 나선 하경옥은 만족하게 웃었다.

《이젠 됐어요. 모든것이 정상이니…》

중년나이의 다산모가 걸걸한 목소리로 제꺽 그 말을 받았다.

《아, 그렇잖구요. 숱한 애들을 낳구두 고뿔 한번 앓지 않은 이 박월선이 이번 아홉번째 임신이라구 무슨 별일이 있겠나요?》

《그래도 검사는 꼭 해야 해요. 더구나 월선아주머닌 아이를 많이 낳은 다산모가 아닌가요.》

《원, 하선생두… 그러게 내 이 산원에만 오면 꼭 하선생에게 맡겨달라구 한다니까요.》

그건 사실이다. 지금 아홉번째 아이를 낳으려고 평양산원에 입원한 박월선은 여기 올 때마다 늘 원장에게 떼질하여 제기하군 했다. 누구보다 책임성이 높은 하경옥이 자기를 맡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번에도 하경옥이 그를 담당하게 되였던것이다.

《자, 그만하고 이젠 호실로 올라가자요.》

하경옥이 그를 환자용승강기로 이끌었다.

《잠간만, 하선생. 내 인차 안내실로 좀 갔다오겠어요.》

《거긴 왜요?》

《집에서 누가 왔다는데… 아까 간호원이 내려가겠다는걸 내가 그만두게 했어요. 이왕 여기까지 내려온김에 내가 만나겠다구요.》

《그래요? 그럼 어서 가보세요. 전 홀에 있는 퇴원환자기다림칸에서 기다리겠으니…》

아래층에 있는 퇴원환자기다림칸은 조용했다. 점심시간이여서 언제나 외래환자들과 퇴원환자들로 붐비던 넓은 홀과 복도에도 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한쪽에 주런이 놓여있는 하늘색 긴 수지의자에 앉은 하경옥은 박월선의 검사지표들을 들여다보며 앞으로의 치료계획을 다시 상기해보고있었다.

그때였다.

《저, 미안하지만 한가지 물을수 있을가요?》

부드러운 녀인의 목소리에 하경옥은 고개를 들었다. 첫눈에도 옷차림이 세련되여보이는 30대의 녀성이 그앞에 서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저…》

녀인은 말을 떼기 저어하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병이 있어 온것같지는 않았다. 산과에 입원해야 할 임신부는 더구나 아니였다.

《어서 말하세요, 병원에 찾아왔을 때야 의사의 방조가 필요해서 오셨겠는데…》

그제서야 녀인이 힘들게 말을 떼는것이였다.

《산원에선… 한두달된 임신부의 요구도 들어줄가요?》

하경옥은 밝게 웃었다. 가끔 나이들어 첫 임신한 녀성들은 괜히 걱정스러워하면서 이렇게 산원에 자주 출입하는 경우가 있군 했던것이다.

《환자의 요구를 들어주는게 병원이 아닌가요? 걱정마세요. 잘 봐줄겁니다. 아마 첫아이인게지요?》

《아니예요. 딸애가 하나 있답니다.》

《오, 그럼 인민군대영웅감을 하나 더 낳아야겠구만요. 딸자매를 잘 키워도 좋은 일이구요.》

녀인이 또다시 머뭇거리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그런데 바라지 않은 아이가 생겨서…》

하경옥의 눈빛이 굳어졌다. 아이를 바라지 않다니?…

그의 이런 속생각을 넘겨짚은듯 녀인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전 딸애 하나만 잘 키워볼 생각이예요. 남부럽지 않게 훌륭히!…》

《그건 아주머니 혼자 생각이예요? 아니면 남편도?》

《세대주는 아이가 생긴것을 모르고있어요. 제가 알려주지 않았어요.》

하경옥은 녀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지난날에는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식을 많이 낳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우대해주고 내세워주고있다.

녀인에게 자리를 권하며 하경옥이 다시 물었다.

《딸애가 지금 몇살인가요?》

자리에 앉으며 그 녀자가 대답했다.

《여섯살이예요.》

《다 키웠구만요. 그런데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건?…》

《방금 말했지만 전 아이를 하나만 키우자는거예요. 그래야 딸에게도 좋고 사회생활을 하는 내게도 유리하거던요. 전 매일 대중앞에 나서야 하는 해설강사랍니다. 언제나 볶이우지요.》

그러니 아이를 키우는것이 그에겐 부담이 된다는것이다. 그래서 임신한 아이를 없애려 하는것이다.

하경옥은 저도 모르게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의사들을 찾아오다니?…》

그때 보자기에 싼것을 들고 불쑥 나타난 박월선이 남자처럼 걸걸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에이구, 하선생! 자, 어서 이걸 좀 맛보라구요. 우리 〈소-대장〉이 집에서 딴 사과를 보내왔다우.》

《아니, 애아버지가요?》

방금까지 마음이 무거웠던 하경옥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녀인이 말하는 《소-대장》이란 여덟명의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전연 가까운 농장에서 축산반 반장으로 일하는 그 녀자의 남편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생김새처럼 성격도 괄괄한 박월선은 남자들도 얼굴을 붉히는 우스개소리를 곧잘하군 했는데 자기가 말하는 《소-대장》이라는 의미는 소들을 키우는 대장이라는 뜻이라고 우스개처럼 말하군 했었다.

박월선이 빈 의자우에 사과들을 와락와락 쏟아놓으며 괄괄한 성미그대로 떠들어댔다.

《자, 어서 하나 들어봐요. 하선생, 늘 나때문에 잉어탕을 해온다, 닭곰을 해온다 하며 수고하는데… 이 신셀 뭘루 다 갚을가? 하선생마음에만 든다면 내 이제라도 하늘에서 졸고있는 견우를 업어오련만…》

하경옥은 떨어질듯 굴러가는 사과알들을 손으로 막으며 소리내여 웃었다.

《아주머니도 참!… 저에겐 그런 견우가 필요없어요.》

《원, 무슨 말을! 하늘에 직녀가 있으면 견우도 있기마련이지. 아니, 그럼 혼자서 오작교를 건느겠어요?》

하경옥은 다시금 웃고말았다. 언젠가 음력 7월 7석 민속음식경연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에도 사람들은 하경옥을 두고 견우와 직녀가 어떻다느니, 또 오작교가 어떻다느니 하며 법석 떠들어댔다. 그리고 강학선과장은 하경옥의 견우가 농마국수를 좋아한다고 하여 사람들을 웃기기까지 했었다.

견우와 직녀! 하경옥이 저 밤하늘의 직녀라면 견우는 또 누구란 말인가?… 문득 권일학의 훤한 얼굴이 떠올랐다. 높은 실력과 뛰여난 림상경험, 사업에 대한 강한 요구성, 그것은 누구나가 다 기술부원장 권일학을 존경할수 있게 하는 일군의 중요한 품격이였다.

그러나… 하경옥은 숨막히도록 가슴을 짓누르던 그날의 림상비판회의를 잊을수 없었다. 그날 고통스럽게 이지러지던 강학선과장의 어두운 얼굴, 그를 가차없이 곤경에 몰아넣던 기술부원장의 랭랭하고 엄숙한 론거… 하경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다신 그 일을 상기하고싶지 않다, 다시는!…

이런 그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박월선이 청높은 소리로 말했다.

《에그, 앞으로 어떤 견우가 하선생을 데려가겠는지. 참, 그 사람도 한심하다니까. 이렇게 맘씨 고운 직녀를 두고 그냥 졸고만 있으니… 안 그래요, 하선생?!》

하경옥은 옆에 앉아있는 해설강사에게 사과 한알을 권하며 조용히 대꾸했다.

《그런 말은 그만두고 아주머닌 어서 열번째 귀염둥이를 낳을 생각이나 하세요.》

《에그, 그거야 이미 가정계획에 들어간건데 뭐. 이제 두고보라요, 내 하선생 정성을 봐서라도 꼭 열번째 아이를 또 낳을테니.》

그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해설강사가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뭐 열번째 애를?…》

하경옥은 이내 밝게 웃으며 그에게 말해주었다.

《벌써 〈만세〉라구 이름까지 다 지어놨답니다.》

《아니, 그럼 아주머니가 전국어머니대회에 참가하여 토론한 그 녀성이란 말이예요?》

역시 해설강사가 달랐다. 아마도 그는 국내에서 벌어지는 숱한 일들을 거의나 다 기억하고있을것이다.

박월선이 생긴 그대로 걸걸하게 받아넘겼다.

《왜 그렇게 보오? 난 이렇게 막 빚어놓은 메주덩이같아도 우리 여덟애들은 하나같이 미끈절삭하게 잘났다오, 배우들같이… 헌데 사진을 많이 찍어간 기자선생들이 볼품없는 나만 신문에 내지 않았겠소?》

해설강사녀인은 웃지 않고 머리만 끄덕이였다.

《신문과 텔레비죤에서 많이 보았어요. 이렇게 만나보니 어머니대회 토론자가 다르긴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게… 어쩌문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을 할수 있었는지?…》

박월선이 손을 홱 내저었다.

《원, 무슨 말을…》

하경옥은 바로 이 기회에 해설강사녀인에게 《해설》해주는게 옳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평양산원만이 아닌 온 나라가 박월선을 따뜻이 맞아주고 위해주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박월선의 일곱번째, 여덟번째 아이를 받으러 군당책임비서와 군인민위원회 위원장이 평양산원으로 달려오고 전국각지에서 보내오는 수많은 물품을 안은 보건성의 책임일군들과 상업성의 일군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던 일…

특히 많은 아들딸들을 낳아 조국보위초소에 세운 그를 당에서는 적극 내세워주고 그들부부의 수고를 헤아려 가족모두가 평양에 올라와 마음껏 휴양하면서 여러곳을 참관하도록 하여주었을뿐아니라 그들이 참관을 마치고 내려갈 때에는 애들을 키우는데 필요한 랭동기며 꽃포단, 영양가루와 학생교복, 학용품들과 고급부엌세간까지 일식으로 갖추어보내준 사연에 대하여…

그때 박월선녀성은 자기 가정이 받아안은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앞으로 아이를 더 낳아 그 애들모두를 우리 장군님의 병사로 내세우겠습니다. 어버이장군님, 저의 아들딸모두를 장군님의 병사로 받아주십시오!…》

《야! 정말 놀랍구 대단하군요.》

해설강사녀인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지금껏 웃고 떠들던 박월선이 정색하여 말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요, 대단하다구… 난 그저 여덟남매를 낳았을뿐 나라에서 그 애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마음껏 공부시켜 내세워주었지요. 우리 장군님께서 안아키우고 내세워주셨으니 난 그저 자나깨나 우리 애들모두를 하나같이 끌끌한 총대병사로 키울 생각뿐이예요.》

해설강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 손에 쥔 사과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있었다. 어린애와 녀성, 가정과 사회생활 그리고 리기와 보답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순간 박월선이 그제야 생각난듯 옆에 놓아두었던 비닐구럭을 펴보이며 다시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에구마! 내 정신 좀 봐.… 하선생, 이걸 좀 보라구요. 글쎄 그 박현희라는 군대처녀가 우리 〈소-대장〉에게 이렇게 도라지를 보내오지 않았겠어요? 내가 도라지무침을 좋아한다구…》

《정말이군요.》

《여기 편지두 함께 보내왔다오. 우리 애들이 앓지 않고 모두 잘있대요. 리당에서랑 마을사람들이 잘 돌봐줄텐데 부대군의소에서까지 늘 관심해주니 참…》

하경옥은 박월선의 마을에서 멀지 않은 군부대군의소에서 박현희간호장이 복무하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리진료소에서나 군인민병원에서 아이들이 많은 박월선의 가정에 담당의사까지 정해주었으나 그들부부는 한밤중 급한 일로 애들이 앓을 때면 늘 가까운 그 군의소로 달려간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하여 아이들이 많은 박월선의 가정과 군부대군의소는 뗄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으며 애기간호원이였던 박현희간호장과는 한집안식구처럼 되였던것이다.

박월선이 청높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글쎄 현희간호장이 편지에 쓰기를 앞으로 산원에 돌아오면 열번째 우리 애기간호는 자기가 꼭 맡는다나요. 원, 간호장두…》

박월선은 손등으로 코밑을 문질렀다. 현희의 편지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것 같았다.

하경옥은 환자후송으로 평양에 올라오는 기회때마다 산원에 들리군 하던 박현희의 군복입은 모습을 그려보았다. 멀리 전연구분대에 가있어도 평양산원과 늘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는 처녀. 그 처녀가 오늘도 기쁜 소식을 보내왔으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처녀인가.

하경옥은 해설강사에게 물었다.

《어때요. 우리 산원엔 좋은 일이 참 많지요?》

《그래요.》 해설강사가 기다렸다는듯 재빨리 말했다. 《모든게 얼마나 좋은지… 내가 오늘 이렇게 좋은 얘길 듣자구 선생을 만난것 같아요.》

모두가 즐겁게 소리내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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