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제 3 장 사랑하면 무엇이든 다 열린다


9


비여있는 복강경수술장을 돌아보며 권일학은 대홍단에 갔던 림숙정당비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당비서방으로 내려갔다. 그 나이에 치료대를 이끌고 천리길을 갔다오느라고 얼마나 수고했으랴.

문을 열고 들어서니 림숙정이 혼자 앉아있었다. 권일학은 반갑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다음주에 돌아오신다고 하더니 어떻게 벌써?…》

림숙정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책상에 눈을 박고 까딱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

권일학은 주름이 더욱 깊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비서동지…》

여전히 림숙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권일학은 후에 다시 올 생각으로 조용히 문쪽으로 돌아섰다. 림숙정이 찾은것은 그때였다.

《거기 좀 서게!》

권일학은 주춤 멎어섰다. 어떤 예감에 온몸이 굳어졌다.

그가 돌아서자 림숙정이 앉으라는 소리도 없이 눈을 치떴다.

《힘들어서 자리를 내놓겠다구 했다면서?…》

권일학은 눈길을 떨구었다. 그가 편치 않게 기다려온것이 바로 이것이였다. 저도 모르게 목구멍이 졸아들었다.

《저…》

당비서는 다 알고있다. 그래서 그 먼길을 서둘러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림숙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뜻밖일세. 그래 전쟁때라면 어떻게 될것 같나? 대오에서 떨어지겠다고 제기한다면 말일세.》

《저, 사실은…》

림숙정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전쟁때라면 용서가 없어! 내가 자꾸 전쟁때 소리만 한다구 뒤에서 쑥덕거리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래도 해야겠어. 우린 늘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하니까. 아무리 힘이 들어도 큰 병원의 기술부원장이 그렇게 나약하게 처신하다니. 그래 전투장에서 물러서려는 전사를 용서할수 있는가?…》

《…》

입이 얼어붙은듯 했다. 당비서의 한마디한마디가 수술칼처럼 가슴을 저며내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왜 말을 못해. 무슨 의견이 있소?》

《아니, 그런게 아니구…》

그는 탁자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싸늘해진 림숙정의 두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비서동지, 정말 일하기 힘듭니다. 모두 제 가고싶은데로만 달아나버리구… 원칙을 세우자고 하면 일군의 인간성을 걸고 비판하지… 사람들이 리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원장선생도 그렇지요, 기술진영이 하나하나 무너지는데도 도의적문제만 절대시하니 정말… 힘에 부칩니다.》

《그만하라구!》

림숙정이 소리쳤다. 석쉼하고 갈린 목소리였다. 도수안경이 번득이고 손이 후들거렸다. 그가 다시 소리쳤다.

《뭐, 사람들이 리해하지 않는다구?… 허, 내가 잘못 봤지! 손탁두 세구 자존심두 강한 사낸줄 알았더니… 계집애들처럼 우는소리만 하는 졸장부였어! 응, 제 체면만 생각하는 옹졸한 졸장부… 정말 그런줄 몰랐네. 동문 기술부원장자격이 없어!》

《예?》

별안간 숨이 꺽 막혔다. 두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손아귀가 아프도록 으스러지게 탁자를 잡아쥐였다.

자격, 체면!… 물론 자기가 힘에 겨워 맥을 놓았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자기의 심정을 잘 알리라고 믿었던, 그리하여 많은것을 리해해주리라고 믿었던 당비서가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었다.

따르릉!-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누구도 받지 않았다. 한번 또 한번… 여전히 따르릉거린다.

한동안 웅크리고 앉아있던 림숙정이 몸을 일으켜 전화기에로 손을 뻗치더니 갑자기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음-》

권일학이 급히 다가서려고 하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의사로서의 본능으로 권일학은 지금 그에게 안정이 필요하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여 그는 전화기에로 다가가 송수화기를 들었다놓았다. 하지만 또다시 따르릉거리는 전화종소리… 이번에는 아예 송수화기를 내려놓고말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송수화기에서 어떤 녀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새여나오더니 지친듯 끊어져버렸다. 권일학은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림숙정이 허리를 펴며 약봉투에서 알약을 꺼내 입에 물었다. 권일학이 재빨리 보온병에서 물 한고뿌를 떠서 가져다주었다. 천천히 물을 마시고나서 림숙정은 권일학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정이 어려있는 눈빛이였다.

《여기 와앉게, 기술부원장…》

그는 손을 내밀어 자기가 앉아있는 쏘파 한끝을 가리켰다. 《좀전엔 내가 너무했던것 같네. 그래도 우리 산원의 기술부원장이구 적지 않은 간부인데 큰소리를 쳤으니… 이보라구, 다신 그런 소릴 말게. 기술부원장밑엔 과장들만 해도 수십명이나 되는데 군대식으로 말하면 참모장이나 같지 않나. 부대 참모장이라는 사람이 기분에 거슬린다고 해서 제밸대로 하면 어떻게 될것 같나. 상상도 못할 일이지. 좀전에도 말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내가 밤낮 전쟁때엔 어드랬소, 군대에선 또 어떻게 하오 하면서 자기네를 홍달군다고 해서 입이 뚜해 그러는데… 아니야, 우린 언제나 그때처럼 살아야 하는걸세. 노래에도 있지 않나. 그때처럼 우리가 살고있는가?…》

림숙정은 숨이 찬듯 잠시 말을 끊고 숨을 톺았다. 오늘따라 그의 눈귀의 주름살들이 더 깊어진것만 같았다. 권일학은 어째선지 가슴이 저려드는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림숙정이 계속했다.

《기술부원장이 일하자고 뛰여다닌건 사실이지. 또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많은것두 옳구… 그걸 우리 원장두 다 알고있네. 그걸 잘 알면서두 절로 일어서리라고 믿고있지.

이보라구, 기술부원장, 일하자면 힘들 때도 있구 기분이 상할 때도 있지. 임잔 우리 산원의 기술진영을 떠메고나가야 할 일군이야. 위대한 장군님께서 늘 가르쳐주시는것처럼 앞채를 메고나가야 할 사람이란 말일세. 그런데 뭐 어쨌다구?…》

《비서동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걸 알면 돼. 사실 나도 한땐 당에서 맡기는 일을 가지구 한다, 못한다 하면서 투정질을 한적이 있네.》

《아니, 비서동지가요?…》

《그렇네.》

그는 두눈을 쪼프리고 무엇인가를 기억에 떠올리더니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그때 림숙정은 어느 큰 공장 지배인으로 사업하고있었다. 그가 지배인으로 된 때로부터 그 공장은 거의 매달 신문과 방송에서 기업관리경험과 혁신적인 성과에 대하여 소개하는것이 례사로운 일로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림숙정은 공장에 내려온 당중앙위원회 일군이 찾는다는 련락을 받았다. 그가 방에 들어서자 낯익은 일군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림숙정은 땀밴 작업복에 두손을 문지르며 그에게 물었다.

《과장동무가 어떻게?…》

《지배인동무, 이젠 지배인사업을 인계해야겠습니다.》

《아니, 인계라니?! 도제 3년밖에 안됐는데…》

《이제 곧 평양산원으로 가야겠습니다.》

림숙정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산원에 가서 내가 무얼 한단 말인가?… 일군이 웃으며 말했다.

《뭐 놀랄건 없습니다. 이번에 새로 개원된 평양산원에 가서 당사업을 해야겠습니다.》

《산원의 당사업을?… 아니, 내가 산원에 왜 가야 합니까? 의사도 아니구… 전쟁때 부상병을 업어나른것밖에 없는데.》 그는 소리내여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난 여기가 좋습니다. 북소리, 나팔소리가 요란한데서 일하는게 좋단 말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구 꽥꽥 소리지르구. 그런데 뭐 요람이나 지키는 조용한데 가서 미역국 먹는 산모들이나 갓난애기들한테 소리치란 말입니까? 아니, 아니! 그러다가 사람 웃기겠습니다.》

림숙정은 과장이 여러가지로 설복했어도 끝까지 머리를 흔들었다. 과장은 혀를 차며 돌아갔다.…

《그때 난…》 림숙정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으로 일이 끝난줄 알았네. 그런데 그 사람이 또 찾아올줄이야. 그가 말해주더구만. 내가 산원에 못 가겠다고 고집한 그 일을 위대한 장군님께 보고드렸다고… 글쎄 장군님께 내가 한 말을 다 보고드리다니!… 그때 장군님께서는 지금 당에선 녀성종합병원인 평양산원을 인민들에게 선물하고 거기에 좋은 주인을 앉히고싶어한다고 하시면서 그러면 누구를 보내겠는가?… 수령님께서 기억하시는 녀성일군은 많지만 영웅간호장 림숙정이 제일 적합할것 같다고, 그를 평양산원 당일군으로 보내는것은 우리 수령님의 뜻이고 당의 의도라고 말씀하셨다는구만.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 림숙정은 전쟁영웅이고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어떻게 영웅이 되였는가?… 뜨거운 심장을 안고 싸웠기때문이다! 온 나라 녀성들을 다 안아야 할 평양산원엔 그처럼 뜨거운 사랑을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업고나르며 자기 피까지 아낌없이 바치던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질 않나. 그러시면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사랑하라! 사랑하면 모든것이 다 열린다, 전장에서 생명을 지킨것처럼 녀성들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자기를 다 바치면 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 어떤 생명도 지켜낼수 있으며 마음의 문도 열수 있다, 평양산원을 온 나라 녀성들을 다 안고있는 당의 품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사랑을 쏟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될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지 않나. 얼마나 귀중한 말씀인가. 한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갈 귀중한 금언이지!…》

회억에 잠긴 림숙정의 두눈은 물기에 젖어들고있었다.

권일학은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가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었다.

무엇때문에 그가 오래전 일을 추억하고있는지 명백히 깨달았던것이다.

이윽고 림숙정이 아무 의미없이 아까 마시던 물고뿌를 들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제자리에 가져다놓았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 난 사랑하면 무엇이든 다 열린다고 하신 우리 장군님의 그 말씀을 언제나 마음속에 안고산다네. 사실 우리 산원이 어떤 집인가. 아무리 세상을 둘러보아야 매일, 매 시각 끊임없이 산모와 부인환자들을 입원시키고 세쌍둥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새 생명이 태여나는 이런 집, 이런 사랑의 집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나!…》

림숙정은 온갖 시름을 잊은듯 환하게 웃었다. 눈과 입귀에 그어진 잔주름들이 금시 다 펴지고있는듯 싶었다.

《힘들긴 해두 얼마나 보람있나. 난 여기 온 다음부터 심장두 더 커지고 가슴도 더 넓어진것만 같네.》

권일학은 눈굽이 쿡 쑤시는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떨려나는 눈시울을 슴벅거리며 고개를 숙이였다. 강학선, 서범천, 위인섭 그리고 그와 남다른 인연으로 얽혀질번 했던 처녀 하경옥, 그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지고있는것이 무엇때문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듯 싶었다.

그는 틀어쥔 주먹에 입술을 꾹 눌러대였다. 이젠 알아야 한다. 옹졸하고 편협한 넋에는, 랭정하고 차거운 심장에는 그런 뜨거운 정과 사랑이 깃들 자리가 없다는것을!… 권일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동지!… 제 이제 가서 서범천을 다시 만나보겠습니다.》

《서범천?… 오- 복강경… 알겠소. 그래주면 고맙겠네, 기술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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