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3 장 사랑하면 무엇이든 다 열린다


10


서범천은 복강경수술장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기술부원장이 자기를 찾아와 한 말이 귀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소, 서선생! 아무것도 도와준것이 없이 큰소리만 치면서… 리해하오.》

《?!…》

《서선생, 첨단을 개척한다는것이 왜 힘들지 않겠소. 선생은 자기가 쌓은 지식은 자기의것만이 아니라고 했었지. 나라에서 품들여 배워주고 키워준것이여서 나라의 재부이며 전사회적인것이라고 했었지. 옳은 말이요!… 어떤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자기가 벌어들인 지식인것처럼 재세하면서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자신만을 위해서 뛰여다니거던, 위인섭이처럼

선생이 복강경수술에 나선건 우리 시대 의학자의 량심때문이 아니겠소? 난 그것을 귀중히 여겼소, 총명과 재능보다도.… 서선생! 우리 복강경수술을 다시 시작합시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녀성들과 미래를 위해서 말이요. 내 힘껏 돕겠소!》

서범천은 그에게 손을 맡긴채 뻥해 서있기만 했었다.

지금도 그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언제였던가. 주견이 없는 인기주의자라고, 당신같은 사람과 어떻게 운명을 같이하며 첨단을 개척하겠는가고 모질게 비난했던 일이… 그에게 꼭 그런 말을 해야 했던가? 윤일국장을 납득시키지 못한것이 기술부원장의 잘못은 아니였는데…

사실 그가 복강경수술을 못하겠다고 내던진것은 그 누구때문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나약했기때문이였다. 눈치만 보면서 모든것을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렸던것이다.

의학자의 량심! 그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말을 했던가. 지식과 창조와 소유에 대하여, 의학자의 량심에 대하여 그자신도 많은 론쟁을 벌리였었다. 얼마전 복강경수술장을 꾸리던 야간작업의 쉴참에도 그랬었다.

그때 위인섭이 청높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했었다.

《서선생은 어쨌든 정열가요. 난 그 정열에 늘 감탄하군 하오. 이렇게 서선생처럼 첨단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우리 주위엔 건달군들도 많단 말이요.》

옆에 있던 정영희라는 처녀의사가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그건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하는 소리예요?》

《한마디로 둔재들이요. 두뇌능력이 딸리면서도 한자리 척 차지하고앉아 일은 제대로 안하고 리득만 바라는 사람들이지. 사회를 발전시키자면 인재와 이런 건달군들인 둔재를 엄격히 갈라야 한단 말이요. 민족이 발전하려면 인재가 많아야 한다고 난 생각하오.》

늘 사람들을 잘 웃기군 하는 리명철의사가 제꺽 그의 말을 받았다.

《옳소! 그런 량심없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요. 창조는 안하고 소유만 하려는 그런 건달군들이…》

《하지만 모두가 다 인재일수는 없지 않아요?》

청년들이 서로 반박하고 지지하며 격렬한 론쟁을 벌렸다.

《난 인섭선생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건 아니지만…》 하고 얼마전에 부인과에 새로 온 정철호의사가 말했다.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고 보오. 똑같이 배운 지식인데 왜 차이나는가? 그건 피타게 공부하지 않기때문이요. 편안한데 습관되여 그저 앉아서 평가나 하고… 그러면서 뭐가 락후하오, 뭐가 또 어쨌소 하며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것처럼 말한단 말이요.》

누군가 또 끼여들었다.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리영일의사였다.

《아니, 난 능력을 따지기 전에 먼저 량심을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하오. 지식의 소유, 그것만이 전부인가. 그 지식을 어떻게 바치는가? 다시말하여 사회를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하는것, 이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하오.》

말없이 듣고만 있던 서범천이 그의 주장을 지지해나섰다.

《옳소! 나도 그건 량심에 관한 문제라고 보오. 과학자는 발명과 새 기술도입에서, 용해공은 강철생산에서, 농장원은 농사에서 자기들의 힘과 지혜를 량심껏 다 바치는것, 바로 이거요. 그럼 우리 의사들의 량심은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생명을 책임져주는거요. 다시말하여 우리 산원의사라면 이 나라 녀성들의 건강과 태여나는 미래의 생명을 책임져주는것, 그들을 위해 자기의 힘과 열정, 지혜를 깡그리 바쳐 최신의학과학기술을 림상의학에 도입하는것, 이것이 아니겠는가?…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인섭선생 생각은 어떻소?》

위인섭은 그때 대답을 못하고 두눈만 슴벅거리고있었다. 남달리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그 무슨 의사의 량심보다도 인재와 창조 그리고 그 소유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펴고싶었을것이다. 그러나 말이 막혀 우물쭈물했었다.

그때 일을 상기하며 서범천은 저 혼자 시무룩이 웃었다. 론리적으로는 자기가 그를 눌렀다고 볼수 있지만 생활에서는 그자신이 이 위인섭이와 무엇이 다른가고 생각하니 쓰거워졌다. 의사의 량심에 대하여 누구보다 열을 내여 떠든 자기가 이제와서는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주춤거리고 모든 잘못을 기술부원장에게 뒤집어씌우는 시시껄렁한 인간이 되였던것이다.

문득 한송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 믿어요, 동무가 모든걸 이겨내구 성공하리라는것을!…》

그러면서 말했었다. 그 복강경의 첫 림상수술대상자로서는 여전히 자기가 되여주겠다고, 외삼촌도 그것이 성공하게 되면 모든것을 다 리해하게 될거라고…

서범천은 두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오, 송애! 솔직히 말해서 난… 나약했댔어. 그러면서도 재능으로 당을 받드는 노력가라고 자처했댔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놈이였겠소. 아무런 의지도 배심도 없는게 큰소리만 쳤으니… 하지만 믿어주오. 내 꼭 복강경수술을 다시 하겠소. 기술부원장선생도 힘껏 밀어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요!…

똑똑… 손기척소리가 난것 같다. 서범천은 출입문쪽에 머리를 돌리며 귀를 기울이였다. 그때 가볍게 문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뜻밖에도 하경옥이 들어왔다.

《하선생이 어떻게?…》

하경옥은 손에 들고온 편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박현희라고 생각나지요? 애기과에 실습 나왔다가 전연에 자원해나간 간호원학교 졸업생처녀…》

《아, 생각나오. 제대되면 우리 복강경수술장에 오라구 하니까 자긴 이담 유명한 애기간호원이 되겠다면서 웃기던 그 처녀?…》

《옳아요! 그가 서선생한테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렇소? 어디 봅시다.》

그는 봉투를 뜯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글줄을 따라내려가던 그의 입이 거의나 소리없이 쩍 벌어졌다.

《참, 재미나는 동무로구만. 읽어보오, 하선생.》

하경옥은 그가 넘겨주는 편지를 받아보았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매 글줄마다에는 산원에 대한 처녀의 그리움과 애착이 가득차있었다. 박현희는 편지에서 먼저 자기가 《병사와 자장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전사단적인 웅변모임에 참가하여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고 하면서 그 웅변원고를 써준 서범천선생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고 썼다. 그리고 자기 부대에는 산원에서 태여난 병사들이 적지 않아 평양산원의 간호원이였던 긍지가 남보다 크다면서 머지않아 제대명령을 받게 되는데 그때면 꼭 산원으로 돌아가겠다는것, 그러되 서범천선생이 말하던 복강경수술장이 아니라 애기과 간호원으로 가겠다는것을 엄숙히 다짐하였다. 끝으로 그는 뜻밖에도 새로 온 기술부원장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그때 저를 위해 바쁜 시간을 내여 새로 꾸린 산원을 함께 돌아보며 설명해주던 기술부원장선생님을 만나던 일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 좋은분이라고 생각되더군요. 좀 엄해보이긴 하지만 날더러 꼭 산원에 다시 와야 한다고 말할 때 얼마나 속이 깊고 친절한분으로 보이던지… 그래서 기술부원장선생님에게도 고마움의 편지를 함께 보냈습니다.》

하경옥은 읽어가던 편지에서 눈길을 들고 서범천을 바라보았다.

《아니, 현희야 부원장선생을 한번밖에 본적이 없는데…》

《글쎄…》

서범천은 《글쎄…》라는 말이 입에 올라있었다. 말이 막힐 때는 물론 긍정하거나 부정해야 될 때면 언제나 아리숭하게 《글쎄…》라고 하는것이였다.

하경옥은 그의 수더분한 얼굴에 이상한 눈길을 주다가 다시 편지의 글줄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니 현희의 눈에는 기술부원장선생이 속이 깊고 뜻이 높은분으로 보였단 말이지?…

티없이 맑고 순진한 애기들의 눈망울에는 모든것이 깨끗하게만 비쳐지는 법이다. 하기에 애기간호원이였던 현희여서 그렇듯 맑고 순진한 눈빛으로 모든 사람들을 보고있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서범천선생에게 편지를 돌려주며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확실히 기술부원장선생에게는 첫눈에 사람들을 반하게 하는 무언가 있는 모양이지요?》

서범천이 자신없이 중얼거렸다.

《글쎄, 첫눈에 반하는게 진짜일수도 있지 않을가요?》

하경옥은 뜻밖인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니 서선생도 그한테 반했다는 소리인가요?》

《글쎄요. 반할 점이 있다는건 아주 좋은거지.》

《예?》

《아, 하선생, 변증법이란것이 있지 않소. 그가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 모르긴 하겠지만 어쨌든 뭔가 달라진건 사실이 아니요? 글쎄 방금 그 기술부원장선생이 날 찾아와서 전번에 제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겠소. 첨단기술이요. 뭐요 하면서 말만 했지 서선생이랑 잘 돕지 못한게 후회된다면서… 사실 복강경수술을 내던진건 그가 아니라 이 서범천이였소.》

《?…》

서범천은 자기의 손에 쥐여져있는 현희의 편지를 다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속내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우리 의사들은 그저 겉이나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되지. 아마 그런데서는 애기들의 눈으로 보는데 습관된 우리 현희가 더 정확히 봤을지도 모르지요.》

《?…》

하경옥은 아무말없이 입술을 깨문채 서범천이 손에 들고있는 현희의 편지에 눈길을 주고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각 전연구분대에서 복무하고있는 박현희의 신상에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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