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제 3 장 사랑하면 무엇이든 다 열린다


12


안순남이 소리치고있었다.

《현희, 뭘하고있소? 빨리 오라는데!》

《같이 가요!-》

현희는 소리없이 날아가는 그를 따라가려고 안깐힘을 썼다. 온몸의 힘을 모아 힘껏 뛰였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왜 이럴가?… 또다시 죽기내기로 달린다. 안타깝게 버둥거린다. 눈앞에 어룽거리며 벌씬 웃는 안순남, 야속한 중대장… 그가 또 소리친다.

《현희, 뭘하고있소?》

현희는 신음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여났다. 눈을 떠보니 침대였다.

온몸을 덮고있는 모포와 아직 밝지 않은 창문… 밖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떠들고있었다.

《뭘하고있소? 간호장, 처벌받을줄 아오. 환자가 도망친것도 모르구.》

급하게 뛰여다니는 소리들이 들렸다. 아마 울상이 된 간호원들일것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통하여 현희는 통신구분대의 한 전사가 자기 중대로 도망쳐갔다는것을 알았다.

직일관이 크게 소리쳤다.

《아침운동시간!-》

밖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또다시 뛰여다니는 발자국소리들… 이어 힘찬 구령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넷, 둘둘, 셋넷 …》

매일 아침 진행되는 군의소의 첫 일과이다. 하루가 시작된것이다.

현희는 덮고있는 모포를 꼭 그러쥐였다. 등골로 흘러내리던 식은땀, 안타까와 소리치던 안순남의 거치른 목소리… 꿈이였었다.

아픈 넋이 꿈결에도 고통을 못이겨 모지름을 쓰고있었던것이다. 그가 아무리 소리쳐 불렀어도 따라설수 없었던 이 몸, 소리쳐 울고울어도 소용없을 처녀의 이 불행- 하반신마비… 어찌된 일일가. 그런데도 잠들어있었다니? 그건 지쳐서일가? 몸부림치는 그 넋을 잠재우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기때문이였을가?…

밖에서는 여전히 구령소리가 들려왔다.

《둘둘, 셋넷, 발을 더 높이… 일곱, 여덟…》

그날도 안순남은 면회를 왔다. 여느때처럼 스스럼없이 찾아왔다. 현희는 그를 외면하며 쌀쌀하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다시는 오지 마세요. 난 동지에 대해서 그 어떤 감정도 품은적이 없는데… 그러니 인젠… 더는 오지 마세요!》

안순남은 입을 꾹 다문채 까딱하지 않고있었다. 보기에도 무서웠다. 으스러지게 틀어쥔 손등에는 굵은 피줄이 꿈틀거렸고 구리빛얼굴은 경련으로 하여 떨리고있었다.

《아니, 이미 말했지만 난 결심하였소. 어떤 경우라 해도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것이요!》

그는 이렇게 마디마디를 힘주어 내뱉고는 몸을 홱 돌려 밖으로 나갔다. 현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수많은 얼음바늘들이 사정없이 가슴을 찌르는것을 느꼈다.

오래전부터 현희는 자기가 마음속으로 저 중대장을 사랑하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의 깨끗한 마음 아니, 그의 남달리 굳세고 강한 성격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제는 지워버려야만 했다. 깨끗이 잊어야 했다. 그래서 랭대하고 가혹하게 쫓아버리는 그였다. 얼마나 모진 아픔인가! 가슴속에 싹터온 그것을 고이 자래우고있었는데 별안간 그것을 자기스스로 짓밟아버려야만 하니?!…

처녀는 그를 외면하면서도, 그가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어쩔수 없이 기다려지는 자기 마음을 부정할수가 없었다.

기다려지는것이 정이라고 한다.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희는 이제 더는 한가정의 안해로도,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도 될수 없는 녀자였다. 이러한 생각을 그는 한순간도 지워버릴수 없었다.

현희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아! 더는 생각지 말자, 더는 그를 기다리지 말자!…》

무엇이 떨어져 베개잇속에 스며들었다. 손으로 얼른 그 자리를 더듬어보았다. 또다시 손등에 그것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눈물이였다. 그제야 처녀는 자기가 아픔에 겨워, 슬픔에 겨워 울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다시 밤이 올 때까지 처녀는 눈을 감고있었다. 아침부터 낮까지, 낮부터 밤까지 그리고 새벽까지 처녀에게는 줄곧 어두운 밤만이 계속되고있었다. 바닥없이 깊어가는 밤, 잠들수 없는 밤…

현희는 베개밑에 간수하고있던 편지를 꺼내였다. 어제 밤 괴로움에 못이겨 평양산원의 당비서에게 쓴 편지, 그러나 이것을 보내지 못하리라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자기의 신상에 닥친 이 불행을 무엇때문에 그들에게 알려야 한단 말인가. 현희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저 창너머 바라보이는 검푸른 밤하늘에서 보석같은 별들이 깜박거리며 처녀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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