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4 장 책임한계


3


기술부원장의 방으로 향한 하경옥은 마음을 종잡을수 없었다. 그가 왜 나를 불렀을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만나자고 하는것인지?…

그는 걸음을 빨리하면서 자기가 담당했던 환자들을 재빨리 머리속으로 따져보았다. 제기된 환자는 없었다. 치료사업, 그것도 역시 규정을 어긴것은 없다. 기술부원장도 지금 하경옥 자기의 사진이 영예게시판에 나붙어있다는것을 모를리 없는것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따로 부른단 말인가.

웬일인지 그 순간 아버지를 찾아왔던 권일학의 아들이 불쑥 눈앞에 떠올랐다.

말끄러미 자기를 쳐다보던 어린것의 까만 눈동자.…

《싫어, 아지민… 아니야!》

하경옥은 지금도 그 어린 정철이를 두고 강학선의 안해가 하던 말이 귀전에서 떠나지 않고있었다.

《하선생, 기술부원장선생은 처음부터 하선생에게 모든걸 다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 애아버지가 반대했지요. 하경옥선생은 그런 일을 가지고 사람을 저울질하는 처녀가 아니라면서… 그래서 그 이야기를 후날 뒤로 미루었댔는데 그만 끝내 말할 기회가 생기지 않더군요.》

그때 하경옥은 얼마나 놀랐던가. 얼음장같은 권일학에게 그런 뜨거운것이 간직되여있다는것이!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었다. 세상에는 숨은 위선으로 남의 칭송을 받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쳐다보던 어린 정철이의 모습, 그 젖은 눈동자는 어째서 지금도 가슴을 아프게 하고있는것인지.…

이런 생각에 하경옥은 자기가 어느새 승강기에 올랐는지도 알지 못했다. 곱살하게 생긴 승강기운전공처녀가 문을 채 닫지 못하고 사람들과 옥신각신하고있는것을 보고서야 자기가 계단이 아니라 승강기에로 왔다는것을 깨달았다.

젊은 청년이 문앞에 떡 버티고 서서 통사정을 했다.

《운전공동무, 난 래일 출장을 간단 말이요, 먼 지방에… 이제 몇달 있어야 돌아오겠는데 딱 한번만 올라갑시다. 예?》

《안됩니다! 외래자는 무균상태인 입원실에 함부로 올라갈수 없습니다. 내리세요.》

이번엔 같은 또래의 처녀가 눈웃음을 치며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야, 난 정말 딱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글쎄 우리 언니가 십년만에 애기를 낳지 않았겠어요? 첫 애기를 낳은 언니를 이 촬영기로 찍어두자고 그런답니다. 좀 도와주세요, 운전공동무.…》

《안된다니까! 그런 일은 텔레비죤면회실에 가서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 일이예요.》

사정이 없었다. 하경옥은 엄격하게 외래자들을 끄집어 내리우는 운전공처녀를 바라보며 구석에 서있었다. 여느때없이 승강기가 지체되고있는것이 어쩐지 다행스럽게 생각되기도 했다. 이제 기술부원장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승강기운전공이 또 누군가를 찾아냈다.

《가만, 거긴 무슨 환자예요?》

《나 말이우? 난 진짜 환자웨다. 자, 보시우!》

빨간 줄무늬가 간 환자복 앞자락을 흔들어보이며 앞으로 나서는 환자는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백발의 할머니였다.

운전공처녀의 두눈이 그만 휘둥그래졌다.

《아니, 할머니도 애기낳으러 왔나요?》

《체네, 여긴 아낳으러만 오는덴가? 맨 웃층에 부인과도 있다던데.…》

《할머니, 이건… 산부들만이 입는 환자복이예요, 애기 낳을 때 입는…》

할머니가 걸치고있는 빨간 줄무늬환자복은 웃옷과 바지가 따로 되여있는 부인과 환자복이 아니라 긴 두루마기형식으로 만든 산부들의 해산복이였던것이다.

《뭐라구?》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며 가볍게 웃자 옆에서 부축하고있던 젊은 녀자가 얼굴이 빨개서 고개를 숙였다. 아마 외래자들에 대한 단속이 심하니 며느리인듯 한 그 녀인이 자기의 환자복을 벗어준 모양이였다.

그러건말건 할머니가 고집스럽게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해산복이든 환자복이든 난 꼭 들어가봐야겠네!》

《야참, 어머니! 제발 소동피우지 말고 그만 돌아가세요.》

며느리인 젊은 녀인이 안타깝게 소곤거렸다. 그들을 바라보던 하경옥의 두눈이 조금 커졌다.

《아니, 옥희환자가 아니예요?》

젊은 녀인은 그의 담당환자였던것이다. 녀인도 하경옥을 알아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아, 하선생님, 선생님이 좀 말해주세요, 우리 시어머니에게…》

《무슨 일인가요?》

《저, 우리 애기가 보육기에 들어갔다는걸 알고 자꾸 신소하겠다고 하지 않나요.》

《신소한다구요?》

《글쎄, 애기가 바뀌였다고 하면서…》

《애기가 바뀌다니?…》

옥희라는 환자가 자기의 시어머니에게 뭐라고 소곤거렸다. 늙은이는 불쑥 하경옥을 쳐다보고나서 며느리를 밀어내였다.

《담당선생이라구? 마침이구만. 그래 선생두 보육기에 있는 애가 우리 손자녀석이 옳다는거요?》

하경옥은 여전히 무슨 영문인지 몰라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예, 옳습니다. 제가 직접 지켜보다가 애어머니에게 안겨주었답니다.》

늙은이는 고집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리가 있나. 아니, 분명 애를 삭갈렸어! 우리 집 래력엔 그런 팔삭둥이가 없다우. 다 끌끌한 대장부들만 낳았지. 어쨌든 내 눈으로 봐야겠소. 우리 집 피줄은 못 속인다니까.》

그제야 하경옥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랬댔군요. 할머니, 그 애는 할머니의 손자가 분명합니다. 다른 애들처럼 늦장부리지 않고 한달이나 빨리 뛰쳐나왔으니까요. 역시 끌끌한 대장부들의 피줄이 다르거던요.》

할머니가 입을 호물거리며 웃었다. 사람들도 소리내여 웃었다. 자기 집래력 칭찬에 마음이 흐뭇해진 할머니에게 하경옥은 이 산원에서는 애기와 어머니들이 삭갈리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규정을 지키고있으며 또 보육기에 들어간 애기는 어머니의 배속과 꼭같은 환경에서 더 자란 다음 정상아이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자란다는것을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할머니가 환자복을 며느리에게 벗어주며 하경옥에게 말했다.

《알겠네. 담당선생의 말을 들어보니 마음이 놓여. 이젠 그만 돌아가려네. 고마우이, 의사선생!…》

할머니는 성큼 내려섰다. 승강기문이 닫기고 사람들은 서로 웃음어린 얼굴들을 마주보았다.

승강기에서 내려 기술부원장의 방앞에 이른 하경옥은 잠시 문앞에 그대로 서있었다. 방금전의 즐겁던 기분이 연기처럼 사라지는것이 아쉬웠다.

하경옥은 숨을 크게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이어 방에 들어선 그는 앞쪽은 보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눈길을 들어보니 권일학은 그가 들어선것도 모르고 탁우에 펴놓은 기술도서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무엇때문인지 한쪽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을 치기도 했다.

하경옥은 문가에 선채 좀 큰소리로 쌀쌀하게 물었다.

《저를 불렀습니까?》

그제서야 권일학이 머리를 들었다.

《아, 왔구만, 하선생.》

그는 탁우에 널려있는 여러권의 책들을 한데 모아놓으며 하경옥을 바라보았다.

《하선생, 이것 좀 보오. 우리 고려과 의사 전재운선생이 쓴 책들이요. 어서 가까이 와보오.》

하경옥은 잠시 망설이였다. 그동안 그는 권일학과 마주선적이 없었다. 자주 진행되는 회진이나 모임때도 멀리서 그를 지켜보았을뿐이였다.

늘 상대방의 속내까지 들여다보는듯 한 예리한 눈초리와 곧은 코마루, 꾹 다물린 무정한 입술. 하경옥의 눈에는 언제나 이런 권일학이 보일뿐이였다.

하경옥은 탁자가까이로 다가갔다. 권일학이 감탄하고있는 책들은 《민간고려약음식편람》과 《600여가지 처방》 등을 비롯한 여러권의 고려의학과학기술도서들이였다.

권일학은 자기앞에 있던 다른것들도 덧놓으며 말했다.

《환자치료를 하면서도 이 방대한 량의 도서집필을 했다는것이 얼마나 놀랍소. 전재운선생은 녀성들만 위해서 책을 쓴다더니 참…》

하경옥도 그에 대하여 잘 알고있었다. 늘 바빠하는 자기를 《안모-고민상》이라고 말하군 하는 이 전재운은 침이나 뜸, 부항과 같은 고려의학으로 신의사들을 깜짝 놀래우는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였다. 그가 말하는 《안모》란 눈섭을 달리 부르는것인데 전재운은 먼저 환자의 눈섭 생긴 모양을 보고 고민상인가 편안한 상인가를 판단한 다음 치료를 시작한다고 한다.

권일학은 탁앞에 놓인 도서들을 분류해놓으며 말했다.

《하선생, 어떻게 생각합니까, 전통의술로 부인질병을 완전히 치료할수도 있다는 이 전재운의사의 주장을?… 난 좋은것이라고 봅니다. 종전 그대로가 아니라 과학시대의 요구에 맞게 고려치료방법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이 선생의 지향과 노력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또 지금도 쉼없이 고려약에 의한 새로운 무통법을 연구하고있고… 60이 다 된 그나이에 말입니다, 참!》

하경옥은 그를 쳐다보았다. 권일학이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았던것이다.

《그것때문에 저를 불렀습니까?》

권일학이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생각하는듯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선생을 오라고 한건 다른게 아니라…》

그는 옆에 있는 책장에서 여러개의 두툼한 자료들을 꺼내 탁에 내놓았다.

《이건 누모르안에 의한 무통약물실험자료인데 그전에 내가 짬짬이 연구하던것이요. 하선생에게 도움이 될것 같애서 이렇게 오라고 했소.》

하경옥은 놀란듯 실험자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기술부원장도 무통제를 연구해왔단 말인가. 그런데 왜 지금껏 그걸 공개하지 않았을가?…

자리에 앉은 권일학이 그것을 처녀의 앞으로 밀어놓아주었다.

《실험자료가 충분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선생에게 참고가 될거요. 이대로 가져다보오.》

하경옥은 푸른 책표지의 두툼한 실험자료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사실 무엇을 연구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의 창조물에 대해서는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것이라 할지라도 제 살점처럼 귀중하게 여기는것이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온 이 실험자료를 그가 서슴없이 나에게 내놓는것은 무엇때문일가. 혹시 한 처녀에게만 베푸는 그 어떤 숨겨진 혜택은 아닌지?…

하경옥은 가볍게 두눈을 치켜올렸다.

《그 성의는 고맙지만… 저에겐 이런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전 이미 무통법을 완성했고 또 그것이 우리 산원에 널리 도입되고있다는거야 기술부원장선생도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필요없다구?…》

권일학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경옥은 자기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듯 한 주의깊은 그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깃든 침묵, 이어 삐-걱! 의자를 뒤로 미는 소리.…

권일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선생, 내 언제부터 선생과 조용히 만나고싶었는데… 오늘 서로 진심을 터놓고 솔직히 얘기해봅시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진심을 터놓자는 저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조용히 만나 무엇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불현듯 자기를 쳐다보며 다가서던 정철이의 까만 눈동자가 떠올랐다. 촉촉히 젖어있던 어린 눈망울, 따뜻한 엄마의 정을 바라던 어린것의 그 눈빛.… 어째서 이 순간 그 어린 눈동자가 자기의 가슴을 파고드는지 하경옥은 알수 없었다.

권일학이 입을 열었다.

《하선생, 이건 힘든 말이지만…》

하경옥은 두눈을 내리깔고 다음말을 기다렸다. 온몸이 긴장해졌다. 저도 모르게 손끝이 저려들고 가슴이 조여들었다.

《내 보기에 선생은… 환자에 대한 정성이 부족한것 같소.》

《예? 뭐라구요?!》

뜻밖의 말에 하경옥은 그만 못박힌듯 굳어지고말았다. 저려들던 손끝의 아픔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하경옥은 그에게 도전적인 눈길을 던졌다.

《어떻게 하는 말씀인지?…》

권일학이 다시 곱씹었다.

《선생은 자기가 환자에게 정성을 다하고있다고 믿는것 같은데… 난 그렇게 생각지 않소. 누구보다 선생은 더 분발해야 한다고 보오.》

하경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시에 두눈이 초불처럼 떨려났다. 지금까지 누구도 자기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산부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써 무통제를 만들어낸것도 그였고 온갖 성의를 다해 환자들을 치료하고 또 그들을 위한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은것도 하경옥 자기였다.

언제였던가. 갑자기 정전이 되여 승강기가 오르내리지 못하던 그때에도 남먼저 환자밀차를 어깨에 메고 계단을 올랐었고 산모들을 위해 명절날 음식을 해가지고 달려나온것도 자기였었다. 그런데 정성이 부족하다는것은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하경옥은 오연한 눈길로 권일학을 마주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저도 인젠 기술부원장선생과 더 이야기할게 없습니다.》

《뭐요?!》

《랭정하고 차거운 눈에는 모든것이 다 위선으로 보인답니다.》

권일학이 놀랍게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지 않던 뜻밖의 일에 그만 아연해진듯 했다.

하경옥은 돌아섰다. 굳어진듯 아무 말도 못하고있는 그를 외면하며 문쪽으로 향했다. 이런 사람과는 더 마주서있을 필요가 없는것이다.

권일학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서시오!》

그는 섰다. 그러나 힘껏 잡아쥔 문고리는 놓지 않고있었다.

권일학의 거친 목소리가 날아왔다.

《위선이라구?!… 좋소! 그건 더 론하지 맙시다. 그러나 선생은 알아야 하오. 의사의 정성이 환자들의 시중이나 들어주는것이 아니라는걸 말이요. 그건… 한갖 동정일따름이요.》

하경옥은 그에게로 몸을 홱 돌렸다.

《동정이라구요?!》

그 어떤 수치감이 그 녀자의 가슴을 따끔하게 꼬집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떨려나고 문손잡이를 그러쥔 손가락이 아파났다.

권일학은 그를 못 본듯 계속했다.

《아프긴 하겠지만 말이 난김에 마저 해야겠소. 선생이 말한것처럼 지금 산원에선 거의나 선생이 만든 무통법을 쓰고있소. 그 무통법은 조작이 어렵고 또 태아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있다는것을 선생도 잘 알고있소. 그런데 선생은 환자들에게 정성을 다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무통법을 더 완성하지 못하고 그것에 머물러있단 말이요, 자기만족에 도취되여서!…》

《뭐라구요, 자기만족이라구요?》

눈앞이 아찔했다.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같은것이 새여나왔다. 언제인가처럼 목구멍이 깔깔해나고 숨이 차올랐다. 어쩌면 기술부원장의 눈에는 이 하경옥의 모든것이 우둘투둘한 결함투성이로밖에 보이지 않는가.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것이 그에겐 그렇게도 힘이 드는 일인가?…

권일학은 창가로 다가가며 생각깊은 어조로 계속했다.

《누군가 말하기를… 진통이야말로 모성애의 기초로 된다고 했소. 무서운 고통속에서 낳았기때문에 그 생명에 무한한 사랑과 애정이 바쳐진다고 말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해산시 무통법을 쓰는것은 오히려 모성애를 깎는것으로, 녀성으로서 고유한 모성의 감정을 없애는것으로 보기도 했던거요. 그러면 고통이 심해서 모성이 더 강해지는가? 아니요. 자기가 낳은, 자기가 창조한 생명, 자기의 분신이기때문에 모성이 강한것이라고 난 생각하오.》

하경옥은 입을 꼭 다물고 까딱하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쥐고있는 손이 얼어붙은듯 했다.

《하선생도 알고있지 않소. 어버이수령님께서 해산하는 녀성들의 고통을 두고 가슴아파 잠 못 드셨다는 이야기 말이요. 해산할 때 주사를 놓는다는데 그러면 일없는가고, 아무래도 아풀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러지 말고 다른것을 더 생각해보라고 하신 그 말씀을.…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였으면 우리 의사들이 만든 첫 무통약에 손수 자신께서 〈안산물약〉이라고, 편안하게 해산하는 약물이라는 이름까지 달아주셨겠소.…》

하경옥은 두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은 자기도 잘 알고있는 이야기였다. 아니, 자기뿐이 아니라 온 산원이 다 알고있는 사랑의 이야기인것이다.

그때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녀성들의 체질에 맞는 무통법이 활발히 연구되였고 지금은 여러가지의 무통제들이 임신부들의 해산에 쓰이고있었던것이다.

이윽고 제자리로 돌아온 권일학이 고개를 숙인채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선생, 미안하오, 그만 큰소리를 쳐서.… 그러나 선생에게 꼭 하고싶던 말이였소. 진정을 바치는 인간들에 대한 사랑은 더 뜨겁고 높아야 한다는것을 말이요. 그리고 선생이 무통제를 완성하는 그것이 환자들에 대한 가장 높은 정성이라는것을!… 자, 그럼 오늘은 이만합시다.》

하경옥은 다시 자리에 앉아 자기 일을 시작하는 권일학을 얼나간듯 쳐다보기만 했다. 권일학은 벌써 탁우에 놓인 전화기를 돌려 누군가를 찾고있었다.

《오, 소생과요? 어떻소, 구급환자의 상태는?… 그렇다?! 알겠소, 수혈과에 지시를 주겠소.》

그는 하경옥의 존재같은것은 까맣게 잊고있었다.

하경옥은 자기가 어떻게 그의 방을 나왔는지, 그가 손에 들려주는 무통약물연구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계단을 내렸는지 알지 못했다. 왜서인지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그 어떤 분함에 괴롭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강한 요구성, 맡은 일에 대한 높은 책임성.… 지금껏 누구나 이렇게 하경옥을 칭찬해왔고 인정해주었으며 내세워주었었다. 그 역시 남들의 이러한 칭찬에 습관되였고 또 그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겨왔으며 그것으로 하여 자신에 대한 남다른 긍지도 가졌던 하경옥이였다.

권일학은 이런 처녀의 높은 자존심을 아니, 남들이 인정하고있는 처녀의 인격을 가차없이 허물어버렸다. 이 하경옥이 애써 이루어놓은 모든 성과를 사정없이 까버린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왜 그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때 누군가 큰소리로 그를 불러세웠다.

《하선생이 아니요?》

무심히 고개를 든 하경옥의 두눈이 한순간 빛났다.

《아니, 과장선생님!》

그는 강학선과장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있소? 사람이 찾는것도 모르구.》

하경옥은 달려가다싶이 그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선생님?》

강학선은 하경옥의 눈길이 미치는 자기의 험한 손을 슬그머니 감추며 어줍게 웃었다.

《과학평의회가 있다고 해서 올라왔소. 회의가 끝나면 인차 다시 내려가야 하오.》

하경옥은 불시에 가슴이 쓰려나는것을 느꼈다. 좀 거칠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후한 인정이 그대로 남아있는 강학선의 축간 얼굴, 감싸쥔 그의 마디진 두손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과장선생님!》

강학선은 웃으며 다른 말을 꺼냈다.

《참, 그새 여기서도 많은 일이 있었더구만. 서범천의 복강경수술이 일정에 올랐다면서?…》

《예.》

《음, 기술부원장이 힘껏 밀어주고있다는 소릴 나도 들었소. 새로 온 기술부원장이 첨단기술에 관심이 높다고 소문이 짜- 하더구만.》

《예.…》

하경옥은 자기 손에 들려있는 권일학의 무통약물자료를 내려다보며 알릴듯말듯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이 모든것이 진심일수도 있지 않을가. 소문그대로 기술부원장선생이 진심으로 첨단기술을 밀어주는것이 아닌지.… 그러나 강학선과장은 다르게 말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소문이 클수록 실속은 없지.》

《예?》

《젊은 사람이니 처음엔 떠들썩하게 소문내기도 한다는거요. 새로 부임된 일군들이 누구나 그러듯 자기라는 존재를 뚜렷이 보여주어야 하니까.》

하경옥은 의아한 눈길을 들어 강학선을 쳐다보았다. 정말 권일학이 자기의 낯내기를 위해서 복강경수술을 내밀고있을가? 그 어떤 공명때문에?… 하경옥은 의혹의 눈길로 자기가 들고있는 무통약물실험자료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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