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4 장 책임한계


4


하경옥은 알수 없는 충격에 이윽토록 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권일학의 무통약물실험자료를 끝까지 보고난 그는 지금 시약에 얼룩지고 탈색되여버린 그 실험자료 여백에 씌여진 글들을 다시금 상기해보고있었다.

《누모르안! 이것만 받아들이면 리상적인 무통제를 내놓을수 있을것이다.》

또 어느 한 여백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합성약물! 철저히 우리 나라 원료에 의거하는 생산체계를 세워야 한다.》

다음 마지막장에 휘갈겨쓴 글.…

《완성까지는 아직 멀었다, 멀었다!》

하경옥은 습기에 퍼져 잘 알아볼수 없는 그 글을 더듬으며 마음속으로 감탄했었다. 얼마나 훌륭한 실험자료인가!… 사실 누모르안에 의한 합성약물은 아직 미개척이였다. 이 합성과정은 가스에 의한 중독과정이기때문에 누구도 쉽게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위험한 연구의 길을 권일학은 지금껏 혼자서 힘겹게 걸어왔다. 이렇게 훌륭한 연구성과를 그는 왜 끝까지 자기가 완성하려고 하지 않고 이대로 넘겨주었는지.…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간호원이 방안으로 뛰여들었다.

《하선생님, 이걸 어쩌면 좋아요? 글쎄 임신부가…》

《무슨 일이 있어요?》

《참, 별난 일두 다 있네! 글쎄 방금 해산직전의 임신부가 들어왔는데 한사코 의사들의 진찰을 거절하지 않습니까, 죽는다고 소리만 지르면서…》

《그래요? 어서 가보자요.》

하경옥은 서두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혹 임신부들중에는 눈앞의 해산이 무서워 괜히 들볶는 녀자들도 있군 했다.

산전실에 들어서던 하경옥은 그만 아연하여 그 자리에 멎어섰다. 해산이 거의 림박한 임신부가 온 산원이 떠나갈듯 고함치며 소리를 질러대고있었던것이다.

《아이구, 나 죽는다!》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녀인은 몹시 성격이 세찬 축이였다. 막무가내로 의사를 뿌리치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다.

《아주머니, 어디가 아픕니까, 예?… 여기? 아니면 여기?…》

병력서를 작성하려던 남자의사는 필요한 소견도 적어넣지 못하고 그냥 물러나고말았다. 조산원 두세명이 옆에 지켜서서 별말을 다하며 얼려도 진찰에조차 응하지 않았다. 애기심음도 들어보아야 하고 태심음이 더 떠지기 전에 무통제주사를 놓아야겠는데 임신부는 간호원의 손을 뿌리치고 눕지도 않았다. 아파죽겠다고 온몸을 비틀며 비명소리만 내질렀다.

그에게 다가간 하경옥은 조금 어성을 높였다.

《아주머니! 여긴 병원이예요. 그러니 의사들이 하라는대로 해야 합니다. 고운 애기를 낳길 바라겠지요?》

조금 주춤했던 임신부는 해산이 시작되자 또다시 고아댔다.

《아이고, 여보?! 어디 있어요?… 아이고, 어머니! 나 못 견디겠어요.…》

가장 친근한 사람들은 다 불러대며 목청을 돋구는 그를 조산원들이 량옆에서 붙잡고 해산시킬수밖에 없었다.

하경옥을 보조하고있던 남자의사가 친절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조금만 더 힘을 주자요, 조금만 더.… 잘합니다. 그렇지, 또 한번 힘을요.…정말 용습니다. 조금 아프지요?》

흔히 일반적으로 해산을 겪어본 녀자들은 남자의사에게서 해산방조를 받을 때면 상냥한 그 봉사성에 마음이 안정되여 더 좋다고들 한다.

아마도 그것은 진통의 아픔을 목격하는 남자의사들이 연약한 녀성이 겪는 무서운 고통을 두고 련민과 동정이 솟구쳐 그들에 대한 해산방조를 더 친절하고 성의껏 하기때문인지도 모른다.

임신부는 막무가내였다. 고함소리는 더 높아졌다.

《아이고!- 더 못 견디겠다!-》

그것이 해산에 영향을 미치고있었다. 의사들이 환자를 지내 어루만지면 때로 이런 역작용을 할 때도 있는것이다.

하경옥은 엄하게 그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더 소리쳐요, 더! 아직 약해요.… 어서 더 소리쳐요! 그러면 틀림없이 미운 애기가 나올거예요.》

임신부는 곧 입을 다물었다. 이 순간 하경옥은 로숙하고 세련된 의사일수록 해산직전의 임신부들에게 엄격한 요구성과 친절성을 잘 배합하여야 한다고 하던 유능한 산과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임신부들을 능란하게 다루는 묘리는 하루이틀에 터득하는것은 아닌것이다.

그를 보조하던 남자의사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는 됐습니다.… 씩씩한 사내애입니다. 축하합니다, 아주머니!》

하경옥은 어린애처럼 고분고분해진 산모에게 산꿀을 권했다.

《자, 어서 꿀을 마셔요.》

금방 해산한 산모는 머리를 저었다.

《싫어요, 입에 당기지 않아요.》

《그렇다고 뿌리치면 안돼요. 이 산꿀은 산모들의 건강을 위하여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꿀이예요. 자, 어서 들어요!…》

방금전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다 불러대며 요란하게 떠들던 산모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싶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를 지켜보던 남자의사가 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 아까는 왜 그렇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의사들의 말을 듣지 않았소?》

산모가 솔직히 이야기했다.

《죽을가봐 무서워서요.… 우리 집 로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애기를 낳을 때는 온몸의 힘을 다 내여 소리지르면 아픔이 좀 덜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껏 소리를 질렀지요 뭐.》

《아, 그래서 소란을 피웠단 말이요?》

《글쎄, 내가 원래 엄살쟁이긴 하지만… 사실 아픈거야 어쩌겠나요. 나 죽는다 하고 소리칠수밖에.…》

모두가 웃었다. 산모자신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쑥스럽게 웃으며 조산원들에게 미안하다고 량해를 구했다.

그러나 하경옥은 웃지 않았다. 진통의 아픔, 아이를 낳는 녀자라면 누구나 다 생리적으로 겪는것이지만 그 진통이야말로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것인가. 하루에도 수십번 아니, 매일, 매 시각 그 진통을 보고 느끼는 하경옥이였기에 그 누구보다 먼저 무통제를 연구해냈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산모들의 고통을 덜어주는것을 보았을 때는 진정으로 자신에 대한 긍지와 만족감을 느끼던 그였다. 그것으로 해서 환자들의 아낌없는 사랑도 받아왔던 하경옥이였다.

하지만 권일학은 이런 그를 가차없이 부정해버렸다. 처녀의 그 모든 긍지와 자부심을 깡그리 부셔버린것이다.

누구의 말이였던가.…

《…하선생두 봤지요? 기술부원장이 자기의 선배인 강학선과장을 어떻게 조겨대는지! 생명, 책임, 량심.…》

그것은 위인섭이 권일학을 두고 한 말이였다. 그랬다, 기술부원장 권일학은 하경옥 자기도 그렇게 사정없이 조겨대였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환자에 대한 정성이 부족하다고 무자비하게 짓조겨놓았었다.

그러나 하경옥은 권일학이 연구해온 새로운 합성물약이 자기의 무통제보다 비할바없이 월등한 요소를 가지고있으며 그 둘을 잘 결합시키면 앞으로 보다 훌륭하고 리상적인 무통제를 완성할수 있다는것을 부정할수 없었다. 이런 충격이 만족감과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자기를 가차없이 두들겨 깨웠다는것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하경옥은 머리를 저었다. 누모르안에 의한 이 합성약물자료를 고스란히 자기가 받게 된다면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이 땀흘려 가꾸고 키워온 열매를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손쉽게 딴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다. 하경옥은 이런 행운을, 그런 동정을 받고싶지 않았다. 숨겨진 그 어떤 혜택처럼 느껴지는 양보를 한사코 받고싶지 않았다.

하경옥은 입술을 옥물었다.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지금 쓰고있는 무통제를 다시 검토하고 자기식의 새로운 누모르안에 의한 합성약물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하여 기어이 리상적인 무통제를 완성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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