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제 4 장 책임한계


6


늘 그러했던것처럼 권일학은 오늘도 몹시 바빴다. 복도에 기다리고있던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6산과 과장이 병력서를 들고 들어왔다.

《부원장선생님, 오늘 퇴원환자들의 병력서입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전문병원에 파송하는 환자의 병력서입니다.》

권일학이 그가 내미는 병력서에 수표하고 밀어놓자 어느새 그뒤에 서있던 5부인과 과장이 재빨리 그 자리에 여러개의 약처방을 올려놓았다.

간단한 질문속에 약처방들을 비준해주는데 부인과의 어느 한 의사가 병력서를 들고 뛰여들어왔다.

《기술부원장선생님, 탈출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전혀 들여다볼수가 없습니다. 그냥 돌려보낼가요?》

권일학은 수표하던것을 마저 해주고나서 병력서에 눈길을 돌렸다.

《돌려보내면 어쩌겠소? 먼 지방에서 왔는데…》

《아니, 그럼?…》

《곧 수술준비를 하고 기다리시오. 내가 들어가봅시다.》

그때 구급과장이 한 청년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기술부원장선생님, 방금 정상위태반 조기박리 임신부가 들어왔습니다.》

권일학은 병력서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물었다.

《지금 증상은 어느 정도요?》

《제3도입니다.》

제3도라는것은 임신부의 상태가 중하다는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출혈경향이 현저하고 이완성출혈을 합병하며 태반박리는 모체면의 절반이상에 이르고있다는것이다. 지체없이 수술해야 했다.

《빨리 수술장에 내려보내시오. 곧 구급수술을 조직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고있던 청년이 권일학에게 성큼 나섰다.

《저, 그런데 그 수술을 하경옥이라는 의사선생님에게 맡겨주면 고맙겠습니다.》

《하경옥선생?》

순간 권일학은 무엇인가 따뜻하고 부드러운것이 자기의 가슴에 깃드는것을 느꼈다. 류달리 검은, 언제나 마음속에 따뜻한 등불을 켠듯 한 그 처녀의 두눈… 아버지를 찾아왔던 정철이를 아프게 바라보던 그 녀자의 눈에 어렸던 눈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이였는지?…

권일학은 탁우에 놓인 병력서를 한쪽에 밀어놓으며 그에게 물었다.

《왜 하경옥선생에게서 꼭 수술을 받으려 합니까?》

청년은 주저없이 그를 마주보고있었는데 자그마하고 열정적인 두눈에는 무엇이라고 할수 없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이고있었다.

《기술부원장선생님, 이제 수술해야 할 그 임신부는 저의 안해입니다. 제가 안해와 함께 평양에 간다는걸 알고 우리 의료기구공장에 내려와 일하고있는 강학선선생이 저를 찾아와 산원엔 박사들도 많고 기술이 높은 의사들도 많은데 그중에는 하경옥이라는 녀의사도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하경옥선생은 의술도 높을뿐아니라 마음도 곱고 친절하다고 하면서…》

《강학선과장이… 알려주었단 말이지요?》

권일학은 복강경수술을 위한 과학평의회가 끝난 다음 차겁게 자기를 바라보던 강학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전히 고민에 잠긴듯 한 어두운 낯빛의 강학선, 그는 산원으로 오는 이 청년에게 수많은 박사들과 하경옥을 알려주면서도 기술부원장인 자기에 대하여서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청년이 계속 설명했다.

《그리구 말입니다. 언제인가 우리 단조직장의 반장아주머니가 갑자기 집에서 해산하여 갓난애기까지 다 죽게 되였는데 글쎄, 여기 산원구급차가 달려와서 그들모두를 산원에 제꺽 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반장아주머니는 그때 담당의사였던 하경옥선생이 밤을 새우며 치료를 잘해주었기때문에 산모도 애기도 다 살아났다고 하면서 지금도 늘 그 일을 옛말처럼 말하군 한답니다. 그래서 저의 안해도 꼭 하경옥선생에게 맡기고싶어 그럽니다.》

《음.》

권일학은 한쪽에 밀어놓은 병력서에 말없는 눈길을 던졌다.

병원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있군 한다. 질병과 아픔으로 고통을 겪어온 환자들은 흔히 자기의 담당의사가 그 누구보다 기술이 높기를 바라며 또 가장 믿음직한 의사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맡겨야 할 그 담당의사가 어느 의사보다 더 친절하고 경험이 많기를, 하여 자기의 병과 아픔을 깨끗이 낫게 해주고 건강을 되찾아주기를 바란다. 때문에 그들은 환자의 특이한 감각으로 오래동안 함께 생활해온 옆사람들보다도 유능한 의사들을 더 잘 가려보고 정확하게 평가하군 하는것이다.

권일학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한 의사가 모든것에 다 준비되기는 쉽지 않다. 물론 하경옥이 녀의사들중에서는 누구보다 친절하고 수술도 잘하지만 만약 수술도중 어떤 불의의 정황이라도 생긴다면?… 물론 기술부원장인 자기가 이 수술에 참가하지 못해도 하경옥과 함께 이런 수술을 맡아할 의사들은 이 산원에 얼마든지 있다.

문득 강학선과장이 떠올랐다. 이럴 때 그라도 있었으면!… 산과의 유능한 박사인 그가 이런 모퉁이를 맡아준다면 얼마나 마음이 푹 놓였을텐가. 그는 지금 단조직장의 프레스앞에 있을것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던 권일학은 불현듯 자기가 하경옥이 맡아야 할 이 수술에 가장 유능하고 능력있는 의사가 함께 참가해주기를 바라고있는것을 깨달았다.

구급과장이 그의 생각을 자기나름대로 리해하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경옥선생도 우리 산원에서야 유능한 녀의사들중의 한사람이 아닙니까. 별일 없을겁니다.》

권일학은 그의 말을 긍정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믿소.》

곧 청년과 함께 구급과장도 방에서 나갔다. 여전히 치료문건들을 처리하던 권일학은 조용한 인기척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웬 녀인이 조심스레 출입문옆에 서있었다. 녀인이 머리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기술부원장선생님.…》

가냘프고 아직 병색이 가시지 않은 자그마한 녀인, 잠시 녀인을 눈여겨보던 권일학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선우금숙환자구만요?》

옳았다. 녀인은 강학선과장의 문합술로 하여 소동이 일어났던 그 환자, 유치원교양원이였다.

《그래, 수술한 부위는 일없습니까?》

《예.…》

권일학은 활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마 다른 일은 없을겁니다, 수술은 힘들었지만 후과는 좋으니까요. 건강도 이제 더 나아질거구. 어떻습니까, 지금은?》

《예.… 좋아졌습니다.》

권일학은 친절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남달리 말이 없는 녀인이여서 더 따뜻하게 대해주고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녀인은 눈길을 떨구며 손에 들고있는 자그마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저, 하경옥선생이 기술부원장선생을 찾아가라고 하기에… 이런 문건은 부원장선생님의 수표가 없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하경옥선생이?》

하경옥이 이 녀인과 가깝다는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였다. 녀인을 병원에 실어온것도 그 처녀였고 패혈증으로 다시 재수술을 했을 때 매일같이 음식을 해가지고 찾아오던 의사도 다름아닌 하경옥이였었다. 아마 그래서 이들은 서로 친동기나 다름없는 그런 사이가 되였을것이다.

권일학이 녀인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 무슨 수표를 해달라는겁니까?》

녀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엇때문인지 앞섶의 단추를 비틀어쥐고있는 손가락들이 가늘게 떨리고있었다.

《저, 이 의학감정서에…》

《의학감정서?! 그건 무슨 말입니까?》

녀인이 눈길을 떨구었다. 발끝을 내려다보는 속눈섭에 눈물방울같은것이 맺혀 흔들렸다.

《이제는… 어쩔수 없어요. 몇해째나 아이를 낳지 못하니… 그래서 남편과 갈라지려는겁니다. 기술부원장선생님이 저를 위해 무척 애써주었는데… 한번만 더 도와주세요. 그저 영원히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의학감정서만 해주면 리혼하는 남편에게도 좋을것 같아서…》

《?!》

갑자기 귀가 멍해졌다.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귀에 가져다대기까지 했다. 의학감정서에 수표를 하라구? 영원히 아이를 못 낳는다는?…

그것은 거의 부탁하는 어조였다. 애원도 요구도 아니였다. 모든것을 단념한 메마르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권일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나무잎들이 언제부터인가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에 축축히 젖어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밑에 밟히우고있었다.

지금 뒤에서 자기를 쳐다보고있는 선우금숙환자는 재수술할 때 권일학이 무자비하게 란관을 떼여버리고 생명을 구원한 그 불임증환자이다. 어머니가 되게 해달라고 그리도 소망했던 녀인, 그래서 하경옥이 부탁을 했고 강학선과장이 모험했던 녀인, 그처럼 애쓰고 바랐건만 오늘 이 녀인에게는 그 간절한 소망도,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도 모두 가뭇없이 사라져버린것이다. 이 녀인이 꼭 이렇게만 되여야 하는가.…

권일학은 그에게 몸을 돌리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래 남편은… 동의했는가요?》

《…》

《금숙선생, 다시 생각해보는것이 어떻습니까. 내 보기엔 남편도 대답하지 않은것 같은데…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소?》

여전히 앞단추를 비틀고있던 선우금숙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지금껏 리해해준것도 고마운 일인데 우리에게 자식이 없다는것이 명백한 지금에야 어떻게 그냥… 더구나 저의 남편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여서 시부모님들은 안타깝게 손자가 태여나기를 기다리고있답니다. 그걸 알면서 제가 어떻게 남편곁에 더 남아있겠어요. 저는 그이를 위한 마지막 이 일을 꼭 기술부원장선생님이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추위를 느끼며 권일학은 몸을 옹송그렸다. 비스듬히 열려있던 창문사이로 바람이 쓸어들어왔다. 지금은 가을, 머지않아 겨울이 올것이다. 그러면 모든것이 얼어붙고말것이다.

밖에 내리고있는 보슬비는 여전히 거리를 적시고있다. 어쩌면 이런 일이…

권일학은 언젠가 아이들속에서 밝게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색종이와 나무토막으로 반달곰의 집을 짓던 아니, 마음속에 사랑의 집을 짓던 선우금숙.… 그는 설사 가정을 잃는다 해도 변함없이 학교교육의 기초를 닦아주어야 할 유치원어린이들에게 자기의 심혈을 다 바칠것이다. 아픔이 클수록 정과 사랑을 깡그리 그 어린이들에게 쏟아부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치원어린이들의 사회적양육자이며 교육자이기 전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머니가 되여야 할 녀성인것이다. 헌데 그렇듯 행복을 위해 생명을 내대고 아이를 낳고싶어했던 그가 이제는 가슴아픈 불행을 부탁하고있는것이다.

잠자코 서있던 선우금숙이 그만 두손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선채 돌부처마냥 굳어져버린 권일학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녀인의 흐느낌소리가 뼈속까지 파고들며 사정없이 가슴을 찔렀다.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한단 말인가, 무엇으로 이 아픔을 덜어준단 말인가.…

입술을 깨문 선우금숙의 어깨가 더욱 세차게 떨고있었다. 참아오던 마음속 괴로움이, 지금껏 믿지 않으려던 마지막절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아프게 흘러나오고있는것이다. 녀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차례지는 가장 범상한 기쁨, 어머니라는 가장 평범한 그 행복이 어째서 이 녀인만은 피해가는것인지?…

그 녀자의 흐느낌소리를 들으며 권일학은 의자등받이를 으스러지게 틀어쥐였다. 그리고 신음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인섭선생, 선생은 이 일을 알고있소? 이런 녀성들을 내버리고 어디 가서 헤매고있는거요!…》

선우금숙은 오래도록 흐느껴울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소리없이 내리는 보슬비가 거리를 축축히 적시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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