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회)


제 4 장 책임한계


8


그때 위인섭은 문수봉회사 부원과 함께 자기가 연구한 광폭항생수를 외국에 넘기기 위한 판로개척때문에 밤낮없이 뛰여다니고있었다.

권일학이 찾아갔을 때 그는 회사부원과 함께 면담실에 들어가있다고 했다. 접수원처녀는 무슨 중대한 국제회의라도 있는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면담땐 누구도 면회할수 없어요. 한순간에 몇십만원이 왔다갔다 하거던요.》

권일학은 접수실의 쏘파에 눌러앉았다. 오래 기다려야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접수원처녀가 바뀌였다.

처녀가 놀라와하며 말했다.

《인섭부원 말이예요? 아직 대방이 오지 않는다고 저기서 두덜거리고있던데요.》

권일학은 면담실로 들어갔다. 여느때처럼 기름 바른 머리를 곱게 빗어넘기고 말쑥하게 차린 위인섭이 몸이 뚱뚱한 사나이와 마주앉아 주패를 놀고있었다. 그들은 제 흥에 겨워 누가 들어서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기다린자에게 행운이 온다!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이지요. 거래를 하자면 마음을 푹 늦추고 기회를 기다릴줄도 알아야 하거던요, 생원님.》

《뭐?》

《안달아하지 말라구요. 광폭항생수만 넘기면 자네가 바라던 그 100살장수연구도 멋있게 할수 있거던. 그러니 생원님, 그저 내게 모든걸 푹 맡기라니까요.》

《난 생원이 아니요. 정말 계속 빈정대겠소?》

《아하, 이 사람이 요즘 신경질이 많아진다?》

뚱뚱한 사나이가 주패장을 덮었다. 위인섭도 손에 쥐고있던것들을 훌 내뿌렸다.

《난 건달군들은 질색이요. 벌써 몇시간째 기다리고있소? 당신처럼 종일 빈둥거리는 사람이 어떻게 고도의 경제법칙이 적용되는 무역사업을 한다는것인지… 참, 어처구니 없소.》

《아따, 이 생원님 봐라, 장사에서는 뭐가 필요한지 알기나 하고 큰소리야? 하루가 아니라 열흘이라도 기다릴 땐 기다려야 하는거야. 머리는 좋은데 이런 일에선 영 생둥이거던.…》

바로 이때 문밖에서 차가 멎는 소리가 나더니 몸이 갈람하고 커다란 색안경을 낀 사람이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위인섭이와 뚱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이제야 왔구만.》

뚱보가 반갑게 하는 말, 그때에야 위인섭은 비로소 문가에 서있는 권일학을 발견한듯 했다. 다음순간 그는 눈을 내리깔며 권일학을 외면해버렸다.

권일학은 그들을 방해하고싶지 않아 가만히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멀리 가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상 위인섭을 만나지 않고서는 돌아갈수가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채 점도록 서있었다. 또다시 흘러가는 지루한 시간, 이따금 오고가는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그를 여겨보군 했다.

안에서 무엇때문인지 어성이 높아지고있었다. 권일학은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회사부원이라고 짐작되는 뚱뚱보가 색안경 낀 사람을 한쪽으로 끌고가 뭐라고 했다. 어성이 높아진것은 색안경을 낀 사람이였다.

《안되오, 그럴순 없소.》

권일학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 뒤쪽에 있는 쏘파에 앉았다. 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곤하여 견딜수 없었다. 어쨌든 위인섭을 만나야 했다.

그들은 계속 무슨 물건이니, 가격이니, 넘긴다느니 하는 소리들을 반복했다. 위인섭이 연구한 광폭항생수를 두고 무슨 물건이라고 하는것 같았다.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회사부원이 대방에게 견본을 내놓았다.

색안경이 입귀를 비쭉거렸다.

《상표가 마음에 안 드는군. 기술지표는?…》

그는 기술지표를 들여다보며 처음통보와 차이가 난다느니, 뭐니 하면서 까다롭게 굴었다. 회사부원이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는것이 알렸다.

《차이나다니요?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런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그러면 딱하지 않습니까.》

《아니요, 우리에겐 꼭 필요한 지표요. 하지만… 가격을 대폭 떨구겠다면 그것도 수용할 용의는 있소.》

《안되오!》

지금까지 주먹으로 이마를 고이고 씨근거리고있던 위인섭이 소리친것이였다. 회사부원이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가만있으라구.》

가격투쟁은 계속되였다. 흥정하고 타산하고, 트집잡고 우기고.…

얼리우지 않으려고 버티던 회사부원과 배심있게 값을 낮추던 상대방은 오래동안 싱갱이를 벌리던 끝에 드디여 값을 정하고말았다.

주먹에 입술을 꾹 눌러대고 모든것을 지켜보고있던 권일학은 저도 모르게 아연한 눈길을 들었다. 그가 보기에도 처음과는 달리 엄청난 헐값이였던것이다.

위인섭이 또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렇게는 안되오. 그런 헐값으로 넘긴다는걸 사장동무가 알면 뭐라겠소?》

《이보게 인섭이, 사장동문 이런 일에까지 관심 못해.》

《그럼, 사장동무도 몰래?》

《자 자, 동문 그저 차례지는 떡이나 먹으라구. 연구는 자네가 했지만 사고파는건 우리 일이야. 더이상 삐치지 말게. 그런 자존심은 필요없어!》

《뭐라구? 그래 나한테 자존심까지 없으면 뭐가 남나, 응?…》

그는 어느새 견본으로 내놓았던 항생수를 으스러지게 거머쥐였으나 별안간 자기를 지켜보고있는 권일학을 발견하고 굳어져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뒤돌아보았다. 뚱뚱보부원인지 색안경인지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거긴 누구요, 어떻게 여기 들어와있소?》

권일학은 아무말없이 곧추 위인섭에게로 다가갔다.

《인섭선생, 나 좀 봅시다.》

순간 위인섭의 두눈에 핑-물기가 어리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며 《인섭선생?!》하고 속삭이였다. 오래간만에 듣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듯 했다.

권일학은 나머지 두사람을 스쳐보며 말했다.

《내 평양산원 기술부원장입니다. 인섭선생과 좀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리고는 위인섭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왜 그리 놀라는거요? 내가 뭐 못 올데를 왔소?》

《…》

여전히 위인섭은 허둥거릴뿐이였다. 그가 잡아끄는대로 발을 헛디디며 따라서는데 숨소리가 거칠었다. 막상 접수실밖으로 나가자 돌연 말뚝처럼 버티고 서버렸다. 바람이 세게 불면서 그의 매끈하게 빗어넘긴 머리칼을 날리였다.

《왜 왔습니까?》

위인섭은 마치 싸움이라도 거는듯 했다.

《어째서 여기까지 찾아다니며 시끄럽게 구는겁니까? 난 인젠 산원 사람이 아닙니다.》

《인섭선생.》

《그래, 뒤구석에서 지켜보고 비웃었겠지요? 한땐 콤퓨터의 씨피유 같은 두뇌를 가졌다고 뻐기던 위인섭이 몇푼의 돈을 놓고 다툰다고… 하지만 난 그런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릴 그렇게 하오? 내가 왜 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한순간 위인섭의 입가에 랭소가 떠올랐다. 그는 발밑의 작은 돌을 걷어차며 심술궂게 말했다.

《모르긴 왜 모르겠습니까. 이 위인섭에게 인정을 베풀자고 왔겠지요.》

《옳소, 인섭선생을 데리러 왔소. 지금 산원엔 불임증으로 고민하고있는 환자들이 인섭선생을 안타깝게 기다리고있소. 인섭선생, 산원에 다시 와서 체외수정연구를 완성하구…》

갑자기 터지는 웃음소리, 위인섭이 거의나 로골적으로 경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소리내여 웃어대는것이였다.

《참, 기술부원장선생은 여전하시군요. 처음 오자부터 숱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그다음엔 그들을 실망케 하더니 오늘은 불임증환자들에게 필요한 위인섭이여서 찾아왔다?… 아니, 난 안 가겠습니다. 내가 뭣때문에 기술부원장선생과 함께 고생하겠습니까?!… 난 여기가 좋습니다.》

권일학은 차츰 목구멍이 말라들고 눈이 깔깔해지는것을 느꼈다. 언젠가 제일 싫어하고 꺼려하는 작은 짐승들을 봤을 때처럼 온몸이 떨려나고 속이 메슥메슥해졌다. 당장 침뱉고 돌아가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참지 않을수 없었다.

하늘에서는 비구름이 서로 엉키고 덮씌우며 어데론가 허둥지둥 흘러가고있었다. 금시라도 비가 쏟아질것 같았다.

《인섭선생.》 권일학은 말라드는 입술을 혀로 추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은 모르겠지만 어제 한 녀성이 나에게 찾아왔댔소. 불임증이라는 의학감정서를 해달라구… 영원히 아이를 낳을수 없기때문에 남편과 갈라지려고 한다는거요.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요. 인섭선생, 그런 녀성들을 위해서 산원에 다시 와주오.》

《기술부원장선생이 그렇게 인정있는 사람인줄은 여태 몰랐군요. 체외수정은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하겠지요, 힘은 들겠지만… 난 그런 고생을 다시 하고싶지 않습니다. 산원에서도 내가 나간것을 좋아할텐데.》

《아니요. 내 말을 믿으시오, 모두가 인섭선생이 다시 오기를 바라고있다는걸. 지금 서범천선생은 복강경수술을 거의 완성하고있소. 체외수정연구에서 제일 앞서있던 인섭선생이 여기서 이렇게 값없는 존재로 되고있으니…》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권일학은 혀를 깨물었으나 이미 쏟아놓은 말을 주어담을수는 없었다.

《값없는 존재?…》

위인섭이 두눈을 쪼프리며 가쁘게 씨근거렸다.

《그러니 아주 루추해졌단 말이지요? 좋습니다. 아무렇게나 말하십시오.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꼭 알아두십시오. 이 위인섭이 거꿀정리요, 뭐요 하면서 뒤걸음치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나도 자기 생각은 다 있다는걸 말입니다. 그러니 산원에 날 다시 끌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어데선가 먼 우뢰소리가 울려왔다. 얼마후엔 후둑후둑 비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권일학은 한자리에 굳어진채 꼼짝하지 않고있었다.

위인섭이 언제 눈앞에서 사라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머리우에서 번쩍이는 번개불, 눈앞이 확 밝아지고는 날이 저문것처럼 어두워졌다. 그는 몸을 떨며 걸음을 옮겼다. 때아닌 가을철 찬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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