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제 6 장 무엇이 사랑입니까


5


하경옥은 먼저 세쌍둥이임신부에게 들려 이상이 없는가를 알아본 다음 해산실에 가서 조산원들과 함께 담당산부들의 해산을 방조해주었다. 이미 정신무통법을 해설해준 산부들에게는 해산시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다시 상기시켜주었고 진통이 심한 산부에게는 해당한 무통약물을 점적할것을 조산원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얼마후 제기된 담당산부들의 해산방조를 끝내고 의사실에 돌아온 그는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지쳐 노그라질 지경이였다. 세쌍둥이임신부를 실어온 그때부터 어느 한시도 쉬여보지 못한 그였던것이다.

극도의 피로에 잠긴 하경옥은 절로 감겨지는 눈을 이기지 못해 책상우에 머리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잠간 눈을 붙이면 기운이 좀 날거야.…》

그러나 잠들수 없었다. 이제 림숙정당비서가 현장에 가있는 강학선과장선생을 데려오면 담당의사인 그도 세쌍둥이임신부의 절개수술에 함께 참가해야 했다.

눈을 감은채 생각한다. 강학선과장이 그전처럼 수술을 원만히 해낼가? 하긴 기술부원장도 함께 참가하겠으니 걱정할건 없다.

그런데 그가 왜 강학선과장에게 이번 수술을 맡겼을가? 그토록 과장선생을 타매하고 론박했던 그가…

《하선생, 조금만 견디면 되오!》

누구의 목소리였던가. 사품치는 강물속에서 웨치던 권일학, 그의 목소리다. 숯불처럼 타는 눈빛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자기를 노려보던 모습… 그것은 무서운것이였다. 처음 보았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다. 그것은 경기장에서 승리한 프로권투선수나 국기를 올리는 축구선수들과도 다른, 그토록 모지름속에 반신반의하던 그 미남자가 아니라 지금껏 하경옥이 알지 못했던 강하고 굳센 사나이, 가장 진실하고 뜨거운 그런 인간의 모습이였었다. 그때 그것이 권일학의 참모습이였을가?…

눈을 감은채 또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왜 나를 피하는것일가? 자기에게 모진 소리를 한 녀자라고? 아니면 의지도 없는 나약한 녀자여서?… 마음이 쓸쓸해지는것이 이상했다. 무엇때문인지 속이 텅 빈것만 같고 까닭없이 울고만싶었다.

갑자기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누군가 다급히 문을 두드리고있었다.

《예-》

문이 벌컥 열렸다. 난데없이 웬 할머니의 헝클어진 머리가 쑥 들어왔다.

《여기가 기술부원장선생방이요?》

《기술부원장선생방은 9층인데요.》

《뭐, 9층?…》

숨이 차서 헐떡이는 할머니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하경옥은 다급히 물었다.

《할머니,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애가 심하게 앓는다네. 막 열에 떠서 정신이 없어.》

《애라니요?》

《내 여기 기술부원장의 에미라네. 애가 고열이 나서 헛소릴 치기에 그냥 애아버지에게 전화했는데 방이 비여있는지 어디 받아야지? 그래 너무 급해 정신없이 달려왔네.》

《아니, 뭐 정철이가요?》

하경옥은 깜짝 놀라 굳어졌다. 기술부원장 권일학이 지금 수술장에 내려가있다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수술이 한창이겠는데 그가 당장 나올수는 없는것이다.

더이상 생각할새가 없었다. 지금 정철이에겐 당장 의사가 필요한것이다. 그는 즉시 구급약들을 준비하였다.

《갑시다, 할머니!》

복도에 나서자 해산실로 달려갔다. 책임조산원에게 말했다.

《정선생, 내 급한 일이 있어서 잠간 나갔다오겠어요. 그새 무슨 일이 생기면…》

《예, 알겠어요.》

급한 마음때문에 할머니가 허둥거리는것도 돌보지 못하고 계단을 뛰여내렸다. 어느새 정문을 나서고 가까운 건늠길로 가는데 뒤따라오던 할머니가 소리쳤다.

《의사선생, 이쪽이요, 이쪽!》 할머니가 뒤쫓아왔다. 《저기 꽃매대를 돌아가야 한다우.》

하는수없이 할머니를 앞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할머니는 숨이 차서 헐떡이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글쎄, 오늘 아침에 애가 앓아 유치원엔 보내지 못하고 이 늙은게 맡아보았지. 그래 종일 애하고 같이 있으면서 그 사람이 하라는대로 약을 먹였지만 일두 참, 애는 점점 더 심해지는데… 고열이 나고 기침을 되게 하더라니까.》

할머니는 몇번 쿨럭쿨럭 기침을 깇더니 하경옥에게 매달리다싶이하며 또 말했다.

《그래서 먼저 종합진료소엘 찾아갔지. 한데 글쎄 담당의사가 왕진을 나갔다는게 아니겠나? 돌아오면 얼른 와달라고 이르고 집에 와보니 글쎄 애가 입에 거품까지 물고 쓰러져있는게 아니겠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구.…》

《예?》

《글쎄, 내가 잘못 봤는지… 아니, 하여간 그 앤 죽은것처럼 기척이 없었수다, 거품을 물구.… 오죽했으면 내가 이렇게 애아버지한테까지 정신없이 뛰여왔겠소?》

《빨리 가자요, 빨리!》

그러나 늙은이때문에 더 빨리 갈수 없었다. 늙은이는 숨이 턱에 닿아있건만 여전히 사설을 끊지 않았다.

《글쎄, 이런 일이 있을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소. 의사선생이 가니 마음은 놓인다만… 제발 그 앨 살려주게. 얼마나 귀엽구 똑똑한 애인지 모르네.》

《알겠어요, 할머니. 자, 빨리요!》

하경옥은 거의나 반사적으로 부르짖었다.

정신없이 달려간다. 오늘따라 이 길로 마주오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가. 사람들과 자주 부딪치며 달렸다. 마음이 조급했다. 그리하여 더욱더 걸음을 빨리 했다.

언제였던가?… 자기를 밀어던지며 뒤걸음치던 정철이의 파리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 애는 하경옥을 말끄러미 지켜보며 한걸음 또 한걸음 다가서더니 별안간 《아니야! 아지민 아니야.》라고 울먹이며 뒤걸음쳐 갔었다.

그토록 애정을 담아 안아주고싶은 정철이, 이제 그 애가 또 발버둥치며 나를 밀어던진다면?… 견디지 못할것이다. 그 아픔은 정녕 이겨내기 힘들것이다.

하경옥은 자기가 어떻게 권일학의 집에 들어섰는지, 어떻게 정철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는지 알지 못했다.

정철이는 실신해있었다. 할머니가 빗보지 않았다. 그 애의 입가에 하얀 거품자욱이 남아있는것을 보며 그는 소스라쳤다.

《정철아!》

대답이 없었다. 덜컥 가슴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서둘러 불덩이같은 아이의 맥박을 재고 체온을 잰 다음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보았다. 가릉거리는 숨소리…

페염이였다. 흔히 체질이 약한 아이들이나 로인들에게 잘 붙어다니는 이 병은 초기증상이 감기처럼 보이기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소홀히 지나면 생명이 위험할수도 있는 급성질환이였다.

지체없이 해열제와 진정제를 먹인 하경옥은 항생제인 암피실린을 꺼내여 주사기에 재웠다. 너무 급해 손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정철이를 붙안고 주사를 놓도록 도와주었다.

잠시후 주사를 놓은 하경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정철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열에 떠서 까실까실해진 입술, 도도록한 이마에 내돋은 땀방울과 파리우리해진 눈언저리… 병약한 어린것의 모습에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그새 소랭이에 더운물을 떠들고 들어온 할머니가 다시금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글쎄, 이럴 때 제 에미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경옥은 더운물에 적신 수건으로 식은땀이 돋은 정철이의 이마를 닦아주며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 늙은게 자꾸 보챘지, 빨리 색시를 얻어 정철이 엄마로 데려오라구. 그럴 때마다 그저 웃어넘기는 그 사람 속내를 도무지 알수가 있어야지?… 총각으로 늙겠는지… 대학에 다닐 때는 정신없이 공부에 묻혀 돌아가기에 그만 내버려두었네만 인젠 큰 산원 기술부원장이 되였는데두 그냥 장가들 생각을 않고있으니 참, 정말 속상한 일이네.… 마침한 처녀가 나서지 않아 그러는지 아니면 우리 정철이 얼굴에 그늘이 질가봐 그러는지…》

하경옥은 따스하게 젖은 수건을 꼭 그러쥐며 눈길을 들었다. 웬일인지 그날 밤, 사품치는 강물에서 허덕이던 그밤이 떠올랐다.

사나운 폭우와 비바람, 무서운 번개와 천둥소리 그리고 어둠속에서 번쩍이던 그 눈빛!… 캄캄한 어둠을 태우던 그 강렬한 눈빛은 지금도 여전히 처녀의 가슴을 뒤흔들며 뜨겁게 폭풍쳐오고있었다. 어째서 숯불처럼 타번지던 그 눈빛이 그토록 잊혀지지 않는것인지?…

하경옥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두눈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손에 든 젖은 수건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그 녀자는 운명적인 그날밤부터 웬일인지 권일학 그가 자기를 피하고있다는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던것이다. 그것은 또 무엇때문인지?…

할머니가 은근한 목소리로 또 말했다.

《산원에두 괜찮은 체네들이 많겠지? 맙씨두 곱고 또 착하기두 하구…》

《예?!》

하경옥은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다음순간 류다른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있는 할머니의 눈길과 마주치자 그만 당황하여 눈길을 떨구고말았다.

할머니가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인젠 나도 젊은 사람들 뒤바라지하기가 힘이 드네. 나이 일흔이 넘도록 손에서 동자질을 놓지 못하고있으니… 이제라도 착한 처녀를 며느리로 맞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어째선지 두볼이 달아올랐다. 하경옥은 얼른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감추며 식어버린 수건을 더운물에 담그었다. 두손에 느껴지는 따스한 촉감…

아까부터 주의깊게 하경옥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인차 상점에 나가 과일이나 좀 사오겠네. 의사선생에게 뭐 대접할게 있어야지…》

《그만두세요. 전 이젠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인차 온다니까. 좀 기다리시우.》

늙은이는 한사코 문을 열고 나갔다. 하는수없이 할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진정제를 맞은 정철이는 드디여 잠에 들어 쌔근거리기 시작했다. 하경옥은 수시로 정철이의 맥박을 재고 체온기를 들여다보며 어린애의 약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군 했다.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가 피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차츰 열도 내리고 숨결도 고르로와졌다. 위급한 고비는 넘겼던것이다.

하경옥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좀전에 나간 할머니가 돌아오자면 아직 시간이 걸려야 했다. 한적한 방안에 어린애의 고르로운 숨소리만이 들렸다.

하경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아직 식지 않은 두볼을 손으로 감싸며 생각했다. 기술부원장선생은 수술이 끝났을가, 어린 정철이가 이렇게 급한 고비를 넘기고있다는걸 그가 알기나 할가?…

창밖으로 향하던 그의 눈길이 그옆에 놓인 책상우에서 멎었다. 여기저기 펴놓은 부피두터운 책들에는 색연필로 표시해놓은것도 있고 만년필로 여러번 진하게 줄을 그어놓은것도 있었다. 그렇게 바쁜 속에서도 권일학은 매일같이 의학서적들과 론문집들을 들여다보며 연구하고있는것이다.

하경옥은 그의 정열에 감탄하며 부피두터운 책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십권으로 된 《산부인과전서》들이며 《산부인과 학위론문초록집》, 《산부인과치료참고서》와 《어머니건강과 애기기르기》 등…

그가 그것들을 질서있게 쌓아놓고 기술자료들을 뽑아놓은 책들을 정리하는데 그중 크고 두툼한 학습장에서 웬 녀자의 사진이 탁우에 떨어져내렸다. 무심히 그것을 집어들어 들여다보던 하경옥은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눈을 흡떴다.

그것은 하경옥, 자기의 사진이였던것이다!

갑자기 당황해진 하경옥은 누가 볼세라 얼른 학습장에 사진을 감추었다.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어떻게 이 두툼한 책에 자기의 사진이 끼여있단 말인가?…

아직 한쪽귀퉁이가 비쭉이 나와있는 사진을 다시 깊숙이 밀어넣으려던 그는 학습장 한귀퉁이에 써있는 《하경옥》이라는 글줄에 그만 손을 멈추었다.

…하경옥! 정철이의 친어머니와 모색이 비슷한 그 녀자, 그가 과연 강학선과장이 칭찬한것처럼 정철이 어머니로서 맞춤한 녀자일가?…

하경옥의 두눈이 굳어졌다. 정철이의 친어머니와 모색이 비슷하다구? 내가?!… 무엇인가 뇌리를 치는것이 있었다. 《아지민… 우리 엄마나요?》 어린 정철이의 물음, 아, 그랬었구나!… 그런데 어린애가 자기 어머니의 모색을 어떻게 알고있을가? 어느새 책장을 몇장 더 번지자 또 다른 글줄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회진때 하경옥을 지적했다. 알고있은것 같은데 왜 왕청같은 대답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의사의 사소한 실수는 생명과 관계된다.

…강학선의 과오, 림상비판회의!… 설사 그 수술이 아무일없이 끝났다고 해도 나는 그를 타매했을것이다. 확신이 없는 의사의 모험- 이는 곧 생명을 죽이는것이다.…


하경옥은 얼른 학습장을 덮었다. 의학서적과 론문집에서 뽑아놓은 기술자료를 적어놓은 두툼한 필기장이였다. 그 한귀퉁이에 사색의 여가마다 흘려놓은 한 인간의 고백, 하경옥은 저도 모르게 숨김없는 그 글줄을 눈밝혀 보았다는것을 깨달았다. 불현듯 남의 마음을 훔쳐본것만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의 글을, 남의 마음을 몰래 뒤적이는것을 제일 질색하던 그였던것이다.

《으-응…》

정철이가 뒤척거렸다. 황급히 제 자리에 필기장을 놓은 하경옥은 급히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정철아, 정철아!》

또다시 고르로운 숨소리, 여전히 아이는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

하경옥은 고개를 들어 다시 책상쪽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덮어버린 필기장으로 눈길이 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사실 남의 글을 뒤져본다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비록 한귀퉁이에 대충 흘겨쓴 글이긴 하지만 그것을 쓴 당자의 마음속 생각을 허락없이 들여다본다는것은 도덕적으로 죄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지만 저 필기장에는 그의 솔직한 마음이, 느낌이 적혀있는것이다. 권일학은 과연 어떤 사람일가?…

하경옥은 저도 모르게 발자욱소리를 죽이며 다시 탁우에 놓인 필기장으로 다가갔다.


…얼음장같이 차거운 사람, 수술칼같은 인간… 과연 하경옥이 의사의 본도가 무엇인지 모른단 말인가? 모두가 칭찬하는 그 처녀가… 수술칼은 랭정하다. 그 수술칼이 발산하는 빛도 차고 랭정하며 서리찬것이다. 그 예리함, 바로 거기에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의 사랑이 있는것이 아닌가?! …


…오래전 나의 담당환자였던 정철이의 친어머니, 이미전에 결단코 무자비하게 적출했더라면 생명을 구원했을수도 있지 않았을가? 동정과 인정에 묻혀 주저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후회도 없을것이다.

하경옥, 그는 알아야 한다. 의료일군들의 정은 따뜻하고 정찬 위로의 말이 아니라 차고 무자비하고 결단성있는 수술칼에 있다는것을, 여기에 생명의 구원이,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것을!…


자신에게 물어보라! 위인섭이 남기고간 말이다. 그럼 나는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원칙만을 요구한것이?!

원칙, 그것은 말그대로 누구나가 무조건 지켜야 할 기준이다. 그러나 권일학, 너의 마음속에 과연 그 원칙 하나만이 있었는가? 자신을 위한것은 없었단 말인가. 모험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한것은 없었단 말인가?…


하경옥은 정신없이 필기장을 번져갔다. 어떤 곳은 한동안 넘어간것도 있고 이름옆에 물음표만 달아놓은것도 있었으며 어느 한 장에는 피곤에 못이겨 얼룩덜룩 잉크자리만 핀것도 있었다. 그러나 또 번진다. 타는듯 한 눈빛으로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기술자료들까지 침범하며 길게 내려쓴 글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는 생명을 구하는 랭철한 리성과 수술칼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원칙이라는 하나의 곧은 자막대기, 그것으로 모든것을 재려고 했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속까지 다 잴수는 없다는것을 오늘 비로소 깨닫는듯 싶다. 원칙이라는 자의 눈금과 뜨거운 정으로 새겨진 사랑의 눈금… 그럼 무엇이 사랑인가? 그것은 서리찬 수술칼도 랭정한 원칙만도 아니다. 사랑은 바치는것이다. 아낌없이 깡그리 바치는것이다. 자기를 죽이면서도 새 생명을 살리는 무서운 모성애와도 같은것이다.

주저없이 복강경수술을 밀어주자! 만약 어떤 뜻하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하여 강학선과장이 모험했을 때처럼 그 어떤 책임이 지워진다면 두말없이 바로 내가, 이 권일학이 법앞에 나설것이다.…


…하경옥의 무통제, 분명 나무랄데 없다. 그러나 잠에서 깨야 한다. 자아도취에서 깨나야 한다. 사랑하면 할일이 많다는것을, 기술에서는 만족이란 있을수 없으며 자기가 위하려는 인간들에 대한 사랑은 모성애처럼 크고 높아야 한다는것을 그는 깨달아야 할것이다.…


…강물에서 세쌍둥이임신부를 구원하던 그밤… 잊을수 없다. 내가 무엇때문에, 어떤 충동으로 그 처녀의 뺨을 후려쳤던지… 그럴수 있는가. 한생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하경옥, 자기를 잊고 새 무통제연구에 몰두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가 안다면!… 그처럼 솔직하고 성실한 처녀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그런 깨끗한 녀성을 나같은 남자가 곁눈질해본다는것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 자기의 처지도 모르고 이런 훌륭한 처녀에게 감히 어떤 기대가 담긴 눈빛을 던지다니.…

미안하오, 하선생. 등불같은 따뜻한 그 눈빛때문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군 했던가 보오. 아마 내 아들 정철이를 가장 사랑해주고 품어줄 친어머니같은 녀성을 찾고있었는지도 모르지.

용서해주오. 이 미련한 사나이때문에 잠시나마 선생의 마음에 그늘이 졌다면…

아들아, 정철아!… 난 너를 가장 진실로 사랑하는 어머니품에, 이 세상 너를 가장 아껴주고 위해주는 그런 어머니품에 안겨주고싶구나. 너를 돌보지 못하는 이 아버지를 용서해다오.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게다. 이 아버지는 무서운 모성의 힘으로 너를 낳은 너의 친어머니처럼 그렇게 너를 사랑해줄 어머니를 기다려왔다는것을… 이제 과연 그런 어머니가 너에게 다시 나타날가? 아니, 없을것이다. 다시는…


하경옥은 필기장에 떨어지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글자들이 피면서 글자들을 알아볼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그는 다 알고있었구나. 나의 눈빛과 무언의 표정에서 모든것을 다 보고있었구나!…

그는 마지막장을 번지였다.


…진실한 사랑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소하지 않는다. 떠들며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 제일 깊은 곳에 있는것이여서 오직 진실로만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면 세쌍둥이임신부의 해산수술은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물론 우리에겐 유능한 박사들과 의사들은 많다. 기술부원장인 내가 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 수술은 강학선과장이 해야 한다. 그가 맡아야 한다. 그가 미세수술전문가일뿐아니라 강학선과장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공명을 버린 참된 의사의 사랑이 어떤것인지 진심으로 느껴야 하기때문이다.


하경옥은 필기장을 덮었다. 알수 없는 그 어떤 강렬한 감정에 소리내여 흐느껴울고싶었다.

원칙밖에 모르는 매정한 사람이라고만 여겼던 권일학, 자기의 가까운 사람까지 가차없이 차버린다고 저주했던 사람, 그가 과연 이처럼 뜨거운 심장을 지닌 사람이였단 말인가? 그저 겉만 훤한 멋쟁이가 아니라 누구도 허물수 없는 진정과 산악같은 마음을 안고있는 그런 사람이였던가? 어째서 난 이런 사람을 여직껏 보지 못했단 말인가.…

제자리에 돌아온 그는 자기가 잠든 정철이를 품에 꼭 껴안고있는것도 알지 못했다. 별안간 그 어떤 감촉에 흠칫 몸을 떨며 굳어졌다. 무엇이, 자그마하고 부드러운 작은 손이 자기의 앞가슴에서 꼬무작거리고있었던것이다. 전류와도 같은것이 온몸을 스쳐지났다. 말큰하고 산뜩한 그 손… 따스하고 정답기도 한 그것이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그의 가슴을 파고들며 긁어대고있는것이다. 아!… 그 유정함 그리고 그 어디에도 비길데 없는 순결함…

하경옥은 불현듯 아직 닥쳐보지 않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어머니의 본능, 모성애라고 하는 강렬한 녀성의 본능이 자기의 마음을 휘저으며 천천히 눈뜨는것을 느끼고있었다. 여전히 가슴을 더듬고있는 자그마한 손…

그제야 처녀는 자기가 아이를 안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가슴에서 꼬무작거리는 그것이 정철이의 애된 손이라는것도 깨달았다.

하경옥은 흐느끼듯 몸을 떨며 안고있는 어린것을 내려다보았다. 머루알같은 까만 눈동자, 맑고 초롱초롱한 그 눈이 자기를 말끄러미 지켜보고있었다. 아이가 잠에서 깨여났던것이다.

하경옥은 당황하여 속삭이였다.

《깨났구나. 정철이…》

그는 땀에 젖은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넘겨주며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겨드랑이에 꽃았던 체온기를 꺼내들었다. 당황하여 눈금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허둥거리며 미간을 모았으나 여전히 눈금을 가늠할수 없었다.

《아지미…》

어찌할바를 몰라하던 두눈이 흡떠졌다. 가날프고도 정찬 부름, 분명 그것은 자기를 찾는 정철이의 목소리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반갑고 고마왔다. 그 부름 하나에 눈물이 쑥 나올것만 같은 하경옥이였다.

《왜, 또 아프니?》

정철이가 머리를 저었다.

《그럼 왜 그러니?》

한동안 입을 꼭 다물고 빠끔히 쳐다보던 정철이가 떠듬거렸다.

《아지민… 우리 엄마 아니지?》

순간 숨이 꺽 막혔다.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며 눈앞이 아찔했다. 얼음물을 들쓴듯 온몸이 가드라들었다. 떨리는 눈길로 정철이를 바라보던 그는 그만 실신한듯 맥없이 입을 벌리며 두눈을 꼭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라고싶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시 은근하게 밀려오는 정다움… 무엇인가를 속삭이는듯 살틀하고도 야릇한 감촉이 따스한 봄볕처럼 그를 가만가만 더듬고있다, 바라고 기다리는.…

《아!-》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작고 따스한 손은 아픔에 모대기는 그의 가슴에서 여전히 꼬무작거리고있었다.

《아지미, 왜 우나?》

어린것이 놀란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운다구? 내가?… 그제서야 하경옥은 자기가 울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끝내 참아오던 눈물이 터지고야말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정철이가 울먹이였다.

《아지미, 울지 마, 울지 마! 아지민… 우리 엄마하구 꼭같애.》

마음속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온몸이 터져나갈것만 같았다. 뭐라구? 엄마하고 꼭같다구?!…

《저 책에 우리 엄마 사진 있어, 아버지가 자꾸 보는거.…》

어린것은 두툼한 필기장을 가리켰다. 하경옥의 눈길이 얼나간듯 필기장으로 향했다.

《엄마의 사진이라구?!》

정철이는 그속에 끼여있는 하경옥의 사진을 지금껏 자기 친어머니의 사진으로 알고있은것이였다. 그 사진이 엄마인줄 알고 오늘처럼 울먹거리며 들여다보군 하였을것이다. 아, 정철이 엄마!…

이름할수 없는 련민의 정이 가슴을 후려쳤다.

《정철아!…》

목이 갈렸다. 눈물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엄마!》

와락 아이를 그러안고 몸부림쳤다. 그래, 그래! 내가 너의 엄마다, 너의 엄마가 될테다. 너만 좋다면 꼭 그렇게 될테다.

처녀는 격정에 못이겨 목놓아울기 시작했다. 정철이를 붙안고 소리쳐 흐느껴울며 마음껏, 아낌없이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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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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