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 회)


제 6 장 무엇이 사랑입니까


12


언젠가도 이런 일이 있었다. 강학선이 잡아끌고 그의 처 오기화가 정성껏 상을 차리고… 끝내는 맥주 한고뿌를 마시고 바삐 나오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날, 지금으로부터 몇달전의 일이다.

권일학은 퇴근하는 사람들을 정문에 불러세우며 웃고 떠드는 서범천을 보며 이렇게 생각하고있었다. 오늘 밤에야 무슨 별다른 일이 없겠지. 제발 오늘만은 다른 일이 없어야겠는데.…

서범천이 좀 늦어진 하경옥을 잡아끌며 큰소리로 말했다.

《자, 오늘 밤엔 하선생도 강과장선생의 집으로 가야지요? 이 기쁜날 경철이 어머니가 한상 잘 차리고 기다린다는데 하선생이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기술부원장선생님, 그렇지요?》

권일학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아니, 기술부원장선생은 또 무슨 일을 핑게로 못 가겠다고 해선 안됩니다. 절대 그런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걸 알아두십시오. 오늘은 나의 조직사업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그는 오늘 매우 기분이 떠있었다. 강학선의 집에 특별히 초청받은 사람들속에 자기도 함께 있다는것이 흡족한 모양이였다.

산원의 기술부원장은 바쁜 사람이다. 많은 능력있는 과장들과 의사들이 있지만 기술부원장을 꼭 거쳐야 하는 일들도 많기때문이다. 이번에도 즐거운 저녁시간이 그에게는 차례지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고있었던듯 임선해원장이 정문에 있는 구내전화로 그를 급히 찾았다.

《기술부원장선생, 급한 일이 또 생겼어요. 오늘 〈아리랑〉공연을 관람하러 왔던 남조선의 한 임신부가 공연도중에 심한 진통으로 쓰러졌다는데 빨리 대책을 세워야겠어요.》

《예?》

《방금 구급차를 대기시켜놓았어요.》

《알겠습니다.》

권일학은 벌써 자기의 사업수첩을 꺼내들고 구급과쪽으로 걸음을 내짚고있었다.

서범천이 다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아니, 기술부원장선생은 또 어딜 갑니까?》

권일학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에게 일렀다.

《서선생, 하경옥선생이랑 같이 먼저 가서 축하를 해주오.》

하경옥은 눈을 내리깐채 가만히 서있었다. 서범천이 이 녀자의 소매자락을 당겼지만 응수하지 않았다.

그렇다, 권일학은 바쁜 사람이다. 림준호나 강학선, 서범천이처럼 자기 실무에서 제일가는 실력가라고 소리치며 자랑할수는 없지만 그들을 포함하여 많은 실력가들의 학위와 명예와 일상적인 림상실천에는 바로 권일학과 같은 일군들의 숨은 노력도 깃들어있는것이다.

《아리랑》공연관람석에서 구급차로 실어온 남조선 임신부는 곧 평양산원에 입원하여 혈육의 정이 넘치는 따뜻한 치료를 받게 되였다. 기술부원장 권일학을 비롯한 강력한 의료집단이 그에 대한 여러차례의 협의진단을 하고 그에 따른 복잡한 해산수술을 끝냈을 때는 밤이 퍼그나 깊었다. 피곤했다. 오늘 하루는 여느때보다 더 지친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만은 흥그러웠다. 바로 이것이 의료일군들의 보람이며 긍지가 아닐가?…

권일학은 정문으로 나섰다.

구름속에서 달이 헤염치고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키높이 자란 수삼나무가지를 흔들었다. 이제 얼마후면 혹독한 겨울의 추위가 닥칠것이다. 하지만 겨울은 겨울대로 그 멋이 있다.

그는 머리를 들어 구름속에서 비죽이 머리를 내민 반달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었다. 즐거운 밤, 무엇인가 크고 정답고 후더운것이 가슴속에 들어차는것을 느낀다.

불현듯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공원입구에 서있는 하얀 자태, 갑자기 가슴이 후두둑 했다.

《아니, 하선생이?!》

《…》

《여기서 뭘하고있소?》

하경옥이 두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기술부원장선생을 기다렸습니다.》

《나를?…》

처녀는 꾸며낸듯 한 딱딱한 어조로 손에 든것을 내밀었다.

《자, 받으세요. 이건 누모르안에 의한 새로운 무통제론문이예요. 곧 기술부원장선생의 이름으로 발표될겁니다.》

권일학은 그것을 받아 눈앞에 바투 가져다보았다. 희미한 달빛에서도 《권일학》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안겨들었다.

《그런데 이 론문을 왜 내 이름으로 발표하게 되오?》

하경옥은 이번에도 꼿꼿하게 대답했다.

《새로운 무통제를 완성하는데서 기술부원장선생의 노력이 컸다는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자기가 한것만큼 평가받는것은 응당한 일이지요. 그래야 공정하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웬일인지 마음이 허전했다. 늦도록 처녀가 자기를 기다린것이 다름아닌 이 론문때문이였다는것을, 하여 자기가 지금껏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바라오던것이 허망한 꿈이였다는것을 깨닫는 순간 권일학은 그 어떤 알수 없는 아픔에 지그시 가슴이 저려드는것을 느끼고있었다.

《그럼 전 돌아가겠어요.》

처녀가 돌아섰다. 그러나 걸음은 뗄수 없었다. 권일학이 그를 불러세웠던것이다.

《가만, 하선생!…》

권일학은 그 어떤 힘에 이끌린듯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순간 싱그럽고 상쾌한 처녀의 기운이, 야릇한 체취가 그의 가슴을 쿡! 찔렀다. 또다시 가슴이 후두둑 했다.

《하선생, 저, 난… 이 무통제의 완성은 우리 두사람의 마음을 합친것이라고 생각하오. 어느 한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꼭 두사람, 우리 두사람의 공동연구로 발표되여야 한다고 보오.》

《예? 공동연구라구요?…》

하경옥이 몸을 떨었다. 싸늘한 밤공기때문인지 아니면 가슴을 찌르는 마음속 충격때문인지.…

짧은 침묵, 마침내 하경옥이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숨을 죽이고 자기를 지켜보고있는 사나이, 자기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듯 한 눈빛을 마주보았다.

웬일인가. 오늘따라 차디찬 달빛이 어려있는 권일학의 두눈에는 그 어떤 랭랭함도, 그 어떤 불신의 감정도 없었다. 다만 자신을 결박하고있던 주저와 위구심의 무거운 바줄을 단숨에 끊어버리려는 결단과 자기의 진정을, 자기의 사심없는 사랑을 그대로 받아주리라는 크나큰 기대와 믿음이 어려있었다.

하경옥은 당황한듯 눈길을 떨구었다.

《전 생각하기를…》

하경옥은 말끝을 잇지 못했다. 권일학이 손을 들어 막았던것이다.

《아니, 거절하지 마오. 새로운 무통제는 분명 우리 두사람의것이요. 난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를 바랐소.》

하경옥은 후더워지는 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천천히 눈길을 들었다. 무엇때문에 이렇듯 진실한 사람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숨기려 했단말인가?…

그는 눈물로 속삭이고싶었다. 용서하세요! 전 기술부원장선생이 그런분이라는걸 믿었어요. 아니, 첨부터 그저 믿고싶었다구 할가.… 그래서 기다린거예요, 오늘 밤처럼 언제나…

그러나 이러한 마음속 속삭임은 하나도 입밖에 낼수 없었다. 무엇인가 크고 정답고 따뜻한것이 가슴가득 들어차있는것만을 느낄뿐이였다.

권일학이 입을 열었다.

《참, 내 오늘 너무 바삐 돌아가다보니 하선생에게 그만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구만. 하선생, 우리 정철이를 돌봐주어서… 정말 고맙소.》

《…》

《그새 나때문에 여러가지로 마음고생이 많았다는걸 알고있지만… 어찌겠소, 본래 그렇게 돼먹은 사람이니… 리해해주오.》

《…》

《왜 그러오? 하선생.》

하경옥은 감싸쥔 두손으로 앞가슴을 꼭 누르며 숨소리처럼 겨우 속삭이였다.

《그렇게밖엔… 더 부를 말이 없는가요? 그저 경옥이라고 부르면 안됩니까?…》

뜨겁게 마주보는 두사람의 눈빛… 하경옥은 타는듯 한 그의 눈빛에서 자기에게 쏟고있는 진정의 고백을 듣고있었다.

《난 정말 오래동안 그 말을 기다려왔소. 이렇듯 성실하고 깨끗한 처녀, 온몸이 정으로 꽉 들어차있는 동무를…》

드디여 권일학은 처녀의 한쪽어깨를 잡아 힘껏 끄당기며 조용히 뇌이였다.

《경옥이!…》

하경옥은 그만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말았다. 더운 눈물이 두볼을 적시고있었다. 세차게 떨리는 어깨… 가슴속에 차있던 모든 간절한 기대와 까닭모를 아픔이 그 눈물로 쏟아지고있는것이였다.

푸릿한 달빛이 두사람을 비쳐주고있었다. 마냥 차게만 느껴지던 그 달빛이 차츰 부드러운 미소를 던졌다. 그것은 마치 그들에게 다시는 사랑에 대한 아픔과 괴로움때문에 모대기는 일이 없을것이라고 조용히 귀띔해주는듯 했다.

하경옥은 마음속으로 묻고있었다. 기쁨과 즐거움, 희망과 기대 그리고 아픔과 괴로움, 피와 살을 바치는 무한한 헌신성, 진정 무엇이 사랑입니까?…

《경옥이, 저기를 좀 보오.》

하경옥은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권일학의 눈길이 향한 그곳으로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창가마다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불빛, 그것은 사랑의 집 평양산원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였다. 언제나 밝고 따스하기만 한 저 창가…

권일학이 말했다.

《난 저 밝은 창가를 볼 때마다 생각이 깊어지군 하오. 얼마나 많은 생명이 태여난 집이요. 온 나라에 불이 꺼져있던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저 창가의 불빛만은 꺼지지 않았댔소. 우리 장군님께서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이 나라 녀성들과 태여나는 아이들, 조국의 미래를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부어주시는 집, 저 큰집에서 태여난 수많은 새 생명들이 이제는 선군시대를 받들어나가는 하나의 세대를 이루고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럽소.》

그는 잠시 숨을 돌리고 자기에게로 처녀의 어깨를 돌렸다.

《경옥이, 난 산부인과 의사로서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긍지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가끔 저녁이면 이렇게 밖에 나와 저 창문들을 바라보군 하오. 온 나라 녀성들과 미래를 다 안고있는 저 밝은 창문들이 무엇이 사랑입니까? 하고 묻고있는것만 같아서 말이요.…》

하경옥은 저도 모르게 두손을 가슴에 모아쥐였다.

그 어떤 메터자로도 그 크기를 잴수 없고 그 어떤 저울눈금으로도 그 무게를 헤아릴수 없는 사랑!…

사랑은 위대한 힘이라고 한다, 바치는것이라고 한다, 헌신이라고도 한다, 사랑은 곧 열이며 빛이라고도 한다.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더 첨부하고싶은것이 있다. 그 모든것의 제일 밑바탕에 깔려있는것, 그 모든것에 뿌리를 두고있는 그것, 그것은 아픔이다. 새 생명이 태여날 때 겪는 모성의 진통… 그 신성한 아픔속에서 태여난 억세고 진실한 사랑만이 헌신이라는 아름드리줄기로 자라나 사랑이 태여나고 자라는 이 땅을 위해 모든것을 깡그리 태우고 바치는것이 아니겠는가!

젖은 눈으로 어머니품을 형상한 사랑의 집을 바라보는 하경옥의 두눈에 붉은 형광등으로 빛나는 《평양산원》이라는 네글자가 아름차게, 커다란 불덩어리처럼 확대되여 안겨왔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그 대답이 바로 빛나는 그 불빛속에 있었다. 이 땅의 수천만 어머니들이 겪어온 그 모든 진통이 가장 신성한 모성의 노래로 울릴수 있도록 우리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웅장화려한 평양산원이 있어 저 수많은 창문들이, 저 불밝은 글발들이 지금 그에 대답하고있는것이다.

사랑은 바치는것입니다, 헌신입니다, 우리의 피와 땀으로 지켜온것이고 길이 빛내갈 우리의 조국이며 미래입니다!…

하경옥은 여전히 자기의 어깨를 그러쥐고있는 권일학에게 머리를 기대였다. 권일학이 불같이 달아오른 손으로 그를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이윽토록 그들은 불밝은 산원의 창가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속삭이였다.

사랑하시라! 우리 녀성들과 태여나는 미래를 그리고 더 아름다와질 우리의 조국을… 더 높이, 더 빨리 전진하여 우리 조국이 강성부흥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여, 가장 뜨겁고 진실한 사랑을 안고 미래를 향해 꾸준히 걸어가시라. 우리의 모든것, 우리의 미래와 우리의 이 땅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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