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6


먹이시간이 지나자 리봄순은 서정옥에게 아버지의 점심을 드리고 오겠다고 말했다.

《어서 갔다와.》

정옥이 웃으며 머리를 끄떡였다.

봄순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인츰 돌아오겠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일없어, 천천히 갔다와.》

정옥은 살뜰한 손길로 처녀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봄순은 아버지의 점심꾸레미를 들고 시험호동을 나섰다.

그는 호동 뒤켠길로 걸음을 옮겼다.

청년직장과 종금2직장은 서로 등을 맞대고 들어앉았기때문에 뒤켠으로 가면 에돌지 않고서도 수의사방에 들어갈수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보며 지름길에 들어서던 봄순은 저도 모르게 호- 한숨을 내쉬였다.

아침출근길에서 만났던 옆집 방인화의 생각이 났던것이다.

《얘, 봄순아!》

봄순이가 큰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가공직장장 방인화는 출근길에 나선 그에게 함께 가자면서 사내처럼 팔을 휘저으며 다가왔다.

처녀와 나란히 걸음을 같이하게 되였을 때 그는 요즈음 부식물을 무얼 먹는가고 물었다.

며칠전에 담근 김치도 있고 메주장에 풋고추를 넣고 끓인것에 절인 오리알로 아침밥을 먹었다고 대답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하더니 며칠전에 온돌수리를 하니 불이 잘 들던가고 물었다.

직장장사업때문에 늘쌍 바삐 드달려다니면서도 봄순이네 살림살이를 제집일처럼 관심해주는 큰어머니였다. 이윽고 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하니? 봄순아.》

《?!》

《너의 아버지일 말이다. 지금처럼 계속 혼자 살게 할수야 없잖니?》

《…》

《효자는 부모한테 짝을 무어준다는데 이젠 네가 아버지한테 말하려무나. 새 엄마를 데려오라구 말이다, 응? 그래 넌 보급원엄마가 나쁘던?》

《나야 뭐…》

성미 앵공한 봄순은 새초롬해진 얼굴을 숙이였다.

그는 새 엄마 얘기만 나오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큰어머니의 소개로 보급원엄마가 들어왔을 때 봄순은 량부모를 다 잃은 심정이였다.

새 어머니를 맞아들이니 아버지는 그전과 다른 사람이 되여버렸던것이다.

여느때는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딸의 눈을 피해가며 새 어머니와 웃음을 나누었고 밥상에 앉아서도 말없이 새 어머니에게 더 관심하였다.

봄순이가 밤일을 나갈 때마다 가슴앓이를 하던 모습도 사라졌고 오히려 계속 나가기를 바라는듯 한 눈치였다.

결국 새 어머니를 맞으니 아버지도 이붓아버지가 돼버린것이다.

봄순이의 마음은 싸늘해졌다. 슬프기 그지없었다. 사랑과 정이 무참히 침해당하는것보다 더 억울하고 분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봄순에게는 이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마음속 생각을 터놓고 의지하던 큰어머니도 자기의 편이 아니라 아버지와 새 어머니편이였다. 만날 때마다 봄순의 심정은 아랑곳 않고 새 어머니를 잘 대해주라는 당부뿐이였다.

함께 일하는 정옥이는 정옥이대로 아버지가 좋은 엄마와 함께 살게 됐다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것이였다.

그러니 누구에게 자기 심정을 터놓을수 있으랴.

앵공한 성격 그대로 혼자서 말없이 묵새길수밖에 별도리 없었다.

그는 시험호동일이 바쁘다는 구실로 거의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봄순은 감기에 걸려 며칠동안 때식도 건느면서 호동에서 앓았다. 하면서도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정옥의 따뜻한 간호를 받고야 일어났다.

정옥에게서 딸이 앓았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시험호동에 찾아온것은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다음날이였다.

봄순이는 그때 두볼을 눈물로 적시며 아버지의 무정함과 자기의 설분을 토설하였다.

《아버지! 아버지맘속엔 새 엄마밖에 없지요? 나두… 친엄마두 다 없지요? 예?…》

딸의 항변에 마음이 약한 아버지는 당황해서 안절부절하였다.

그럴수록 봄순은 더 슬프게 울었다.

《가라요! 나한텐 아버지가 없어요! 그리구 집도 없어요!…》

다음날 차수정이도 찾아왔다. 그는 사정하듯 말했다.

《여기서 앓는걸 몰랐구나. 그저 바빠서 안 들어오는줄 알았지. 집에 가자, 응? 어서.》

하지만 봄순은 그의 손을 차겁게 뿌리쳤다. 며칠동안 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찾아와 설복해도 눈만 내려깔고 랭기를 풍기였다.

정의성의 엄한 눈빛을 보고서야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차수정이 정의성을 찾아와 봄순이가 집에 들어오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는것을 그는 모르고있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예전그대로 딸에게 자기의 사랑과 정을 깡그리 쏟아부었다. 새 어머니를 보는 눈길은 무표정이였고 가정의 사소한 일도 봄순이의 의도를 중시하면서 복종할것을 요구하였다.

점차 아버지와 새 어머니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지더니 몇달후엔 차수정이 집에서 아예 나가버렸다.

《난 이제부터 너하구만 살겠다.》

새 어머니가 짐을 꾸려가지고 나가버린 그날 저녁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봄순에게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앞으로 시집을 가더라도 아버지를 꼭 모시고 살겠다고 마음다졌다.

그러나 생활은 결코 바라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봄순은 요즈음 생각이 많아졌다.

군사복무를 마치고 가금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종금직장에서 수리공으로 일하는 진철이라는 청년이 그의 가슴속에 자리잡히기 시작했던것이다.

영예군인부부의 외아들인 진철은 홀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봄순이를 자기의 둘도 없는 배후자로 점찍고있었다.

봄순이도 레스링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에 눈빛이 번쩍번쩍하는 이 총각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이 더 깊어져갔다.

(내가 만약 진철동무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간다면 우리 아버지는…)

《너도 이젠 시집갈 나이가 됐으니 어느때든 날아가겠지? 그럼 너의 아버진 일생 고독하게 혼자 살아야 할텐데… 너도 그걸 바라지는 않겠지?》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본듯 방인화가 머리를 다소곳하고 걸음을 옮기는 봄순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봄순은 뭐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상큼상큼 걸음을 옮기면서 신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참! 너두 아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기사장동지와 보급원엄만 대학동창생이라더라.》

방인화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아낸듯 목소리까지 죽여가며 말했다.

그러나 봄순은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기사장과 보급원엄마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서정옥에게서 다 들었던것이다.

그러나 방인화는 하던 말을 계속하였다.

《기사장동지가 그러는데 보급원엄만 대학때부터 보통 똑똑하지 않구 못하는 재간이 없었다더라. 그리구 마음씨두 고왔대. 그래서 지금 보급원네 집안일에 여간 마음쓰지 않더구나.》

《…》

《사실 보급원엄만 일두 잘하구 달린 자식도 없어서 너의 아버지한텐 적임자야. 그러니 너두 아버지에게 잘 말해라. 네가 말하면 너의 아버지도 싫다구는 안하실게다.》

방인화의 당부에 봄순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거렸다.…

지금도 그의 귀전에는 큰어머니의 그 말이 울려왔다.

문득 시험호동에 자주 찾아오는 기사장이 언제인가는 큰어머니처럼 아버지와 보급원엄마에 대한 말을 꺼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뭐라구 대답할가? 내가 잘못했다구 할가?…)

봄순에게는 어쩐지 아버지와 보급원엄마를 갈라놓은 장본인이 자기라는 생각이 들군 하였다.

이제껏 아버지의 운명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의 감정만을 위주로 살았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새 엄마를 데려오라고 한번도 말하지 않았고 지금처럼 살기를 항상 바랐던것이다.

또한 자기만 있으면 아버지는 더없이 행복해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아버지에게 말해볼가? 보급원엄마를 데려오자구. 그럼 아버지는 뭐라구 하실가?…)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던 그는 땅속에서 솟았는지 불쑥 앞에 나타난 진철을 보고 우뚝 멈춰섰다.

《아버지한테 오는 길이요?》

《예.》

(흥! 뻔한걸 물으면서… 헌데 누가 보면 어쩌나?…)

처녀의 눈길은 허둥거렸다. 했으나 진철은 셈평좋게 웃으며 다가섰다.

《아버진 지금 안계시오.》

《어디에… 가셨게요?》

《수의약품 타려구 방역대에 가셨소. 동무가 아버지를 찾아다닐것 같아서 내 지금 기다리고있었지.》

진철은 무슨 큰일이나 도와나선것처럼 동가슴을 내밀며 우쭐해서 말했다.

봄순은 귀뿌리가 달아오르는것을 느끼며 몸을 옹송그렸다.

그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싶었다.

눈빛이 번쩍거리고 목청이 높은 그앞에 서면 괜히 가슴만 활랑거리였다.

《저… 이걸 아버지에게 전해주세요. 난 빨리… 돌아가야 해요.》

봄순은 머밋머밋하며 꾸레미를 내밀었다.

《조금 있으면 오실텐데…》

진철은 서운한 기색으로 꾸레미를 받아들며 정문쪽을 쳐다보았다.

처녀가 선자리에서 돌아설줄 알았으면 방역대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수의사가 나타나주었으면 하고 다시금 정문쪽을 쳐다보았다.

그럴수록 처녀는 더욱더 조바심을 쳤다.

《우리 호동에서 날 기다릴거예요. 그럼 난…》

봄순은 홱 돌아섰다. 얌전스레 어깨우에 드리워졌던 머리태가 춤추듯 흔들렸다. 어느새 봄순은 놀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호동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진철은 허구픈듯 씨물 웃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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