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9


서정옥은 미용을 하려고 방송화를 찾아갔다.

방송화는 미용실에 들어온 시누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한시간만에 정옥을 완전히 다른 녀자로 만들어놓았다.

피곤에 몰려 반쯤 졸고있던 정옥은 《자! 거울을 좀 봐요.》하는 방송화의 말을 듣고 눈길을 들었다.

그는 거울에 비쳐진 자기의 모습을 황홀해서 들여다보았다.

곁에 선 방송화도 자기의 멋진 창조물을 자랑스럽게 감상하고있었다.

《얼마나 고와요? 이제부턴 자주 오라요. 누인 멋부릴줄 모르는게 흠이라니까. 보란듯이 곱게 차리구 다녀야 해요.》

그는 반짝반짝 머리기름을 덧발라주면서 새물거렸다.

《나야 기껏 오리나 키우는데 치장해선 뭘해요? 그저 남보기 부끄럽지 않을만큼이면 되지요 뭐. 그런데…》

정옥은 쑥스럽게 웃으며 다시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스쳐갔다. 현장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멋을 부린것 같아 은근히 근심스러웠던것이다. 곱슬곱슬하고 반짝거리는 머리가 되려 한숨까지 자아냈다.

《무슨 소릴 하나?》

방송화가 크지 않은 눈을 빨았다.

《녀잔 우선 곱구부터 봐야 해요. 그래야 남편들도 헛눈팔지 않지?》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시누이의 어깨를 탁 쳤다.

《참! 기사장이 일철이 아버지일에 발벗구 나선다지? 이틀이 멀다하게 찾아다니면서… 맞아?》

원래 남의 소리하기 좋아하는 방송화인데 어째서인지 기사장에 대해서는 특별하였다. 언젠가는 남편을 소갈데말갈데 다 내몬다고 지지리도 야비하게 험담하더니 오늘은 또 무슨 심사에 기사장에게로 화제를 돌리는걸가?

《이틀이야 뭘… 필요할 때면 들리군 하지요.》

서정옥은 형님의 입방아에 기사장의 인격이 조금이라도 상할가봐 한몸으로 막아서고싶은 심정이였다.

손벽이 마주쳐지지 않는것을 민망스러워하며 방송화는 머리를 까딱까딱하였다. 하더니 인츰 해죽거리며 목을 갸웃갸웃하였다.

《누이! 그러다가 기사장한테 남편을 뺏기지 않겠어?》

형님의 말에 정옥은 그만 호호 웃고말았다. 너무도 터무니없고 현실성없는 말이여서 오히려 재미나게 들렸다.

《뭐라나요? 인간생활인데요 뭐…》

그는 꾸밈없이 웃으며 흔연히 대답하였다. 년장자처럼 아량있고 너그럽게 말하는 정옥을 보고 방송화는 눈을 할기죽거렸다.

《누인 그저 말끝마다 인간생활타령이야.… 하지만 벙어리두 남편을 뺏기니 말을 하더래.》

《그럴수도 있지요 뭐. 역시 인간생활이 아니나요?》

정옥은 다시금 곱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앉아있어야 기사장에 대한 험담만 들을것 같았다. 무엇때문에 그다지도 기사장을 시비하는지 모를 일이였다.

미용실을 나서던 정옥은 온통 가시투성이인 형님의 말을 되새겨보다가 또다시 웃고말았다.

그는 남편을 잘 알고있었다. 남편처럼 사업과 연구밖에 모르는 곧은 목이 또 어디 있으랴. 지금은 꿈속에서도 첨가제연구를 하고있는 남편이였다.

하지만 기사장에 대한 남편의 태도에 대해서는 야속하고 민망스러운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지난날의 우정은 둘째치고라도 사심없이 첨가제연구를 도와주는것만 생각해도 좀더 친절하게 대해줄수 있겠는데…

그런 면에서 오빠는 참으로 본받을만 했다. 상급에 대한 태도에서 오빠는 얼마나 공손하고 정중한가. 그런데…

그날 저녁 남편과 나란히 퇴근길에 오른 정옥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 당신은 왜 기사장동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말 한마디 안하셔요? 당신은 그래 기사장동지가 고맙지 않나요?》

남편과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정옥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정의성은 되려 랭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고마우면 어쩌라는거요? 매일 엎드려 절을 하라오?》

《당신은 언제봐야 수정보급원에겐 친절하지 않나요? 이따금 만나서두 따뜻이 인사를 나누구요. 그런데…》

정옥은 지금껏 품고있던 불만을 터놓았다.

문득 큰 공장의 기사장인 녀성앞에 서고보니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지 않을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다음순간 정옥은 머리를 저었다. 남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출세욕도 찾아볼수 없었고 오직 탐구심과 학구열만이 있었다.

《여보! 부탁해요. 래일이라도 기사장동지가 오면 제발 따뜻이 대해줘요. 예? 내 보기엔 기사장만큼 좋은 일군이 없어뵈는데… 당신이 그러니 내가 되려 미안해요. 그러니 제발…》

정옥은 거의 애원이 담긴 어조로 당부했다.

안해의 그 순진한 눈길앞에서 정의성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알겠소, 알겠다니까.》

남편이 헌헌하게 접수하는걸 보고 정옥은 복스러운 얼굴에 웃음을 피워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저녁준비를 서둘렀다.

웃방에 올라가 실험자료를 읽고있던 정의성은 부엌에서 들려오는 안해의 코노래소리를 듣고 눈길을 들었다.

문득 그의 생각은 송영숙에게로 이어져갔다. 자기자신과 송영숙의 가슴에 쓰라린 상처를 남기였던 그 시절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럴 땐 어쩌면 좋은가.…)

그때 새로운 연구과제를 받고 고향도시에 올라온 정의성은 괴로움에 모대기며 자기자신에게 안타깝게 물었다. 그는 연구소일군들을 찾아다니면서 닭공장에 다시 내려가 연구사업을 계속하겠다고 몇번이고 절절하게 호소하였다. 그의 호소는 오히려 연구소일군들을 더 감동시켰을뿐이였다. 일군들의 눈가에 담겨졌던 믿음과 기대…

《동문 역시 생각하는 품이 다르구만. 다른 동무들은 모두 중앙의 연구소나 보다 높은 곳을 지망하는데 동무만은 현실에 다시 내려가겠다니 말이요. 동문 앞으로 훌륭한 연구사가 될거요. 우리 함께 손잡구 일해보기요.…》

정의성은 그만 손맥이 풀어져 더 할말을 찾지 못하였다. 하는수없이 당분간이라도 연구소에 남아있기로 결심하였다. 닭공장으로 내려가는 문제는 얼마쯤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상정시키려는것이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순편치 않았다.

부모가 보아둔 처녀의 문제는 그의 괴로움을 더욱더 가증시켜주었던것이다. 가풍좋은 집과 사돈을 맺으면 여러모로 좋을거라면서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형제들과 총각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며칠에 한번씩 찾아오기도 하고 전화를 걸어오는 처녀의 어머니…

정의성은 도무지 마음의 안정을 찾을수 없었다.

어느날 저녁 정의성은 어머니앞에 송영숙이와 함께 닭공장에서 일하면서 희망대로 연구사업을 하려고 한다는것을 털어놓았다.

아들의 말을 들은 어머니의 눈은 화등잔만큼 커졌다.

《여길 떠나서 아예 닭공장으로 가겠다구? 도시에서 농촌으로? 철이 없구나!… 그리구 처녀가 총각에게 시집오게 돼있지 총각이 처녀한테 간다는건 또 뭐냐?》

일생 회계원으로 일해온 그의 어머니는 생활에서도 타산이 밝았고 모든것이 수자처럼 명백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역시 어머니였다.

《네가 정말 그 처녀와 헤여질수 없다면 처녀더러 여기에 오라구 하려무나. 그럼 될게 아니냐?》

어머니가 내놓은 타협안에 정의성은 그 어떤 대꾸도 못하였다.

(영숙동문 결코 닭공장을 떠나지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성의 입에서는 또다시 한숨이 새여나왔다. 낮이나 밤이나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을 송영숙의 모습은 순간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후 그는 합성제약공장 기사로 일하는 맏형의 집으로 갔다.

어릴 때에는 아버지보다 더 어려워했었지만 지금은 어느 형제보다 더 살뜰하고 다정한 맏형이였다.

《오! 우리 셋째가 왔구나. 그래 연구사업은 잘되겠지?》

맏형은 크고 어질어보이는 눈으로 동생을 반겨맞아주었다.

《참! 좋은 처녀들이 많이 나선다던데 장가는 언제 가겠니?》

《글쎄 아직은… 요즘엔 생각이 많아서…》

맏형의 물음에 정의성은 어릴적처럼 약간 응석기어린 투로 떠듬거렸다.

《잘 왔다. 복잡할 땐 환경을 바꾸면서 생각을 정립해야지.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자면서 나와 얘기나 하자.》

그는 옷을 활활 벗어걸더니 속옷차림에 꽃무늬앞치마를 둘렀다.

맏형의 차림새를 보고 정의성은 싱긋 웃었다.

《저녁을 짓자구요? 그만두라요. 형수가 들어와 할텐데…》

그의 말에 맏형은 머리를 저었다.

《우리 집은 주부가 바뀐셈이다. 때식은 거의 내가 하니까.》

《때식을 형님이 다 한다구요?》

정의성은 큰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구역인민병원 기술부원장을 하는 형수는 무슨 큰일을 한다고 남편에게 때식까지 떠맡긴단 말인가. 그는 사내처럼 허우대가 크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한 형수를 눈앞에 세워놓고 마음속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의 속마음을 읽은듯 맏형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어쩌겠니? 집사람 하는 일을 내가 잘 도와야지.》

이때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부엌으로 내려가던 맏형이 다시 올라와 송수화기를 들었다.

《나요.… 방금 들어오는 길이요.》

통화하는걸 들으니 형수가 걸어온 전화였다.

《참, 여기 셋째가 왔소. 요즘 이렇게 저렇게 생각이 많으니 날 찾아왔구만. 오늘은 좀… 오늘 또?… 알겠소, 알겠다니까.…》

맏형은 시큰둥한 얼굴로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저 늘쌍 이렇다. 오늘두 급한 환자가 생겨서 못 들어온다질 않겠니? 그저 병원에서 살다싶이한다.》

그는 어깨를 구부정하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맏형은 녀인들 못지 않게 부엌일을 잘했다. 랭동기에서 꺼낸 물고기도 척척 잘 손질했고 기름냄새를 풍기며 양념장도 제법 잘 만들었다.

정의성은 부엌에서 오락가락하는 맏형을 오래동안 지켜보았다.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여나왔다. 남자가 한생 어떻게 저렇게 살랴 하는 막연한 생각이 솟구쳐올랐다.

날이 어두워지자 학교에 다니는 조카들이 들어왔다. 두 애가 다 학교 축구소조에 다니는 벌찬 사내들이다. 한창 자라는 그 애들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배고프다면서 저녁밥부터 찾았다.

맏형은 한발 먼저 들어온 작은것의 입에 삶은 닭알 한알을 물려주었다.

《나두!》

뒤따라 들어온 큰애도 부엌문가에 서서 입을 쩍 벌렸다.

동생처럼 닭알 한알을 닁큼 삼키고서야 그 애도 집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찾아온 삼촌에게 반갑다고 매여달렸다.

얼마후 맏형은 두 애를 부엌으로 불러내였다. 그리고는 밥꾸레미를 들려주면서 병원에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어머니한테 빨리 저녁을 가져다주어라. 돌아와서 우리두 밥먹자.》

조카애들도 이제는 그 생활이 례사로운지 군말없이 집을 나섰다. 조카애들이 돌아온것은 저녁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였다. 자식들이 빈 밥곽을 들고 돌아온 다음에야 맏형은 저녁상을 들여왔다.

맏형의 성의가 담겨진 저녁상이였지만 정의성에게는 도무지 수저가 가볍지 않았다. 밥상에서 물러앉기 바쁘게 조카애들은 졸음에 몰려 방바닥에서 딩굴며 꿈나라로 갔다.

저녁상을 거두고 올라온 맏형과 나란히 누운 정의성은 온밤 잠들수 없었다. 그에겐 어쩐지 맏형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안해의 보살핌이나 공대는 고사하고 안해의 뒤받침을 하느라 두손이 마를새 없는 맏형이였다.

(…다른 가정들에서는 안해가 남편과 자식들을 돌봐주고있는데 맏형네는 그와 반대로구나. 결국 세명의 남자가 안해이며 어머니인 녀자 한명을 떠받들고있는셈이 아닌가.…)

맏형네의 류다른 생활을 헤쳐볼수록 생각은 깊어졌다.

그에게는 합성제약공장 기사인 맏형이 지금껏 그 어떤 사업성과가 없이 평범하게 생활하는것 모두가 가정적부담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영숙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정의성에게 있어서 맏형네의 생활은 류다른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많은것을 새롭게 깨닫도록 해주었다.

(사업과 생활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헌신적인 안해나 남편의 뒤받침이 있었기때문이다.…

나에게도 삶의 목표가 있다. 가금학계의 거목이 되려는 나의 결심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하다면 영숙동무한테서 그런 헌신성을 기대할수 있을가?…)

그날 밤 정의성은 처음으로 송영숙을 제3자의 눈으로 랭정하게 투시해보았다.

송영숙은 물론 뭇사람들의 눈길을 모을만 한 훌륭한 처녀였다.

그리고 남다르게 열정적이였고 뛰여나게 총명하였다.

정의성은 송영숙이 언젠가는 우리 나라 가금학계에 단단히 한몫을 하는 과학자가 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러자면 영숙동무에게도 반드시 헌신적인 방조자가 필요하다.… 하다면 내가 과연 그런 헌신적인 남편이 될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기를 맏형의 위치에 세워보다가 우뚤 놀랐다. 그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니, 난 하루도 그렇게는 못살아! 그렇게는 절대로…)

문득 눈앞에 《우리 함께 공동연구를 하는게 어때요?》하고 묻던 송영숙의 빛나는 눈빛과 청맑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리 두사람의 지혜를 합친다면 하나의 크고 훌륭한 열매를 딸게 아니나요?…》하고 즐겁게 말하던 처녀…

그날 송영숙의 얼굴에는 얼마나 큰 기대와 믿음 그리고 희망과 열정이 가득차있었던가.

사실 송영숙의 물음은 정의성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었다.

두뇌가 총명하고 열정적인 그와 지혜와 힘을 합친다면 학계의 주목을 끌수 있는 크고 멋진 열매를 거두게 되리라는 믿음이 앞섰던것이다.

하지만 곧 타산하였다.

(두 머리에 하나의 월계관을 씌울수 없다! 물론 《우리의것》도 귀중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우리의것》보다 《나의것》이 더 귀중하다.…)

정의성은 송영숙의 얼굴을 그려보며 《우리… 우리…》하고 조용히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송영숙이 그토록 정을 담아, 사랑담아 표현하군 하던 그 《우리》와 《나》를 저울에 달아보았다.

며칠동안을 두고 반복하였지만 놀랍게도 저울추는 《우리》가 아니라 《나》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그럴 때마다 정의성은 랭정해지는 마음과 함께 야릇한 아픔을 동시에 느끼군 하였다.

처녀에 대한 그리운 정이 리성을 상대로 모질게 싸우고있었던것이다.

정의성은 사무치는 정에 겨워 몸부림치듯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난 그와 헤여져 살수 없어! 헤여져선 못살겠어!》

그는 항변하듯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누구인가에 대해서 억울하게 생각되기도 하였고 저주를 퍼붓고싶기도 한 심정이였다.

그러나 《우리의것》이 아니라 《나의것》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털어버릴수는 없었다.

리성은 끝내 그의 마음속의 연연한 감정을 타승하고 《나의것》을 선택하게 했다.

정의성은 드디여 책상앞에 마주앉았다. 송영숙에게 편지를 쓰려는것이였다. 그는 무겁게 펜을 움직였다. 그러나 글줄이 잘 엮어지지 않아서 다시 쓰기를 그 몇번… 차마 보내기가 서슴어져 체신소앞에서 돌아서기를 그 몇번…

하지만 편지는 끝내 우편함속에 넣어졌다.

(아! 날아가버린 아름다운 새! 영영 잃어버린 진주보석!…)

그때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연구소에서 들어오니 어머니는 무역회사 경리원처녀네 집에서 방금 또 전화가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푸념조로 물었다.

정의성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았다.

《그 처년 싫어요. 그리구 난… 지금이 좋아요.》

《지금이 좋다구? 그래, 지금이 좋으면 도대체 어쩐다는거냐, 응?》

어머니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는지 미간을 모았다.

《나도 모르겠어요.》

정의성은 어머니의 눈길을 외면하며 웃방으로 씽 올라갔다.

송영숙의 문제와 함께 무역회사 경리원처녀의 문제도 이미 마음속으로 결산해버린 그였다.

손끝이 뾰족하고 실피줄까지 들여다보일만큼 해말쑥한 경리원처녀도 역시 정의성이 바라는 헌신적인 녀성으로는 적합치 않았다. 움속의 감자싹처럼 희다못해 창백해보이는 그 처녀는 한가정의 짐만이 아니라 자기자신도 감당할수 없으리만치 연약해보였던것이다.

그렇다고 맏형처럼 자기가 대신 그 짐을 짊어질수는 더욱 없었다.

정의성이 지배인이 된 송영숙의 소식을 들은것은 그때로부터 몇년후였다.

그날 아침 연구소에 출근하기 위해 뻐스정류소에 나왔던 그는 우연히 차수정을 만났다.

그는 오래간만에 만난 수정을 반갑게 마주보며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수정이 오리공장 기능공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는것으로 알고있던 그는 도출판물관리국에 출장왔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놀라기까지 했다.

의혹이 담겨진 그의 눈길앞에서 수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그는 방긋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저… 영숙동무 소식을 들었어요?》

그만에야 정의성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정에게서 송영숙의 말을 듣는것이 무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를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길마저 떨구었다.

《영숙인 얼마전에 닭공장 지배인이 됐어요. 지난해엔 새로운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연구하고 생산에 도입해서 학위를 받았구요.》

《?!》

예상 못했던 소식앞에서 정의성은 눈을 흡떴다.

그럴수록 수정의 입가엔 방실방실 고운 꽃이 그려졌다.

《어디 그뿐인줄 알아요? 올봄엔 결혼까지 했어요. 제대군인에 대학을 졸업한 총각하구 말이예요. 아유! 얼마나 잘생긴 사람인지 몰라요. 안팎으루 멋쟁이미남자더군요. 나두 결혼식에 갔더랬는데, 야!… 정말 굉장했어요. 참! 그의 남편은 올해중에 중앙기관으로 소환된댔어요. 영숙인 참말 세상에 부러운것 없이 행복할거예요. 말그대로 성공한 인생이지요 뭐.》

차수정은 정의성의 눈앞에 다정한 녀동무의 눈부신 성공과 행복상을 방불하게 그려보였다.

정의성의 입안은 바짝 말라들었다.

《…》

《그래 정동문 결혼했나요?》

차수정은 련속타격을 결심한듯 이렇게 물었다.

정의성은 눈길을 떨구며 머리를 저었다. 그저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싶었다. 그러나 수정은…

《아직두요? 아이참! 무슨 큰일하기에 아직두 결혼하지 않았나요? 예? 자꾸만 좋은 처녀를 고르는게지요?》

수정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정의성은 쑥스러운 얼굴에 시무룩한 웃음을 담았다.

《그런건 아니지만… 어떻든 하는일없이 지각생이 됐구만.》

그의 말에 수정은 동정하듯 머리를 까딱거렸다.

그날 수정과 헤여진 정의성은 뻐스를 단념하고 걸어서 연구소까지 갔다.

그리고 온종일 뼈저린 후회로 몸부림쳤다.

(모든걸 다시 시작할수는 없을가?… 지나간 생활을 다시 이어갈수는 없을가?…)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현지실험을 위해 도목장관리국에 갔던 정의성은 정문앞에서 뜻밖에도 송영숙을 보았다. 정의성은 꿈을 꾸는것 같았다.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영숙동무! 오래간만이구만. 난 동무를 만나고싶었소.》

그 어떤 강렬한 충동으로 그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하였다. 송영숙에게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지배인이 되고 학위를 받은것도, 결혼을 한것도 모두 축하해주고싶었고 죄스러운 마음도 다 털어놓고싶었다.

그러나 송영숙의 눈빛은 싸늘했다. 그는 낯선 사람을 만난듯 크고 검은 눈동자로 정의성을 곧추 쳐다보았다.

《나를요? 난 동무를 만날 일이 없어요.》

그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한마디 내던졌다.

이때 까만색승용차가 미끄러지듯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송영숙은 승용차에 올랐다. 정의성의 귀뺨을 후려치듯 《탕!》 소리를 내며 닫기던 문! 멸시와 조소가 담겨진 그의 검은 눈동자인듯 차체를 반짝이며 미끄러져가던 까만색승용차… 그때 일을 돌이켜보던 정의성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뼈아픈 그 시절을 덮어버리듯 펼쳐놓았던 실험일지를 소리나게 덮어버렸지만 그에 도전하듯 송영숙의 검은 눈동자는 아프게 그의 가슴을 찌르며 육박해왔다.

정의성은 아픔을 잊으려는듯 두눈을 꼭 감았다.

(그렇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그의 용서를 바랄수 없다! 몇백마디 말로써도 죄를 씻을수 없다.

오로지, 그렇다! 오로지 첨가제연구에서 성공하는것으로써 그앞에 사죄해야 한다. 성공만이 나를 변호해줄것이다.…)

이윽고 그는 실험자료를 다시 펼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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