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12


(또 한가지 찾아냈구나!…)

정의성은 문평역 기다림칸에 앉아 비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웨쳤다.

첨가제의 중요미량원소인 망간(Mn)을 대용할수 있는 천연물인 망간토를 찾아낸것이다.

세차례에 걸치는 시료분석결과 오리공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흥농장 뒤산에 함량이 높은 망간토가 많이 매장되여있다는것을 밝혀내였다.

삶의 기쁨과 희열로 그의 마음은 마냥 부풀어올랐다.

창조의 기쁨, 탐구자의 기쁨을 그 어디에 비길수 있으랴!

시료분석을 위해 문평제련소에 왔다가 이틀만에 돌아가는 그였다. 기차시간을 맞추어 어뜩새벽에 제련소합숙을 나온 그는 짬시간마다 읽군하는 책도 꺼낼념하지 않고 그냥 앉아있었다.

차거운 가을비는 련 사흘째 내렸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찬비내리는 쓸쓸한 마가을날씨와는 정 반대였다.

도농촌경리위원회에서 사업하는 동창생과 련계를 맺고 도안의 여러곳을 종횡무진하면서 토양분석을 진행하느라 반년가까이 모지름을 써온 정의성이였다.

(드디여 성공의 날도 멀지 않았구나!…)

어제 저녁 분석공처녀에게서 받은 시료분석표를 다시 꺼내보며 그는 마음속으로 웨쳤다.

지금까지 오리에게 필요한 미량원소가운데서 제일 많은 량을 차지하는 망간을 수입품인 류산망간이나 과망간산칼리움으로 대용해왔다.

먹이가운데서 망간이 많이 들어있는것은 쌀겨나 밀기울이지만 그 원천이 부족하여 화학제로, 그나마 수입제로 대용했던것이다.

첨가제의 모든 성분들을 사람들의 건강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원료원천이 풍부한 천연제나 화합물로 되게 할 때에라야 국산화된 우리식의 첨가제라고 당당히 말할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도농촌경리위원회와 탐사관리국을 비롯하여 도안의 군과 리들을 찾아 헤매던 날과 토양분석을 위해 밤길을 걷던 그때를 그려보는 정의성의 마음은 마냥 설레이기만 하였다.

진정할수 없는 기쁨으로 간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고 이른새벽 찬비를 맞으며 역으로 나온 그였다.

그는 지금 역기다림칸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기쁨을 목청껏 터놓을수 없는것이 안타깝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심으로 첨가제연구의 성공을 바라는 공장사람들에게 한시바삐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싶었다.

다정다감하면서도 순진한 안해는 복스러운 얼굴에 웃음을 담고 아이들처럼 손벽을 칠것이다.

요즈음 웃음이 많아진 봄순은 그 특유의 얌전한 목소리로 《축하합니다, 기사동지!》하고 말할것이다.

유상훈박사는 미더웁게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일것이고.…

정의성은 평양-청진행차표를 팔겠다는 역사방송원의 목소리를 듣고 생각에서 깨여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차표파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시바삐 공장으로 달려가 실험과 연구를 다그치고싶었다.

문득 《100리길을 가는 사람은 90리를 절반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언제인가 김춘근당비서가 해준 말이다.

(그래! 나는 아직 먼길을 가야 한다. 먼먼 길을… 그러니 지금의 성과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그는 잠시라도 들떠있던 자기를 꾸짖었다.

그는 더욱더 신들메를 조이고 성공의 령마루를 향해 달리고 또 달리리라 다시금 마음다지였다.

평양-청진행 급행렬차는 제시간에 역구내에 들어섰다.

홈을 나선 정의성은 곧 기차에 올랐다.

가을비 내리는 차거운 바깥날씨와는 달리 렬차안은 후끈했다.

지정된 좌석을 찾아간 그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함께 동행할 손님들도 모두 새 손님을 친절히 맞아주었다.

앞좌석에 앉아있던 얼굴이 길쑴하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한 사람은 그의 배낭을 받아 차창우의 당반에 올려놓아주었고 돌격대제복을 입고 옆자리에 앉은 청년도 그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이모저모로 마음써주었다.

정의성은 푹신한 의자에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차가 떠나자 그는 이미전부터 읽고있던 《수의축산》잡지를 꺼내여 읽기 시작하였다.

가금의 날개를 잘라 알생산을 높이였다는 흥미있는 상식자료에서 그는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자료에는 수칠면조의 날개를 자르니 정액량이 훨씬 증가되였으며 먹이소비도 적어졌다고 씌여져있었다. 날개를 자른 어미닭과 어미게사니, 어미칠면조에서 알생산은 종전보다 더 높아졌다는것이 수자자료로 씌여져있었다.

(이런 방법을 우리 공장에서도 적용하면…)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삽시에 졸음이 밀려오는것을 느끼였다.

공장을 떠나기 전부터 토양분석준비때문에 뛰여다녔고 제련소에 분석을 의뢰하고는 또 긴장해서 이틀밤을 꼬박 새운 그였다.

정의성은 책을 덮어 창턱에 올려놓고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였다. 절로 눈이 감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정신을 차리고 앉아 시간을 보니 한시간정도 잔것 같았다.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도 다시 좋아진 그는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있었다. 이제 두어시간 달리면 공장에 도착하리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즐거워졌다.

(빨리 가자. 기차여!)

정의성은 느닷없이 수송전사들의 기쁨과 랑만을 담은 노래구절이 떠올라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그는 다시 책을 읽으려고 창문턱을 바라보았다. 그가 읽던 잡지 《수의축산》은 앞좌석에 앉은 사람이 읽고있었다. 얼굴이 길쑴하고 체육선수처럼 체격이 그쯘한 그 손님은 정의성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책을 덮어 그에게 내밀었다.

《잘 봤습니다. 손님은 어디까지 갑니까?》

자기와 동갑나이쯤 돼보이는 그 사람의 물음에 정의성은 오리공장에 간다고 말해주었다. 그 사람의 얼굴빛은 밝아졌다.

《그렇습니까? 나도 거기까지 가는데 함께 갑시다.》

《오리공장에 출장가는 길입니까?》

정의성은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에 목소리도 듣기 좋은 중음인 그에게 호감을 느끼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 사람은 머리를 저었다.

《오리공장엔 우리 집사람이 다닙니다. 기사장으로 일하지요.》

헌헌히 웃으며 대답하는 그를 쳐다보던 정의성은 마음속으로 우뜰 놀랐다.

(아! 이 사람이 영숙동무 남편이구나. 군인민위원회에서 일한다고 했지.…)

정의성은 인츰 놀라움을 감추며 《오늘 참 좋은 길동무를 만났군요. 알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하고 친절하게 말하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마음은 결코 례사롭지 않았다.

(이 사람은 나를 알가?…)

그는 온몸으로 백상익의 표정이며 몸가짐새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어느모로 보나 알뜰한 안해의 손길이 느껴지는 단정한 차림새였고 후더운 인정과 활달한 성격이 느껴지는 얼굴이였다.

백상익은 자기는 평양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면서 정의성에게 어느 직장에서 일하는가고 다시 물었다.

《기술준비소에 있습니다. 시료분석때문에 제련소에 갔다가 지금…》

정의성은 앞머리카락을 쓸어올리였다.

송영숙의 남편이 어떤 사람일가 하고 은근히 호기심을 가지고있었는데 정작 마주하고보니 마음이 야릇하고 따분하기까지 했다.

《혹시… 정의성동무가 아닙니까?》

백상익의 얼굴에도 의혹과 반가움이 담겨졌다.

정의성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를 알고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백상익은 소탈하게 웃음을 지었다.

《집사람한테서 다 들었지요. 재능도 있구 열정도 있는 사람인데 지금은 국산화된 새로운 첨가제를 만든다고 하더군요. 정말 훌륭합니다.》

백상익의 말에는 사소한 가식도 없었다.

정의성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기사장의 도움이 크다고 말했다.

했더니 백상익은 《그거야 기사장으로서 응당한 일이지요.》하고 말했다.

그들은 마주보며 즐겁게 웃었다.

그 웃음으로 하여 정의성의 가슴에 얹혀있던 따분하고 어색한 감정은 거의나 가시여졌다.

대활하면서도 지성미가 느껴지는 백상익은 첫눈에도 무척 호감이 가는 사람이였다. 정의성은 그에게 첨가제에 필요한 망간토를 찾았다는것과 시료분석때문에 제련소에 왔다가 돌아간다고 말해주었다.

《망간토까지 찾았으니 연구에서 또 한걸음 크게 전진한셈이군요.》

백상익은 첨가제연구의 성과에 대하여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백상익은 공장첨가제와 수입첨가제의 비교측정결과로부터 시작해서 기술준비소와 시험호동의 일에 대하여 많은것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농산과 축산의 세계적인 발전추세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로 아는것이 많았다.

존경과 친근감이 안겨오는 백상익을 보며 정의성은 언젠가 송영숙이 출장 떠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던 생각이 났다. 그때에도 그들 부부가 남달리 정깊은 사이라는것을 느끼였는데 지금 백상익을 보니 그 이상 리상적인 부부는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영숙의 인간적인 성공뿐아니라 그의 줄기찬 사업열정도 다름아닌 이 훌륭한 남편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도고하고 당당한 품성도 그렇게 형성된것인지도 모른다. 생활에 대한 만족으로부터 오는 그 여유있는 태도며 다른 모든것이 다…)

정의성은 송영숙의 앞날은 남편에 의하여 더더욱 행복해지리라는것을 확신하였다.

어느덧 그들이 탄 기차는 오리공장이 자리잡은 정포역에 들어섰다.

정의성은 백상익과 함께 기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나란히 공장마을로 향하였다.

며칠째 내리던 비는 멎었지만 마가을날씨는 몹시 쌀쌀하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소로길앞에서 백상익은 집에 들렸다 가라고 친절히 말하였다.

정의성은 머리를 저었다. 그는 빨리 공장에 가야 한다면서 앞으로 찾아가겠다고 대답하였다.

백상익은 첨가제연구에서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후에 또 만납시다. 건강하십시오.》

그는 친절하게 인사말을 하고 문화회관 뒤켠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의성은 백상익의 뒤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는 배낭을 추슬러올리며 기술준비소로 걸음을 옮겼다.

유상훈박사에게 분석결과를 보고하고 시험호동에도 돌려야 했다.

정의성은 걸음을 다그쳤다. 그러나 걸음걸음 백상익의 모습이 얼른거렸다. 첫 대면이지만 너무도 인상깊은 사람이였다.

그런데 그와 자리를 같이했을 때에는 소탈한 그의 성격에 휘말리여 다는 몰랐는데 정작 헤여지고보니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무엇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는걸가?…)

얼마후에야 백상익의 앞에서 정정당당하고 떳떳치 못했던 자기를 깨달았다.

봄순이 잔치날에 느꼈던 그러한 감정이 되살아난것이다.

문득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자기자신에 대한 불만이 욱욱 치밀어올랐다. 그는 무섭게 화를 내였다.

(내 언제까지 이런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가? 언제까지!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윽고 그는 자기자신에게 말했다.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것이기때문에 지나쳐버려야 한다! 두번다시 자기자신을 학대하는 바보가 되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는… 첨가제를 하루빨리 완성해서 세상에 보란듯이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성공이고 발전이기 전에 나의 인격이고 존엄이다!…)

어느덧 그는 기술준비소에 들어섰다.

유상훈박사는 실험실에 혼자 있었다. 생산성이 높은 새 품종의 오리를 육종하기 위해 늘 종금직장에 나가 살다싶이 하던 박사였다.

《지금 도착하는 길이요? 수고많았겠구만. 그래 갔던 일은 잘됐소?》

정의성을 본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겨맞아주었다.

정의성은 말없이 시료분석표를 꺼내여 내밀었다.

분석표를 받아들고 한동안 들여다보던 박사는 짐작했던대로 크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견한 눈길을 들었다.

《큰일했구만. 큰일했소.》

그는 제일처럼 기뻐하며 분석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걸 어서 기사장에게 가져다 보이오. 기뻐할거요. 방금전에두 전화가 왔댔는데 분석결과가 어떻게 됐는가구 묻더구만.》

박사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방금전에 월사업총화가 끝났으니 지금은 사무실에 있을거라고 덧붙였다.

정의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바쁜 일도 아닌데… 소장동지가 후에 전화로 말씀드리던지 아니면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은 유상훈박사의 마음을 서운케 해주었다.

박사는 주의깊은 눈길로 정의성을 건너다보았다.

《내가 잘못봤는지 모르겠는데 기사장을 대하는 정기사 태도는 좀 불손하구만. 정기사야 기사장의 수고를 모른다면 안될 사람 아니요?》

소장의 가벼운 질책앞에 정의성은 뚝해졌다.

박사의 진지한 그 눈빛이 탐조등마냥 자기의 속내를 낱낱이 꿰뚫으며 비쳐보는것 같아 무안하기도 하였다.

다음순간 지금껏 안해에게도 헤쳐보인적 없는 지나간 생활을 박사앞에 남김없이 털어놓고싶은 류다른 충동을 느끼였다.

정의성이 유상훈박사에게 지나간 일들을 모두 털어놓으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서정옥은 바삐 기술준비소로 달려오고있었다. 방역부원에게서 기술준비소로 들어가는 남편을 보았다는 말을 들은 그였다.

《이걸 어쩌나? 집열쇠는 내게 있는데…》

《어쩔게 있나요? 빨리 가봐요. 호동은 근심말구요.》

결혼식을 하였지만 자기가 기르던 오리를 판매에 넘길 때까지는 시험호동에서 일하겠다면서 요즈음 더 힘껏 일하는 봄순이다.

그는 며칠 남지 않은 기간에 시험호동과 서정옥을 위해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싶었다.

《그럼 내 들어갈테니 호동을 부탁해.》

작업복을 벗어놓은 정옥은 시험호동을 나섰다. 그는 총총걸음을 옮겼다.

(분석결과가 어떻게 되였을가?…)

어느덧 기술준비소에 이른 그는 매 방마다 기웃거리며 남편을 찾았다.

실험실앞에서야 그는 남편이 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음을 알게 되였다. 분석결과에 대하여 보고하는중이라고 생각한 그는 남편의 목소리에서 일이 잘되고 못되였는가를 가늠하려고 문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소장동지! 저도 나자신이 기사장동물 무례하구 불손하게 대한다는걸 모르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집사람한테서도 그런 충고를 여러번 들었습니다. 하지만 난… 그렇게밖에 달리 행동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

남편의 입에서 기사장과 함께 자기에 대한 말이 나오는 바람에 정옥은 우뚝 굳어졌다. 더더욱 놀라운것은 그 어떤 울분을 억제하는것과 같은 남편의 목소리였다.

(왜 그럴가?… 혹시 분석결과가 잘못되였을가?… 그런데 나와 기사장은 무엇때문에…)

정옥의 가슴은 후두두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온몸으로 남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장동지도 기사장동무가 닭공장에서 소조생활을 했다는걸 알겠지요?… 그때 저도 그곳에서 연구를 하고있었습니다.

그 나날 전 남달리 총명하구 열정적인데다가 꿈도 많은 한 처녀대학생을 알게 되였구… 그 처녀가 바로 기사장입니다.》

남편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하였다.

(아니, 아니. 내 마음이 떨려서 그렇게 들릴거야. 그래, 그래.…)

서정옥은 남편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문앞으로 더 다가섰다.

남편은 저으기 흥분된 목소리로 기사장 송영숙이와 헤여지게 된 사연에 대하여 대담하게 털어놓았다. 자기자신의 성공과 발전만을 생각했던 지나간 나날들에 대하여…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에는 뼈저린 자책과 고뇌가 진하게 슴배여있었다.

어찌보면 그 어떤 반발심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만.》

이윽고 유상훈박사가 침착한 어조로 남편의 말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 헛짚은 그 한걸음때문에 평생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지. 한생을 후회없이 산다는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요. 하지만 갱신의 여유가 없을만큼 인생이 짧은건 아니지 않소? 그래서 〈뒤를 보며 울지 말구 앞을 보며 웃으라〉는 속담도 있는거구…》

잠시 방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답답한 그 침묵을 소장이 먼저 깨뜨렸다.

《정기사 말을 듣고보니 어쩐지 기사장이 더 돋보이누만. 지난날의 모든걸 내색하지 않구 진심으로 첨가제연구를 돕고있으니 말이요. 그렇지 않소?》

《아닙니다!》

소장의 말에 남편은 단호히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그가 첨가제연구를 돕는건 결코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건 공장을 위해서지요. 그리구 기사장의 의무이기때문입니다.》

순간 서정옥의 입에서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이 내불리였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였구나!…)

그에게는 모든것이 순간에 리해되였다.

《그거야 인간생활이 아니나요?》

《인간생활인데 뭘…》하고 지금껏 즐겨하던 말도 그는 아예 잊어버린것 같았다.

인간생활에 도통한 년장자처럼 너그럽고 아량있게 곧잘 말하던 그였지만 정작 자기가 복잡다단한 인간생활과 부딪치게 되니 당황해지기도하고 이름못할 설음까지 느끼게 되였다.

잠시후에야 정옥은 남들의 눈에 띄울가 근심하며 조심히 문앞에서 물러섰다.

기술준비소를 나선 정옥은 쓸쓸해지는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였다.

전 공장지배인의 막내딸로 태여난 그는 지금껏 온 가정과 마을의 사랑을 받으며 고생이란 말을 모르고 자라났다.

그는 가금전문학교(당시)를 졸업한 다음부터 오리공장에서 일하였다.

부모형제들과 친척들이 모두 한마을, 한공장에서 일하기때문에 가금전문학교를 다닌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방에서 생활해본적이 없는 그는 마음씨 곱고 성실하였지만 생각은 좀 단순하고 외곬이였다.

언젠가 그는 자기의 리력문건을 쓰다가 저 혼자 웃었다.

가금전문학교를 다닌것과 오리공장 로동자라는 단 두줄이 자기의 한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남들은 열줄도 넘던데 난 고작 두줄뿐이구나.…)

그러나 정옥에게는 부모형제들이 한생을 바쳐가는 오리공장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고 관리공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없었다.

정옥에게 있어서 남편은 하늘이였고 억센 기둥이였다.

결혼식날 자기의 몸단장을 해주던 방송화가 남편의 체격이 좀더 컸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에 정옥은 눈을 흘겼다.

《아이참! 저 사람은 표준이예요, 모든게 다…》

그에게는 남편보다 리상이 높고 재능있으며 박식하고 단정한 품성을 지닌 사람은 둘도 없었다.

남편은 성격도 취미도 습관도 품성도 모두 고상하였다. 사나이답게 대활하고 호호탕탕한 성격은 아니지만 리지적이고 사색적이며 남다른 탐구심과 열정을 지니고 규칙적이며 정돈된 생활을 이어가는 남편을 정옥은 끝없이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언젠가 수정에게서 남편의 별명이 《전자시계》였다는 말을 듣고 그는 호호 웃었다. 그리고 혼자서 불러보았다.

《전자시계!》

단정하고 절도있는 남편의 품성을 단마디로 표현한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처럼 훌륭한 남편의 마음속에 오직 자기 한사람의 녀성만이 존재한다는것으로 하여 그는 항상 기뻤고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기쁨과 즐거움은 여운도 없이 사라졌다.

남편에게 사랑을 약속하였던 녀성이 있다니…

그 녀성이 다름아닌 기사장이라는 사실앞에 그는 경악할만큼 놀랐다.

직위나 지성도는 물론이고 인물이나 성격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자기가 기사장보다 비할바없이 못하다는 생각으로 그의 마음은 더욱더 슬펐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마가을의 찬바람도 느끼지 못한채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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