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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5일

평양시간


(제 20 회)


제 2 장

6


약속한대로 박원작은 해질녘에 남권부의 집을 찾아갔다. 대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던 남권부가 반색을 하며 박원작을 손잡아 안방으로 이끌었다.

방에 들어선 박원작은 어리둥절해졌다.

함박꽃같이 잘난 마씨의 교태도 뜻밖이거니와 비단휘장을 두른 넓은 방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잘 차린 음식상이 놀라와서였다. 온갖 산해진미가 모두 오른 요란한 음식상을 불과 몇사람이 둘러앉아보기는 처음이였다.

《병마도감사님은 이쪽에 앉으시와요.》

마씨는 찰찰 감기며 박원작의 팔을 잡아 아래목의 금수방석우에 앉히였다.

박원작이 어색해할수록 마씨는 더욱 애교를 부리며 은방울 굴리는듯한 고운 목청을 돋구었다.

《언제부터 병마도감사님을 청하려 했었는데 오늘에야 제 소원이 풀렸나이다. 글쎄 제 주인은 어찌나도 덜퉁하고 데면데면한지 소녀의 생일날조차 친지분들을 청해올 생각을 않더라니까요. 오늘 제 주인의 몫까지 합쳐 술을 부었으니 이 잔을 받아주시와요.》

마씨가 내민 술잔을 받으려던 박원작은 급히 손을 쳐들었다.

《잠간만! 이런 날에야 안주인에게 먼저 한잔 부어드리는게 도리지요. 자, 내가 붓는 술을 받으소.》

박원작이 부어준 술잔을 받아든 마씨는 생글생글 웃으며 몸을 꼬았다. 그는 술을 단숨에 마시더니 엄지손가락을 꼽아보였다.

《병마도감사님같이 친절하고 세심한분은 세상에 더 없을거예요.》

마씨가 내민 술잔을 받아 입에 가져가던 박원작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생전처음 보는 술이다. 빛갈이 노르끼레한데 술에서 나는 특이한 향내가 기분을 돋구었다.

마씨가 박원작에게 고운 눈길을 던졌다.

《아이, 어서 드시와요.》

마씨와 남권부의 재촉에 술잔을 다 비운 박원작은 감탄을 터치였다. 세상에 이렇듯 감미롭고 향기로운 술도 있었는가.

《이 술맛 참 기막히오이다.》

《병마도감사님은 이런 술이 처음인가 봅니다? 이건 청주를 달여 뽑은 맑은 술에다 인삼을 담그어낸 술이오이다.》

박원작은 진실로 감동되여 고개를 끄덕였다.

술 한가지만 보아도 이 집의 문명을 알수 있다. 이런 좋은 술은 타국에도 없을것이다. 술이 좋은것도 나라의 문명에 기여하는것으로 될것이다.

《병마도감사님은 어떤 음식을 즐기시나이까? 소고기산적도 있고 잉어회도 있는데 어느걸 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박원작은 하마트면 《난 말이요, 우리 집 사람이 만드는 서경랭면을 제일 즐겨하오.》하고 말할번 하였다.

요란하게 잘 차린 음식상을 둘러보니 유감스럽게도 시원한 동치미국물에 만 메밀국수는 없었다.

남의 집에 와서 성의껏 차린 음식상을 외면하고 굳이 없는 음식을 좋다고 하면 되겠는가.

《허허― 너무도 맛있는 음식들이 많아 정말 갈피를 잡을수 없소이다. 손이 가는대로 내가 다 즐기는 음식이오이다.》

《그럼 됐나이다.》

박원작은 마씨가 접시에 놓아주는 노루고기산적을 집어 입에 넣으며 남권부가 보통 수완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8년전 서경에 처음 내려왔을적에 박원작은 경상골의 제 집곁에다 그가 살 집을 지어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얼마동안 병마도감의 별관에 려장을 풀어놓았던 남권부는 갑자기 고리문근처에 있는 이 큰 기와집을 사들였다.

그때 박원작은 깜짝 놀랐다. 남권부가 어데서 많은 돈이 났기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다 샀을가. 이 박원작이 같으면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그런 고대광실은 살 엄두도 못내겠는데…

하여간 남권부는 괴짜에 괴짜였다.

박원작은 덩실한 기와집에서 홀로 사는 남권부를 생각하여 맞춤한 혼처를 물색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남권부는 제힘으로 서경에서 제일이라 할만큼 삐여지게 고운 마씨를 후처로 맞아들였다.

어찌 사사일에서만 남권부가 수완이 있다고 하랴. 공적인 일에서도 그는 수완이 대단하였다.

지금껏 병기도감에서 숱한 병쟁기를 마음대로 만들수 있은것은 남권부가 놋쇠같은 쇠붙이를 척척 구입해와서였다. 놋쇠는 군기감에서도 귀히 쓰는것인데 그는 개경에 가기만 하면 손쉽게 구해왔다.

박원작은 그런 면에서라면 자기는 남권부의 곁에 가지도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열스무가지로 편안한 집이 없다고 남권부에게는 한가지 불행이 있었다. 그가 전처에게서도 자식 하나 보지 못했는데 마씨한테서도 태기가 없는것이였다. 돈 놓고는 못 웃어도 아이 놓고는 웃는다는데 슬하에 자식 하나 없어서야 무슨 살 재미가 있겠는가.

그 일을 해연에게 걱정삼아 말하였더니 어떤 녀인들은 서른고개에 가서야 임신을 할수 있다는것이였다. 마씨가 아직 서른전이니 실망해할것까지는 없다는 소리였다.

《병마도감사님! 언제까지 저의 주인을 그냥 서경에다 붙들어두렵니까. 언제면 제가 개경가서 살아볼수 있는지요?》

마씨가 그런 말을 허물없이 꺼내드니 박원작은 말하기가 한결 헐했다.

박원작은 인삼을 담그어낸 술을 달게 마시는 남권부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보게 남공! 그대만 응한다면 난 조정에 아뢰여서 그대를 개경군기감으로 전직(관직을 옮기는것.)시켜주겠네.》

마씨보다도 남권부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하였다.

박원작의 이 말은 술기운때문이거나 혹은 상대의 환심을 사느라 즉석에서 꾸며낸 말이 아니였다. 그는 개경에서 자기가 병마도감사로 다시 내려가게 된것을 알았을적에 남권부를 대신 군기감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제는 개경군기감에서도 뢰등석포며 수질구궁노를 만들어낼 때가 되였다고 본 그였던것이다.

그래야 온 나라의 모든 군진들을 《신기한 병기》들로 갖추는 일이 앞당겨질수 있었다.

그런 생각에서 박원작은 군기감을 찾아갔었다. 군기감의 주인인 판사는 박원작을 반갑게 맞아주면서 그렇지 않아도 북계병마도감사가 자기네의 소감직을 겸했으니 《신기한 병기》를 만들수 있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고 했다.…

남권부는 개경군기감으로 전직시켜주겠다는 박원작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박공! 그게 롱담으로 한 소리는 아니겠지?》

《허― 사람두, 롱말을 할게 따로 있지 그런 말도 롱담으로 하겠나.》

남권부의 목에서 울대가 오르내렸다.

도대체 저 박원작의 속은 어떻게 되였기에 남을 좋게 해주려 애면글면 하는걸가. 저 사람도 지금껏 나라위해 쌓은 공이면 얼마든지 높은 관직에 올라설수 있겠는데.

현명한 임금은 상을 사사로이 주지 않으나 공을 세운 신하에게는 작위를 하사하고 능력있는 신하에게는 높은 관직을 내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박원작이 저 사람에게는 응당히 작위와 함께 높은 관직이 차례져야 하는것이다.

허나 박원작은 위력한 병기들을 줄곧 만들어냈건만 임금의 부름은커녕 그 어떤 상도 받지 못했으니 과연 조정의 처사를 알만 하다.

그런데도 박원작은 조정을 나무랄대신 나라의 안녕만을 근심하고있으니 이런 사람이 어디 쉬운가.

남권부는 아직은 자기의 진속을 감추고 딴전을 부렸다.

《박공! 공은 나라를 위해 이룩해놓은게 많은데 아무런 대가도 차례진게 없으니 도대체 공은 무얼 바라기에 사사일은 밀어놓고 공사에만 그리도 극성인가?》

그 말에 박원작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났다.

어쩜 남권부 저 사람이 이런 술좌석에서 그런 말을 꺼내놓는것일가.

뭘 바라기에 공사에 극성인가고? 아직은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보이지 않은 가슴속의 제일 깊은 곳에 자리잡은 진속을 터놓으라는건데… 아니, 진속은 아무데서나 쉽게 헤쳐놓는것이 아니다.

박원작의 마음을 엿보았는지 마씨가 남권부에게 눈을 흘기였다.

《이보세요. 뻔한걸 다 묻누만요. 예로부터 불의로써 지닌 부귀는 뜬 구름과도 같다고 했어요. 병마도감사님이 남들처럼 그따위 부귀영화를 탐낸다면 애초에 서경으로 내려오지부터 않았을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마씨는 남권부의 옆구리를 꾹 찔러댔다.

남권부는 마씨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왜서 마씨가 오늘 이자리를 마련하였던가. 그래 자기의 출세를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인가.

며칠전 마씨는 화약의 비방을 손에 넣어야 개경의 군기감으로 출세해갈수 있다는 남권부의 말을 듣고 박원작을 집에 청해오자고 하였다.

그래서 가짜생일놀이를 꾸며낸것이였다. 사실 마씨의 생일은 오늘이 아니라 여름철이였다.

마씨가 박원작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만들면 남권부가 그의 속을 뽑아내기로 하였다.

바로 오늘 이자리에서 어떻게 하나 염초를 화제거리에 올려서 그에 대한 박원작의 태도를 타진해야 하였다.

남권부는 마씨에게 눈을 찔끔해보이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박공! 공은 개경군기감에서도 뢰등석포를 부어내도록 하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에다 염초장도 내오려 하나?》

마씨가 부어준 술을 마시고난 박원작은 흔연히 대꾸했다.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남권부는 너무 기뻐 볼편을 씰룩거렸다.

그는 바라는것이 너무 쉽게 풀려나가는듯싶어 현훈증이 날 지경이였다.

개경에 염초장을 차리려 한다는걸 리자연에게만 알리면 군기감의 주인자리는 먹어놓은 떡이다.

하지만 박원작의 다음말에 남권부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게 인차는 안될것 같네. 한동안은 우리 염초장에서 구워내는 화약만으로도 부족하지는 않으니까. 이제 천균노를 만들어내면 그때 가서 군기감에도 염초장을 내오려고 하네.》

남권부는 속이 발칵 뒤집히는것 같았다. 그의 언성은 절로 높아졌다.

《그럼 대씨인지 발해사람인지 하는 그 늙은이의 말을 곧이 듣고 천균노란걸 해보겠단건가?》

《그렇네. 옛적에 천균노가 있었다는 말만 들어도 얼마나 힘이 나나. 병기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쯤한걸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일세.》

마씨는 두눈이 동그래가지고 박원작을 쳐다보았다.

《병마도감사님, 천균노는 또 무슨 병기오이까?》

박원작은 마씨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예, 천균노는 뢰등석포보다 몇십배, 아니 몇백배나 더 큰 3만근짜리 화포인데 수백근이나 되는 바위돌을 멀리 날려 단숨에 적진을 짓뭉개버릴수 있는 병기지요.》

마씨의 얼굴이 경탄의 빛으로 물들었다.

《그래요?! 그런 병기를 가진 나라는 얼마나 강하겠나요. 정말 그런 병기를 만들수만 있다면 제 어찌 만금재산인들 아끼겠나이까.》

남권부는 볼이 잔뜩 부어서 두눈을 지릅뜨고 마씨를 쏘아보았다.

다 먹었다고 여겼던 화약의 비방을 천균노때문에 망치다니, 그것도 모르고 남의 사내에게 맞장구를 치는 계집이 어디 똑똑한 년인가.

《이봐, 아녀자가 뭘 안다고 사내들의 일에 끼여들어?》

마씨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천균노가 나라를 지키는데 더할나위없는 위력한 병기라는데 그 일에 발벗고나서는거야 백성의 응당한 도리가 아니겠나이까.》

마씨의 말은 박원작을 크게 감동시켰다.

마씨가 이렇듯 훌륭한 녀인이란걸 여태 왜 몰랐을가. 사내의 그늘에 묻혀 지금껏 자기를 드러내지 못한때문인가.

박원작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부인! 오늘 현숙한 부인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된것이 정말 기쁘오이다. 이 술을 받으시고 남공의 일을 더 잘 도와주시길 바라오이다.》

마씨는 방긋 웃으며 박원작이 내미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병마도감사님, 오늘을 잊지 않겠나이다. 저의 주인이 천균노를 만드는 일에 발벗고나서도록 힘껏 돕겠나이다.》

《고맙소이다.》

남권부는 그제야 마씨의 속심을 알아차렸는지 술잔을 쳐들며 말했다.

《박공! 난 개경으로 가지 않겠소. 나도 여기 남아서 천균노를 만들어낼 때까지 박공을 돕겠소.》

박원작은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두사람을 바라보며 눈물이 글썽했다.

《남공! 부인!…》

《박공!》

술이 거퍼 몇순배 돌았다. 술이 거나해진 박원작은 쉬고가라는 마씨부부의 청을 사양하고 대문을 나섰다.

남권부는 초롱불을 켜든 하인을 불러 박원작을 집에까지 모셔가라고 분부를 내렸다.

하인을 따라 집으로 가는 박원작은 유쾌한 기분이였다. 천균노 만드는 일을 잘 돕겠다는 마씨를 알게 된것이 제일 큰 소득같았다.

녀인들이 소원하면 무릇 큰일도 쉬이 이루어질수 있으렷다.

이제 더는 지체할수없이 천균노를 만드는 일에 달라붙어야 한다. 헌데 천균노의 형체를 아직도 그려볼수 없으니 그게 허깨비같은게 아니고 뭔가. 가만, 범재 여럿이 수재 하나를 당할수 있다는데 장공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떨가. 시키는 일이나 하는줄로만 여긴 그들이 불막대기를 궁냥해낸것을 보면 십분 신심이 가는 일이다.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숱한 사람들의 지혜를 합치면 한번도 본적 없는 봉황새나 룡을 그리듯 능히 천균노의 모습을 그려낼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술기운이 사라지고 일욕심으로 가슴이 불타기 시작했다.

희뿌연 달빛아래 어떤 사람이 박원작의 뒤를 조심스레 따르고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김충지였다.

박원작은 지금 김충지가 자기를 따르며 지켜주고있다는것을 꿈에도 알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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