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1 장


8


산채의 젊은이들이 찾아왔다는 하인의 전갈을 받은 소서노는 저도 모르게 짜릿한 흥분과 기쁨으로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들이 왔단 말이지. 정말 그들이… 나를 찾아왔단 말이지.)

소서노는 처음 한동안 안절부절하며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한참만에야 마음을 다소 진정한 그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여러번 쓸고나서 자주빛무늬가 촘촘히 박힌 연한 미색의 사치한 비단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청동거울을 들고 그속에 비쳐진 불그레하니 물든 자기의 얼굴을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찌보면 처음 보는듯 한 녀인이 눈섭을 치켜올리고 자기를 빤히 들여다보는것 같았다.

(아이참, 내가 왜 이럴가?)

금시 튀여나올듯 쿵쿵거리는 심장을 붙잡기라도 할것처럼 두손으로 가슴을 모두어잡은 소서노는 눈을 꼭 감고 자신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아이, 마님! 어인 일이시와요? 손님들이 기다리고계시온데…》

려송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서며 아뢰였다.

《오… 오냐. 알겠다. 내 이제 곧 나가마.》

소서노는 나쁜 장난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청동거울앞에서 황황히 물러서며 어쩔줄 몰라 허둥거렸다.

전에는 볼수 없었던 소서노의 당황한 표정을 지켜보는 려송의 눈가에 웃음이 남실거렸다.

《마님, 참 이상한 일이와요. 동녘에 해가 뜬지 언제인데 마님의 얼굴엔 아직도 아침노을이 비껴있사오니 어인 영문인가 하나이다.》

《넌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다시 그런 말을 꺼냈다간…》

더욱더 낯이 뜨거워진 소서노는 짐짓 성을 냈다.

《호호, 다신 안 그러겠사와요.》

려송은 호들갑을 떨며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려송을 앞세우고 방에 들어서니 그때까지 손을 모두어잡고 서있던 주몽이네가 머리를 숙여 례의를 표시하였다.

《이것 참 무례가 많소이다. 듣자하니 댁으로 찾아올 때는 미리 기별을 보낸다 하더이다. 례의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꾸짖지 말아주사이다.》

주몽이 준수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례절있게 말하였다.

소서노는 황황히 손을 내저으며 맞절을 하며 또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쩜 그런 말씀을 다하시와요? 목숨을 구해주신 그 은혜 결초보은 하여서도 갚을길 없사온데 그분네들을 어찌 평범한 손에 비기리오이까? 오히려 아녀자의 청을 허물치 않으시고 이렇게 찾아주신것만으로도 저는 황송하기 그지없소이다.》

소서노는 진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싶었다.

《그러지 마소이다. 우리 산채를 다시 일떠세우라고 부인께서 많은 재목들과 재물들을 보내주셨으니 오히려 사례는 우리가 드려야 할가 봅니다. 옛글에도 이르기를 어려울 때 도와주는것이 진짜 벗이라 하였으니 마님이야말로 우리를 리해하고 진심으로 도와준 은인이며 벗이로소이다.》

주몽이 겸허하게 일행을 대표하여 사의를 표하였다.

심금을 따뜻하게 울리는 주몽의 인사는 더욱더 소서노를 감동케 했다.

녀인의 눈앞에 주몽의 모습은 더없이 름름하고 의젓하게 안겨들었다.

아, 이렇듯 훌륭한 미덕을 지닌 장부를 내 언제 보아왔던가.

소서노가 몸둘바를 몰라하며 감히 눈길을 들지 못하는데 려송이 불쑥 한걸음 나서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마님께선 무사님들이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모르오이다. 산채를 잃으면서도 우릴 구원해준 그 은혜를 꼭 갚아야 하신다면서…》

금시 귀뿌리가 달아오른 소서노는 려송이가 더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재빨리 밀막아버렸다.

《애두 참,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계속 말만 할셈이냐?》

《어마, 이 정신을 좀 봐. 제 미처…》

오이는 주몽의 등뒤에서 려송의 쾌활하고도 당돌한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고있었다. 보매 이들의 사이는 주인과 시비의 사이가 아니라 다정한 자매들사이같았다.

려송이 바삐 문밖으로 사라진 후 얼마 안있어 밖에서 돼지멱을 따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서노는 다시금 얼굴에 웃음을 담고 주몽의 일행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편안히 자리를 잡고 앉은 주몽은 좌우의 형제들을 소서노에게 소개하였다.

《나와 사생동고를 맹약한 동생들이오이다. 여기는 오이 그리고 저기는 마리…》

하나같이 젊고 끌끌한 무사들이였다.

젊은 나이에 비해 진중하면서도 사색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오이의 모습이 퍼그나 낯이 익었다.

오룡산싸움에서 주몽에게 날아드는 화살을 한몸으로 막아 위험속에서 구출해낸 그 무사가 틀림없었다.

바로 저 무사가 말갈놈들로부터 려송을 구원하였다고 했지…

그러고보면 오늘 아침 자기에게 별스레 너스레를 떨며 수다를 피우던 려송의 행동이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름름한 사내대장부의 저런 모습이면 어느 처녀인들 첫눈에 끌리지 않으랴!

더우기 봄을 맞아 금방 피여오르는 한떨기 꽃과 같은 려송의 심정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제가 춤추고싶으면 동서보고 추라고 한다더니 오늘 아침 려송에게 깜짝 속아넘어가 놀림가마리가 된걸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소서노는 오이네앞에 한발 나서 나부시 절을 하였다.

《이렇게 알게 되여 정말 반갑소이다. 소서노라 불러주사이다.

그때는 창황중이라 미처 변변한 인사도 드리지 못했사와요. 그러니 다시한번 고마운분들께 절을 드리고싶나이다.》

따뜻한 닭알색의 명주치마저고리로 단장한 그의 모습은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왔다.

쭉 빠진 날씬한 몸매에 아련한 자태, 연분홍빛으로 발그레하니 달아오른 얼굴, 숫저운 몸가짐…

당황한 마리가 벌떡 몸을 일으켜세우더니 덥석 허리를 굽혔다.

《마… 마님, 이러시오면…》

어깨가 버그러진 장대한 체통의 그는 어찌할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불의앞에서는 조금도 주저나 굽힘을 모르던 이 불같은 성격의 사나이가 더없이 어지고 순박한 마음씨를 지녔다는것이 소서노에게는 그저 놀랍기만 하였다.

《다르게 생각지 마사이다. 사실 이 마리동생은 일곱살 어릴적부터 노예가 되여 부여땅 여기저기 마소처럼 팔려다니면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다 받으며 자랐소이다. 혈붙이라고는 하나뿐인 다섯살잡이 녀동생과도 그때 헤여진 이후로는 소식조차 모르고있소이다. 노상 정에 주려살던 저 사람이 오늘 마님의 따뜻한 환대에 그만 감동이 되였나봅니다.》

주몽이 사연을 설명해주었다.

소서노는 머리를 끄덕이며 주몽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병상련(같은 처지에 있으면 그 처지를 서로 동정하고 위로해준다는것.)이라고 마리의 곡절많은 운명사에 자기의 불우한 인생사가 비쳐져 마음은 더없이 쓸쓸해지는것이였다.

어찌하여 이 세상엔 고통과 불행이 그리도 많은것일가?

눈빛을 보고 소서노의 울적한 심기를 눈치챈 주몽은 슬쩍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였다.

《집이 참 훌륭하오이다.》

소서노의 집은 부여궁성에 오래 있어 웬만한 큰 집에는 버릇되여 있는 주몽일행에게도 감탄을 불러올만치 웅장하고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그토록 칭찬하여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소이다. 그럼 저의 집구경이나 좀 하시오이다.》

소서노는 옹색한 처지에서 벗어난것이 다행인듯 주몽에게 고마운 눈길을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문을 돌아서니 꽤 널직한 뜨락이 달린 웅장한 본채가 있고 사랑채 좌우에는 행랑과 제당(제사지내는 방)이 있었다.

후원에는 여러가지 기이한 꽃과 나무들을 떠다 심은 숲이며 기암괴석들을 쌓아 절묘한 경치를 이룬 련못까지 있어 과연 졸본의 세력가인 소서노의 위세를 잘 말해주고있었다.

옆채에 달린 마구간은 마구간이라기보다 마방이라 불러도 될만치 큰데 방목하여 놓아기르는 말을 내놓고도 수십마리에 달한다고 했다.

실지로 소서노는 동서남북을 오가며 물건을 교역하는 상단까지 소유하고있으며 광대한 전장에 수백명의 노예들과 근 수백여마리에 달하는 마소를 가지고있는 졸본의 세력가였던것이다.

주몽의 일행은 소서노의 권세와 재력이 예상했던것보다 더욱 크고 막강한데 대해 속으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과루부의 대인 연타발의 딸이다.

가문의 혈통으로 보나 특권계층인 그의 처지로 보나 주몽이네를 도와나설 하등의 리유나 조건이 너무도 희박했다.

시름이 많은 녀인들은 원래 과묵한 법이다. 그러나 오늘 소서노는 무척 부드러운 감정에 휩싸여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몽의 일행과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하여 불그레해졌다.

《참, 오이라고 했던가요?》

《그렇소이다.》

소서노는 잠시 나들문쪽을 돌아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려송이에게서 무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사와요. 려송인 자기 목숨을 구원해준 오이님을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못하겠다고 하오이다.

사실 려송인 내가 친동생처럼 아끼는 소녀옵니다.

그 애도 마리무사님처럼 일점혈육도 없는 외로운 몸이와요.

우린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지요.》

잠자코 있던 오이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마님은 려송이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 잘 아시게 되였나이까?》

《예, 한해전 류랑걸식하던 소녀 하나가 우리 집 대문앞에 쓰러져있던걸 제가 들여다 구완을 해준적이 있답니다.

그 처녀가 바로 오빠를 찾아다니던 려송이였지요. 그런데 하나밖에 안계시는 오빠분마저 변방에서 수자리를 서다가 그만 잘못되셨거던요. 그때부터 저 앤 나한테 의탁해서 살아간답니다.》

소서노의 이야기에 오이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말갈족놈들한테 봉변을 당한 후부터 려송인 매일 무술훈련을 하고있사와요. 아무때든 그놈들을 제 손으로 복수한다나요.

처음엔 내가 좀 가르쳐주었는데 애가 얼마나 눈썰미가 빠른지 이젠 더 못 가르치겠소이다. 가만히 그 애의 눈치를 살펴보니 오이무사님에게서 무술을 더 련마하였으면 하는 기색이온데 무사님이 반대없으시겠는지…》

웃음을 지으며 하는 소서노의 말에 오이는 한순간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이런 그를 주몽이 도와나섰다.

《연약한 녀인이 무술을 닦는다니 그것 참 흥미있소이다. 전번 오룡산싸움때 보니 부인의 무술솜씨도 보통이 아닌가보오이다. 무술은 언제 누구에게서 배우셨소이까?》

소서노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어릴적 추억을 더듬었다.

어릴적에 소서노를 가르치던 스승은 한때 단군조선때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전해져내려오는 겨레의 전통무도를 집대성해볼 구상을 안고 조선국은 물론 부여와 진국 등 여러 후국들을 편답한 뜻있는 늙은이였다.

그러나 무예를 단지 노예들에 대한 무제한한 억압과 착취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폭력수단으로만 여길뿐 가난한 하호들과 노예들이 무예를 수련하여 저들과 맞서는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한 노예주계급의 우매성과 취약성에 환멸을 느끼고 초지의 뜻을 꺾고 글방에 들어앉아 동서고금의 책들이나 뒤적거리고 후대들에 대한 교육에서 여생의 락을 찾았다.

스승은 소서노에게 글과 함께 연약한 녀성으로서 자기의 몸을 보호할수 있는 여러가지 호신술을 가르쳐주었다.

흔히 아름다운 녀인은 뭇사내들의 시달림에 견디기 어렵다는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 호신술을 밑천으로 삼아 소서노는 말타기와 활쏘기, 칼쓰기와 같은 무예도 어렵지 않게 배워낼수 있었다.

그렇게 놓고보면 소서노란 이 녀인은 지금 세월에 매우 드물게 찾아보게 되는 녀걸임이 틀림없었다.

《마님의 청이 그러하다면 어찌 거절하오리까.

오이는 우리 의형제중에서도 무술이 뛰여날뿐아니라 지략도 출중하고 례의와 덕을 다같이 겸비하고있어 려송의 무술사부로서는 더할나위 없소이다.》

주몽은 호협하게 웃으며 오이를 돌아보았다.

《하하, 형님이 참 부러운데… 마님, 이 마리에게도 변변치 못하지만 재주가 그리 없진 않사오니 제자 한사람 붙여주사이다.》

마리가 덩달아 익살을 떨며 무랍없는 청을 드리는 바람에 장내엔 한동안 웃음이 끊길줄 몰랐다.

《정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것도 없지요. 마리무사님의 용맹에 대해선 온 고모나땅에 모르는이가 없는걸요. 동에 번뜩 서장(서쪽의 장수)베이고 남에 번뜩 북장(북쪽의 장수)베인다는 마리무사님의 제자로는 제가 되여볼가 하는데 승낙해주시겠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소서노의 기지있는 이 물음에 마리는 그만 말문이 막혀 쩔쩔맸다.

그 모양이 너무도 우스워 오이도 그만에야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웃음이 가라앉자 소서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려송인 인물도 마음씨도 비단결같사와요. 눈썰미도 있고 성격이 또한 활달하여서 그 애만 곁에 있으면 갑갑한줄 모르오이다. 한데 이 애가 왜 이리 늦어질가? 귀한 손님들도 오셨는데…》

범이 제 소리하면 온다더니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리더니 려송이 웃음을 함뿍 담고 들어섰다.

《아이참, 무슨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시기에 여러번이나 소리쳐불렀는데 듣지 못하시와요? 음식이 다 식고있소이다.》

려송은 어리광을 부리듯 소서노를 나무라며 곱게 눈을 흘기였다.

소서노는 웃음을 머금은채 말했다.

《오냐, 미안하구나. 참, 인사를 드리거라. 이분은…》

《호호, 마님도 참, 내가 자기를 구원해준 오이무사님을 몰라보겠소이까?》

《원 애두, 오늘부터 오이무사님은 너의 무술사부이시란다.》

소서노의 이 말에 려송의 두눈은 기쁨으로 하여 반짝거렸다.

《정말 그러하오면… 제 인사를 받아주시와요.》

려송은 얌전하게 몸가짐을 바로하고나서 나부시 절을 올렸다.

익은 꽈리빛이 된 려송의 고운 얼굴을 훔쳐보던 마리가 데면데면해 서있는 오이의 옆구리를 쿡 지르며 소곤거렸다.

《뭘해요? 맞절을 해야지요.》

당황한 오이가 몸둘바를 몰라하다가 용케 자기를 자제하며 부러 청을 높였다.

《싱겁게 놀지 말아. 제자한테서 인사를 받는데 맞절은 무슨…》

《챠, 이런 목석이라고야…》

마리는 혀를 끌끌 차며 히죽이 웃는다.

《그럼 소녀는 그리 알고 이제부터는 오이무사님을 사부로 모시겠소이다.》

려송의 이 말에 마리가 또 엉너리를 쳐댔다.

《히야, 우리 형님에게 꽃같은 아씨가 제자라… 하하.》

그러나 마리는 려송을 바라보는 오이의 눈빛에 어두운 불안의 그림자가 일순 비꼈다 사라지는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소서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어서들 가소이다.》

그들은 음식을 차려놓은 방으로 들어갔다.

비단휘장을 드리우고 자리를 깐 그 방은 살림방이라기보다 객실비슷하였다. 키낮은 탁자우에는 붓과 먹, 벼루가 쓰기에 편리하게 놓여있고 번쩍이는 놋초대와 갖가지 문방구들이 빠짐없이 갖추어져있었다.

소서노는 주몽을 청하여 상좌에 오르게 하고 자기는 오이와 마주앉았다.

크고 널직한 상에는 갓 구운 애송아지고기와 졸본천의 산천어, 사슴고기며 이 고장 특산으로 소문이 자자한 곰발쪽통찜, 꿩고기완자, 부루, 기장떡과 같은 갖가지 음식들이 풍성하게 차려져있었다.

소서노는 주인답게 붉은 비단보로 뚜껑을 씌운 자그마한 술단지를 청동술잔에 기울이며 먼저 말을 꺼냈다.

《산골이라 귀한 손들이 모처럼 찾아오셨는데도 별로 대접할것이 없사와요. 성의뿐이니 허물치 마시고 많이 드사이다.

이 술은 록용과 불로초를 산꿀에 재워 담근 약주오이다.》

찰랑찰랑 넘쳐나게 부은 술잔마다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술이 몇순배 돌았다. 시녀들은 분주히 드나들며 음식들을 날랐다.

소서노가 부어주는 여러 잔의 술잔을 비운 주몽은 소서노의 앞에 놓인 입에 대다만 술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옛말에 반잔 술에 눈물나고 한잔 술에 웃음이 난다고 하였으니 어찌 주인마님께선 술잔을 가볍게 내려놓소이까?

제가 한잔 부을테니 어서 그 잔을 비우소이다.》

주인과 객들사이에는 허물이 없어지고 구면이기나 한듯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확실히 주몽은 사람의 마음을 휘여잡을줄 아는 비범하고 도량이 넓은 사나이였다.

오이는 생소한 고장에 와서 처음으로 환대를 받는것이 못내 즐거웠으며 소서노와의 첫 대면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되여가는것이 또한 흐뭇하고 다행스러웠다.

《오이무사님, 이건 우리 졸본의 특산인 산천어회로소이다.

졸본천은 물이 차고 맑아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있으나 이 산천어가 제일 맛이 좋소이다.》

려송이 큰 접시에 담긴 물고기회를 오이의 앞으로 가져다놓으며 하는 말이였다.

《정말 맛이 좋구만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잡았소이까?》

《어디 맞혀보소이다.》

《음… 낚시? 아니면 그물?…》

《호호, 사실 이건 활로 쏘아잡은것이와요.》

《활로요?》 오이는 놀랐다.

부여에도 크고작은 강들이 많아 그 잡이방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있는 그였다.

《쉿!》

려송이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음식을 들고있는 옆사람들에게 방해가 될세라 오이의 귀가에 대고 속살거렸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은 이 고장에서는 강폭이 넓지 못하고 수심도 그리 깊지 못한데다 물살까지 빨라 보통의 물고기잡이방법을 가지고서는 많은 물고기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일찍부터 작살이나 활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아왔는데 물살을 따라 재빨리 오르내리는 물고기를 잡는데 더없이 효과적이였다.

려송에게서 활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들은 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서노마님에게서 듣기는 들었으나 려송의 활쏘는 솜씨가 벌써 그 수준이라면 정말 대단하오.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걸…》

사위를 살피던 려송이 결심이 선듯 《좋소이다.》하고 기꺼이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흥겨운 좌석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꽤 널직한 공지에 이른 그들은 곧 목표로 될만 한 표적물이 없는가하여 주위를 살폈다.

아스라하니 솟은 소나무우에 해묵은 솔방울 몇개가 매달린것이 얼핏 눈에 띄웠다.

《저기 저 솔방울을 쏘아맞혀보우.》

오이가 머리우를 가리켰다.

처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화살을 뽑아들고 공중을 겨누었다.

핑- 시위줄을 울리며 튕겨난 화살이 솔방울을 거의 스칠듯 하더니 그옆의 솔가지 하나를 부러뜨려놓고 사라져버렸다.

《야, 헛맞혔네.》

처녀의 얼굴엔 더없이 아수해하는 눈빛이 력력히 흘렀다.

《한번 더 쏘아보오.》

려송은 다시금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도 역시 너무도 긴장하여 그만 빗맞혔다.

《어마나, 또 빗맞혔소이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오이는 한번 더 쏴보라고 이르며 려송에게 신심을 주었다.

려송은 다시한번 침착하게 겨누고나서 조심히 깍지손을 떼였다.

이번에는 영낙없이 맞아떨어졌다.

《맞았다!》

려송은 너무 기뻐 환성을 질렀다. 오이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여올랐다.

오이는 활을 겨누는 자세로부터 시작하여 숨을 죽이고 슬며시 깍지손가락을 떼는 방법 등 여러가지 활쏘는 묘리를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려송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잠시후 려송은 나머지 솔방울을 모조리 쏘아떨구었다.

《놀라운 솜씨요. 소서노마님의 칭찬이 공연한 소리가 아니였구만. 짧은 시간동안에 그렇게 빨리 늘다니… 정말 놀랍소.》

《아이참, 과찬의 말씀이로소이다. 오이무사님께서 비방을 가르쳐주시지 못했더라면 제가 어떻게…》

려송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아니, 무술엔 그 기초가 있어야 하오. 집을 짓기 전에 주추돌 놓을 자리를 잘 다져야 하듯이 말이요. 솔직히 말하오만 내 생각엔 려송은 그 기초가 공고하다고 볼수 있소.》

오이의 말은 진심이였다.

그러나 려송은 오이의 뜻밖의 칭찬에 몹시도 당황한 표정이였다.

《그럼 이번엔 오이님이 한번 쏘아보소이다.》

려송이 활을 넘겨주었다. 오이는 별로 겨냥하는것없이 슬쩍 활을 당겼다놓았다. 려송의 발치에 단번에 세개의 솔방울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려송이 너무도 놀라와 어린아이처럼 손벽을 치며 감탄했다.

《정말 귀신같은 솜씨오이다.》

《그쯤한걸 가지고 놀랄건 없소.

우리 주몽형의 활쏘기솜씨야말로 천하에 당할자가 없지요.

그는 벌써 세살적에 작은 활을 만들어가지고 날아다니는 파리를 쏘아 맞혔다오. 주몽이란 그 이름자체가 활 잘 쏘는 아이란 뜻이라오.》

《그처럼 뛰여난 무술을 지닌분이시기에 오이님이랑 의형제분들이 그렇게 따르는 모양이오이다. 그래서 전번 싸움땐 한몸으로 행수님을 막아나선것이오이까?》

《허허, 그렇게 생각하시오?

우리가 행수님을 따르는것은 그의 뜻과 인품에 반해서요.

봉황과 닭을 비교할수 없고 태백산의 웅건함을 뭇뫼들과 비길수 없듯이 그 뜻과 인품은 천하사람들과 비할바없이 크고 원대하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주몽에 대해 다 안다고 할수 없소.

그는 정이 헤프고 눈물이 많은 사내라오.

거세개탁(온 세상이 다 흐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옳바르지 않음.)한 이 세월에 파리목숨보다 못한 불행아들인 우리를 위해 누구보다 많이 울어주고 밤새워 위해준이가 있다면 오직 주몽형일뿐이요.

아마 우리가 주몽을 무작정 따르는건 그의 장한 뜻과 기개보다도 불같은 그 정과 눈물때문일거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려송은 오이의 말뜻을 다는 알수 없었으나 무엇인가 크고 심원한것이 마쳐와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참, 언제부터 묻고싶던건데 려송은 그때 어떻게 말갈놈들이 산채를 습격하리라는것을 알았소?》

뜻밖의 물음에 려송은 잠시 당황한 기색이였다.

그러나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조용히 그날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했다.

《사실 그때 전 말갈놈들이 소서노마님을 노린다는것을 알고는 쉽게 댁으로 돌아설수 없었나이다. 마님은 저의 목숨을 구원해준 생명의 은인이 아니오이까.

그래서 발걸음을 돌려 거무나산속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사냥군로인을 찾아 떠났소이다. 그런데 사냥군로인의 말이 이른아침 말갈놈들 수십놈이 졸본산채를 없애버리겠다고 말을 타고 수군거리며 떠나는걸 보았다는것이 아니겠소이까. 그래서 무사님들께 이 사실을 알리자고 산을 질러가다가 오룡산으로 달려가는 오이무사님을 보게 되였소이다.》

《음, 일인즉 그렇게 되였구만. 아무튼 우리를 걱정해주어서 정말 고맙소. 하지만 앞으론 그런 위험한 일에 절대로 뛰여들지 마오.》

《알겠소이다.》

처녀는 공손히 응수했다.

두사람은 활을 거두고 공지를 벗어나 얼마쯤 거닐었다.

려송은 숫저운듯 고개를 숙이고 발볌발볌 발을 내짚으며 자기 생각에 빠져들어갔다.

이 사람의 눈에 이 려송이는 과연 어떤 녀자로 비껴있을가?

과연 이런 남아를 내가 꽤 움직여낼수 있을가?

선망의 감정은 근심으로 바뀌여져 마음을 무겁게 했다.

문득 어렸을 때 생리별을 당한 오랍생각에 가슴이 저려들었다.

지금쯤은 오랍도 이 오이무사와 한두살차이의 름름한 사나이로 성장했을거야. 정말 오라버님은 살아계시기나 할가.

려송은 자기가 이 세상사람이 아닌 오랍을 찾아 헛된짓을 하고있지는 않는가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들면서 나직이 긴숨을 내쉬였다.

오이 역시 곁에서 걸음을 나란히 하는 려송이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왜서인지 오이는 숲속에서 려송을 구원해냈을 때부터 처녀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더구나 하나밖에 없던 오빠마저 수자리에서 잘못되였다고 하는 소서노마님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불시에 가슴이 매여나고 뭐라 딱히 표현할수 없는 그런 아픔이 전신을 휘감는것이였다.

사내인 자기도 헤쳐가기 힘든 고행스러운 인생길을 혈육 한점 없이 홀몸으로 헤쳐가야 하는 려송에 대한 동정이 가슴 한귀퉁이에 자리잡게 되였다.

그래서 려송을 자기의 친동생처럼 위해주고 사랑해주고픈 심정이였다.

한참이나 말없이 걷던 려송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저… 우리 마님 말이오이다. 요즘은 웬일인지 밥도 잘 드시지 않고 혼자 멍하니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시는데 참 이상하지 않소이까?》

《혹시 무슨 병이라도 난게 아니요?》

오이는 걱정스레 물었다.

《무사님들에게서 구원을 받은 다음부터 마님의 마음은 그만 뒤죽박죽이 되고말았사와요.》

오이는 침묵을 지킬수밖에 없었다.

려송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계속하였다.

《마님은 참으로 불행한 녀인이로소이다.

비단옷속에 눈물고인다고 그에겐 생활의 락이 별로 없사와요.

한창 젊은 시절을 방구석에서 한숨으로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그를 옆에서 보는것이 정말 딱하오이다.

과부가 일생을 홀로 살고나면 한숨이 구만구천두라 하옵는데 정을 붙일데 없는 녀자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되옵니다.

제가 선뜻 이 집을 떠나지 못하고있는것도 실은 저마저 훌 떠나버리면 맘씨고우신 마님께서 혼자 더욱 외롭고 쓸쓸해할가봐서오이다.

그런데 불현듯 마님의 생활에 무사님들이 뛰여든것이 아니오이까? 생명을 구원해준 은인인데다 인품도 뛰여난 그 주몽이라는분을 마님은 마음속깊이 사모하는것이 틀림없사와요.》

려송의 이야기를 듣는 오이의 눈앞에는 문득 소서노가 보내온 갑옷과 장검을 받아들고 얼굴빛이 흐려지던 주몽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범상히 생각했던것이 려송의 말까지 듣고보니 결코 스쳐지날 일이 못되였다.…

그들이 방에 다시 들어섰을 때까지 소서노와 주몽은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물론 지금 세월은 모든것이 불공평하고 어지럽소이다.

하오나 세상리치가 그리된것을 사람의 힘으로써야 어찌할 도리가 있겠소이까?》

봄볕에 음달얼음이 풀린듯 소서노는 아무런 구속감을 느끼지 않게 되자 주몽에게 자기가 고심하던 모든것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세상의 리치란 본래 사람이 만든것이옵니다.

노예와 노예주도 역시 하늘땅이 생겨날 때 저절로 생겨난것이 아니라 다름아닌 사람자신이 만든것이지요.

노예주들은 바로 이 사실을 노예들이 깨달을가봐 두려워하고있소이다.

허나 손바닥으로 저 하늘의 해를 가리울수 없듯이 진실을 언제까지나 숨길수는 없는것이오이다.

달도 차면 기울기마련이고 물이 가득차면 그릇을 넘기마련입니다.

비록 지금은 마소보다 못한 노예의 쇠사슬에 얽매인 처지이지만 언젠가는 자기들도 사람임을 깨닫고 그 쇠사슬을 끊어버릴 그런 날이 오고야말것이오이다.》

주몽의 음성은 나직이 울렸으나 소서노가 받아안은 충격은 너무나도 큰것이였다. 무아몽중과도 같은 깊은 번뇌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소서노의 눈앞에 한가닥 밝은 해살이 비쳐들었던것이다.

(어쩌면 천하의 리치를 이렇듯 환히 알고있을가.)

소서노는 예지가 흘러나오는듯싶은 주몽의 영채도는 두눈동자로 자기의 온넋이 빨려들어가는듯 한감을 느꼈다.

녀인은 다시금 몸가짐을 정숙히 하고나서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며 조언을 바랐다.

《…저에겐 남편이 남긴 땅 말고도 아버지가 물려준 토지가 적지 않사옵니다. 노예들도 그렇구요. 전 그들을 선정으로 다스리고싶었소이다. 그런데도 한두해사이에만도 여러명의 노예들이 달아났나이다.

솔직히 우리 집 노예들의 처지는 다른 노예주들의 노예살이처지보다 훨씬 나을뿐아니라 가난한 하호들의 궁색한 살림에도 비할바가 아니오이다.

그래도 어디론가 멀리 도망을 칠 궁리들만 하고있소이다.

노예들은 비록 궁색한 살림일망정 자기의것을 가지고싶어하나이다.

자기의 집, 자기의 가정, 소작부치는 땅일망정 제 손으로 자기의 농사를 짓기를 바라나이다.

그래서 전 충실한 일부 노예들에게 땅을 소작주어 부치게 해보았나이다.

남녀가 좋아하면 서로 짝을 무어주었나이다.

그랬더니 더는 도망치는 노예들이 없더이다. 힘써 농사를 지어 수확도 곱절이나 냈소이다.》

《두렵지 않던가요?》

주몽이 물었다.

소서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두렵나이다. 왜 그렇지 않겠소이까.

과루부의 귀족들은 물론 구려땅의 여기저기서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조상의 전통과 법도를 허무는 미친짓이라고 소녀를 비방해나섰댔소이다.

그때에야 소녀는 비로소 수천년을 내려오며 바위처럼 굳어진 이 세상앞에 〈나〉라는 녀인의 존재야말로 가을볕에 자라난 작고 연약한 어린 싹에 불과하다는걸 깨달았나이다.

아버지의 배경만 아니였다면 전 이미 오래전에 세론의 지탄에 몰려 형장의 이슬이 되여버렸을지도 모르오이다.》

《마님은 참 훌륭한 일을 하셨소이다.》

소서노는 주몽의 얼굴이 환하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것을 보고 다시한번 놀랐다.

무엇때문에 그렇게도 흐뭇해하는것일가? 내가 무엇을 했기에…

주몽은 확신성있게 말하였다.

《마님은 지금 천하의 대세를 향해 벌써 흔들림없이 가고있소이다.

그래서 제가 마님을 훌륭하다고 하는것이오이다.》

소서노는 아직도 의아함을 채 가시지 못한듯 낮게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소녀를 두고 미친 녀자라고 하옵는데두요?…》

주몽은 호탕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어찌 미친 행동이라 할수 있겠소이까. 노예들을 안착시키는것은 이 땅의 민심을 안착시키는 일이고 나라의 기초를 닦는 일이라 사려되옵니다. 천하의 대세가 새것을 향해 흐르고있는데 구태여 옛것만을 고집하는자들이 오히려 미친자들이오이다.

양춘이 가까워올수록 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새날이 밝아올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지는 법이나이다.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초지의 뜻을 세우사이다. 새벽길을 남먼저 걷는이는 비록 남보다 많은 이슬을 차게 되지만 그만큼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법이오이다.

노예도 사람이오이다.

이제 멀지 않아 이 땅의 민심은 마님의 뜻과 의지가 옳았다는것을 보여줄것이오이다.》

소서노는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것만 같았다.

사실 자신이 노예들에게 땅을 소작주어 농사를 짓게 한것은 노예들이 도망치는것을 막고 또 그들이 이전보다 훨씬 일을 직심스럽게 하여 소출을 더 낼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간 유모의 넋을 위로코저 한 하나의 의거라고도 할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몽의 말을 듣고보니 마치 칠칠야밤의 어둠속에서 안타깝게 손더듬하며 방황하다가 갑자기 광명을 만난듯 모든것이 석연하고 막혔던 가슴이 확 열리는것만 같았다.

소서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주몽에게 눈물을 보일가 두려워서였다.

그동안 외로움에 시달리며 고독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이렇듯 마음속이나마 의지해보고싶은 억센 대장부가 있다는것이 참으로 꿈만 같았다.

그는 아직까지 이렇듯 천하의 대세에 밝고 주견이 명백하며 뜻이 큰 사나이를 한번도 보지 못했었다.

참으로 주몽은 대하면 대할수록 감탄하게 되는 사내였다.

(이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그 어떤 크나큰 포부가 숨겨져있는것이 분명해.

참새, 제비무리 어찌 봉황의 뜻을 알리오만 무엇이든 이분을 도울수만 있다면…)

연회가 거의 끝나갈수록 소서노의 머리속에는 오직 이 하나의 생각만이 꽉 차있었다.

얘기가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오이는 소서노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우린 연타발대인을 좀 만나봐야겠소이다.

오늘 아침 산채에서는…》

오이는 두로가 나타나 연타발의 뜻이라며 당장 산채를 헐어버리고 떠나가라고 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두로오라버니가요?》

소서노의 얼굴엔 긴장한 빛이 흘렀다.

두로라면 충분히 그럴수 있는 위인이였다.

더우기 아버지 연타발은 자기의 충실한 신하의 아들이였던 두로를 자기의 오른팔처럼 믿고있는터에 본의아니게 그의 손탁에 놀아날수 있었다.

소서노는 일이 급하게 되였음을 느꼈다. 하루빨리 손을 쓰지 않는다면 과루부의 병권을 쥐고있는 두로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마침 연타발은 구려의 도성인 연나부의 연나성으로 왕을 만나러 자리를 뜨고 없었다.

소서노는 자기가 아버지를 두로보다 먼저 만나리라 결심하고나서 조용히 말했다.

《걱정놓으소이다. 제가 곧 아버님을 뵙겠사와요.》

《정말 고맙소이다.》

오이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졸본산채는 더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였다.

민심이 그들을 따랐고 소서노와 같은 유지들도 점차 그들에게 공감하고 따라나서고있지 않는가.

이 사실이 그 무엇보다 오이를 기쁘게 한것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을 때 주몽의 일행은 소서노의 집을 나섰다.

소서노는 여라문명의 건장한 노예들을 시켜 군량미와 장구류를 이십여필의 군마에 실어가도록 분부하였다.

오룡산싸움이후 주몽의 산채로는 나날이 많은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중에는 가난한 하호출신도 있었고 도망친 노예들도 있었으며 수자리로 변방에 번을 들러 나갔다가 귀향하던 군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불공평한 이 세상을 바로잡아줄 성인이 졸본천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혼자몸으로 혹은 두셋씩 짝패를 이루고 찾아왔다.

그래서 제일 걱정거리가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였다.

다행히 올봄에 그들이 뿌렸던 종곡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복슬강아지의 탐스런 꼬리같은 호함진 이삭들을 빼여물었다.

게다가 의복같은것은 산짐승사냥을 통해 얼마간 해결할수 있었다.

그러나 제일 난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장시킬 철기와 군마문제를 해결하는것이였다.

바로 그것을 소서노가 도맡아 해결해주고있는것이다.

대문밖 멀리에까지 따라나온 녀인은 그들과 작별하였다. 그윽한 옹달샘같은 소서노의 크고 까만 눈동자에 맑은것이 고여올랐다. 눈물을 보이는것이 부끄러워 얼른 명주수건으로 눈굽을 훔치고나서 소서노는 젖은 목소리로 주몽에게 물었다.

《다시 오시겠사와요?》

《네, 그렇게 약속하지 않았소이까.》

대범히 웃으며 범상히 하는 그 한마디에 소서노는 한껏 서려들던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온몸이 나른해왔다. 그대신 눈가에선 감출래야 감출수 없는 뜨거운것이 두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고말았다.

그 모습에 웃음짓던 주몽도 가슴이 젖어들어 한동안 말을 못했다.

주몽은 가슴에 무둑해지는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고개를 돌리고 소서노의 손을 굳게 잡았다놓았다.

《그토록 대담한 일을 해오신 마님이 이런 잠간리별에 마음이 여리여지시면 되겠소이까.》

그 말이 소서노의 마음을 다잡게 했다.

눈물을 닦은 소서노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이다. 참, 군마를 끌고간 사람들은 그대로 산채에 두어 군사로 쓰도록 하시와요. 그래서 일부러 몸이 건장한 사람들로 골랐나이다.》

《고맙소이다.》

말에 오르려는 주몽을 소서노가 《저…》하고 다시 불러세웠다.

떨어지기 아쉬워 무슨 말 한마디라도 더 건네고싶은 심정이 용기를 낸것이다.

주몽이 다시 돌아섰다.

소서노는 당황했다.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녀인은 차마 주몽을 마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오이다. 어서 떠나시오이다.》

주몽이 성큼 걸음을 뗄 때에야 소서노는 황급히 소리쳤다.

《아니 저, 참 내가 잊었댔소이다. 부탁이 있소이다.

우리 려송일 데리고 가주사이다. 본인의 청도 간절하고 또 만약 과루부도성의 군사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려송이만 있으면 그리 큰 불상사도 없을것 같아…》

주몽이보다 곁에 있던 오이가 난색을 지었다.

《산채는 한적한 곳이라 랑자가 있을만 한 곳이 못되는 곳이오이다. 그러다 혹시…》

바빠하는 오이의 모습에 모두들 웃음을 지었다.

소서노의 뒤에 섰던 려송이 냉큼 나섰다.

《제가 짐스러울것 같아 그러오이까?

그만두시오이다. 사내대장부들이 연약한 소녀 하나 돌보지 못해 쩔쩔 매는 모습 금시 눈앞에 방불하오이다. 그러고도 뭐 세상을 건진다고요? 흥.》

금시 샐쭉해진 려송이 말고삐를 돌려세우며 토라진 목소리로 비꼬았다.

《얘, 려송아, 버릇없이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저, 용서들 해주소이다. 얘가 그만…》

《마님도 참, 용서는 왜 빈단 말이오이까? 사람을 얕보아도 분수가 있는 법이오이다.》

바빠맞은 마리가 주몽의 얼굴을 쳐다보며 간청했다.

《챠, 이런, 형님들 이러다가 우리 산채의 위신이 떨어지겠소이다. 오이형! 아, 제자를 받았으면 스승구실을 해야지요. 저… 랑자, 밥을 지을줄 아시우?》

《호호, 려송인 어려서부터 못하는 일이 없나이다.

성격은 또 얼마나 좋구요. 활발하고 명랑하고, 어찌보면 사내들같다니까요. 》

려송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소서노는 그냥 말을 이었다.

《인정은 또 얼마나 많다구요.

사실 저로서도 려송과 헤여지기가 아쉽소이다.

하지만 무사님들곁에 가면 려송인 친오랍을 찾은것과 같은 심정일것이오이다. 바로 그래서 저도…》

《마님두 참, 그런 말이 이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이까?》

려송이 다급히 말렸으나 그의 촘촘한 속눈섭아래엔 어느새 축축히 눈물이 슴배여나왔다.

소서노의 속깊은 마음이 헤아려져 모두들 말이 없었다.

일곱살때 노예로 팔려가면서 어린 누이동생과 생리별을 당하였던 마리의 심정은 곱절이나 더했다.

《의논이구뭐구 할것 없시다.

이 마리가 랑자를 데리구 갈테니 그런줄 아시우. 랑자, 어서 따라서시우.》

일이 이쯤되고보니 맹랑해진 오이는 하는수없이 주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몽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하하, 뭘 더 생각할거나 있소. 데리고 가야지.

랑자, 좋도록 하우.》

려송의 얼굴에 언제 그랬더냐싶게 박꽃같이 환한 웃음이 피여났다.

그러는 려송의 모습은 더없이 귀염성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소서노의 얼굴에도 만족한 웃음이 피여올랐다.

《산채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려송을 통해 련락을 띄워주사이다.

그리고 몸성히들…》

소서노는 더 말끝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마디만 더하면 금시 눈물이 쏟아져내릴것 같아서였다.

그토록 마음속으로 바라고 갈망해온, 자기의 일생을 의탁하고싶어했던 그런 사람을 이렇게 만나자바람에 헤여져야 한단 말인가.

녀인은 애써 자신을 자제하며 강잉히 머리를 쳐들었다.

웃음으로 그들을 바래우고싶었다.

소서노의 얼굴엔 다시금 밝은 미소가 비껴흘렀다.

오이는 그런 소서노를 차마 마주볼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였다. 주몽은 소서노를 향해 다시한번 머리숙여 깊은 사례를 드리고나서 말고삐를 잡고 채찍을 휘둘렀다.

깃을 찾는 저녁새의 무리가 불그레 물든 락조속을 훨훨 날아오르는 서켠 산등성이를 향해 주몽의 일행은 말을 달리였다.

멀리 말발굽이 피워올리는 먼지구름속으로 려송의 명랑한 웃음소리와 걸걸한 마리의 호호탕탕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는 길가쪽을 이윽히 바라보는 소서노의 눈가에는 맑은 눈물이 소리없이 고여올랐다.

(가고싶소이다. 그대와 함께… 정녕 가고싶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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