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제 1 장


2


정인수소위는 서울교외에 주둔하고있는 소속부대로 급히 돌아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것처럼 형의 집에서 서둘러 나왔으나 오히려 시간을 한강물처럼 푼푼하게 쓰면서 단층기와집들이 비좁게 앉은 성북구의 고요한 골목길에서 어슬렁거리고있었다. 몇집의 문패를 눈여겨보며 헤매던 그는 마침 큼직한 우편가방을 얹은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는 늙은 우편배달부에게 물었다.

《요 근방이겠는데 혹시 박명찬교수댁을 모르시겠습니까?》

낡은 여름중절모를 앞이마에 깊숙이 내려쓴 늙은 우체부는 못 들은척 지나가더니 밀랍색수염이 밤송이같은 턱을 건듯 들어보이며 알려주었다.

《저기 낮은 대문귀에 살구나무가 선 저 집이요.》

우편배달부는 걸음을 멈추고 한손에 쥔 여러개의 편지들을 직업적인 솜씨로 바람에 젖혀지는 비둘기꽁지처럼 동그랗게 펼치고 살피더니 그속에서 하나를 인수에게 넘겨주며 덧붙였다.

《그 집 따님한테 가는거라서, 좀 부탁합세다.》

인수는 빼앗다싶이 편지를 받아쥐고 기쁨과 호기심에 번들거리는 눈길로 편지에 적힌 박영옥이라는 수신인이름을 몇번이나 더듬었다. 보매 이 녀인의 이름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이 낯선 골목길을 헤매게 한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편지를 웃주머니에 소중히 간수했다.

연록색의 낮은 대문기둥에 붙은 새똥에 얼룩진 교수의 집 문패앞에 선 인수는 큰숨을 들이그어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기의 군복차림을 깐깐히 뜯어보고나서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고 대문에 난 쪽문고리에 자신있게 손을 뻗쳤다.

이때 안에서 이쪽으로 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문쪽을 벌컥 열고 반나마 벗어진 대머리에 언제나 어떤 사색에 지치고 외계보다는 자신의 정신적내면을 응시하는듯 한, 흐릿하면서도 날카로와보이는 눈을 가진 풍채좋은 로인이 가방에 가득한 책속에서 무엇인가 뒤지며 바삐 나왔다. 인수는 절도있게 인사를 하며 물었다.

《저 혹시 박명찬선생님이 아니십니까?》

《그렇소. 무슨 일로?》

심오한 전문지식의 세계에 깊이 몸을 잠근 학자들이 흔히 숨가쁘게 바뀌는 류행이나 몸차림에 무관심하듯이 양복과 구두, 손목시계까지도 낡은것을 착용하고있는 교수는 빛다른 초면의 방문객을 아래우로 훑어보고는 우스울 정도로 큰 가방을 다시금 뒤지며 덧붙였다.

《나를 만나야겠소? 도서관에 좀 바쁜 일이 있는데…》

인수는 눈길을 떨구며 더듬거렸다.

《사실은 댁의 따님을 좀…》

《우리 앨? 아직 오지 않은것 같은데.》

박명찬교수는 건성으로 반응하고는 다시 쪽문안으로 들어가며 집안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그 내 책상우에 싸둔 원골 내다주구려.》

이윽고 나온 늙은 부인에게서 원고와 함께 우산을 받은 교수는 벌써 방문객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겅중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정인수는 그때까지 할바를 모르고 문앞에서 어물거리고있었는데 탄재를 들고나온 교수의 부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내밀었다.

교수에게서 랭대를 받은 인수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무뚝뚝하게 물었다.

《댁의 따님 언제쯤 돌아오는지요?》

젊어서는 어여뻤을것이나 이제는 벌써 그 미의 꺼져가는 황혼만이 어려있는 늙은 부인은 젊은 손님의 군복차림과 말투에 놀라는 눈치더니 혹시 불행한 일이나 생기지 않을가 근심하며 억양에 친절을 보탰다.

《우리 영옥이말인가요? 학교에서 올 때가 됐어요. 무슨 일이신지 들어와 기다리시지요.》

인수는 대답없이 뜰안에 들어섰다. ㄱ자로 앉은 중류풍의 고색창연한 기와집이였다. 퇴마루엔 정성들여 가꾼 여러개의 화분이 주런이 놓이고 담쟁이덩굴과 살구나무가 무성한 울타리에 있는 소잔등만 한 배추밭둘레에는 백일홍과 나리꽃이 소담하게 피여있었다.

교수의 부인은 장교에게 퇴마루에 앉으라고 권하고나서 긴장해보이는 그의 거동을 근심스레 살폈다. 보매 부인은 무기를 착용한 이런 부류의 방문객들한테서는 아무러한 유쾌한 일도 겪어보지 못한듯싶었다. 구멍탄을 가쯘하게 다시 쌓은 부인은 용기를 내여 물었다.

《우리 애는 아직 철부진데요. 혹 무슨 그르친 일이라도 있었는가요?》

마루끝에 걸터앉아 눈길을 떨군채 담배를 피우고있던 인수는 자기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부인의 말을 잘못 듣고는 종잡을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네. 꼭 좀 만나보고싶어서요.》

부인은 원망어린 눈길로 장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때 마침 열려진 쪽문으로 계란형의 얼굴에 눈이 어글어글한 숙성한 녀대학생인 교수의 딸 박영옥이 낮은 코노래와 함께 청춘다운 활기를 풍기며 들어섰다.

인수는 놀란듯 마루에서 내려서더니 자기의 운명이 처녀의 표정여하에 달려있기라도 한듯 흥분과 기대감에 넘쳐 온 시력을 영옥의 얼굴에 겨누었다. 그러나 그를 한번 바라본 처녀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한채 무관심한 담담한 얼굴로 부엌쪽으로 걸음을 놓았다.

《오래간만입니다. 날 모르겠습니까? 정인숩니다!…》

이렇게 나선 인수의 거동에는 처절한데가 있었다. 순간 영옥은 놀라 상대를 살피더니 어떤 즐거운 충격과 기쁨이 기쁨을 낳아 과장하고 흥분하기 잘하는 이 나이치고는 결코 특별한 환희라고는 말할수 없는, 어느 정도 도의적으로 꾸며서 지은 환한 미소를 그리며 억양이 풍부한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어떻게… 여기까지 다 찾아오셨어요?》

《마침 기회가 생겨서. 벌써 찾아온다는게 두루 매여살다보니…》

정인수는 넘치는 기쁨을 어데다 건사했으면 좋을지 몰라 모양없이 바장이며 벙글거렸다. 둘은 뜯어보는 재빠른 눈길로 서로 몰라보게 변한 상대방을 더듬으며 한순간 침묵을 즐겼다.

부엌에서 교수의 부인이 이 광경을 내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부인은 불안이 사라진것을 다행스러워하면서도 어느새 사나이가 찾아올만큼 어여쁘게 다 자란 딸을 슬퍼하면서 자리를 피했다.

정인수는 문득 이 처녀를 처음으로 알게 된, 여러해전인 고등학교시절에 가야산을 답사했던 때에 있은 일을 생각했다. 그때 충청도의 시골 소도시의 야심많은 학생이던 정인수는 소나기를 머금고 급작스레 몰려드는 검은 구름장아래서 어느 산골짜기를 빠져나와 동무들이 기다리고있는 해인사를 향해 반달음을 치고있었는데 앞서가는 녀학생들을 따라잡을양으로 바삐 가는 한 소녀와 나란히 가게 되였다.

한낮인데도 컴컴해지더니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어찌할 사이없이 소낙비가 쏟아졌다. 다행히 우산을 갖고있은 인수는 비를 맞는 초면의 소녀에게 함께 쓰고 갈것을 감히 요청했으나 소녀는 얼굴을 붉힐뿐 곁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비를 맞는 소녀가 애처로운데다가 치근거려보고싶은 인수는 약간의 강제로 그를 우산아래에 넣는데 성공했다. 수집어 발가우리해진 소녀는 무척 호감을 주는 청초한 얼굴인데다가 초불처럼 따뜻하게 빛나는 그 눈이 특히 마음을 흔들었다. 게다가 그의 선행의 값을 올려주려는듯 물보라를 날리며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그러더니 만상을 은백색의 불길로 지지는듯 한 눈부신 번개와 함께 온 하늘을 산산이 부셔 곧바로 머리에 동댕이치는듯 한 무서운 뢰성이 연방 터졌다. 그바람에 소녀는 채집한 식물꾸레미를 떨구며 새된 비명과 함께 얼결에 인수의 품에 안겨들었다. 순간이 지나자 소녀는 엄청난 수치를 당한듯 두손에 낯을 묻고 마른 울음을 울었다.

얼마후 그들은 비를 그을수 있는 큰 바위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인수는 소녀가 서울에서 동급생들과 함께 가야산으로 식물을 채집하러 왔으며 이름은 박영옥이고 부친은 모대학의 력사학교수라는것까지 알아내게 되였다.

인수는 이처럼 한번 만났다가 헤여진 소녀에게 련정을 품게 되였다. 저쪽에서는 특별히 호감을 표시한 일도 별로 없었으나 인수가그에게 숱한 편지를 띄우면서 열렬히 짝사랑하는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그러나 간혹 린색한 회답이나 받으면서 세월만 보낼수는 없는데다가 소속부대와 함께 윁남전쟁의 불길속으로 끌려가게 되였으므로 어떻게 하든지 이 숙제를 원만하게 풀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미 무게를 지닌 녀대학생으로 변한 영옥을 곁눈질로 탄상하며 인수는 처녀의 마음을 단단히 틀어쥐려는 야심과는 반대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몰라 조바심을 느낀 나머지 법정에 나선 검사와 같은 얼굴이 되고말았다. 한편 처녀다운 직감으로 사나이가 심상치 않은 열에 떠있음을 느낀 영옥은 은근히 두려움을 느끼며 울타리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수는 뽀뿌라나무처럼 몸을 쭉 펴고 물었다.

《어데 산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전 여기가 좋아요. 동무들과 만나기로 약속한것도 있구 해서요. 군인생활이 재미있어요?》

《재미가 다 뭡니까. 그러나 의무니까. 난 이틀후면 부대와 함께 윁남전쟁에 전투부대로 파견돼갑니다.》

《윁남에요? 큰일이겠네요.…》

처녀는 눈이 둥그래져서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 말입니다. … 난 괴롭습니다. 영옥씨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도 좋겠는지 듣고싶어서요.》

이야기가 이렇게 번져지자 영옥은 억울한 경우를 당하기라도 한것처럼 눈길을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녀자에게 있어서 정인수라는 청년은 언젠가 흘러간 생활의 오솔길에서 만났다가 헤여진 평범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해전에 수학려행에서 있었던 일은 색날은 사진처럼 기억에서 흐려졌고 인수가 보낸 외국작가들의 경구들과 인생에 대한 과장된 맹세로 가득찬 사랑의 편지들은 어느 정도의 불안과 함께 동정의 미소를 자아냈을뿐이였다. 그런데 괴로운 군인살이와 고달픈 운명의 중하에 지쳐보이는 검붉은 얼굴의 이 소위는 빛다른 녀대학생의 생활에 뛰여들어 자기의 권리를 강요해나선것이다.

영옥은 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무리한 말씀이예요. 노엽게 생각마세요. 전 어쩐지 군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다고 여긴적이 없었거든요. 시위투쟁때엔 충돌까지 했으니까요. 그래요. 두렵고, 나무랍고, 그저 그래요. 더구나 윁남파병은 더욱 그렇구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들어있는 이 신랄한 거절에 인수는 깊이 실망하였다. 그는 주먹만 한 주추돌 하나 놓지 않고 다년간 탑을 쌓은 헛수고를 깨달았다. 처녀가 여린 손길로 그 탑을 건드리자 그것은 일순에 돌사태로 변하여 다름아닌 인수자신의 가슴을 내려조긴것이다. 가슴이 아프고 분한 그는 급히 담배를 붙여물고 연방 연기를 삼키더니 이렇게 된바엔 동정을 구걸하기보다는 비난하는수밖에 없다는듯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그래, 그것이 이 땅을 떠나가는 나에게 하는 마지막말이요? 대학생이면 단가?…》

처녀는 어이없어하며 조용히 응수했다.

《참, 내가 어쨌다구 그래요. 저에게 화를 내실건 없지 않아요?》

다년간의 짝사랑이 이처럼 모양없는 처참한 결말로 잘려버린것에 기가 찬 인수는 이제는 상실의 아픔만을 덧치는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애통한 눈길로 쏘아볼뿐이였다. 부대에서 특별외출허가를 받고 나올 때 동료들이 그를 놀려주던 말들이 방정맞게 떠올랐다.

《교수의 딸에 녀대생이라. 그런 애인과 약혼까지 해놓고, 어흥, 윁남에 가서 영웅이 되여 돌아오겠단 말이지? 짜아식!》

《니 한턱 내지 안하문 너거 처니 울어쌓게 코를 잘라버린다이.》

생각할수록 희극적인 존재로 된것만 같은 그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눈길이 꼿꼿해져서 말했다.

《깔보지 마시오. 나는 전쟁터로 가는 사람이요. 더는 감출수 없어 청을 낸것이 뭐가 무리하다는거요? 나 같은 하급장교는 녀대생아가씨와는 어울릴수 없다는겁니까?》

인수는 이렇게 말하는것이 조잡한 감정의 표현이며 처녀에게 실망을 주리라는것을 알았으나 달리 어떻게 할바를 몰랐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 처녀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될 인상적인 충격을 남겨야 할것이였으나 그의 가슴에 떠오르는것은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생긴 노여움뿐이였다. 군대라는 편협하고 거치른 특수세계에 갇혀 고통에 시달리며 증오만을 배워온 그는 참답게 사랑하는것을 배울수 없었고 생활과 진실을 떠나서는 어떠한 사랑이나 우정도 자라날수 없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곤경에 빠지면 화를 낼줄은 알았으나 상대를 끝까지 도덕적으로 대하는 문화성과 인내력도 배우지 못했었다.

영옥은 담쟁이덩굴에서 잎사귀를 한잎 뜯어내여 그것으로 발가우리하게 상기된 부드러운 뺨을 건드리며 말했다.

《깔보다니요. 그런게 아니예요. 우린 서로 교제해본 일도 없지 않아요? 피차 잘 알지도 못하지요 뭐. 윁남전쟁에 가신다는것도 난 처음 알았지 뭐예요. 그 걸음이 과연 옳은걸가요? 우린 서로 리해할수도 없어요. 그러니 다른 얘기야 할 필요나 있겠어요?…》

《말 다했어? 점점 한다는 소리가…》

자제력을 잃은 인수는 부대에서 부하를 대하듯 두손을 옆구리에 짚고 격분에 꺼멓게 질린 참혹한 얼굴을 내밀고 처녀앞으로 다가갔다. 참으로 이러한 때 교수의 부인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일이 어떻게 끝날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빨래한 옷을 다리며 바깥동정을 살피고있던 부인은 허둥지둥 달려나와 딸을 한옆으로 끌며 인수에게 항의했다.

《아니, 이런 변이라고. 우리 애가 어쨌다고 이런단 말이요?…》

인수는 교수의 부인이 눈물이 글썽한것을 보자 충격을 받은듯 주춤하며 자중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모자를 벗어들고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죄했다.

《안됐습니다. 제가 그만… 용서하십시오!…》

인수는 군모를 쓰고 무겁고 느린 걸음으로 대문쪽으로 걸어가더니 그제서야 생각이 난듯 우편배달부에게서 부탁받은 편지를 꺼내들고 영옥모녀를 돌아보았는데 놀랍게도 순진하고 투명한 미소로 환한 얼굴이였다. 영옥은 담담하게 돌아보는 어머니와 눈을 맞추고 빙긋 웃었다. 인수는 교수의 부인앞으로 다가가서 공손히 편지를 전하고는 영옥이에게 검붉은 큰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영옥은 손을 맡겼다. 인수는 제 손에 잡힌 부드럽고 따뜻한 처녀의 이쁜 손을 굽어보며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다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그럼 안녕히 계십쇼!》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이전페지   다음페지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