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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5일

평양시간


제 7 회


제 2 장


7


문희는 민규석에게 매워있는 아버지가 남편의 기사때문에 당하게 될 피해가 걱정되여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갔다. 연한 여러가지 타일로 치장한 아담한 2층양옥이였다. 수입제잔디가 금빛으로 물들고 값비싼 몇그루의 상록수들이 운치를 돋구는 정원에 들어선 문희는 2층에서 울리는 설희의 맑은 피아노소리를 들었다. 취할듯 투명한 피아노소리가 울려나오는 꽃이 많은 베란다를 쳐다보는 문희는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슬펐다. 몇해전까지는 자기도 이 집에서 살았건만 이제는 미천한 처지에 묶여 그리운 안락이란 이룰수 없는 공상으로 변해버렸다는 애잡짤한 설음이 가슴속에 매운 연기처럼 서리는것을 느꼈다.

현관에서 늙은 세탁공을 만났다. 이따금 문희네 집에도 와서 집안일을 보아주는, 전쟁시기에 홀몸으로 된 녀자였다.

《아버님은 출장에서 돌아오셨는가요?》

문희가 묻는 말에 세탁공은 뜨락으로 나가며 대답했다.

《어제 저녁에 오셨다가 그길로 회사에 나가셨는가 봅데다.》

문희는 계모의 방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이불장과 옷장, 아담한 문갑, 커다란 자개거울이며 화장도 구들이 규모없이 놓인 방이였다. 쉰살이 넘었건만 젊은 녀자들처럼 숱이 많은 검은 가발을 여름구름처럼 높이 틀어올린 문희의 계모 강은월은 거울앞에서 새로 지은 류행복을 입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맵시를 보고있었다. 거울속에 비친 문희를 알아본 계모는 여전히 옷맵시를 살피며 물었다.

《허리품이 너무 솔지 않어? 기장은 길어진것 같고…》

《아니, 좋아요. 오히려 길이가 좀 짧지 않아요?》

《뭐가 짧아. 넌 그림 그린다는게 새 류행도 몰라?》

젊어서는 이름난 기생이였으나 이미 모양없는 비게덩어리가 된 계모는 또 한번 몸을 뒤틀어 맵시를 보더니 새옷을 실내옷으로 바꿔입으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남편은 대체 어쩌자는거냐. 장인이 꼭 망하는걸 봐야 속시원하겠다던? 우리가 이만큼 사는것도 아버지가 오랜 세월 애를 써서 그 민사장의 눈에 들어 그만한 자릴 차지한 덕분인데 그 회사를 신문에서 두드려패니 이거야 장인에게 몽둥이질이지 뭐니? 그래, 넌 우리가 우는 꼴 살피러 왔니?》

억울한 문희는 혹시 눈물이라도 보일가봐 자신을 다잡으며 변명했다.

《그런게 아니예요, 어머니.》

어머니라고 불렀으나 남남보다 차거운 계모였다. 문희는 어느 옛날에 이 계모에게 밀려나 지금은 먼 시골에서 우울속에 조용히 늙어가는 친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아픈 한순간을 체험했다. 그러나 감상에만 젖을 일이 아니였다.

《그런게 아니예요. 재일이 아버진 민사장의 일이 아무래도 드러나게 돼있어서 어쩔수없이 썼는가봐요. 내가 펄쩍 뛰니까 저도 딱해하던데요.》

문희의 말에 계모는 반신반의하며 빤히 쳐다보더니 어디로 나가려는지, 아니면 더 말하기도 싫다는것인지 경대를 향해 돌아앉아 머리를 손질하였다. 이 녀자의 고민은 그 어떤 값비싼 외국제화장품으로도 자기의 몸을 처참하게 만드는 늙음을 물리칠 길이 없는것이였다. 그래서 아침저녁 옷치레나 화장에 열중하였고 병사가 전투를 앞두고 무장하듯 이 각종 장신구들로 자신을 깐깐히 치장하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회사에서 퇴근하는 남편을 곧바로 집으로 끌수 없기때문이였다. 그러나 돈많은 남편은 세월이 갈수록 향락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집에 와도 아무런 흥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다만 관습이나 겨우 지키는것을 무슨 큰 혜택이나 베푸는것처럼 행동하였다.

이런 처지로 하여 그 녀자는 젊은 녀자들을 본능적으로 증오하였다. 지금도 거울속에서 문희의 젊고 싱싱한 모습을 본 그는 이 전실태생이 마치도 자기의 젊음을 략탈해가기라도 한것처럼 미워하였다. 그럴수록 그 녀자는 언제나와 같이 문희의 처지를 불행으로 묘사하고 거기에 동정을 뿌리려고 하였다. 그래야만 반발을 사지 않고 괴롭힐수 있기때문이였다.

《너도 그런 남편 만나 고생개나 하겠다. 남의 흠집이나 뒤지는 기자에게 눈물인들 한방울 있겠니? 그 좋은 부자집 혼처를 다 놓치고 그런 시골농사군 아들에게 너를 준것이 그저 한스럽다.》

문희는 계모에게서 흔히 듣는 독이 든 이런 아픈 말이 싫었다. 그러나 남편은 돈을 벌어 재산을 모으거나 아니면 문사로서 화려한 인기를 누릴 가능성도 없고, 그렇다고 가정에 충실하여 안락의 보금자리를 틀어올릴 사람도 못된다는 그 점에서는 계모의 말을 거부할수 없었다. 더구나 이렇게 풍청거리며 사는 아버지의 집에 올 때면 부러운것만큼 자신은 이 집 식구들과는 반대로 험난한 내리막길에 운명을 얹었구나 하는 시름겨운 모멸감을 강하게 느꼈다.

계모앞에서 자기를 주장할 흥미를 느끼지 않은 문희는 거기를 나와 설희의 방으로 올라갔다.

피아노가 있어 멋이 도는 양식으로 꾸려진 방이였다. 엷은 감빛실내복을 걸친 설희는 피아노로 한창 새로운 선률을 탐색하며 오선지를 메꿔나가고있었다.

힘차게 건반을 두드리며 상반신을 잽싸게 기울일 때면 긴 흑발이 드러난 잔등에서 춤을 췄다. 그러다가도 제 흥에 달아올라 웃으며 찌프리며 오선지에 달라붙는것이 제법 열중한 모양이였다. 설희는 한참만에야 쏘파에 앉아있는 문희를 알아보더니 자기는 행복에 지쳤다는듯이 맥없이 어깨를 떨구며 소리없이 웃었다.

《아이, 피곤해. 이건 극장에 줄건데 침울한 주제선률에 화려한 장식음을 배합한 새로운 스타일이지 뭐. 어떻게나 주문들이 많은지 시끄러워 죽겠어. 내 작품은 부를 때마다 새롭다느니, 여름날에 가슴에 맞는 폭포수라느니, 기약없는 리별의 키스같다느니 하며 야단들이야 글쎄. 결국 명예란건 모아들인 아첨인가봐.》

자신은 마치도 음악적천품을 타고나서 찬양이나 명예는 응당한것처럼 심드렁한 얼굴로 이렇게 자랑하더니 문희의 옆에 와서 앉았다. 문희는 설희의 접혀오른 옷자락을 내려주며 말했다.

《넌 좋겠구나. 돈많고 그리운것 없구, 마음껏 돌아칠 무대도 있구. 그런데 난 초롱새구나. 서울 살면서도 류배살이야. 남편이란건 햄리트(쉐익스피어의 희곡의 주인공)이니. 내 얼굴 좀 봐, 늙지 않았니?》

배다른 자매는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닮았으면서도 다른 얼굴, 다른 운명. 두 얼굴은 서로에게 창문이였다. 그 창문을 거쳐 아직은 안개속에서 희미한 서로 다른 미래의 세계를 더듬었다.

문희가 물었다.

《넌 미국에 간 그 남자를 기다리니?》

《아 아니, 그 사람도 기다리지 않을거구. 서로 재주껏 멋대로 사는거지. 중요한건 오늘이구. 오늘이 쌓아지면 미래라구 봐. 미리 미래를 정해놓고 거기에 구속받는것처럼 바보가 어디 있어. 언닌 이 점에선 나보단 보수파야. 아저씨 영향인가보지.》

《남편 얘긴 하지두 마. 그 사람은 모든걸 부정하지. 그리곤 줄창 고민이란다. 어떤 때엔 깊은 밤에 깨여나보면 불도 켜지 않고 책상앞에 앉아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며 이마로 자꾸 책상을 조아리는거야. 불쌍한 생각이 나서 이야길 나눠보면 뭐가 뭔지 알수 없는 캄캄한 미궁이야.》

이때 옆방에서 전화가 따르릉거렸다. 설희는 놀란 사슴처럼 옆방으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웃고 떠들더니 건너와서 혼자서 왈쯔춤의 보폭을 밟으며 말했다.

《버클교수의 딸 엘레나였어요. 그애가 하는 말이 일반민중에게는 가난이 채찍이고 권태는 부자들의 채찍이라나. 그런데 나의 음악에는 그 채찍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눈을 뜬채 잠들수 있는 꿈나라가 있다잖아요. 그애의 아버지인 버클교수는 또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의 음악은 아직 미숙하지만 행복이란 다름아닌 체념이란것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는거예요!》

《그게 꼭 칭찬일가? 너도 행복이란 모든걸 단념하고 버려두는거라고 생각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문희가 이렇게 묻자 설희가 주장했다.

《왜 그렇잖아요? 사람이란 원래부터 체념하고있는걸요. 만약 사람이 목적이나 리상을 위해서만 사는 론리적인 동물이라면 자기 론리가 무너질 때엔 다 자살해야 할것 안예요? 그렇지만 그 모든 모순속에서도 다 살아있는건 체념하고있기때문이예요. 나의 노력은 이 체념의 희로애락을 감각적인 소리의 예술로 환원시키는데 있어요.》

《글쎄, 잘은 모르겠다만 체념은 타락의 길잡이가 아니겠니? 나에겐 네가 어쩐지 위태로와보여. 체념과 타락이란 사람과 함께 예술도 죽일수 있어.》

설희는 화가 난듯 고집어린 날카로운 눈으로 문희를 돌아보며 엇섰다.

《참, 언니도… 남은 칭찬인데 깎아내려요? 언니도 아저씨와 별로 다르지 않군요. 아저씨는 버클교수네 가정음악회에 나타나 나에게 뭐라고 폭언했는지 알아요? 신세를 망치기 전에 가버리자느니, 사교의 수단으로 된 음악은 시체라느니 하며 마구 모욕했단 말예요. 아유, 그런 남편과 어떻게 살아요?》

도고한 설희의 말은 문희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러나 그는 설희를 나무랄 대신에 아무런 일에도 열중하지 못하고 활무대도 개척하지 못한채 하루하루 보람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탓했고 알길없는 고민때문에 집에서나 밖에서나 숱한 말썽거리만 만들고 다니는 남편을 원망했다.

문희의 얼굴이 흐려있는것을 보자 설희도 잠잠해졌다. 문희는 남편의 기사때문에 아버지가 입을 타격에 대하여 의논해보고싶었으나 설희의 혹독한 비난이 두렵기도 하여 말을 안했다.

문희는 방을 나오면서 한마디 했다.

《넌 무엇인가 자꾸 랑비하고싶어하는것 같은데 자신을 잘 단속해야겠어.》

설희는 꾸민 미소를 짓고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아저씨께 걸작기사를 잘 읽었다고 전해줘요. 아버지가 특히 감탄하시더라는것도 잊지 말고요.》

올 때와는 반대로 누를길 없는 불쾌감을 품고 친정을 나온 문희는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종로를 돌아 명동으로 갔다. 기분도 바꾸고싶었거니와 한 양품점의 웃층에 있는 다방 《코스모스》에서 열리고있는 미술전람회를 보고싶은것이였다. 거기에는 자기의 작품도 몇점 걸려있어서 노상 벼르어오던 참이였다.

택시를 멈추고 운전사에게 료금을 물고 내린 문희는 거리로 흐르는 인파를 헤치고 양품점으로 들어갔다. 일본과 미국에서 들어온 각종 상품들로 장식된 상점이였다.

사람들로 붐비는 계단을 거쳐 곧바로 미술전람회장으로 오르는 문희는 왜서인지 자기 그림에 자신이 붙지를 않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로서는 오래간만의 출품이였고 그만큼 명예를 건 야심작이기도 하였으나 일반의 평판을 별로 들어본 일이 없어서 불안하기만 하였다.

다방을 빌린 이 미술전람회는 십여명의 화가들이 출품한 집체전람회였으나 인기화가들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명예를 지녀본적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였다. 문희도 례외가 아니였다. 문희는 어린시절부터 화가로 성공하려는 꿈을 안고 숱한 그림을 그렸었다. 연필화로부터 유화에 이르는 그의 다양한 련습화들에는 사물의 인상뿐아니라 그 지조를 이루는 본질적인 모상에 대한 통찰력과 생활을 보는 선의에 찬 애잡짤한 환희가 선명히 비쳐있어서 친구들과 교원들의 찬양을 받았다.

소녀시절의 문희는 생활의 색채와 목소리에 취해있었다. 무엇을 보나 시정을 느꼈고 울분처럼 가슴을 누르는 설명할 길 없는 환희에 시달렸다. 현실에서는 마음을 고달프게 하는 초라한 마을이나 땅버들이 먼지를 들쓰고있는 보잘것없는 언덕풍경도 그의 그림에 오르기만 하면 그것은 어떤 시적인 가치와 고귀함을 일러주는듯 했다.

중학시절의 일인데 문희는 결핵으로 오래 앓다가 사망한, 제자들을 위하여 헌신적이였던 미술교원을 추모하는 목탄화를 그린 일이 있었다. 추운 겨울날 고인의 유가족들과 교원, 학생들의 애도속에 고인의 령구가 칼바람에 부대끼는 컴컴한 아카시아숲길을 지나가는 구슬픈 장면을 감각적이며 사실주의적인 필치로 그린 그림이였다. 문희는 저로서도 그 그림이 마음에 들어 동무들에게 보이려고 학교로 가지고 나갔는데 이 그림을 오래도록 보던 우울한 지리교원이 그만 학생들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작고한 미술교원의 친구인 그 지리교원은 울어서 붉어진 눈길을 떨구고 어린 문희에게 말했다.

《학생의 그림엔 이상한 힘이 있어요. 그처럼 귀한분을 잃은 한없는 아픔이 가슴을 쥐여짜는구만.》

문희에게 잊을수 없는 이 사건이후 그는 미술의 길에서 자기의 운명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한없는 포부를 안고 입학한 다름아닌 미술대학에서 이상하게도 자기 능력에 대한 의혹과 쓰라린 실패에 부닥쳤다. 백발성성한 교수들의 현학적주장에 따라 세기말적인 서방미술을 본따서 현실의 구체적인 모상들을 버리고 어두운 내면세계를 뚜져가며 관념의 형상을 그리려고 안깐힘을 쓰던 그는 갑자기 빛을 잃은 소경이 돼버렸다. 추상성이 그 녀자의 재능을 질식시킨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당하게도 자기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우울에 잠겼다.

그 이후 오늘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된것으로 보면 이번에 출품한 작품도 실상은 그 녀자의 능력이나 재능과는 무관계한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시험을 잘못 친 학생이 진학여부가 결정된 성적표를 받으러 가는듯 한 불안을 안고 전람회장인 다방으로 올라갔다.

다방에는 양품점을 돌아다니다가 들린 사람들이 많았으나 벽에 주런이 걸린 그림들을 감상하거나 사는 사람이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자욱한 담배연기속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동료들끼리의 얘기에 팔려있었다.

문희는 여전히 팔리지 않은채 구석진쪽에 걸려있는 자기의 그림부터 살피고나서 매대로 갔다. 웃을 때마다 볼우물이 패이는 동그란 얼굴에 보석귀걸이를 단 다방 녀주인이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알은체를 했다.

《난 또 누구시라고… 화가선생님이시군요.》

문희는 레몬수를 청하며 물었다.

《손님이 많군요. 그림덕 더러 입는가요? 팔린 그림 더러 있어요?》

《덕이 다 뭐예요.》

녀주인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그림 사는 사람은 없고 차 한잔 마시지 않는 구경군들만 자꾸 끼여들어 떠들어대니 단골손님들도 잘 오지 않아서 손해만 보거든요. 참, 미술협회다가 이 미술전람회 좀 빨리 거둬달라고 말씀해주세요.》

화가로서의 문희의 희미한 존재를 얕보고 아무렇게나 해보는 말이였다.

문희는 적당한 말로 체면을 세우고 자기의 그림이 가까운데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앉고보니 바로 옆자리에 중년의 화가가 앉아있고 그너머의 탁자에는 뜻밖에도 남편과 그 친구인 김성우가 마주앉아있었다. 문희는 자리를 옮기든지 방에서 나가든지 해야겠다고 망설이는데 무재능이면서도 어디에 가나 사건을 만들어내면서 언제나 화제의 주인공으로 되는것을 자랑으로 알고있는 중년화가가 문희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송선생의 그림 세폭, 다 괜찮아요. 좀더 자주, 더 많이 내놓도록 해봐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용에서 옷이 률동을 방해하는것처럼 선생의 이번 그림에선 아직 표면적인 시각이 포착한 사실의 잔해가 값있는 철학적테마의 표현을 방해하고있는것 같군요.…》

그의 이야기를 듣던 문희는 김성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바람에 이쪽을 등지고 앉아있던 남편도 돌아보더니 애매한 미소를 보냈다.

이때 서너명의 청년들이 들어와서 그림을 보기 시작했는데 상점구경을 하다가 심심풀이로 들린 농촌청년들로 보이는 그들은 제나름으로 떠들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중년화가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주절거리고있었는데 문희는 건성으로 반응하면서 그림을 보는 청년들을 살폈다.

한 청년이 해빛에 그을은 커다란 손으로 모씨의 《겨울의 바다》를 가리키며 동료에게 말했다.

《내 원, 이게 바다란 말이노? 눈이 아이고 옹지구멍인거로. 아무리 봐도 우리 앞마을 감탕구덩이 같은기라. 에크, 그래도 이만원가겍이 붙었구마!》

그러자 그의 동료는 가격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개탄했다.

《직일놈들, 이만원이 어데가. 공짜로 준다 해도 십리 밖으로 뛰겠다.》

한편 키가 작달막한 다른 청년은 문희의 그림 《희망》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얼굴을 잔뜩 찌프리며 벙어리처럼 웃었다. 그것은 문희로서는 무척 고심한 작품이였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담청색으로 바꾸고 뒤엉킨 흰 연기를 감빛으로 바꾼듯 한 그림, 구체적인 형태를 무시하고 색과 선의 상징적인 조성을 통해 어떤 형태로 환원하려는 열띤 의지를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보고 웃던 작달막한 청년은 들고있던 가방으로 그림의 제목을 가리우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 그림에 이름을 붙여봐.》

《이거?》 하며 키큰 청년이 말했다.

《이건 또 무슨 도깨비속인고. 거러지가 버린 옷, 이런 이름 안되나?》

《글쎄말이다. 그런데 이거 봐.》 하고 작달막한 청년은 제목을 보이며 웃었다.

《이따우 꼬라지가 〈희망〉인거다!》

그러자 나머지 두 청년은 장마당에서처럼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분해서 붉어졌던 문희의 얼굴은 극도의 수치심에 질려 해쓱해졌다.

금시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았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에 열중한 중년화가는 여전히 주절거렸다. 문희는 겨우 용기를 내여 남편이 앉아있는쪽을 살폈다. 김성우는 감동을 감춘 번쩍이는 눈길로 그림을 보며 랭소하는 청년들을 보고있었고 저편을 향한 진수는 머리를 떨구고있어서 노한 매의 날개처럼 들썽한 어깨만 보였다. 남편이 비난자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치욕을 느끼고있는것을 본 문희는 이 다방안에서 도망치고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힘이 없었다.

(아, 어떻게 하면 좋을가?)

문희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러고있을가. 왜 나의 가난한 명예를 함부로 짓밟는 저사람들의 뺨을 후려치지 못할가. 아니야, 나자신도 모를 그림, 나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그림이 아닌가. 오히려 나는 저 청년들에게로 나가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가?

《나를 때려줘요! 이따위 그림 다시는 그리지 못하도록 사정없이, 사정없이 때려줘요!》라고.)

그러나 그의 창작을 가치없는것이라고 처음부터 비난해온 남편이 자기의 정당성을 확인하며 망신당한 안해인 자기를 동정하고있을것을 생각하고는 또다시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문희는 접대원이 그 청년들을 꾸짖어 내모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고 남편이 괴로움이 내밴 무색한 얼굴로 성우와 함께 방에서 나가는것을 피부의 감각으로 느꼈다.

《실망할것 하나 없어요. 일반관중이란 언제나 독창적인 예술의 적이니까요.》

중년화가는 이런 엉터리위안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5~6명의 녀대학생들이 들어와서 배를 한두개씩 청해먹더니 벽을 따라 돌아가며 그림을 감상했다.

그들을 곁눈으로 살핀 문희는 아무런 방비도 없이 새로운 참화를 기다리는 기분이였다.

녀대학생들은 초라하게 말라 비틀어진 겨울의 꽃밭앞을 지나가듯 건성으로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역시 비난들이였다.

《돌아가자. 기분만 잡치겠어. 이런 장난에 무슨 철학이나 있는체하는 심보들, 정말 미워죽겠어.》

키가 큰 처녀가 동무들을 끌고 나가면서 말했다.

《돈이나 많으면 도맡아 사다가 모조리 난로에 처넣었음 좋겠어.》

못처럼 귀에 박히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문희는 자기의 그림 세점을 떼여가지고 돌아가려는 비참한 결심을 했다. 그는 다방 녀주인과의 교섭끝에 잡부를 시켜 수치만을 벌어들이는 자기의 그림들을 떼여가지고 다방을 나섰다. 적장의 요새에 들어가 강화조약에 서명하고 물러가는 패전장군들이 아마 이런 기분이겠지 하고 그는 생각하며 사람들로 붐비는 양품점의 계단을 내려갔다.

거리에서 택시를 불러 그림들을 싣고 잡부에게 돈을 치렀다. 차안에 들어앉은 문희에게 늙은 택시운전사가 물었다.

《아무래도 알수 없습니다요. 그게 무슨 그림같다고 그런걸 사셨습니까?》

《너무 한심해서 사본거지요.…》

아무렇게나 하는 대답이였다.

차는 문희의 집을 향해 번화한 명동을 떠났다. 문희는 달아오른 관자노리를 차창에 기대고 풀어진 시선을 밖으로 보냈다. 자동차들과 보행자들이며 간판투성이건물들이 형체를 잃고 흐릿한 색갈의 분류를 이루어 흘러갔다. 문희는 높은 산을 치달아오르다가 중턱에서 산불을 만나 아래로 급급히 내려닿은것 같은 허탈감을 느꼈다. 한번 딩굴면 밑바닥까지 미끄러져 떨어지기가 일쑤인 치렬한 생존경쟁의 싸움터, 자본의 날카로운 이발이 번쩍이는, 관료제도의 무자비한 계단으로 쌓아진 산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깊이를 알수 없는 심연속으로 한정없이 굴러내려가는것만 같은 착각에 괴로운 문희였다.

(이렇게 나는 절망해야 하는가?)

문희는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참,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이 이 랑패를 기뻐할수 있었으면! 스스로도 알길없는 추상화를 내여걸고 헛된 명예심에 시달리지 않고 대지처럼, 아기의 미소처럼 풍부하고 선명한 언어로 자기를 주장할수있는 로동이 있어 거기에 마음껏 투신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문희의 뒤끓는 심정속에 문득 떠오른 이 생각은 고귀한것이였건만 받은 교육과 환경의 독소에 너무도 중독된 그는 다시금 상처받은 자존심이 분해서 속으로 조용히 오열하는것이였다.

얼마후 차에서 내린 문희가 크지도 않은 가벼운 그림들을 힘겹게 끌고 자기 집 쪽문안에 들어섰을 때 문앞에는 기다린듯이 진수가 서있었다.

어두운 시선들이 부딪쳤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림을 서재에 들여다가 보자기로 가리워놓은 진수는 문희가 들어선 아래방으로 건너갔다. 망연자실하여 손가방을 든채 멍하니 서있는 문희를 본 진수는 안해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용감할줄은 몰랐소!》

눈벌판에 뛰여든것처럼 문희는 온몸을 떨며 남편의 가슴에 안겨들어 오래도록 흐느껴울었다.

얼마후 마음을 진정한 문희는 경대앞으로 가서 수건으로 얼굴을 꼼꼼히 닦았다.

《실망할것 없어. 교훈을 찾는거지.》

진수가 방바닥에 앉아 부드럽게 말했다.

《난 워낙 추상화를 싫어하지만 예술의 본도야 아무래도 력사가 가장 오랜 사실주의가 아니겠어? 그 면에서 당신은 누구하고 경쟁을 해도 지지 않을거야.

이따금 그리는 련습화들만 봐도 훌륭한것이 많다고 보는데 생활의 이야기가 있고 부드러운 사색도 있고 얼마나 좋아! 그 그림들을 볼 때면 당신의 재능이 활짝 피여나도록 도와주지 못하는 내가 죄스러운 생각이 들어.》

상처입은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남편의 말에서 문희는 울어서 불긋한 눈에 칭찬에 수집어진 아이와 같은 순진한 미소를 담고 그를 돌아보았다.

진수는 미소로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남들이야 어떤 풍으로 그리든 제가 정당하다고 생각되면 자기를 지키고 커다란 개성으로 확립해야지. 창작이란 그런거 아니겠어?…》

진수의 이야기는 문희에게 납득이 되였으나 자기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 알길없는 그는 애잡짤한 설음에 잠긴채 언제까지나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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