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2 장


9


첫눈이 내리려는지 날씨가 제법 쌀쌀한 어느날 저녁 진수는 박명찬교수로부터 저녁이나 한끼 같이 나누면서 이야기나 하자는 전화기별을 받고 술 한병을 사들고 교수의 집을 방문하였다.

박명찬은 그가 지닌 《사색하는 호랑이》라는 별명처럼 박식과 제자들에 대한 엄격한 요구로 두드러지는 사학계의 로교수였다. 력사를 왕조들의 정책을 중심에 놓고 서술하는 많은 학자들과는 달리 광범한 민중의 처지와 면모의 변화속에서 당대 시대의 생태와 운명을 꿰뚫어볼줄 아는 그는 많은 제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은 반면에 학계에서는 비타협적으로 대립된 많은 적수들을 가지고있었다.

교수네 집뜰에 들어서서 학창시절부터 사랑해온 ㄱ자형의 낡은 기와집을 둘러본 진수는 우선 서재에서 노기를 띤 론쟁을 하는 소리를 듣고 약간 실망하였다. 바라고 왔던 사제간의 조용한 분위기를 가질수 없게 된것이다.

먼저 교수 부인의 방으로 들어간 진수는 서재에 술안주를 나르고 나오는 부인을 만났다. 그는 가지고 온 술을 전하며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요? 손님들도 온걸 보니 혹시 선생님의 생신날이 아닌가요?》

부인은 뒤손으로 서재로 통하는 문을 꼭 닫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차리지도 않았는데 령감이 미워하는 구일동이라는분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벅걸인지 버클인지 하는 미국사람까지 데리고 와서 저렇게 떠들지 않아요.》

속삭이던 부인은 서재로 들어가려는 진수를 멈춰세우며 다시 말했다.

《잠간 의논할게 있군요. 좀 뭣한 얘기지만요, 윁남에 갔다는 정선생님 동생이 우리 영옥일 그냥 괴롭히는가본데 어떨가요? 짝은커녕 무슨 일을 저지를것만 같군요.》

진수는 서울을 떠나던 날 인수가 룡산역에서 박교수의 딸에게 무례한짓을 하다가 무안을 당하던 광경을 회상하며 말했다.

《글쎄요. 내가 보건대도 짝이 되긴 어려울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또 있었는가요?》

《또 편지가 왔군요. 하두 미심쩍어서 영옥이한텐 보이지 않고 뜯어봤더니 그저 무턱대고 협박이니 글쎄.》

부인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가득 얹어진 선반에서 편지를 찾아내여 진수에게 주었다. 사이공에서 띄운것이였다. 속지를 빼여보니 란필로 휘갈겨쓴 짤막한 편지였다.

《박영옥에게.

비참한 하급장교는 사이공까지 왔다. 그러나 내 마음은 숱한 사람들앞에서 너에게 멸시를 당하던 룡산역에 못박혀 피흘리고있다. 남양으로 달린 수만리 끝없는 해로에서는 너를 생각하며 눈물 아닌 피를 흘렸다.

너는 어떤 녀자냐? 네가 모욕한 사나이는 너를 여러해나 홀로 사랑한 정인수냐? 아니면 공산주의와 싸우려고 전쟁판에 뛰여든 군인 정인수냐? 내가 하늘끝으로 떠나왔으니 너는 나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천만에!

나는 돌아갈테다. 지옥에 떨어져도 네게로 돌아갈테다. 네가 다른 사람을 향해 웃는것을 용서할수 없다. 너를 죽이든지 나의 안해로 삼든지, 둘중의 하나다!

며칠간의 훈련이 끝나면 싸움터다. 망할것, 내가 죽기를 빌려무나. 무섭게 쏟아지는 남양의 소낙비속에서 네 얼굴을 본다.

정인수》

읽은 편지를 돌려주는 진수는 어두운 얼굴이였다. 미욱하면서도 불쌍한 동생이였다. 결말이 아무래도 비극으로 예상되는, 독특한 별난 사랑이였다.

《그래서 부탁인데 말이지요.》

교수의 부인이 용서를 비는듯 한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이 형님으로서 잘 타일러서 그만두도록 편지를 쓰는것이 어떨가요?…》

진수는 미타했으나 동의하고는 서재로 향했다. 이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뜻밖에도 키가 후리후리한 강동혁이 아이들의 인사에 습관된 교사처럼 거의나 표정없이 검실검실한 얼굴을 두어번 끄덕끄덕하며 활기있게 방안에 들어섰다.

《이게 누구냐, 동혁이! 어데서 떨어졌나?…》

너무도 반가와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은 진수는 마구 포옹하고싶었으나 자기를 억제하고 다만 그의 손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동혁은 특별히 반가와하는 기색도 없이 빛나는 눈으로 진수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만났군. 반갑네.》

동혁은 칭찬하듯 한마디 건네고는 선선하게 웃으며 교수의 부인과 인사말을 나누었다. 그리고나서야 진수에게 다시 관심했다.

둘은 말없이 긴장한 눈초리로 서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도 첫눈에 반한 두 남녀가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긴장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생김새라든가 표정에서 리상적인 면모를 찾아 날카롭게 샅샅이 살펴보는 눈초리와도 같았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동혁은 진수보다 한해 선배인 대학동창생이였다. 그렇지만 기민하고도 날카로운 두뇌와 뛰여난 행동력으로 하여 진수에게는 친구이면서도 높이 보이는 존재였다.

대학생시절의 강동혁은 대학내에 조직된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의 중추적인물의 한사람이였으며 5.16군사쿠테타에 의하여 감옥의 철창속에 쓰러질 때까지 학생대군을 이끌고 온 서울이 들썩하게 만들며 독재자와 외세를 반대하여 영용하게 싸운 투사였다.

그 나날 정진수는 자신을 강동혁의 기수로 자처하고 자랑했다. 그를 만나기만 하여도 랑만적인 기분이였고 더불어 모험적인 일에 뛰여들고싶었다.

그들은 며칠씩 밤을 새우며 자기 세대의 사명과 운명에 대하여 혹은 사회적사건들과 세계에 대하여 끝없는 론쟁을 벌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서로 모욕적인 말을 뿌리며 원쑤처럼 노려보다가는 간신히 접근점을 찾아 웃음을 회복하고는 마지막 담배꽁초를 나누어 피우기도 했다. 혹은 투쟁의 거리에서 흉탄에 희생된 벗의 시체앞에서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으며 초만원을 이룬 경찰서 류치장안에서 서로 잔등을 기대고 앉아 괴로운 악몽속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은 그들자신으로서도 개탄할만 한 대립으로 바뀌고말았다. 그 대립의 시초는 4.19투쟁에서 승리한 직후에 벌린 자유에 대한 격렬한 론쟁에서 시작되였었다. 그것은 자유의 개념이며 개인적 및 사회적자유를 위한 동서고금의 각종 투쟁사며 《한국》의 현실까지를 끌어내면서 벌린 하나의 사상투쟁이였는데 여기에는 적지않은 동료들까지 참가하여 학생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다수파의 사상적선도자인 정인수는 4.19와 그에 뒤따른 장면 《정권》시기를 압제를 타승한 대중의 승리로 마련된 자유의 개화기로 확신했으며 이것을 부정하는 온갖 공격을 전사한 영웅들의 령혼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수파의 강력한 《두목》인 강동혁은 그러한 주장에 대하여 건축의 명수가 서투른 도끼목수를 대하듯 했다. 그는 4.19를 진정한 자유를 위한 출발진지의 영예로운 점령으로 평가했으며 지성인들의 사명은 이제부터야말로 민중이 준마처럼 타고 달릴수 있는 참다운 자유의 영상을 탐색해내는것이며 대중과 함께 그 자유를 위한 고난많은 투쟁의 길을 헤쳐나가는것이라고 력설했다. 따라서 그는 진수를 용납할수 없었다. 어느날 진수가 《너의 출발진지론은 우리가 눈물과 피와 죽음으로 쟁취한 자유를 허무로 돌리는 리론적인 만행이다!》 하고 또다시 도전했을 때 동혁은 분노하여 규탄했다.

《너절한 소리 작작해라. 기막힌 일이다. 나는 네가 장면〈정권〉의 품속에 뛰여들어 출세하려고 싸워온 속물인줄은 몰랐다. 4.19렬사들은 거들지 말라! 부르죠아지들을, 새로운 압제를 편들면서 감히 렬사들을 옹호하는체 하는것보다 더 더러운 위선이 어데 있냐 말이다!》

이것으로써 그들이 함께 마시며 힘을 얻던 우정의 그릇은 돌우에 떨어져 박산이 나고말았다.

지금 동혁을 만난 진수는 무엇이라 설명할수 없는 아픔과 기쁨을 체험했다. 둘은 한순간 바라본 뒤에 특별한 사랑으로 그들을 배워준 대학시절의 스승의 서재로 향했다.

이때 그들이 온 기미를 알고있던 박명찬교수가 술기운에 환한 얼굴로 마주 나오더니 두손을 각각 제자들의 어깨에 얹고 웃으며 말했다.

《맹장들이 왔구만. 실은 오늘이 나의 생일이여서 한잔 나누면서 자네들과 조용히 얘기나 하자고 했는데…》

교수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불청객들의 불의습격을 받아 땀을 빼는중이야.》

《전 모르고 빈손으로 왔습니다.》

강동혁이 미안해하자 교수가 나무람했다.

《호랑이가 뭘 들고다니겠나. 과공이 비례라고 빈손이 도리여 깨끗하지.》

《들어오면서 듣자니 론쟁이 벌어진것 같은데 무슨 문젭니까?》

진수가 허옇게 내돋은 동혁의 흰머리를 보며 교수에게 물었다.

《구일동박사가 버클교수까지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근대사에 대한 나의 신간물을 비난하는거야. 조선봉건왕조말기 문호개방을 앞둔 시기의 외국렬강과 조선정부의 관계를 다룬 이번 단행본에서는 유미렬강, 그중에서도 미국의 이양선들의 출몰과 그 결과로 일어난 양요들을 조선내정에 대한 간섭과 침략이라고 단죄했지. 헌데 저 사람들은 반대야.

가만, 여기서 이럴것 없지. 저 사람들이 기다리겠는데…》

교수는 어서 서재로 들어가자고 끌었으나 두 제자는 거기서 만날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싫은것을 마지못해 응하는 눈치였다.

박교수의 서재는 창문이 난 곳을 내놓고는 벽들이 온통 서가로 꽉 차있는데다가 낮은 책상과 책무지우에까지 원고들과 각종 자료묶음들이 무질서하게 얹어있어서 안식처로서의 방이라기보다는 첫눈에 벌써 긴장감을 주는 탐구의 전투장이였다. 지어는 낡은 책상우에 쌓인 고서들 짬에 번들거리는 김홍도의 《우경도》를 새긴 청화백자항아리와 천정밑에 걸린 초정 박제가의 육필인 《금수강산》을 넣은 족자까지도 전호턱에 놓인 악기처럼 투쟁의 랑만을 일러주는듯싶었다.

세사람이 이 방에 들어섰을 때 구일동과 버클은 별로 잘 차린것이라고는 볼수 없는 술상머리에 앉아 이마를 맞대고 무엇인가 수군거리다가 똑같이 놀란 표정을 위엄있는 미소로 바꾸며 진수와 동혁을 가늠하듯 살펴보았다. 박교수가 두 제자를 소개하자 버클이 먼저 동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동혁은 린색한 목례로 반응하고는 마주 내미는체 하던 손을 거두어 자기 머리를 쓸어올리며 박교수에게 말을 거는 바람에 버클은 무안을 당하고말았다. 그는 약간의 수치나마 이내 만회하려고 진수에게 조선어로 말을 걸었다.

《우리넌 벌써 친교한 일 있느거 같은데요. 반갑스미다.》

《글쎄올시다. 난 싸운 기억밖에 없어서 두려워했더니, 다행입니다.》

진수 역시 이렇게 반롱조로 버클을 제껴붙이고 구일동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박교수의 옆에 앉았다.

이렇게 되여 어색해진 방안의 분위기는 한동안 풀릴줄 몰랐다. 그런대로 박교수는 안해를 불러들여 술잔과 새 안주를 더 청하기도 하고 제자들과 술잔을 건네기도 하였다. 마침내 구박사는 동혁과 진수에게 지어먹은 친절을 표시하였다.

《우린 지금 한두가지 문제로 론쟁중이였는데 거기서도 견해가 서거든 끼워보세요.》

이렇게 말한 구박사는 위엄을 차리며 박교수에게 다시금 도전하였다.

《아까의 계속입니다만, 박선생이 다룬 〈셔먼〉호사건만 보더라도 력사적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 말씀이예요.

나의 견해로는 그 배의 출현은 통상과 신교의 자유를 트려는 미국의 적극적인 노력의 표현이고 대동강에서 겪은 그 배의 비극은 본능적으로 과학문명을 두려워하며 증오하는 조선봉건사회가 저지른 우행의 결과지요. 그러니까 독립후 국력이 크게 일어나 넓은 세계에서 시장을 구하던 미국으로서는 조선이라는 규방처녀에게 사랑의 선물을 안고 찾아왔다가 그만 불행히도 첫사랑에 할퀸셈이 아니겠어요?》

박교수는 코허리에 건 안경너머로 그를 넘겨보며 껄껄 웃더니 부드럽게 조롱하였다.

《지난 세기의 세계사를 로맨스로 채색하는 구선생의 순진성에 대해서는 참 존경하지 않을수 없군요.》

박명찬은 어조를 바꾸어 공세에로 나왔다.

《〈셔먼〉호에 대해서 말한다면 미국에서 건조된이래 다년간 중국, 윁남, 타이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곳을 무대로 유감스럽게도 해적행위를 하던 배라는것을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배가 1866년에 왜 조선에 들이닥쳤는가 하는것을 당시 미국의 아시아정책과의 련관속에서 보는것이 필요하겠지요.》

침울한 버클에게 통역을 하던 구일동은 심중히 듣고있는 진수와 동혁을 돌아보더니 박교수에게 말하였다.

《어서 말씀하시오. 흥미있습니다.》

《내가 연구한바에 의하면…》 하고 박교수는 말했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야망은 지난 세기 40년대에 조성됐지만 특히는 국내전쟁후에 얼마동안 국내시장의 불안정과 유럽으로부터 자금대부를 받을수 없는 형편에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제국을 갉아먹지 않고서는 공업화를 해낼수 없는 여건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러면 왜 특히 〈한국〉을 필요로 했는가? 우선 국내전쟁을 하는 사이에 남부중국에서 우세했던 자리를 잃게 된 미국이 부득불 영국세력이 미치지 못한 북부중국에 진출하려고 노력했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무렵 조선의 서해안은 북부중국과 일본, 류꾸사이를 왕래한 미국배들의 기본통로에 놓이게 됐는데 여기서 미국은 조선을 우선 기항지로 갈망했거든요.

다른 한편 조선은 미국의 극동전략에서 특히 조선이 북부중국과 짜리로씨야와 접경하고있는 점때문에 미국의 군사전략상의 기지로 요망된 사실을 들수 있겠지요. 〈루즈벨트와 로일전쟁〉에서 턴넷트는 미국이 1865년부터 70년대에 동방아시아에서 해군기지쟁취문제를 심의했을 때 조선을 점찍었다는것을 솔직히 고백했거든요. 그런가 하면 그때 로씨야에 주재했던 미국공사 클레이는 본국정부에 보낸 건의서에서 조선에 미국의 군사기지를 창설할것을 로골적으로 력설하면서 지브롤터와 같은 의의를 가지는 거문도부터 먼저 점령해야 한다고 떠들었단 말입니다. 이런 점들만 미루어보아도 명백한것이지만…》

여기서 박교수는 자기의 주장을 좀더 깊이있게 펴기에 앞서 구일동과 버클의 잔에 술을 부었는데 그사이 머리를 수굿하고 담배만 피우던 강동혁이 불쑥 끼여들었다.

《선생님, 그 점을 론증하는데는 역시 당시의 미국정부가 조선을 식민지시장으로 만들데 대한 공개적인 목표를 가지고있었다는 점을 떼놓을수 없지 않겠습니까?》

구일동의 통역을 들은 버클은 염소들의 엄숙한 회의에 함부로 끼여드는 강아지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제때에 눌러놔야겠다는듯 동혁에게 영어로 빈정거렸다.

《당신은 그 중대한 발견을 자료로 론증할 자신이 있습니까?》

동혁은 즉시에 류창한 영어로 당당하게 말했다.

《하바드대학의 저명한 교수인 당신에게 문외한인 내가 〈미합중국정부의 대외관계문헌집〉에 있는 내용을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그 문헌집 1870년판인가 69년판에는 〈미일통상조약〉형의 극히 불평등한 굴욕적인 조약을 조선에 강요할데 대한 야망이 명백히 서술돼있단 말입니다.》

대답에 궁한 버클교수는 구일동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박교수와 동혁의 론거 같은것은 문제거리도 안된다는듯 화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그의 재빛눈은 이때껏 《한국》의 지성계에 대하여 약간의 호기심을 총족시킨듯 한 느낌과 함께 이국적인 동식물이 서식하는 자그마한 호수정도로 알고 탐색선을 타고 유람하다가 뜻밖에도 암초와 큰 파도를 만나 물속에 빠진듯 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박교수는 눈으로 동혁을 찬양하고나서 버클에게 말했다.

《보다싶이 〈셔먼〉호가 미국의 이러한 욕망을 사회적배경으로 하고 특수적으로는 평양부근에 널린 왕릉들에 묻힌 보물을 훔치려고 조선에 들이닥친것이 확실하다면 이 배가 싣고 온것은 유감스럽게도 구선생이 주장하는 달콤한 로맨스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되는 끔찍스런 그 무엇이라는데 대해서 당신은 동의하겠지요?》

그러나 진실이나 정의보다는 다만 자기의 목적을 중시하는 버클은 미국의 신사답게 술잔을 들어 건배를 청하고 쭉 들이키고나더니 문어회에 손을 댔다. 그러나 저가락질이 서툴어서 그 맛스러운 회를 입으로 나르지 못한채 눈을 들었다.

《그 점은 나도 연구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처녀는 사나이에 의해 비처녀로 돼야 아이를 낳을수 있듯이 력사상의 모든 후진국들은 선진국의 침투에 의해서만 문명과 진보에로 진전해왔다는 명백한 사실에 류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 강동혁은 렬강의 침략은 언제나 세계와 문명에 대한 만행이였다고 반격해나섰고, 여기에 구일동이 반론을 펴면서 론쟁은 순식간에 불이 일듯 격렬해졌다. 구박사와 박교수는 서가에서 고문서를 뒤져 자료를 내대면서 싱갱이를 벌렸다.

정진수는 국외자처럼 벽에 기대여앉아 담배만 피우고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가장 심각한 사색으로 흥분해있는것은 진수였다.

론쟁은 그에게 현실에서 미국인들이 저지르고있는 모든 행위와 그의 력사적인 연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기회를 준것이다.

오늘의 미국정치체계와 외부세계에 대한 그의 맹렬한 활동 특히는 남조선에서의 미국인들의 행위에 대한 진수의 견해는 뒤죽박죽으로 돼있어서 명백한 판단이 서있지 않았다.

이 땅에 장기주둔해있는 미군을 《공산침략》에 대비한 평화의 성새로 봐야 할것인가, 아니면 법도와 민족을 유린하는 침략자로 봐야 할것인가. 미국의 《원조》를 후진국에 대한 지원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저들에게 충직한 군대와 매판과 위정자들을 키우는 등이 땅에서 자기의 동맹군을 생산하여 틀어쥐는 수단으로, 예속화의 수단으로 봐야 하는가.

재생한 일본의 검은 세력을 이 땅에 끌어들이는 미국을 어떻게 평가해야 옳으며 혹은 미국인들이 끝없이 감행하는 각종 비행과 만행을 미국정책의 본질적표현으로 봐야 옳은가, 아니면 시행착오로 봐야 하는가.

의문에 괴롭고 판단에 지친 진수였다. 기자로서 언제나 사회의 깊은 곳에 자맥질해 들어가서 어지러운 사건들을 수없이 들추어내는 그는 그 모든 추태와 악의 근원이 다름아닌 미국이며 그들이 키워낸 세력에 있다는것을 피부로 느끼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 있는 미국인들의 수뇌와 백악관이 구름처럼 뿌리는 화려한 선전광고의 회오리바람속에 휘말려 판단이 흔들리고 무력해지군 하였다.

(만약에 우리 나라에 대한 미국의 력사적인 행동이 명백히 침략적인것이라면…)

진수는 버클의 말을 열심히 통변하는 구일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의 미국은 그 침략의 야망을 이남땅에서 완성한것이 아닐가? 백여년전에 대동강을 거슬러올라왔던 《셔먼》호가 오늘의 미8군으로 변하고, 그우에 실렸던 악마적인 야망이 오늘의 미대사관과 무수한 암근과 발톱으로 이 땅을 거머쥐고있는 미국의 모든 현지기관으로 변한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 생각은 그의 가슴을 너무도 아프게 찔러서 버클과 구일동을 보는 그의 눈은 무섭게 번들거렸다.

버클교수는 자신만만하게 박명찬교수에게 말했다.

《당신은 그 시기의 쇄국정책을 변호하고있는데 그것은 조선사회가 개명할 절호의 기회를 박차버린 우매한 봉건세력에 대한 옹호란 말입니다. 내가 연구한바에 의하면 조선통치자들의 서양배척정책은 애국에 있는것이 아니라 봉건통치질서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유교리념을 고수하려는 개탄할만 한 고집에 있었다는것이 명백하단 말입니다.》

구박사는 결정적인 타격에 쓰러진 적수에게 다시 일어날수 없게 일격을 가한다는듯 한 쾌감을 느끼며 미국류학시절부터 받들어오는 버클의 주장을 고문서의 자료로 《확인》했다.

《보시오, 고종은 뭐라고 했는가? -구씨는 박교수에게 고사자료의 한문을 번역하며 열을 올렸다.- 〈洋船之來泊父有我國人之內應이라, 서양배가 와서 머무는것은 우리 나라에 내응하는자가 있기때문이니, 그들의 요구는 비록 강화에 있다고 하나 만약에 강화를 한다고 하면 륜리와 기강이 다 무너질것이니 우리 공자의 도는 장차 실행될수 없을것이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본질이란 말입니다.》

구박사는 고서를 딱 소리나게 접어놓으며 승리자연한 미소를 짓고 부언했다.

《다른 실례로 평안감사 박규수의 권고를 받고 대원군은 기술에 능한 사람을 시켜 그 배를 모방하여 목탄을 피워 증기로 기륜이 돌게 된 철갑선을 하나 만든 일이 있었지요. 비록 서툴게 만들어서 한시간에 열발자국을 겨우 나가는 배였지만 그러나 어쨌든 이 철갑선이 미국배의 모방이라면 그자체만으로도 미국기술의 거대한 기여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리고 이 사실이 대원군의 척화비가 자신과 조선사회에 대한 조롱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때까지 침묵을 즐기던 진수가 끼여들었다.

《참, 놀라운 사고방식입니다!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격파한 침략선에서 그 배건조기술을 빼낸 대원군이라고 보면 이 점에서도 척화비는 그에 대한 조롱인것이 아니라 척화비를 모독하는자들에 대한 영원한 고발장이 아닐가요?…》

날카로운 진수의 말에 만족한 박교수는 구씨와 버클에게 폭소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게다가 강동혁은 버클에게 훈계하는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마디 보충할가요? 나는 워낙 모든 교를 구속적인 기만으로 압니다만 유교보다 카톨릭교가 우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모기보다 빈대가 낫다는 고집 같은것으로 보거든요. 게다가 해외에서 들이닥친 카톨릭교도들과 그 선도자들의 행위는 할머니들이 손자들에게 들려준 무서운 옛말보다 더 무서운것이였단 말입니다. 이 모든것이 선진문명의 지원이라면, 그리고 구선생이 주장하시는것처럼 이것이 사랑이라면 이 세상에는 선진문명의 지원이나 사랑보다 더 무서운 악덕은 없을겁니다.》

동혁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론쟁은 끝난것이다. 물론 쌍방은 아직 할 말이 많았다. 특히 박명찬교수는 자기 지론을 증명할 방대한 사료를 가지고있었으나 이 학구적인 론쟁이 더 깊어져 오늘의 미국정책과 직결됨으로써 버클의 분노를 일으킬수 있는 위험을 두려워했다. 참으로 이 점만은 삼가해야 할것이라고 박교수는 거듭 생각했다.

한편 버클과 구일동은 학계와 제자들속에서 허물수 없는 권위를 갖고있는 박명찬을 어떻게 하든지 거머쥘 야심때문에 비록 노엽고 난처하긴 했으나 몇마디 기지있는 변명으로 명백한 패배를 웃음으로 돌리는데 그치고말았다.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롱담을 하던 끝에 버클은 박교수에게 미국의 《아시아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도록 주선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박교수는 자기마저 미국의 주머니에서 딸라를 끄집어낸다면 미국은 그만큼 약해져서 덜 《위대》해질가봐 걱정이라고 롱으로 부드럽게 물리쳤다. 그 돈을 받는다면 자기의 지식을 권력에 아부하는데로 돌리지 않을수 없게 될가봐 우려해서였다.

통금고동소리가 길게 울렸을 때 버클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자기의 본심과는 정반대로 말했다.

《아주 유쾌한 밤이였습니다. 당신들의 애국적인 지식과 견해는 〈한국〉이 가지고있는 가장 훌륭한 재부입니다. 감사합니다.》

버클과 구일동이 먼저 사라진 뒤에 진수와 동혁이도 교수의 집을 나왔다. 그사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있던 영옥은 아버지와 함께 그들을 큰길어구까지 따라나와 바래워주었다. 영옥을 보자 진수는 동생과 그 처녀와의 불행한 관계를 생각하고는 무엇인가 교훈적인 말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아무 말도 못한채 헤여지고말았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mypeople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이전페지   다음페지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