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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6일

평양시간


제 12 회


제 3 장


12


고등교육을 받은 부자집 딸들이나 졸업후에 유족한 가문에 출가한 녀자들은 거의가 직업이라는것이 없었다. 일하지 않고 사는것이 자랑이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동창생녀자들이 오래간만에 만나면 흔히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넌 요새 뭘 하니?》

《뭘 하긴? 놀지.》

《너의 랑군은 돈벌이가 좋은가보구나. 나도 이제껏은 돈걱정 모르고 흔전만전 놀았는데 요즘은 틀렸어. 야단이야, 어떻게 된것인지 살림살이에 마이나스가 생겼지 뭐냐. 그러니 어떻게 하니. ×회사에 취직을 했단다. 아유, 창피하고 피곤해서…》

《그럼 너까지도 출근한다는거냐? 정말 불쌍하구나. 난 말이야,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소일거리로 디자인기술이라도 익혀볼가 해서 며칠양장점에 다녔더니 우리 랑군이 질색하지 뭐야. 그까짓 기술이야… 돈이면 단데 뭘 피곤하게 그러느냐고 하면서…》

그 녀자들에게는 돈쓰고 노는것이 자랑이고 직업을 가지고 일한다는것은 불행이고 부끄러움인것이다.

부자집 딸들의 꿈은 권세있는 집안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보장된 생활을 향락하는것이였다. 그 타락과 기생충생활이 그 녀자들의 희망이고 행복이였다. 녀자로서 학교교육을 받는것은 사회봉사니 뭐니 하고 떠드는것과는 반대로 속심으로는 활동력있고 돈많은 남자를 유혹하며 《교양》있는 사치한 안해로 되여 깨끗한 부리로 알룩알룩 빛갈고운 죽지나 한가스레 다듬는 비둘기처럼 살아보려는것이다. 그러면서 남편의 출세나 뒤받침해주고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류행이나 쫓아다니면 되는것이다. 직업을 갖는 경우에도 대개는 그 분야에서의 어떤 사명감때문이 아니라 남편앞에서 자기의 독자성을 누리려고 하거나 남들앞에서 자기에게는 돈뿐만아니라 재능과 인기라는 보물이 있다는것을 보여주려는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무엇인가 보탬을 주려고 활동하는 슬기로운 녀자들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였다.

요컨대 이러한 페단은 어지러운 사회환경과 교육의 근본적인 병집에서 출발한것이다. 교육은 응당 참다운 인생관을 확립시키는데 복무해야 할것인데 반대로 리기적인 안락과 사치생활의 수단으로 되고있는것이다.

문희도 역시 교육과 환경에서 영향을 받은만큼 뚜렷한 직업이 없이 지내는것을 부끄럽게 여길줄 몰랐다. 그러나 유족하지 못하고 빠듯하게 생계를 꾸려나가고있는데다가 남편으로부터 이러저러하게 자극을 받은 그 녀자에게는 날이 갈수록 무직업생활이 답답해났고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서도 사회를 호흡하고싶었다.

그런데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을 제손으로 떼여가지고 와놓고보니 사회에 놓았던 가냘픈 한가닥의 줄마저 끊어져버렸다. 창작으로 어느 정도의 체면이나마 세워보려고 했으나 벌어들인것은 수치뿐이였다. 그 슬픈 사건은 날이 갈수록 그 녀자에게 심한 소외감을 일으켰다. 자기의 재능이 한번도 사회의 공감을 받아온 일이 없는 울적한 예술가들에게는 흔히 치명적인 허탈상태를 빚어내는 그러한 소외감이였다. 그런데다가 남편은 이 실패와 수치를 응당한것처럼 보면서 동정이나 뿌리는것만 같았다.

(말이 남편이지 그저 남남이라니까.)

책상앞에 앉아 소설책을 뒤적거리고있던 문희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깊은 한숨을 쉬였다.

(그뿐인가. 제 기사때문에 아버지가 그렇게도 속이 까매져서 분해하는걸 보고서도 후퇴는커녕 자중하는 눈치도 보이지 않으니 무슨 사람이 그럴가?… 거기다가 쩍하면 세상바람에 휘둘리운다느니, 사고방식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모욕은 또 얼마나 하고…)

생각할수록 분하기만 했다. 너무 고분고분하게만 지내온것이 바보짓처럼 생각됐다.

재주껏 막아서고 멈춰세워야 한다. 어떻게 하나 안해된 권리로 그의 마음을 돌려세워야 한다.

어떤 그럴듯한 생각이 펀뜻 든 그는 급히 경대앞으로 가서 눈을 빛내며 머리꾸림새를 손질하였다.

대문밖에서 짜랑짜랑 자전거의 종소리가 울리는가싶더니 뜨락으로 아들애가 달려들어오는 소리가 난다. 재일은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바쁘게 편지를 내밀며 소리친다.

《이거 편지. 엄마, 어데 가? 나두!》

문희는 얼른 편지를 받아보았다. 숱한 고무도장이 찍힌, 모서리가 닳아진 국제우편, 남부윁남에서 시동생 정인수가 남편에게 보내온 편지였다.

편지를 방구석에 던진 그는 저녁상을 푸짐하게 차리고 아버지와 설희까지 불러다가 셋이서 남편에게 《공동작전》을 펴는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별식을 주문하려고 재일이와 함께 집을 나서다가 때마침 찾아온 설희를 만났다.

《그러지 않아도 아버지랑 너랑 부르려던 참인데 참 잘 왔구나. 내 얼른 음식을 좀 주문하고 올테니…》

문희가 반가와하자 하늘빛코트에 흰 구두를 신고 악어가죽가방을 든 설희는 재일을 덥석 안아들고 웃으며 한손으로 문희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이끌었다.

《어서 들어가기나 해요. 내 벌써 석류관에 음식과 술을 여기로 가져오라고 주문했지 뭐. 둘이서 고집쟁이아저씨를 돌려세우자는거야. 안될가?》

《아니, 어쩌면! 네가 오히려 내 생각을 앞질렀구나!》

모든 일이 잘 펴일것만 같은 문희는 가슴까지 드리운 이복동생의 긴 흑발을 어깨너머로 넘겨주며 집안으로 이끌었다.

설희에게서 풀려난 재일은 손뒤짐을 지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녀인들을 쏘아보더니 흥미를 잃은듯 홱 돌아서서 꼬맹이들을 찾아 쪽문밖으로 달려나갔다.

방안에 들어가서 문희와 나란히 앉은 설희는 가방에서 값진 수입제고급포도주 두병과 통졸임을 꺼내놓으며 누가 엿듣기나 하는듯 쏘알거렸다.

《아버지 선물이야. 민규석은 시청을 내세워가지고 창덕사부지에 당장 돌격이래. 그러니까 아버진 아저씨때문에 속이 까맣지 뭐. 우린 어떻게 하든지 아저씨를 주저앉혀야 해.》

고급포도주와 설희의 재미스러운 얼굴을 번갈아 황홀히 여겨보는 문희는 벌써 남편에 대한 승리를 예감하며 가슴이 짜릿해오는것을 느꼈다. 그런데다가 장난꾸러기 미동같은 설희는 가방속에서 또 신형라이카사진기를 꺼내주며 역시 아버지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들자매가 한동안 히히닥거리고났을 때 설희가 료정에 주문한것이 도착했다. 문희는 얼른 나가서 늙수그레한 뚱뚱한 사나이가 목통속에서 내여주는 음식을 받아 부엌으로 날랐다.

로인이 빈 퇴마루에 습관적으로 껍석 인사를 한 후 목통을 들고 뒤뚱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쪽문을 빠져나가자 빠끔히 연 문짬으로 그 뒤모습을 바라보던 설희도 부엌으로 나갔다. 둘은 상을 차릴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진수는 해가 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어스름과 함께 밖에서 들어온 재일이녀석은 몇숟가락 먹다말고 거불거리며 졸더니 쓰러져 잠들고말았다.

설희가 기다리기에 지쳐서 그만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때에야 진수가 뜻밖에도 무릎이며 팔소매가 먼지투성이인데다가 관자노리와 한손에 상처까지 입은 비참한 몰골로 한수에게 부축을 받아 들어왔다.

문희는 서재로 들어서는 남편을 얼른 함께 부축하였다. 그러면서 혹시 남편이 술을 마신것이나 아닌가 하여 코를 그의 찌프린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며 안한수에게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술을 마신것 같지도 않은데…》

한수는 쌀쌀히 웃을뿐 대답이 없고 남편은 오히려 안해를 물리치며 짜증이다.

《아무것도 아냐. 제발 수선 떨지 말고 나가라니까.》

그러면서도 설희를 보고서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입원해야잖아요?》 하고 설희가 물었다.

진수는 침대에 누우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는 돌아가면서 래일 출근하겠는가고 묻는 한수에게 대답했다.

《출근해야지. 고맙네. 잘 가게.》

한수는 밖으로 따라나온 문희에게 진수가 당한 일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일인즉 맹랑하게 벌어졌다. 이날따라 복잡한 두건의 사건을 취재하고 지친 몸으로 신문사에 들렸다가 나온 진수는 어느 한 불행한 친구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갔었다. 그는 거기서 돌아오다가 왕래가 드문 북악산기슭에서 변장한 괴한들의 불의습격을 받았던것이다. 놈들은 무자비하였다.

맞받아치다가 관자노리에 강한 타격을 받고 쓰러진 진수는 놈들이 구두발로 사정없이 짓밟으며 내뱉는 소리를 들었다.

《멀끔하게 빠진 자식, 골통은 왜 그 모양이야?》

《너따위 기자는 없는것이 좋다!》

《짜석, 빨갱이는 고만 직여뿌린다!》

깡패들이 도망친 후 진수는 한동안 누워 신음하면서 생각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느 놈이 이 깡패들을 파견한것인가? 창덕사부지문제로 대립된 민 무엇이라는 사장놈인가, 아니면 여러 기사들에서 고발당한 다른 작자인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단 하나 명백한것은 그의 모든 행동이 감시를 받고있다는 사실이였다. 그는 썩 후날에 가서야 이 자그마한 돌발사건은 바로 그에게 온갖 찬사를 보내며 보호자연하던 론설위원 량성도가 다름아닌 죤 버클의 지시로 일으킨짓임을 알았다. 이를테면 그들은 흥분상태에 있어보이는 진수에게 진정제를 쓴셈이다.

한동안 로송나무아래에 누워있던 진수는 겨우 일어나 걸음을 떼였다. 이렇게 절름발이걸음으로 정류소까지 어기적거리며 걸어오다가 취재에서 돌아온다는 안한수를 만났던것이다.

한수에게서 간단히 얻어들은 문희는 자기의 중대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기분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어야 할 남편에게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난것을 크게 걱정했다. 그러나 방안에 들어선 문희는 뜻밖에도 남편이 설희의 청을 들어 상보를 씌워놓은 밥상머리에 나와 앉는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였다. 문희는 얼른 물약을 가져와서는 화가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세부에 색을 입히듯 정성껏 남편의 상처에 발라주며 말했다.

《이만한것도 천만다행이예요.》

그리고는 자랑스레 식탁보를 거두었다. 진수의 흐려있던 얼굴은 식탁을 보자 불을 켠듯 했다. 화려한 포장을 한 진귀한 프랑스 백포도주에 두세개의 통졸임, 그밖에도 료리들을 꽃처럼 꾸며놓은 접시들의 원무로 이 집 지붕아래에선 일찌기 본 일이 없는 알짜배기 성찬이였다. 진수는 표창을 바라는듯 깐깐한 화장으로 돋보이는 안해의 얼굴과 처제를 번갈아 보며 놀라와했다.

《하, 이런! 어쩌자는거요?…》

문희와 설희는 서로 눈짓하고는 고집스레 말 한마디 없이 번갈아 술공세를 가했다. 진수도 당기는 술인데다가 얼떨한김에 련속 몇잔을 받아마셨다.

문희가 사진기까지 내놓으면서 발그레해진 얼굴을 숙이고 말했다.

《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당신 선물이예요. 아버진 정말 당신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시는지 몰라요.》

설희도 뒤질세라 차랑차랑 넘치게 부은 술잔을 받쳐들고 상글거렸다. 그러나 그 녀자가 하는 말은 돌발적이고도 맵짰다.

《사실이예요. 그렇지만 그건 아버지가 아저씨를 무서워하기때문일거예요. 어머니도 나도 다 아저씨를 무서워하거든요. 지어는 언니마저도 아저씨를 두려워한단 말이예요.》

《무서워하다니, 내가 뭐 뿔이라도 뻗쳐있나?》

진수가 어느 정도 놀라며 반문하자 설희는 즉시 반박했다.

《뿔이 뭐 무섭나요? 아저씬 똑 소도구대신 탄알을 재운 진짜총을 들고 무대에서 아무나 마구 겨누는 배우같단 말이예요.》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설희에 의하여 곧바로 그들자매가 노린 기본문제에로 비약했다. 진수는 어디 좀 들어나보자는듯 한 방관적인 고자세였고, 문희는 위태로운 폭탄을 조립하는 일에 견습공으로 참가한듯 한 불안한 얼굴이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주도하는 당돌한 설희는 이야기가 솔직해지고 표현이 대담해질수록 술과 아양과 자신있는 얼굴표정을 엇바꾸어 활용하며 공세를 높였다. 설희의 이러한 태도에 목적을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고집스러운 야심이 선명히 드러나있어서 그 녀자를 보는 문희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섞인 경탄과 함께 모순적이고도 내성적인 자기를 서글퍼하는 어두운 빛이 갈마들었다.

설희는 부엌에 나갔다가 술잔 두개를 가지고 들어오더니 문희와 자기앞에 각각 놓았다. 그러면서 혼자 마시는 진수를 봉건이라고 나무람했다. 진수가 할수없이 부어주자 설희는 문희에게 한사코 마시라고 강요했다. 진수도 눈짓으로 권했다. 문희는 눈을 질끈 감고 한모금 꿀꺽했다. 하더니 흡사 곰의 열이라도 삼킨것처럼 오만상을 찌프리더니 가슴을 부여잡고 몸서리를 쳤다. 눈에는 눈물조차 글썽거렸다. 이러는 문희를 빤히 넘겨보던 설희는 웃으며 진수를 탓했다.

《아저씨의 압제를 말해주는 증거지 뭐예요.》

그리고는 자신은 자유의 절정에나 있는듯이 눈살 하나 찌프리지 않고 잔을 내며 말했다.

《하여튼 아저씨가 신문에서 곤장을 치건말건 창덕사땅은 민규석사장이 틀어쥐고말거예요. 큰 자본가는 옳던그르던 지는 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아저씨는 아버지까지 망치게 된다는걸 번연히 아시면서 물러서지 않는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청와대에 정치자금을 대주고있는 민사장은 경찰 같은건 시동 다루듯 하는 만능불도젤이란 말이예요. 그런데 왜 정해져있는 실패도 보지 않으세요?》

설희는 진수가 무심히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상밑으로 굴려넣는것을 못마땅하게 보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기로에 서있어요. 하나의 길은 관권에 반항하다가 고통에 시달리는 대가로 가난뱅이들의 박수를 받는 길이겠죠. 그렇지만 또 하나의 길은 눈치있게 시세를 따르면서 안락과 출세의 줄을 잡는거예요. 그런데 전자는 쇠사슬을 의미하고 후자는 약속된 행복이예요. 또 우리모두가 바라며 응원하고있구요. 아시겠어요?》

진수는 지루한 영화를 보는듯 한 얼굴이다. 그는 하품을 하며 쓰겁게 웃더니 깡패들에게 맞아서 결리는 어깨를 씰룩거리며 대꾸했다.

《참, 부자집 따님답다. 철부지가 사설이라더니, 넌 그 버클의 딸에게 휘말려 돌아치더니 더 한심하게 됐구나.》

설희는 모욕감에 낯을 붉히며 상밑으로 문희의 허벅다리를 아프게 쥐였다.

진수는 생각했다. 하기는 설희의 말대로 내가 실패할수도 있다. 아무런 보람도 없이 화만 입을수도 있지 않는가.…

진수도 신문사에 몇번이나 창덕사사건을 다른 기자에게 넘겨달라고 부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편집국장이 듣지 않았다. 편집국장도 그 사건에 진수의 장인이 관계하고있다는것을 아는터이여서 진수가 장인을 봐서도 위험한 그 사건을 《원만하게 적당히》 처리할것으로 기대했다. 이를테면 진수의 장인을 이 사건의 안전변으로 보았던것이다.

생각에 잠긴 진수에게 문희가 말했다.

《설희의 말에 그른 점이 뭐가 있나요? 나도 권력이 밉고 협잡을 싫어해요.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가 그 회사에서 전무노릇 하는것도 달갑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 아버지의 딸인걸 어떻게 하겠어요?》

문희는 남편이 주춤해진듯 한 기색을 살피며 더욱 열을 냈다.

《얘기하자는건 그게 아니예요. 당신은 못 보세요, 지금이 어떤 세상이예요? 쩍하면 잡혀가고 기둥뿌리를 뽑히우는걸 몰라요? 그런데 당신은 어쩌자는거예요?》

《정말 나도 견디기가 어렵소. 나의 환경은 왜 이렇게도 아름답지 못한지. 난 아무것도 못할거요. 모두가 한사코 끌어낸다면 망하는수밖에…》

이러면서 진수는 혀를 끌끌 찼다. 입술을 깨물며 남편을 뜯어보던 문희는 항의했다.

《원, 그 리기주의 좀 못 버려요? 당신은 자기 량심 하나만 소중한줄 알았지 우리일가 망하는건 왜 보지 않아요? 제 처와 처가까지 망치게 하는 당신에게 무슨 도덕과 량심이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예요!》

진수는 치미는 분노를 누르며 조용히 그러나 맵짜게 말했다.

《제발 나의 인내성을 시험하진 마오! 나도 형편 딱한 생각을 하면 주저앉고싶소. 그러나 민씨 자본가 하나를 위해서 저 숱한 령세민들을 배반하는것만이 도덕이고 량심이란 말이요?》

진수는 사진기를 설희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가 고맙게 받았다가 설희에게 선물하는걸로 하지.》

설희는 사진기를 나꿔채여 도로 구들바닥에 놓으며 진수를 쏘아보았다. 그러건말건 진수는 아픈 몸을 끌고 서재로 넘어가며 설희에게 말했다.

《난 그래도 네가 생각있는줄 알았더니… 슬픈 일이다.》

《나 같은거야 뭐 감각인들 있겠어요?》

설희는 벌떡 일어나며 서재에 대고 쏘아붙였다.

《아저씬 암만 그래봐도 권세를 탐내는 악당이예요. 그럴바엔 속세를 등진 중이 되든가 감옥에나 가란 말이예요!》

진수는 무섭게 노성을 지르며 장지문을 탕하고 닫아버렸다. 설희는 와뜰 놀라면서도 그것이 재미있기나 한듯 문희에게 코살을 찌프려보이며 굴복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남기더니 고개를 잔뜩 제껴들고 치마바람을 일으키며 휭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편을 돌려세우기가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게 된 문희는 자기가 무척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이 설음은 자꾸 저항심을 불러일으켜서 남편에 대해서 종래에 품고있던 모든 호감은 깡그리 사라지고 마뜩지않은 점만을 애써 밝혀내고 과장하면서 그를 악인처럼 미워하는것이였다.

처녀시절에는 어떻게 되여 그에게 그렇게도 취했던지 모를 일이였다.

…온통 함성과 피와 싸움이던 그 무서운 항쟁의 나날에 가슴을 압박해오던 그 거세고 뜨거운 사랑, 그때엔 얼마나 행복하고 또 불행했던가. 진수가 항쟁의 거리에서 류치장에 끌려가자 세상은 캄캄한 겨울밤으로 변했지. 그러나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자 끝없이 설레던 눈부신 봄.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진수의 미소가 얼른거리고 책을 보나 거울을 보나 그의 목소리가 우러나오던 그 나날에 나는 공상했었지. 진수는 안해의 소원이면 무엇이나 자랑으로 받아주고 무슨 일에서나 감싸주고 두둔해주는 남편이기를, 그런 남편의 고무를 받는 자기는 그 까다로운 모더니즘미술의 비밀을 끝내 정복하고 새로운 류파의 녀류화가로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될것을, 그리고 열정적이면서도 생활에서 균형을 맞출줄 아는 재사로 등장한 남편과 함께 녀류화가인 내가 귀여운 아들딸들의 손을 잡고 거리에 나서면 사람마다 부러워서 자꾸자꾸 쳐다볼것이라고…

그러나 지난날의 공상은 오늘의 절망을 더욱 괴로운것으로 만들뿐이였다. 행복으로부터 한사코 달아나는 리해할수 없는 남편은 희망의 마지막쪼각마저 짓밟아버리고 돌아선것이다.

문희는 장난으로 까맣게 된 재일의 손에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것을 보고서야 자기가 울고있다는것을 알았다.

(참, 저 미욱한 사람은 무엇을 하고있을가?)

문희는 서재가 빈방처럼 조용한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니다. 나는 절망할수 없다.)

그 녀자는 마시다 남은 술병을 들고 서재문을 열었다. 남편의 상한 몸을 술로 닦아주는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진수는 웃옷을 벗은채 어깨에 여러 군데 난 상처를 살펴보고있었다.

《술을 바르면 좋다는데…》

문희가 혀아래소리를 하며 들어서자 진수는 묵묵히 술병을 받아내려놓으며 울적한 눈길로 눈물이 글썽한 안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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