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3 장


15


교수네 대문앞에 이른 진수는 심한 공허와 한줄기 불안을 느끼며 문기둥에 붙어있는 단추를 눌렀다. 한참만에 안에서 문소리가 나고 신발을 딸딸 끌며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쪽문을 열어주었다. 영옥이였다. 노란 모내의우에 검은 양복저고리를 어깨에 걸친 처녀는 진수가 뜻밖인 모양, 놀란 얼굴에 언뜻 엷은 미소가 비끼는가싶더니 방황하는 어두운 눈길을 떨구며 얕은 한숨을 쉬였다.

《오래간만이군요. 선생님 계시는가?》

쪽문을 사이에 두고 진수가 물었다. 영옥은 숙인 머리를 한번 끄덕거렸을뿐 말없이 집안으로 향했다. 진수는 그 처녀의 뒤모습에서 눈을 뗄수 없었다. 무엇인가 슬픔이 어린 아름다움이다. 인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상처를 입고 얼음우에 떨어진 오리가 해빛부신 먼 나라로 떠나가는 계절조에게 구원을 부르짖는 격이지…

진수가 교수의 서재에 들어섰을 때 교수는 한창 집필중이였다. 책상과 창턱은 산만하게 덧놓인 원고와 세월의 때가 앉아 누렇게 뜬 자료책들, 잉크가 뿌옇게 바랜 발취카드들과 그우에 놓인 손잡이가 부러진 확대경이며 각종 연구서적들로 혼잡한 잡화매대를 이루고있었다.

《안됐습니다. 인차 가겠습니다. 오늘은 강의가 없습니까?》

진수가 인사삼아 묻는 말에 박교수는 집필하던 자세를 허물지 않은채 코허리에 걸린 돋보기너머로 사색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흐린 시선을 방문객에게 겨눈채 한순간 멍해있었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내려 서둘러 방석과 담배를 내놓으며 제자의 손을 잡아 주저앉혔다.

《자, 어서 앉어. 오늘은 오후강의니까. 잘 왔어. 그러지 않아도 만나고싶었어.》

진수는 더욱 늙어보이고 지친듯싶은 교수의 성글어진 백발을 언뜻 살펴보며 생각했다.

(대학시절, 이 지혜의 사령관은 나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이끌어주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동생의 사랑건이나 들고 온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교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는지 담배도 물지 않고 성냥부터 켜더니 맨입에 불을 붙이려는 실수를 하고있었다. 진수는 솟구치는 웃음을 누르며 얼른 자기의 담배를 꺼내여 섬겼다. 과학에서는 한치의 편차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사생활에서는 건망증과 착각이 심해서 사흘이 멀다하고 우스운 일화를 남기는 교수였다. 언젠가는 그만 부인의 가방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와서 책이 아닌 화장품통을 교탁에 펴놓아서 학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혼란을 일으킨 교수는 부인용가방속을 다시 뒤지더니 이번에는 뜨개질에 쓰는 빨간 실꾸레미를 꺼내들고는 저로서도 어처구니없어 허허 웃었다. 학생들은 발을 구르며 미친듯이 웃어대서 강의실이 떠나갈듯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의 그의 강의는 빈틈없이 심오하고 문자그대로 화려하였다. 그러니 이런 교수를 제자들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었으랴. 지방에 있는 옛 제자들도 서울에 들리는 기회가 생기면 바쁜 시간에도 짬을 내여 박교수의 강의실 문밖으로 달려왔다. 다만 그를 만나 인사나 드리고 그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고…

진수는 담배를 피워물고 무슨 생각엔지 옴해있는 교수에게 물었다.

《지금 쓰시는건 어떤겁니까?》

《알고있겠지. 짬짬이 9년째나 써오는 〈한미관계사〉, 이젠 아마 5 400매가량 되는가본데 나로선 솔직하고 대담한 글이니까 발표될 가망도 없어. 하긴 모르지. 세상이란 롱간이 많은거니까. 유고로 어느 후날 해빛을 보게 될지. 그때면 아마 자네가 학계의 타수로 등장하여 나의 이 슬픈 3부작을 비평의 메스(수술칼)로 호박썰듯 하지 않을가.》

박명찬은 빙그레 웃었다. 그가 쓰고있는 《한미관계사》란 진수가 대학시절에도 이 집에 오면 이따금 쓰는것을 본 일이 있는 야심작이였다. 어용학자들의 견해와는 날카롭게 대립된, 공개적으로 발표할수 없는 음밀한 지론을 그렇게 써오는것이다. 그것은 마치 적의 포위속에 든 로장이 제가 죽은 다음에도 부하들에게 전해지리라는 한가닥 믿음으로 자기가 탐구한 투쟁전술과 온갖 교훈을 남몰래 적어두는것과 같았다. 진수는 지혜가 그대로 빛을 발하는듯 한 교수의 밝은 미소에 생각에 잠긴 서글픈 미소로 교감을 나타내며 말했다.

《선생님의 정력과 랑만이 부럽습니다. 그 저작을 환영해줄수 있는 투명한 학계가 없는것이 아쉽습니다.》

교수는 찬양을 무시하듯 무표정이더니 곧 친밀하면서도 근심어린 얼굴로 화제를 바꾸었다.

《참, 전번에 이 방에서 버클과 구일동이랑 우리 약간의 론전 같은것을 폈을 때 어땠나? 내가 혹 실언하는것 같진 않던가?》

《별로 모르겠는데요. 글쎄, 그 사람들앞에서 진실을 말씀하신것이 과오라면 몰라도… 무슨 일 있었습니까?》

박교수는 타는 담배에 공연히 성냥불을 켜대더니 얼굴로 밀려드는 담배연기속에 조용히 도리머리질을 하며 말했다.

《분한 일이 있었지. 그 이튿날 도서관에 가서 저녁무렵까지 무슨 자료를 보고있는데 대학에서 긴급호출전화가 왔다기에 급히 가방을 챙겨가지고 나왔지. 그런데 택시를 잡아타려고 하는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놈들이 나타나 별스럽게 친절을 떨며 좀 만나자는거야. 따라갔지. 하, 그랬더니 공원구석에 이르렀을 때 불의에 행패질이 아닌가. 가방을 빼앗아가지고는 그걸로 나의 얼굴을 마구 후려친단 말이여.》

《그럴수가? 그래,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고가 있나. 코피가 터지도록 란장을 맞았지. 그런데 그 괴한들은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날뛰다가는 내가 부서져 떨어진 안경을 줏자고 하자 한놈이 그것을 구두발로 짓밟으며 뇌까리는거야.

〈빨갱이교수님, 철창이 몹시 그리운가.〉

그러자 곁의 놈이 하는 말이 〈미국이 어쩌고어째? 외다리 과부에게 장가들고싶은가?〉 하며 이렇게 교수대까지 끌어대고는 슬슬 도망치거던. 그게 무얼가?》

눈이 휘둥그래진 진수는 자신이 겪은, 그와 비슷한 경우를 생각하며 긴장했다.

《이상한데요. 그 며칠후가 되겠는데, 저 역시 북악산기슭에서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거든요. 그러고보면 무슨 련관된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네까지 겪었다? 이건 단순치 않아. 그런데 난 아무 근거도 없이 구일동과 버클이 괜히 두려웠단 말이야. 물론 헛생각이겠지만…》

두사람은 한동안 복잡한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못했다. 어떤 검은 세력에 추격을 당하고있다는 불안, 지성계에 대한 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주변환경으로만 여겨왔던것인데 이제는 그 살의에 찬 눈이 자기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영옥이 부리에서 김이 몰몰 나는 차관과 두개의 커피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오더니 조심조심 한잔씩 붓고는 도망치듯 아래방으로 건너갔다.

진수는 교수가 권하는대로 뜨거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조심하십쇼. 선생님은 언제나 진실과 본질을 가지고 과학을 론하고계시지만 보수파들에게는 뭐랄가. 투견같은 기질과 날카로운 이발이 있거든요.

즉흥적인 생각입니다만 가령 구일동박사를 미중앙정보국의 성원이라고 가정해보십시오. 또 우리 사회에 비집고 들어온 버클이 꼭 순수한 학자래야 한다는 법도 없지 않겠어요. 많은 나라들에서 미국선교사들과 〈평화봉사단〉이 간첩으로 몰려 배격을 받는 사실에 비추어봐도…》

《글쎄, 모르겠어.》

박명찬교수는 뜨거운 커피잔에 입술을 대다말고 내려놓으며 억양없이 말했다.

《그러나 조심만 해가지고야 과학이 되나. 저 거시기, 칼 맑스는 프로메테우스를 가리켜 철학사상에서의 최고의 수난자로 평가했지만 그 프로메테우스도 그렇지. 그가 자기의 슬픔을 제우스의 종살이와 바꾸지 않았으니까 모든 영웅들의 시조로 된게 아닐가. 력사학에서도 마찬가지지. 흘러간 력사로부터 찾은 귀중한 교훈들을 가지고 현대인들의 앞길을 등대처럼 밝혀주는것이 목적이 아닐가.》

진수는 로학자다운 스승의 자존심의 무게를 느끼며 약간 머리를 숙여 수긍을 표시했다. 교수는 다시 커피를 몇모금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하기는 나도 하고싶은 말을 얼마나 하는지. 학부복도에 들어서면 학생들이 일러주거던. 〈조심해주십쇼. 오늘도 개로 보이는 몇놈이 강의실에 끼여들었습니다.〉하고… 이러니 강의실인지 고문실인지 알수가 있어야지.

그런가 하면 오늘은 학술보고회다, 래일은 좌담회다 해서 자꾸 나와달래서 준빌 해가지고 가보면 〈선생님은 차후계획인데요.〉 이따위소리로 모욕적으로 거절이라 주최측에 호통을 치면 그놈들은 제꺽 빌붙으면서 게걸음치지만 모욕은 모욕대로 남거던.

그뿐인가. 책을 내면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진것처럼 달라붙어서는 도끼질이란 말이야. 그 지휘자는 다름아닌 구일동이고… 허허.》

교수는 소리내여 웃었으나 뒤끝이 짜겁고 쓸쓸했다.

우울한 진수는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국보적존재로 내세워져야 할 이 사색하는 호랑이가 이리떼에 시달려야 한단말인가. 그러면서도 발표도 못할 원고를 5천여매나 쓰다니… 얼마나 우울한 도전인가, 무서운 암흑이다.…

방바닥에 눈길을 떨군 진수의 얼굴이 흐려있는것을 본 교수는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면서 활기를 살려 말했다.

《이거 울적한 얘기만 해서 안됐소. 그래, 무슨 일이 있어서 온것 같은데…》

진수는 한순간 주저하다가 동생 인수에게서 온 편지를 교수앞에 내놓으며 말했다.

《난처한 문제인데 혹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윁남에 끌려간 제동생의 편집니다. 그저 웃어넘길 일 같진 않고 해서 좀 의논하고싶습니다.》

《아, 그 문제! 우리 영옥이와… 알고있소. 거참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교수는 종잡을수 없는 미소로 진수를 살피더니 돋보기를 끼고 편지를 읽었다. 진수는 교수의 얼굴에 처음은 진지한 호기심이 어리다가 그것이 점점 우울한 동정으로, 침통한 사색으로 바뀌는것을 보면서 필경 파탄을 면치 못할 이런 문제를 내놓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교수의 태도는 의외로 협조적이였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슬픈 얘기군. 참, 그럴거야. 짐승으로 변한 동료들과 미군들속에서 인간으로 살아남으려는 절망적인 몸부림이군. 이건 우리 애한테만도 아닌 모든 민중들에게 구원을 부르는게 아닐가?》

진수는 동감이였다. 교수는 생각에 젖어 손에 쥔 안경으로 방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아래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딸을 불렀다.

《영옥아!》

영옥이 사이방으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넌 왜 학교에 가지 않았느냐?》

《몸이 좀 아파서요.》

자신없는 혀아래소리였다. 교수는 감각으로 딸의 거동을 포착하며 명령이나 떨구듯 엄하게 말했다.

《너 그 윁남에서 온 편지들을 가져와!》

놀란 딸은 금시 상기된 얼굴을 숙이더니 입귀에 엷은 랭소를 그리며 힘없이 항의했다.

《뭘 그러세요. 그건 안돼요.》

아버지는 가부장의 허물수 없는 권위를 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꾸물거릴것 없어. 얼른!》

진수가 참견했다.

《그만두십시오, 선생님.》

교수는 담담한 시선을 딸에게 겨누었다. 그 시선에 지고만 영옥은 뒤방으로 들어가서 낡은 트렁크속에 간수한 여러통의 편지를 꺼내였다. 처녀는 마치 그 편지들이 자기의 죄록이 담긴 참회서이기나 한듯 떨리는 손으로 서재의 문턱에 놓으며 그 어떤 자책감과 원망이 어린 눈으로 진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거기 앉어라. 정선생님이랑 함께 좀 상론해야겠다.》

영옥이는 사이방에 할수없이 주저앉았다. 난처했던 진수는 교수가 거듭 권하는데 못이겨 동생의 편지들을 읽었다. 편지에 그려진 참혹한 정황과 열정적인 사연은 인차 진수를 사로잡았다. 거기에는 억울하게 이국의 불속에 던져진 청춘의 비명과 오열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오고있었고 사랑하는 처녀를 구원의 신처럼 숭배하며 거기에 매달리는 눈먼 열정의 분류가 있었다. 이런 열정은 몇장의 편지들에 같은 말로 반복되기도 했다. 혹은 기습전을 벌린 뒤끝에 겪은 우울증이나 추도식도 없이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진 죽은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신변에 일어난 잡다한 토막소식들과 뒤섞여 울려나오기도 했다.

표현은 례외없이 조잡했다. 진수는 애인에게조차 사나움을 감추지 못하는 동생에게서 그의 절망과 우울한 분노를 느꼈다. 동생은 위협적인 어조로 사랑을 강요하고있었고 처녀의 무관심을 씻을수 없는 범죄처럼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온후하고도 정제된 어조로 하소하기도 했다.

여러통의 편지를 차례로 급히 훑어보던 진수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러 떨고있었다. 동생은 쓰고있었다.

《영옥, 나에게는 너밖에 없다. 〈한국〉에서도 군에서 잔뼈가 굵어진 나는 부모형제의 사랑도 모른다. 배려와 웃음과 애정이 오가는 가족분위기, 그런것 세상에 있기나 한지 기억에도 없다. 얼굴도 마음도 까맣게 된 나는 인생의 그림자도 잡아보지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억이 막힌다. 하늘이라도 찢어발기고싶다. 그러나 나는 인간세상에로 이끌어줄수 있는 최초, 최후의 안내자인 네가 나를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그 확고한 표적을 내 손으로 만져볼수만 있다면… 이 무정한 사람아, 나는 직탄에 맞아 즉사한다고 해도 한이 없겠다.…》

인수는 또 쓰고있었다.

《너와 나와의 거리는 내가 빠진 심연의 깊이다. 그러나 나는 한없이 깊은 심연의 밑바닥에서도 네가 유람선을 타고 표면을 지나가면서 남을 향해 함부로 웃는것을 노려보고있다. 제발 나의 고통을 멸시하지 말아다오. 네가 가느다란 구원의 줄이라도 드리워만 준다면 나는 인간으로 구원될수 있다.》

동생의 막다른 불행은 진수를 괴롭혔다. 동생을 구원하자면 어떻게 해서라도 영옥이의 마음을 돌려세워야 하지 않을가 생각했다. 그러나 불가능해보였다. 설혹 둘의 마음을 맺어줄수 있다고 가정해도 그것은 오히려 곧 닥쳐올 결정적인 파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우둔한 일처럼 보였다. 진수는 교수가 딸이 싫다는것도 무릅쓰고 편지를 보여주는것도 이런 결론에 합의하자는 심산이 아닐가 생각했다. 교수 역시 일을 난처하게 여기는 모양, 편지들을 이것저것 번갈아 살피며 담배만 연신 태우고있었다. 진수는 다시 읽어나갔다.

한편 옆방에 앉아있는 영옥은 생각에 지쳐 풀어진 시선을 창문에 겨눈채 그림처럼 움직일줄 몰랐다. 그는 그런 편지를 돌려읽는 아버지와 진수를 딱하게 여겼고 더구나 이 문제에 간섭해나서면서 여차하면 다수가결이라도 할듯 한 분위기를 두려워했다.

윁남에서 인수가 거듭 보내온 편지들은 영옥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사랑은커녕 두렵기만 했다. 생활의 교제도 없이 그런 무례한 요구를 하다니… 한심한 사람, 생소한 존재였다. 먼 고등학교시절에 가야산실습려행에서 처음 만난이래 줄곧 편지공세를 해오다가 윁남파병을 눈앞에 두고 집에서와 룡산역두에서 잠시 마주쳤다가 두번 다 아름답지 못하게 헤여진 사람이 아닌가. 매력을 보인 일도, 하나의 관심사를 놓고 다정한 얘기를 나눠본 일도 없었다. 더구나 보기만 해도 화를 돋구는 군복입은 사람인데다가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사람잡이를 하고있지 않는가.

이런 점때문에 영옥은 인수에게 생각이 미치는것조차 싫은 부담으로 여겨왔었다. 그러나 윁남에서 오는 슬픈 편지들을 받아 읽을 때마다 그 처녀의 가슴에는 점점 동요와 불안의 파문이 일어나군 했다. 사랑이 끝내 거절을 당한다면 차라리 죽고말겠다는 그 변함없는, 애원섞인 위협이 그의 도피심리를 누르기 시작했다. 책을 읽거나 거울을 보다가도 문득 생각하군 했다.

(정말 그는 나의 랭담에 절망하여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고 파멸할지도 몰라. 어쩌면 좋아. 사랑한다고 한마디 써보낼가. 그래서 그가 인간으로 살아남아 돌아올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도리가 아닐가?… 아니야, 고작 동정이 갈뿐인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 쓸수 있어? 그건 기만이고 모욕이지 뭐냐.)

두가지 생각이 널뛰듯 번갈아 솟아올랐다. 그러는중에 인수가 다른 군인들보다는 량심적이고 인간적인 사고능력이 강한 아까운 젊은이라는 생각은 자꾸 자라올랐다. 며칠전에는 마침내 《깨끗한 인간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빈다.》는 길지 않은 편지를 보내고야말았다. 그것은 비록 마음의 비밀을 감춘 담담한 답신이였어도 그것으로 그 녀자는 그의 불행을 제것으로 받아들이는 모험에 나선듯 한 심한 불안을 느꼈다. 고민으로 잠을 설친 그는 이틀째나 대학에도 나가지 않았고 간헐적으로 몰려드는 인수에 대한 무서운 환상에 쫓기우고있었다.

지금도 웃방에 신경을 쓰며 바깥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고있던 영옥은 악몽속에서처럼 인수의 괴이한 환영을 보았다.

불타는 땅에 흑인처럼 검은 얼굴에 한쪽팔이 떨어진 인수가 떠오른다. 걸레같은 옷은 다 찢어져서 숱한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반벌거숭이다. 인수는 그런 무서운 몰골로 영옥의 길을 한사코 막아나서며 무섭게 절규한다.

《어데로 가느냐. 너는 내거다!》

피가 얼어드는 공포에 떠는 영옥은 목이 잠겨 모기소리를 낸다.

《용서해주세요. 제발 빌어요!》

그러자 무서운 불구자는 성한 팔에 들고있던 총을 발로 짓밟아 분질러버리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무릎걸음으로 덮칠듯 다가온다. 영옥은 운명을 회피하듯 급히 돌아선다.

목소리 아닌 혼으로 비명을 지른 영옥은 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환상을 쫓아버렸다.

아버지가 진수에게 조용히 묻는 소리가 들렸다.

《보니 동생은 아까운 젊은이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쪽 의향은… 뭐 꺼릴것 없지.》

진수는 편지를 한옆으로 밀어내놓으며 긴장한 영옥의 얼굴부터 살폈다.

《글쎄요. 이건 청춘들의 문제니까. 어디 영옥의 생각은 어떤지, 한번 말해봐요. 응?》

처녀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제자로 오래전부터 친숙한 진수를 애달프게 바라볼뿐이였다. 교수가 딸에게 말했다.

《말해봐. 묻어둘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인수라는 청년은 속이 옅은 사람같진 않구나. 너와는 사귄 일도 별로 없었다니 그쪽 요구가 경우에 닿지 않는것도 사실이다. 워낙 그또래는 소년기를 넘기기 바쁘게 군대라는 특수세계에 갇혔으니까 녀자는커녕 생활일반과도 단절된 슬픈 세대다. 그러니 그 사람이 이성관계에서 기초도 쌓지 않고 결론부터 강요하는것도 오히려 그를 묶어둔 질서나 제도의 잘못이 아니겠냐. 게다가 그 사람은 그 무서운 역경에서도 너와의 관계를 살려 소생하려는것이 아니냐.

사랑이란 언제나 많은 가능성을 의미하느니라. 어머닌 반대인 모양이지만 나로선 네가 그 사람을 용납한다고 해도 놀라진 않겠다.》

영옥은 힘들게 대답했다.

《전 뭐 부자집 아들을 쳐다보는 속물도 아니고요, 군인일반을 증오하는것도 아니예요. 그 사람이 남다른데가 있다는 짐작도 가구요. 그럴수록 그런 무서운 환경에서는 이래도 저래도 자기 파탄만 겪고 페인이 될거예요. 저도 무척 아깝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게 다예요.》

영옥은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났다. 아버지가 다우쳐물었다.

《그러니 어쩌겠다는거냐?》

《뭘 그러세요. 회답을 보냈어요. 깨끗한 인간으로 살아남아달라구요!…》

이 말과 함께 진수에게 번쩍 빛나는 눈길을 던진 영옥은 무대에서 사라지는 무희처럼 우아한 반달음으로 아래간으로 뛰여건너가며 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교수의 협조적인 태도와 영옥의 처사에 공감한 진수는 구석에 벗어놓은 자기의 코트에 손을 뻗치며 말했다.

《안됐습니다. 이런 문제로… 영옥은 참 훌륭합니다. 동생이 부끄럽습니다. 영옥이 보낸 그 회답만으로도 그애는 표창을 받은거지요.》

《무슨 말을, 하여튼 그 사람을 도와줘야 할텐데…》

진수는 점심이라도 함께 나누자는 스승의 청을 사양하고 그 집을 나섰다. 대문밖에서 그는 식료품을 사들고 오는 교수의 부인을 만났다. 부인 역시 진수에게 점심을 대접하겠다면서 거듭 안으로 이끌었으나 그는 사양하고 골목길에 나섰다.

교수의 부인은 머리를 푹 숙이고 멀어져가는 진수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원 동생이라는건 저런 형을 절반이라도 닮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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