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5 장


27


강동혁은 교수와 약속한 시간보다 한시간이나 일찌기 대학으로 찾아갔다. 대학도서관에 먼저 들려 참고로 꼭 빌려보고싶은 책이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도서관현관에 이른 그는 안으로 빗장을 지른 현관문에 《오늘은 휴식》이라는 패쪽이 붙은것을 보았다. 지나가는 학생에게 그 리유를 물었더니 직원들은 내부실사때문이라고 하지만 진짜 원인은 정보부 수사원들이 나와서 이틀째나 도서관내부를 온통 뒤져보느라고 그런다는것이였다. 정보부의 마수와 눈초리가 미치지않는 곳이란 없었다. 악법의 숲속에 사는 인간들은 생활의 모든 갈피들에서 독사들의 위협을 당하고있는것이다.

동혁은 울적한 기분에 싸여 력사학과로 찾아갔다. 그가 한무리의 학생들과 함께 2층계단으로 오를 때 죤 버클교수가 다부지게 생긴 몸집에 머리가 유별나게 커서 만화적인데가 있는 한 교직자와 담소하면서 웃층에서 내려오고있었다. 언젠가 박명찬교수의 집에서 《셔먼》호사건을 놓고 론쟁을 한이래 서로 상대에 대해서 적의어린 경계심을 품게 되였다. 층계의 굽인돌이에서 강동혁의 시선은 문득 뒤를 돌아보는 버클의 날카로운 시선과 부딪쳤다. 버클은 순간에 다시 눈길을 거두고 현관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동혁은 강의실들이 련달린 긴 복도를 걸어갔다. 도서관이 닫혀있어서 그런지 저녁무렵인데도 강의가 없는 교실들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책을 읽는 축들도 있었지만 무엇을 의논하는지 머리를 모으고 수군거리는 학생들도 많았다.

동혁은 자기의 대학생시절을 추억했다. 이 강의실과 정원에서 그어떤 희망과 절망을, 고민과 의분을 체험했던가.

동혁은 긴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을 이어갔다.

(민중이 설음을 분노로 바꾼다면, 그들이 허리를 펴고 일떠선다면 그우에 도사리고있던 파쑈의 구조물은 산산이 부서질게 아닌가. 그 독어린 쪼각쪼각은 다름아닌 침략자들의 머리우에 죽음의 돌사태로 쏟아질걸!

그러니까 나의 사명은 민중에게 허리를 펴고 일떠서도록 용기와 힘을 주는거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서투르게 일하는가. 산만하고 깊이가 없다. 소심한 복병처럼 제 한몸의 안전이나 생각하는 때는 없는가? 은밀하고 완강하게 투쟁진지를 넓혀가야 한다!…)

학과사무실에 들린 동혁은 이전부터 풋낯이나 알고있는, 병으로 사망한 유명한 박사의 미망인으로서 몸집이 뚱뚱하고 도수높은 근시안경밑에서 부리부리한 눈이 마치도 산다는것이 왜 이렇게도 괴로운가 하고 언제나 힐문하는듯 어리멍청한 애수에 흐려있는 교무행정서기를 만나 찾아온 사유를 간단히 말했다. 그 녀자는 교무일지를 펴들고 자그마한 칠판에 다음주의 강의시간표를 쓰면서 말했다.

《박명찬선생님은 강의중인데요. 반시간정도 남았으니까 기다리세요.》

《박선생님의 강의는 여전히 인기가 있는가요?》

동혁이 쏘파에 앉아 묻는 말에 그는 쓰던것을 멈추고 돌아보면서 활기를 띠였다.

《인기요? 아주 대단해요. 질투를 하다못해 헐뜯는 선생님도 있으니까요.》

녀서기는 비밀을 고백한다는듯이 속삭이는 투로 말을 이었다.

《구일동박사 같은분은 박교수님을 쓰러뜨리려고 아주 필사적이랍니다. 론쟁을 하다못해 지금도 박교수님의 강의에 끼여들어 도사리고있어요.》

《흥미있군요. 나도 들어가봤으면 좋겠는데 안되겠지요?》

《왜 안되겠어요. 좋으실대로 하세요.》

동혁은 그가 알려주는대로 강의실을 찾아갔다. 조심스레 뒤켠문을 열고 강의실에 들어선 그는 뜨거운 열풍이 몸을 휩싸는듯 한 느낌과 함께 옛 대학생시절에 대한 추억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박명찬교수는 교탁과 창문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매우 침울한 목소리로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다가 동혁이 학생들의 뒤켠 빈자리에 앉으며 눈인사를 보내는것을 알아보고는 알릴듯말듯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바람에 몇몇 학생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동혁은 량해를 구하는 미소를 보냈다. 그는 한자리건너 옆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구일동과도 눈인사를 교환했다.

박교수의 강의는 김옥균의 갑신정변실패의 의미에 관한것이였다. 동혁이 들을수 있은것은 본론의 마지막부분이였다.

《보는바와 같이》 하고 말한 교수는 칠판앞에 놓여있는 자기의 의자에 가서 앉으며 계속했다.

《진보를 위한 그 어떠한 시도도 반역으로 짓밟히고 사회발전의 속도가 굼벵이걸음치는 암담한 봉건사회에서 김옥균이 도달한 견해와 투쟁의 높이는 그의 비극의 크기와 처절성에 정비례할수밖에 없었던거요.》

교수에 의하면 사회발전이 상대적으로 빨리 진행된 유럽에서는 혹자들은 자기의 생애에 한 사회체제의 발생기와 전성기까지를 체험하기도 하고 혹은 전성기와 몰락까지를 목격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것이 음성적으로 고질화되고 정체된 옛 조선에서는 한 사회체제의 새벽이나 한낮을 한생애에 체험하거나 한낮과 황혼을 다 보고 간 사람은 있을수 없었다. 그랬던만큼 젊은 김옥균이 만물을 짓누르는 봉건의 절대권력에 도전하여 그 캄캄한 칠칠야밤에 근대적사회의 새벽노을을 느끼고 그 리상을 향하여 돌진했다는것은 시대적환경을 놀랍게 초월한 전례없는 비약이였다.

교수는 여기서 하나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김옥균이 3살때의 일이였다. 그는 언제나 몹시 울어서 그의 어머니는 밖에 나가 일을 할 때면 그를 집안에 가두어넣군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가 밖에서 일을 마치고 뜨락에 들어서니 놀랍게도 아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두 이상하길래 어머니는 문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코흘리개 철부지가 송곳으로 뛰는 벼룩을 찍느라고 코를 훌쩍거리며 정신없이 기여다니는것이 아닌가! 약빠른 벼룩을 무슨 재주로 송곳으로 잡으랴. 벼룩은 자꾸 뛰고 아이는 그냥 따라다니며 송곳으로 헛찍었다. 그러나 철부지는 맥을 놓지 않고 방바닥을 온통 망치며 끝없이 찍기를 거듭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고개를 들고 눈이 없어지게 웃었다. 바늘같은 송곳끝에 벼룩이 꿰여있었던것이다!

어머니는 무서운 인내력으로 어려운 목적을 끝내 이룩하고야만 철부지의 그 행동에서 남다른 인재의 싹을 알아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부드럽게 웃던 교수의 얼굴이 애통한 울분으로 흐려졌다.

그는 주먹으로 교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고종황제에게 보낸 유명한 상주문에서 김옥균은 〈여정도치하여 안으로는 제도를 혁신하여 민력을 함양하고 밖으로는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신지식을 널리 흡수하는것을 최대급무〉로 제기한 인물이였소.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는 악전고투속에 지지자들을 모으는데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조선의 서민사회에서 봉건을 반대하는 대군을 조직할 생각을 못했으니 그의 투쟁은 첫걸음부터 패배를 향해 나아가고있었던것이요.

김옥균이 상층에 속한 극소수의 개화당성원들로 봉건의 소굴을 급습하여 순간의 성공이나마 거두었던것은 하나의 기적에 지나지 않았소. 민중으로부터 떨어졌던 그는 아무리 온몸이 심장인 불같은 인간이였어도 본질상 단신으로 적의 불뿜는 요새에로 돌진한 서사시적 비극의 주인공이였소.》

교수는 문득 코살을 찌프리며 랭소를 짓고 선언적으로 말했다.

《어떤 학자는 김옥균이 일본세력을 대거출동시켜 고국의 봉건을 분쇄하지 못한것이 과오라고 론단하고있으나 그것은 우둔하고 어리석은 판단이요. 미사려구가 무슨 소용이겠소. 그것은 나라를 외세의 침략에 내맡기기를 선동하는 매판적지성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것이요. 여기에 웅변적인 규탄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통속적인 막말로 말하고싶소. 침략자 제씨들, 못난 상투는 우리끼리 자를테니 입으로 흘러드는 제 코나 닦으시오!》

학생들은 와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동혁도 웃었다. 그는 박교수의 신랄한 조소가 구일동을 겨눈것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닌게 아니라 구일동은 낯색이 캄캄해지고 오줌을 맞은 개구리처럼 잔등을 들썽하니 솟구치고 끙끙 신음하였다. 모욕을 당한 자존심이 복수를 부르는 모양이였다.

박교수와 구박사의 론쟁이 문자그대로 비타협적이라는것은 명백했다. 특히 구일동은 박명찬을 보기만 해도 역증이 나고 염통이 뒤틀렸다. 그들의 이러한 관계는 《셔먼》호사건에 대한 론쟁이후 강동혁도 익히 알고있는터였다. 그의 판단에는 구일동은 좋게 보아서 지능의 빈약을 이채주의로 가리우고 때묻은 미사려구를 날개로 삼아 푸득거리는 게사니같은 존재였고, 날카롭게 지적한다면 외래문물이면 길바닥에 쏟아진 포도주도 엎드려 빨고 핥아대는 거지문화인이였다. 이런자가 박명찬같은 지성의 호랑이에게 달려든다는것은 일종의 희극이였다. 그러나 구씨는 든든히 믿는 곳이 있었다. 박명찬은 진리를 믿었고 구일동은 권력을 믿었다.

박교수는 다시 창가를 천천히 거닐며 비분이 어린 목소리로 강의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해외로 망명한 김옥균이 상해의 려관에서 시체로 되여 고국의 쓰거운 땅으로 돌아온 의미는 무엇인가? 암살당한 그가 돌아와서도 악독한 봉건의 손에 다시금 부관참시를 당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칠판에 급히 《부관참시》라고 쓰고 《무덤을 헤쳐 시체의 목을 자르는것》이라고 풀이하고는 울분을 계속 토로했다.

《죽어 돌아온 김옥균이 저 봉건야만들에게, 주지육림에 파묻혀 갓쓰고 땐스춤을 춘 수구파들, 자기의 하늘소에게도 약과만 먹인 수구파들인 민영익, 민경호와 같은 흡혈귀들에게 온몸을 갈갈이 찢기우고 〈대역부도죄인〉이라는 글발이 드리운 장대끝에 잘리운 목까지 매달린 그 치떨리는 참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학생들은 가슴을 그러쥐고 숨을 죽였다.

동혁은 구일동이 새로운 범죄증거를 발견한 검사처럼 야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도사리는것을 보았다. 눈물이 끓어오른 박교수는 손을 들어 허공을 때리며 흥분으로 턱을 덜덜 떨었다. 그는 교수이기에 앞서 김옥균시대로부터, 그 참사의 현장으로부터 현대로 파견된 파발군이였다. 아니, 그는 파쑈치하의 우울한 나날에 품어온 울분과 은밀한 주장을 터뜨리는것이였다.

《제군, 그 찢겨진 영웅의 살점과 부서진 뼈우에서, 장대끝에 걸려 날뛰는 몽매한 야만들을 굽어보는 그 피투성이머리에서 읽으시오! 그 어떤 영웅도 민중을 떠난 과오는 자기의 죽음으로도 씻을수 없다는 교훈을 읽으시오! 진보를 위한 그 어떤 투쟁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불패의 힘인 민중을 동원하지 못할 때는 참혹한 실패를 피할수 없다는 력사의 교훈, 오늘의 교훈을 읽으시오! 이 땅의 력사는 이 하나의 교훈에 귀착되는것이고 우리들의 인생사의 승패도 이 하나의 교훈에 달려있는것이요!》

강의는 끝났다. 강의실은 학생들의 뜨거운 숨결로 터질듯 했다. 부지중 많은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환성을 올렸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바로 그겁니다. 민중입니다!》

《옳소! 민중 만세!》

학생들의 탄성에 미소를 보내며 박교수가 나가자 구일동은 퉁기듯 일어나서 쿵쿵 울리는 야단스러운 걸음으로 뒤문으로 빠져나갔다.

강동혁은 박교수의 의분과 열정을 체험한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뒤따라 나온 동혁을 복도에서 반갑게 만난 박명찬은 조용한 연구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스승과 제자는 서로 바라보는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듯 련계없는 외마디경구들을 주고받으며 연방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봐, 동혁이, 그런데 진수의 일은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교수는 안색을 흐리며 가슴아파했다.

《말썽이 된 그 사람의 글 읽어봤어. 얼마나, 얼마나 잘 썼겠어! 재능과 심장이 겸비됐거던! 그런 보배덩이를 저 죽일놈들이…》

《너무 근심마십쇼. 선생님! 석방운동을 펴고있습니다.》

동혁이 안심을 시켜도 교수는 그냥 근심하면서 말했다.

《진수는 자네나 마찬가지로 나의 참다운 제자일세!》

그들이 진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있을 때 구일동은 학장실에서 학장에게 항의하고있었다.

《어찌하여 박명찬같은 불온한 선동군을 신성한 교단에 아직도 세워두는지 그 리유를 알수 없다 그겁니다. 고집쟁이처럼 귀머거리는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시대착오인 좌익사상이 들어찬 그 사람은 20세기와 자유세계의 리념을 리해할 초보적인 능력조차 없단 말입니다.》

구일동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머리를 떨어대며 주장하자 자신을 지성계의 사령관으로 자처하는, 풍채가 자못 로련한 해군제독같은 학장은 그 역시 박명찬을 용납 못할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모든 교직원들의 보호자인듯 한 태도를 꾸몄다.

《난들 왜 모르겠소? 알고있다니까. 그렇다고 그 교수를 당장 추방하거나 수갑을 채워야만 하겠소? 여러가지로 소란스러울수 있다는것도 고려해야죠.》

《참 알수 없군요. 그 사람은 부단히 소요를 생산한단 말입니다. 소동군학생들을 부추기는 그따위 빨갱이들이 용납된다면 이게 무슨 대학입니까?》

구일동은 자기딴의 의분에 달아올라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알아두십시오. 박명찬을 남겨두시겠다면 내가 나가겠습니다. 정말 이건 참을수 없다니까.》

구일동은 학장이 정보부의 신임을 받고있는 존재라는것을 알고있으면서도 마치도 자기의 주장을 그가 리해하지 못해서 더 말할 흥미조차 없다는듯 손수건을 꺼내서 살이 오른 목덜미를 닦으며 휭하니 방에서 나왔다. 복도에 나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길로 박명찬을 찾아갔다.

구일동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박명찬과 강동혁은 무슨 이야기로 즐거이 웃다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거 안됐군요. 비밀얘기라면 내가 나갈가요?》

구일동이 깔끄러운 미소를 짓고 그들의 친밀한 분위기에 대해서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박명찬은 어지간히 짜증이 났으나 동혁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비밀은 무슨 비밀이겠소. 하실 얘기가 있으면…》

《아니, 가겠습니다. 강동혁씨, 이거 안됐군요. 내 박선생께 한마디만 하고…》

강동혁은 말없이 머리만 숙여보였다. 구일동은 출입문가를 거닐며 말했다.

《박선생의 강의를 들어보고 배우기도 했습니다만 리해할수 없군요. 어째서 김옥균에 대한 강의에서까지 민중혁명을 주장해야 하는건지. 무얼 어쩌자는겁니까? 나는 그래도 선생에 대해서 험담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애써 두둔하고 변호했지요. 그런데 선생은 오늘 강의에서도 나와의 관계를 파국에로 몰아가셨는데 이건 인내성을 시험하는겁니까? 새로운 도전입니까? 그 대답만 듣고 나가겠습니다.》

박명찬은 날카로운 눈길로 구일동의 아래우를 잠간 훑어본 다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가로 다가가며 말했다.

《당신은 도덕을 지킬줄 모르는게 탈이거던! 균형에 대한 감각부터 없지 않소?》

그리고는 출입문을 열고 나가달라는 표시로 한손을 들어 복도쪽을 가리켰다. 구일동은 잠시 망설이며 박명찬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무도 분한 그는 심장이 목을 치받으며 무섭게 골풀이치는것을 느꼈다. 따귀를 얻어맞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괴로울수는 없었다. 그러나 노여움을 누르고 마치 사죄라도 할듯 서글픈 미소까지 지은 박명찬의 침착한 얼굴을 본 그는 그 어떤 두려움과 불가항력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 순간에 너의 운명은 결정되였다! 나는 무자비하게 너를 짓밟을것이다!)

그는 킁 하고 코바람을 불며 병사같은 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출입문을 닫은 박교수는 동혁이 구일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도록 미리막으면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동혁은 난처했다. 오늘 같은 날에 퇴맞은 원고를 존경하는 스승에게 돌려주자니 내키지 않았다. 실례가 될것 같기도 하고 본의와는 반대로 《지열》과의 뉴대감을 상하게 할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보면 교수에게 좋은 자극을 줄수도 있을것 같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던 끝에 가방에서 교수의 원고를 꺼내여 돌려주면서 말했다.

《안됐습니다만 잡지에 넣지 못했습니다. 먼저 들어온 같은 주제의 글이 있는데다가 읽은분들이 아무래도 납득을 못하는 점도 있고 해서…》

구일동에 대한 생각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교수는 손끝으로 원고를 토닥거리며 초점이 없는 흐린 시선으로 옛 제자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밝은 표정으로 일변하며 담배를 붙여물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손동작이 서툴러져서 성냥을 제대로 켜지 못했다.

동혁은 남현에게서 받은 라이터를 얼른 켜서 불을 붙여주며 그 라이터를 선물삼아 받아달라고 했다. 교수는 여러가지로 구실을 붙여 받지 않았다. 동혁은 다시 넣을수밖에 없었다. 박명찬은 본화제로 돌아가며 쓸쓸히 웃었다.

《이 글은 두번이나 추고를 했는데 퇴를 맞았군. 거 보아하니 〈지열〉의 권위가 대단하군그래. 그러니까 이 글의 기본약점이라면…》

《진리의 객관성》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사물현상과 그의 본질을 분석하는데서 철저히 객관적립장에 선 자료적립증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탐구자의 주관적요인을 완전히 거부하고있었다.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사회적진리는 수학문제의 풀이처럼 과학적으로 랭철하게 증명되여야 하며 거기에 연구하는 사람의 주관적열정이나 주장을 섞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지열》의 편집자들은 이 랭담한 객관주의에 동의할수 없었던것이다.

동혁은 이런 결론을 알려주면서 덧붙였다.

《연구하는 사람이 진리를 증명하고 주장하고 자기의 열정으로 풀이하는것이 부당하다면 그 고립된 진리가 무슨 힘을 갖겠습니까? 진리는 투사들의 무기이지 박물관용은 아니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도 오늘강의에서 진리를 무기로 사용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과 이 문제하고야 다르지. 이를테면 아전인수라 할가, 그런 연구태도를 반대하는거지.》

《그것도 저희들은 리해합니다만…》

《알겠소. 중대한 비판일세. 더 생각해보지.》

동혁은 봉투에 넣은 원고료를 교수앞에 내놓고 일어섰다. 교수는 의아해했다.

《이건 뭔가? 퇴맞은 글에 원고료라니, 이렇게 롱을 하면 되겠소?》

교수는 단호히 봉투를 밀어내며 노여워했다.

《자네까지 이런줄은 몰랐군.…》

《그런게 아닙니다, 선생님! 저의 잡지의 규정입니다. 많은 지원을 바라는 표시입니다!》

동혁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작별을 알렸다. 그의 드팀없는 태도를 본 교수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흐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픈 징벌일세! 나의 집필생활 수십년에 이런 일은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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