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5 장


29


문희는 남편의 처사를 못마땅하면서도 그의 불행을 진심으로 아파하였다. 피를 뚝뚝 떨구며 형사에게 끌려가던 남편의 모습이 자주 눈앞에 비쳐오면서 그를 괴롭혔다. 안해답게 그를 지켜주지도, 편들어주지도 못하고 위안의 말 한마디도 해주지 못한것이 죽을죄를 저지른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도 결정적인 때에 왜 남편이 증오하는것을 증오하지 못하고 그이가 사랑하는것을 함께 사랑하지 못할가. 그이는 류치장과 고문실에서 피가 마르도록 그 고생인데 나는 어찌하여 더운 음식을 먹을수 있고 부드러운 잠자리에 누울수 있을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꾸짖고 개탄하기도 하였다.

문희는 가만히 앉아있을수가 없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수를 구원하기 위한 방도를 의논하기도 하고 구원투쟁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신문사나 문화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알고있는 경찰이나 사법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사람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애쓰며 다니는 과정에 문희는 김용기와 같은 로동자들이나 일반지성인들은 진수를 적극 지지하고 그의 불행을 무척 가슴아파하면서 그를 구원하는 일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지만 기업가나 사법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고 경계하면서 지어는 문희자신에 대해서까지 랭대하는것을 볼수 있었다.

문희는 어느날 고등학교시절에 무척 친하게 지낸바 있는 신옥주라는 옛친구를 찾아갔다. 그 녀자의 남편이 검찰청의 검사여서 잘 부탁하면 진수가 무사히 빨리 석방되도록 경찰서에 영향을 줄수 있을것 같았던것이다. 그러나 문희가 찾아가 만난 몸집이 크고 매부리코가 류별나게 큰 검사는 자기 안해와 함께 앉은자리에서 문희가 가슴을 조이며 부탁하는 말을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으면서 건성으로 듣더니 개구리의것처럼 툭 불거져나온 커다란 눈으로 자기 처와 문희를 대비해보듯이 둘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옥주와의 관계를 봐서도 문희씨의 부탁은 무겁게 여기지요. 그런데 이번만은 좀 어렵겠습니다. 털어놓고 말하면 난 2~3일전에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만 집주인한테는 제일 나쁜 딱지가 붙은 모양이더군요. 이런 경우는 우리도 관여하기가 아짜아짜해놔서…》

《제일 나쁜 딱지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어떤건데요?》

문희가 가슴이 철렁하여 묻는 말에 검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난처한 기색으로 안해를 돌아보더니 친구끼리 오래간만에 만났겠는데 잘 대접하라는 말만 했다. 그리고는 손목시계를 보고 자리를 일면서 문희에게 말했다.

《딱하겐 됐지만 너무 근심하진 마십시오. 나도 힘닿는데까진…》

《정말 간청이예요. 적극 좀 힘써주세요. 선생님을 믿겠어요!》

문희는 울상이 되여 다시 호소했다. 검사의 안해도 옛 동창을 편들어 남편의 소극적인 태도를 나무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을 실제로 추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남편은 결심을 내리기까지가 힘들지만 한번 마음먹으면 못해내는 일이 없는 큰사람이란다 하고 자랑하려는듯 했다. 검사는 입언저리에만 엷은 미소를 그리고 한동안 머리를 끄덕거리며 서있더니 다녀올데가 있다면서 방에서 나갔다. 문희는 그의 이러한 거동에서 원한을 사는 일이 없도록 적당히 구슬려서 돌려보내려는 속심을 엿보았다.

락심하여 집으로 돌아온 문희는 방안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구들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남의 집에 가서 원조를 바라다가 거절을 당한것도 분했지만 남편이 무서운 사상범이여서 쉬이 풀려나오기는 틀렸으며 자신은 어느새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는 중죄인의 뒤바라지군이 돼버렸다는 랑패감으로 하여 자기를 무척 동정하면서 슬피 울었다.

이런 때 밖에서 찾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아버지네 하녀인 삼월녀가 저자바구니를 끼고 퇴마루앞에 다가서며 반색을 한다.

《아이구, 계시누만. 다른게 아니구 예, 아버님이 지금 아줌마를 빨리 오시랍니다. 꼭요, 예?》

그러더니 이쪽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급히 쪽문을 빠져나갔다.

문희는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친정으로 찾아갔다. 그가 촉수낮은 전등에 비친 그 집 계단을 거쳐 2층복도에 올라서서 잠시 숨을 돌릴 때 아버지의 손님들이 들군 하는 응접실에서 몇사람의 남녀가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의 웃음소리에 조야스러움이 느껴지는것으로 보아 술놀이판이 벌어진것이 확실했다. 침울하던 이 집에 경사라도 난것인가. 문희는 오늘이 설희의 생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조용하던 방안에서는 귀에 익은 남자들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들리고 또다시 와그르르 웃음이 터졌다.

문희는 자기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복도에서 망설이고있었다. 아버지가 설희의 생일놀이에 부른것이라면 알리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는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발끝걸음으로 조용히 층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응접실문이 열리더니 술기운에 벌거우리해진 얼굴에 피로가 잔뜩 어린 그의 아버지가 몸이 호리호리한 중년의 가무잡잡한 사나이를 앞세우고 나오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럼 믿겠네. 래일 다시 동양흥업사에 가서 잘 구슬려보게. 내가 벌써 세번이나 찾아가서 적지 않게 찔러넣어주었으니까 경수의 솜씨여하에 달렸어. 거기서 반가운 소식만 쥐고 오면 자네에 대해서야 두말할게 있나. 내 성미야 알지 않나.》

여기서 송건호는 벙긋 웃다가 몰래 돌아가려던 일이 틀려버려서 계단에 우두커니 서있는 문희를 발견했다.

《너 왜 그러구있어? 빨리 들어가. 내 좀 얘기할게 있다.》

문희는 그래도 망설여져서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 건호는 자기의 심복노릇 하는 최경수를 저쪽구석으로 이끌고 갔다. 어여쁜 녀자를 보면 맥을 추지 못하는 경수는 그 녀자의 모습을 훔쳐보며 속삭이는 투로 상전에게 우는소리를 했다.

《글쎄, 덤벼보긴 하겠는데 자신없어요. 민규석씨가 송선생이 자그마한 기업이라도 펴보자고 하는걸 냄새맡고 어떻게나 독설을 폈는지 어느 흥업소에 가서나 선생님 명함만 대면 찬서리만 끼얹고 돌아서버리는 판이니 원. 그런데 사위가 정말 빨갱이라면야…》

문희는 복도를 지나가며 어렴풋이 들은 이 말에 흠칫 놀랐다. 그러면 남편이 진짜 《빨갱이》란 말인가? 검사가 말한 《제일 나쁜 딱지》란 바로 이것이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 녀자에게는 그런 감투를 쓰거나 누구라도 그렇게 지목되면 본인은 물론 가족모두가 큰 재난을 당한다는 두려움부터 앞섰다. 문희는 감당키 어려운 의혹을 품은채 악몽속에서처럼 저항할 길 없는, 알수 없는 힘에 밀려 방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이 이미 오래 지난 뒤인지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반나마 빈 술병들과 음식그릇들이 가득 놓인 커다란 둥근 식탁둘레에 포만한 얼굴로 앉아있던 여러 남녀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문희에게 쏠렸다. 뚱뚱한 몸에 중국귀족처럼 은빛비단옷을 팽팽하게 입고 윤택한 검은 가발을 높이 틀어올린 문희의 계모 강은월이 앉은 왼쪽으로 송건호의 빈자리, 와이샤쯔바람의 량성도, 결이 굵은 회색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맨 미국인기자 에드워드 하틀리가 앉아있고 강은월의 오른쪽으로는 설희의 친구인 눈이 크고 목이 긴 녀가수와 이 자리의 주인공인 설희의 차례로 주런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이제는 먹고 마시는것도 심드렁해져서 량성도의 롱담이나 듣고있던 때여서 문희의 등장은 각별한 인상을 주었다.

《아이 언니, 그래도 왔군요!》

흰 팔을 자랑하듯 드러낸 달린옷차림에 술기운이 도는 설희가 먼저 반겨주고나서 모두에게 자랑했다.

《보세요. 나의 언니만 한 미인은 흔치 않을거예요.》

문희는 설희에게 코트를 벗어맡기고 그가 제자리곁에 새 의자를 놓으며 이끄는대로 따라가 앉기는 하였으나 마치도 집요하게 눈여겨보는 화가들앞에 모델로 나선것처럼 속이 푸들거렸다. 실상 그 녀자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하나같이 탐욕적으로 번들거려서 얼굴에 송진같은것이 게발라지는듯 한 불쾌감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 한사람, 계모만은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자기를 쏘아보며 경멸의 랭소를 짓고있는것을 얼굴의 감각으로 느꼈다. 설희는 식모를 불러 문희의 몫을 새로 청하려고 했으나 은월은 그럴것없이 좀 있다가 아래에 내려가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술기운이 올라 유들유들한 얼굴이 놋대야처럼 번들거리는 량성도가 일어나서 새 잔에 미국산 위스키를 부어 문희에게 내밀며 선심을 썼다.

《자, 사양하지 마시오. 불일간 기쁜 소식이 있을겁니다. 설희양을 위해 하틀리선생이 갖고 온 술입니다. 어서 드시라니까. 이거 팔이 떨어지겠소.》

하틀리도 느물거리며 마시라고 몇번이나 손짓으로 권했다. 문희는 모두의 권고에 못이겨 받기는 했으나 마실줄 모른다고 변명하면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량성도가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보시다싶이 국제적인 모임인데 우리의 녀성대표가 한잔도 못 든대서야…》

《왜 그래? 보려무나, 어떤 자린지. 참 어쩔수 없다니까.》

강은월이 참지 못하고 비난했다. 미국사람이 설희의 초대에 응해준것을 설희와 가족모두에 대한 높은 표창처럼 여기고있는 이 부인은 전실태생인 문희가 촌뜨기처럼 굴어서 자기 가족의 명예를 해칠가봐 두려워했다.

이때 심복을 돌려보낸 송건호가 헤염치는듯 한 걸음으로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얼마전에 민규석회사에서 끝내 밀려난 그는 다년간 은행에 저축했던 돈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는 상인들을 상대로 고리대를 하는 한편 자그마한 영업이라도 해보려고 흥업소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출로를 모색했다. 오늘 밤에 벌린 이 술놀음도 그러한 목적을 노린것이였다.

송건호는 애써 밝은 낯색을 꾸미며 술들을 더 들라고 권했다. 그러자 량성도가 하틀리의 잔에 술을 부으며 송건호에게 말했다.

《맏따님께서 저러시니 우리도 식었지요. 아마 그 사람때문에 괴로워하시는것 같은데 곧 석방될겁니다. 여기 계시는 하틀리씨까지 마음을 쓰고있으니까.》

문희는 문득 량성도가 코를 씰룩거리며 하틀리에게 눈짓으로 비밀적인 그 무엇인가를 암시하는것을 보았다. 설희와 녀가수는 저희들끼리 영어로 재잘거리며 히히닥거렸다.

하틀리가 술잔을 들고 문희에게 사교적인 눈인사를 보내더니 성도와 건호와도 잔을 찧으며 꽤 류창한 조선말로 말했다.

《나는 로출된 미를 즐기는 서방사회에서 교양을 받았지만 에- 뭐라 할가. 녀자들은 역시 실례지만 저 부인처럼 미인인 경우에는 부끄러워, 아니 수줍어할수록 매력을 최고로 높인다는것을 확신합니다.》

설희는 질투어린 시선으로 문희를 살피더니 순간에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오며 꼬리를 달았다.

《그렇잖구요, 산도 안개를 두를수록 높아보이는거나 같지요 뭐.》

여기서 하틀리는 문희의 미모에 대해 한두마디 더 익살을 부리더니 미인은 그자체가 령감의 무한한 원천이라는따위의 시시껄렁한 말을 무슨 금언이나 되는듯이 뇌까렸다. 그 말에 량성도가 잔을 높이 들고 맞장구를 쳤다.

《동방적인 미앞에서 엄격한 하틀리씨가 굴복한것을 축하하여, 우리의 미인들이 세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영원히 젊어있기를 빌어 이 잔을!》

속속들이 모욕을 느낀 문희는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창백해졌다. 그들이 취한것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어쩌면 나의 처지도 무시하고 이럴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니 억울하기만 했다. 그들의 사교적인 너울속에 들어있는 차디찬 배타주의, 신사인체 하면서도 감추지 못하는 무례와 조야스러움이 놀랍기만 했다.

남편때문에 이런 조롱을 당한다고 생각한 문희는 긴장한 표정으로 쟁가당 그릇소리를 내며 도전적으로 불쑥 일어나 모두의 주시속에 벽에 걸린 자기의 코트를 벗겨들며 멍하니 바라보는 하틀리와 량성도에게 쏘아붙였다.

《누굴 조롱하는거예요? 교양이 높아서 그렇게 저급한가요? 참, 대-단하군요.》

그리고는 당황하여 일어나는 설희에게 말했다.

《안됐구나, 네 생일에…》

모두가 어떤 마력에 걸려 화석이 된듯 했다. 송건호와 강은월에게는 청천벽력이였다. 감지덕지해야 할 계집이 이 모임의 격을 대표하는 미국신사에게까지 도전하다니… 말쑥한 얼굴로 앉아있던 녀가수는 너무도 민망스러워 헛기침을 하며 몸을 뒤틀었다.

어떤 미묘한 분위기에 문희가 화를 내는지 알리 없는 둔감한 송건호는 제가 밖에 나가있던 사이에 혹시 마누라가 계모행세라도 한것이 아닐가 하여 처를 살피더니 문희를 꾸짖었다.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야. 가긴 어델 간다고. 아래층에 내려가 기다려라.》

량성도와 그가 데리고 온 미국사람을 잘 사귀여두면 좋은 수가 생길것만 같아 아까운 돈을 들여 마련한 이 자리가 문희의 조용한 한마디에 어이없이 망쳐버린것만 같은 은월은 날카로운 말들이 혀끝에서 바글거리는것을 겨우 참고있었다.

방을 나선 문희는 설희가 따라나와 만류하는데 못이겨 아버지를 기다려서 만나보기로 했다. 설희는 문희가 아래층에 있는 식당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는것을 보고서야 다시 웃층으로 올라갔다.

암담한 기분으로 앉아있던 문희는 얼마후 손님들이 흩어져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외등이 환하게 켜진 뜨락에까지 그들을 따라나간 아버지와 계모가 특히 하틀리의 손을 쥐고 몇번이나 아첨의 미소와 함께 머리를 숙이며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느니, 앞으로 많이 보살펴달라느니 하면서 각별히 친절을 떠는것을 창가림짬으로 보았다. 하틀리는 방금전에 문희에게서 뜻밖의 역습을 당한 불쾌감의 여운이 있어서인지 진심이라기보다는 겉발림뿐인 얄팍한 미소를 짓고 적당히 얼러맞추고있었다. 그는 《선발된》 인종인 자기가 식민지에 와서 일반가정까지 방문한것을 어떤 《특혜》를 베푼것처럼 자처하고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특혜》를 받은 《한국인》은 요긴한 때에 자기들을 위하여 봉사해야만 하였다. 그러자면 그들이 호감을 가지도록 이러저러한 기회를 타서 주물러놓는것이 상책이라고 본것이다.

방문자들이 돌아가자 송건호와 강은월, 설희는 약속이나 한듯이 함께 문희에게로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넌 무슨 신경질이 그러냐?》

은월이 뾰주름해서 짜증을 내자 송건호는 급히 제지하더니 불만과 고집이 어린 얼굴을 문희에게 돌렸다.

《만나잔건 다른게 아니다. 뭐 길게 늘어놓을것 없지. 전에도 몇번 말했지만 복잡하게 생각할것 없이 리혼을 하라는거다.》

문희는 겁에 질린듯 한 커다란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노여움과 고집으로 꼿꼿해진 아버지의 집요한 눈길에 지고만 그는 낯을 외로 돌리며 말했다.

《왜 자꾸 이러세요? 그건 제가 생각하고 결정하겠다고 하잖았어요?》

이 소리에 은월이 발끈 화를 냈다.

《원 철딱서니도, 그게 어디 너 하나의 문제냐. 너의 서방때문에 우리가 온통 벼랑끝에 밀려났는데도? 아유- 참.》

《엄마, 너무 그러지 마. 생각할거야 생각해야잖아요.》

설희는 자기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폈다 하면서 샐쭉한 표정으로 문희를 바라보더니 방에서 나갔다.

송건호는 다시 마누라를 제지하면서 애써 부드럽게 설복하려고 했다.

《너도 아는지 모르겠다만 진수가 빨갱이라는 소문이 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럴수가 없어요! 그건, 그건 거짓말이예요.》

문희는 금시 눈물이 글썽해지며 항의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남다른 사고방식과 그의 집요한 투쟁을 회고할 때 거기에는 그 어떤 전혀 뜻밖의 동기라도 숨어있지 않았을가 하는 의혹도 들었다.

건호는 담배를 피워물더니 온 얼굴에 연기를 들쓴채 말을 이었다.

《중요한건 진수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데 있는게 아니다. 민규석은 말할것도 없고 모든 나의 적수들은 그가 빨갱이기를 바라고있고 그렇게 말을 돌리고있어. 그래서는 나를 꺼꾸러뜨리려는거야. 민규석이는 내가 빨갱이사위를 추동질해서 저를 사회적으로 두들겨놓고는 내가 제 회사를 망치려고 덤벼치다가 들통이 났다고 마구 떠들고있는 판이고, 사방에 통보를 해서 나를 고립시켜 말려죽이려고 하는 판이야. 그러니 어떡하니, 새로운 출로를 열어줄 흥업소도 없고. 봐라, 이렇단 말이다. 꼼짝 못하고 망하게 됐다.》

여기서 사면초가에 빠진 절망적인 송건호는 방바닥을 멍하니 굽어보는 전처의 딸을 피곤한 눈길로 바라보며 비극배우처럼 애처로운 소리를 했다.

《진수가 일으킨 소동이 이렇게까지 번질줄은 나도 몰랐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겠니. 네가 내 자식이라면 너에게 주저할 리유가 없다는거야. 너의 운명이자 우리모두의 운명이야. 네가 그 사람과 리혼하면 나는 다시 체면을 회복할수 있고 우리모두가 펴일 희망도 있어.》

통통한 손가락에서 금강석반지를 뽑았다끼였다 하면서 남편과 문희를 번갈아 살펴보던 은월이 인차 말을 받았다.

《정말이지 네가 속을 앓는걸 생각하면 나도 밤잠이 안 온다. 그 사람은 아마 온 일생 소동이나 피우고 감옥에나 드나들면서 너를 말리워죽일게다. 무얼 재여볼게 있니? 눈을 꺽 감고 갈라지는거야. 너는 아직 새파랗게 젊었겠다, 우리가 든든히 뒤받침해주겠다, 번쩍거리는 남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니지 않을라구. 난 벌써 둬군데 봐두고있어.》

문희는 가슴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남편은 그런 혐의까지 받게 되였으니 이제는 그를 저항의 길에서 돌려세워 안전한 가정생활을 회복해보려는 소원도 이루기 어렵게 되였다는 허무감, 자기 가정이 철저히 파탄돼야만 아버지가 다시 솟아날수 있다는 괴로운 모순, 세상의 불의에 항거하여 제 몸을 깨면서 그렇게 싸우는 남편을, 어찌보면 진실로 슬기롭고 남아다운 사람을 강요에 못이겨 혹은 경솔한 실수로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애절한 두려움 등이 한데 뒤엉켜 심장을 비틀어짜는것만 같았다.

그러자 마음속 깊은 밑바닥에서는 간혹 그 존재가 희미하게 느껴지던 하나의 설명할 길 없는 감성이 묵은 상처의 아픔처럼 뜨끔하게 살아오더니 순간에 맹렬한 불길처럼 숨막히게 퍼져올랐다. 그것은 먼 옛날에 아버지와 영원히 갈라지던 젊은 어머니가 눈물을 쏟으며 어린 그의 온몸에 미친듯이 입을 맞추고 황황히 집을 빠져나가던 그 무섭고도 놀라운 밤이후로부터 느낀,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자기는 운명적인 고독속에서 거지처럼 죽을것이라는 한없는 애수였다. 문희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지르더니 아이들과도 같은 애원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무의식중에 강은월의 무릎에라도 얼굴을 묻으려고 엉거주춤히 일어나다가 급히 돌아앉아 의자등받이에 낯을 부비며 울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처절하여 아버지도 속이 언짢아 젖어오는 눈을 슴벅거렸다. 그러나 계모는 문희가 우는것은 마침내 리혼을 결심한때문이라고 못내 다행스러워하면서 그의 떨리는 잔등을 쓸어주며 달래였다.

《내 가슴도 찢어진다. 우리가 아무렴 널 과부로 남겨두겠니. 이젠 그만 새살림만 하면야 리혼상처 같은거야 뜸자리 아물기지.…》

문희는 벌떡 일어나 젖은 눈으로 계모를 쏘아보더니 손수건으로 급히 얼굴을 닦으며 쏘아붙였다.

《누가 내 걱정을 하래요? 어쩌문 그렇게…》

그는 울분을 가까스로 삼키더니 아버지는 보지도 않고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송건호가 급히 따라나오며 위협적으로 다짐을 놓았다.

《시키는대로 안했다만 봐라, 혼쌀을 내겠다!》

문희는 착잡한 생각에 잠겨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갔다. 한참 달리다싶이 걸어가던 그는 먼 등불빛에 주위가 투명해진 곳에서 어떤 남자가 엇갈려 지나가다가 자기를 돌아보는것을 느꼈다.

《가만, 혹시 재일이 어미가 아니냐?》

어덴가 귀에 익은 로인의 목소리가 저어하면서 물어왔다. 먼 불빛으로 중절모에 회색양복을 입은 상대를 눈여겨본 문희는 그가 충청도 시골에 사는 시아버지인것을 알고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버님, 언제 오셨어요? 어데로 이렇게…》

《그래, 옳구나. 오후차에 왔다.》

정재만로인은 반가와하는 기색과 함께 깊은 한숨을 쉬며 개탄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놈의 자식 또 잡혀갔다면서? 윁남엔지 끌려간 인수때문에 속이 까맣게 질려있는데 진수까지 이럴줄이야. 경찰서에 가서 그놈 자식 얼굴이라도 보자고 몇시간이나 사정사정했는데 거들떠보기나 해야지. 그래 너의 집에 들렸다가 사둔령감이라도 만나 화풀이라도 하려고 찾아가는 길이다. 내사 너를 보기가…》

정재만로인은 어지간히 달아오른 모양인지 중절모를 벗어 부채질을 하면서 선자리에서 바장이였다.

《그러지 마시고 저희 집으로 가십시다.》

문희가 권했으나 로인은 제 말만 했다.

《참 어쩔수 없는 놈이라니까. 넌 왜 그놈 고삐를 단단히 쥐질 못하고, 정신없는 놈이지. 대학다닐 때야 홀몸에 두려운게 없어 그랬다치더라도 인제야 처자 거느린 놈이 제 발밑은 보지 않고 얼이 쑥 빠졌지. 내 좀 손을 써봐야지. 어서 가보라구.》

송건호가 자기를 어떻게 랭대할지 짐작도 못하는 정재만은 저에게 무슨 큰 힘이나 있는듯이 사돈집을 찾아 활개를 치며 걸어갔다. 로인은 아들을 개탄하면서도 그의 모든 점을 본능적으로 리해하고있었고 량심이 명령하는바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대는 그 기질을 자랑으로까지 여겼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이 세상은 너무도 험악해서 량심을 드러낸다는것은 죽음을 자청하는것이나 같았다. 그러기에 시골에서 몇몇 줄을 거쳐 아들의 사건을 대충 알게 된 그에게는 진수가 범앞에서 게잡이를 하는 철부지로만 보였다. 그런 철부지에게 아버지로서 이 모진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 하나 배워주지 못한것이 후회막급이였다. 그런데 같은 서울에서 떵떵거리며 산다는 사돈이라는 사람은 어째 제 사위가 이 지경에 빠질 때까지 눈을 감고있었단 말인가? 정재만은 이 점이야말로 들이댈만 한 문제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이런 사고방식을 알리 없는 문희에게는 이 로인까지 제 아들의 처사를 개탄하고있다는 사실만이 커다란 의미를 띠였다. 그 녀자는 큰길에 흐르는 자동차의 불빛과 가로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이게 무슨 생활인가? 이대로는 못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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