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제 7 장


36


문희가 미술에 대한 취미와 창작능력을 가지고있는것은 어느모로보나 다행한 일이였다. 난생처음으로 체험하는 최하층의 생활이 무자비한 징벌처럼 무서우면서도 새로운 출로를 찾지 못하고있는 그는 자신의 불행을 과장하고 자기를 경멸하면서 운명을 그르칠 위험성이 많았다. 누구나 이러한 때에는 자기에게 어떤 유익한 능력이 남아있다는 자긍심을 찾아내야 하며 거기에 의지해서 불행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희에게는 미술창작이 자기를 지탱케 하는 마지막수단이였다.

마을길이나 혹은 들판에 나가서 화구들을 펴놓는 때면 달가운 흥분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울적하고 불안한 생각들이 아침안개처럼 가셔지면서 마음은 투명해지고 섬세한 감각으로 충만되군 했다. 세월의 파도에 부대껴 기울어가는 초라한 초가집들, 장독대아래에서 해빛을 쪼아먹는 어미닭과 솜털이 보르르한 병아리들, 푸르뎅뎅한 장구배에 다리가 꼬챙이같은 아이들, 살기를 풍기는 군용시설에 무참히 깔리워 모지름을 쓰면서 죽어가는듯 한 황페한 전야, 흘러내린 돌들과 모래에 메꿔진 개울에서 사라진 물줄기를 더듬어찾는듯 무성한 가지를 드리우고 서럽게 서있는 늙은 버드나무… 무엇을 보나 모든것이 자기의 시와 이야기, 음악을 가지고 그를 불렀다. 그런 때마다 문희는 그 모든것을 형상으로 옮기고싶은 조바심을 느꼈고 붓을 잡고 그리기에 열중하면 세상만사를 잊어버렸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부역에 나가거나 농사일을 도와준다던가 여러가지 잡일로 창작에 바칠수 있는 시간은 많지 못했으나 그런만큼 붓을 잡으면 즐거움은 더욱 컸다.

문희는 사실주의창작방법은 19세기적인 낡은 방법이라고 대학에서 배웠고 또 그렇게 믿었다. 그랬건만 이제 와서는 생활과 사실주의창작방법을 떠난 참다운 예술이란 빛이 없는 불이나 선률과 리듬이 없는 음악이란 말처럼 어불성설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과 다른 화가들이 그린 추상과 관념위주의 그림들을 회상할 때마다 조용히 도리질을 하며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생활과 대립되고 밀페된 화실에서 그린 병적인 관념의 날조품인 그 작품들에는 실제적인 생활의 언어란 한마디도 없는 무인지경의 어둠과 그속에 까무락거리는 악마적인 린광만이 어지럽게 보일뿐이였다. 그 작품들이 풍기는것은 공허나 합리적인 사색에 대한 파괴가 아니면 미신적인 불안이거나 사람들을 실제생활과 사회관계로부터 홀려내여 환상적인 쾌락의 나락에 밀어붙이는듯 한, 미칠듯 한 번열감 같은것이였다. 이런 그림앞에서 일반관객들은 마치도 연회나 놀이에 초대를 받아갔다가 뜻밖에도 놈팽이들에게 모욕을 받은듯 한 표정이거나 아이들의 락서를 보는듯 한 얼굴이다.

어느 한 화가가 목격담이라고 하면서 전한바에 의하면 어물점에서 품팔이군이 화보종이에 고기 한두마리를 싸다가 거기에 실린 유명한 그림을 보고 한다는 소리가 《아이코, 더럽기도! 이런데 쌌다간 고기가 당장 변하겠구나.》 하고 쯧쯧 혀를 차며 휙 집어던지고는 새끼줄에 고기를 묶어들고 가더라고 했다.

문희도 들은바 있는 이 이야기는 한때 화가들사이에서 좋은 화제거리가 되였다. 그들은 그 품팔이군을 두고 잘들 비웃어대군 했다. 그러나 그 웃음은 하늘에 침뱉기였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 품팔이군이야말로 모든 사이비예술가들의 코대를 대패로 통쾌하게 밀어놓은 진짜 평론가였다. 문희는 또한 전람회에 내걸었던 자기의 그림들을 관중이 경멸하는것을 목격했던 일을 잊을수 없었다.

시골에 온 문희에게는 그 추상의 세계가 이미 열병환자의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 생활은 사방에서 파도쳐오면서 진실을 보라고 소리높이 웨쳤다. 그는 감동하고 순종했다. 그러자 그의 재치있는 손에서 이루어진 사물의 형상들은 다듬어진 형태미와 색조를 자랑하면서 그의 의식속에 건전한 사고의 씨앗들을 수없이 뿌려주는것이였다. 생활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리는 과정에 그 사물현상들이 품고있는 생성의 비밀과 존재리유며 무릇 생명이 파괴와 죽음에 저항해서 자기를 주장하고 완성하려고 벌리는 끝없는 투쟁의 세계를 엿볼수 있었다. 해빛을 찾아 흙속에서 돌멩이를 들치고 일어서는 어린 싹들은 얼마나 정당하고 장한가! 모진 가뭄과 싸우다가 소낙비에 젖는 땅과 초목들의 흐릿하게 번들거리는 그 미소속엔 얼마나 거센 생명력이 숨쉬는가.

문희는 각이한 생명의 열기와 아름다움을 감각하고 그리는것이 즐거웠다. 거기에는 귀보다 가슴에 들리는 부드럽고도 힘찬 노래와 호흡이 있었는데 그것이 느껴질 때면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현상은 결국 삶, 창조, 아름다움을 한편으로 하고 죽음, 파괴, 추악을 한편으로 하는 치렬한 투쟁이라는 생각과 함께 자아중심의 리기욕에 포로되여 뭇사람들의 불행을 본체만체했던 자신의 지난 생활태도가 일종의 추악이였구나 하는 느낌이 갈마들군 하였다.

만국지도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어느날 오후였다. 문희는 느린 경사를 이루어 휘우듬히 솟아오른 마을앞 둔덕우에서 여윈 황소로 자갈밭을 갈아엎는 농부를 그리고있었다. 보습날이 굵은 돌에 걸릴 때마다 볼품없이 낡은 농립모를 뒤머리에 얹은 중년의 건장한 농부는 열어헤친 땀투성이가슴으로 보습을 밀며 모지름을 썼고 황소도 땅을 받아버릴듯 대가리를 숙이고 거센 숨을 몰아쉬였다.

농부는 이미 약속이 됐는지 문희앞으로 지나갈 때면 한순간씩 소를 멈추고 정지상태의 모습을 보여주군 했다. 그럴 때면 문희는 달려나갈듯 한 긴장된 자세로 온 시력을 농부와 소에게 쏟았다.

신비로운것을 발견한듯 둥그래진 눈은 불꽃을 튕기다가도 말 못할 환희를 즐기는듯 다시 실눈을 짓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상의 전체적인 인상과 특징을 포착하며 모든 세부를 샅샅이 더듬고는 화판에 달라붙어 성급하고도 섬세한 붓질로 색갈을 입혀나갔다. 그는 보습의 손잡이에 가슴을 얹고 발로 대지를 벋디디며 줄땀을 쏟는 농부와 드센 코김으로 먼지를 날리는 황소에게서 삶과 생활의 열정을 느꼈고 그것을 화폭에 옮기려고 고심하였다.

그런만큼 그림은 퍽 인상적인것으로 돼가고있었다. 그러나 문희가 그려내는 선과 색갈에는 아직도 낡은 화풍의 잔영이 남아있는데다가 감정을 맵짠 사색으로 휘여잡아 려과하고 정제하는 기량이 미숙해서 군데군데 과장된 세부묘사가 주제를 해치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였다.

문희는 벌써 몸을 뒤로 제끼고 그림과 농민을 대조해보면서 흡족한 기분으로 완성작업을 하고있었다.

이때 마을쪽에서 서너명의 어린 학생들이 달려오고 그뒤로 색이 바랜 검정치마차림에 아기를 업은 키큰 녀인과 양복차림에 흰 구두를 신은 작달막한 젊은 녀인이 급히 걸어오고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우리 학급 선생님이 왔어요.》

눈길이 어른처럼 심중한 발을 벗은 소년이 벌씬 웃으며 문희에게 인사를 하자 다른 아이들도 인사를 하고 그림에 모여들었다. 문희는 발벗은 소년의 더부룩한 머리를 만져주며 반겨맞았다.

《남철이는 아직도 맨발이구나. 내가 사준 신 맞지 않던가요?》

남철이는 먼지가 보얗게 오른 한쪽발로 다른 발을 비비적거리며 혀아래소리를 했다.

《어머니가 학교갈 때만 신으라고 그래서…》

뒤미처 다가온 키큰 남철의 어머니가 종이에 싼 두툼한 꾸레미를 문희에게 보이며 문희도 알고있는 남철이네 담임선생을 치하했다.

《남철이네 선생님과 학생들이 글쎄, 우리가 불쌍하다고 남철이한테 이런 선물까지 가지고 왔군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겠어요. 문희선생님이 그렇게 왼심을 쓰시더니…》

꾸레미를 받아 땅에 놓고 펼쳐보는 문희에게 녀교원이 갈린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지도하여주신 남철의 일기를 읽고 나도 학생들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모두들 남철이를 조금이라도 도와주자고 푼푼이 모은 돈으로 얼마 안되지만 이런걸 사가지고 왔지요뭐. 남철의 어머니는 선생님께 먼저 보여드리겠다고 어찌나 서두르는지…》

문희가 꾸레미를 펼쳐보니 그속엔 각종 연필과 공책을 비롯한 여러점의 학용품이 들어있었다.

《아주 훌륭하고 좋은 일이예요. 불쌍한 제 동무를 돕는 그 마음들이 정말 보배같군요!》

문희가 밝게 웃으며 녀교원과 학급대표로 온 꼬마들을 칭찬하자 남철의 어머니는 눈물이 북받쳐올라 무슨 말인가 하려던 말도 못한채 머리를 외로 꼬고 조용히 울었다.

남철이네는 문희네 옆집에 사는데 살림이 말할수 없이 구차했다.

남철의 아버지가 심장병이 위독한 상태여서 어머니와 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는 남철소년이 부자집 돼지 다섯마리를 맡아 길러주는 품삯으로 여섯식구가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있었다. 5리나 되는 읍에서 뜨물을 날라다가 돼지를 길러야 하는데 노상 굶주리는 몸으로 그일을 한다는것은 말그대로 죽을내기였다. 그렇게 날라온 뜨물에서 찌꺼기를 건져 수제비부터 끓여먹어야 했다. 그것도 못 먹는 때가 많았다. 남철소년은 몇번이나 학교에서 졸도했다. 가난한 집 학생들은 순번제로 남철이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그것을 받을 때마다 소년은 거기에 담긴 동무들의 눈물과 함께 자기의 눈물을 마셨다.

문희는 어느날 남철소년을 모델로 그리다가 그 집과 사귀게 되여 이것저것 도와주게 되였다. 세 아이의 맨발에 신도 사다 신겨주었고 읍에 가는 기회가 있으면 환자에게 약도 사다주었다. 그중에서도 잘한 일은 남철소년에게 일기를 쓰는 습관을 붙여주고는 거의 매일같이 소년이 고통스럽고 설음많은 생활을 사실그대로, 느낌그대로 쓰도록 곁에 붙어앉아 지도해준것이였다. 비오는 날에 뜨물을 이고 온 어머니가 설음에 겨워 목놓아울 때 그때까지 배고파 칭얼거리던 어린것이 울음을 뚝 그치고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준 이야기, 피땀으로 번 품삯을 집달리에게 세금으로 빼앗긴 날 밤에 온 식구가 잠들지 못하고 랭수만 자꾸 들이킨 이야기… 문희도 함께 울면서 지도해준 일기들이 많았다.

남철소년은 학교에서 과제발표시간에 울먹울먹하면서 몇번이나 자기의 일기를 읽었는데 그때마다 온 교실은 울음판이 되였다.

문희가 덕담을 하면서 선물꾸레미를 남철의 어머니에게 넘겨주었다. 녀교원은 남철소년은 장차 훌륭한 작가로 될거라고 했다. 그리고 남철이는 아버지의 병도 고치고 모든 앓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고 벼르고있노라고 했다. 그 말에 남철의 어머니도 웃었는데 눈에는 또 눈물이 가랑가랑했다.

그들이 이러고있는 사이에 지나가던 농부 세사람이 다가와서 아이들과 함께 문희의 그림을 보면서 한마디씩 했다. 벗어진 가무잡잡한 이마에 커다란 상처자리가 꺼멓게 남아있는 작달막한 농민이 한손으로 무릎을 철썩 치며 감탄했다.

《히야, 그것 참 재간인데! 소도 사람도 막 살아서 씩씩거리는것 같구만, 엉, 여기 이 왕사발눈을 지릅뜬 소대가리 좀 봐. 받기우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리겠는걸!》

《허, 이런, 저 울뚝이 최서방도 그림에 오르고보니 거참, 무서운 장수같구만.》

벋이가 나서 한쪽입귀가 들썽한 키가 후리후리한 농민이 칭찬에 수줍어져서 얼굴을 숙일사하고 웃고있는 문희를 곁눈질하며 이렇게 말하더니 긴 목을 빼들고 왜가리소리로 밭갈이군을 불렀다.

《이 사람, 영팔이! 좀 와서 보라구. 자네 이거 어떻게 된거야? 미꾸라지가 룡이 됐어!》

아이들도 그림에 취해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녀교원은 한순간 눈을 빛내며 그림을 황홀히 바라보더니 문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주 대단하군요. 뭐랄가, 로동이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다 찌르르하군요. 학교에도 이런 그림을 걸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직 손이 서툴러서… 이건 아직 초안이니까 다시 크게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그려야 해요. 혹 소용되신다면 이 초안이라도 후에 더 손질해서 드리죠.》

문희가 이렇게 호응하자 교원과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이럴 때 밭갈이군이 소를 멈춰놓고 와서 땀내를 풍기며 그림앞에 털썩 앉더니 바지주머니에서 담배꽁초와 성냥을 꺼내들면서 그림에 눈을 주었다. 순간 놀라서 긴장한 그의 얼굴은 성난것처럼 되더니 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새로운 그 무엇을 응시하는듯 눈길이 생각에 젖어들었다. 그는 한동안 정신없이 그림을 바라보더니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여물고 문희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고맙수다! 농사군을 알아봐주시니!…》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린 밭갈이군은 다시 그림을 보면서 말했다.

《저렇게 힘들게 갈고 씨를 뿌리고… 이렇지요. 분한거야 다 말해 뭣하겠소. 차라리 보습으루 땅을 갈것 없이 세상이나 푸욱 푹 갈아엎었으면 시원하겠소!…》

《최서방, 자네도 눈이 있다고 보긴 보누만. 그 말 한마디는 잘했어!》

번대머리농민이 참견했다.

《나도 이 그림을 척 본즉 피뜩 그 생각이 나더라니까.》

문희는 농민들이 주고받는 소박한 말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는 미처 다 깨닫지는 못하면서도 자기의 창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공감과 높은 평가를 받아본 일은 일찌기 없었다고 생각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예술의 진미를 모른다는 말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말인가! 이 고장에 와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곁에 다가와서 좋아하면서 정직한 말로 격려해주던 남녀로소의 얼굴들을 잊을수 없는 문희는 예술과 생활과 창작과의 일체성을 처음으로 배우는 심정이였다.

문희가 이렇게 보람있는 한때를 보내고있을 때 마을쪽에서 검정옷을 입은 중키의 중년남자가 스적스적 걸어오더니 사람들의 뒤에 서서 저으기 놀란듯 한 얼굴로 그림을 보았다. 그림에서 부족점을 찾아 붓질을 하던 문희는 우연히 그 남자를 보고 흠칫 놀라며 얼결에 탄성을 지르고는 그의 손을 잡고 무척 반가와하였다.

《아이, 강동혁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세요. 어떻게 여길 다 오셨어요?…》

《어떻게가 아니라 내가 너무 늦었습니다.》

피로한 빛이 보이는 강동혁은 침착한 눈매로 문희의 쾌활한 모습과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뿌리며 말했다.

《그림이 괜찮은데요. 많은걸 생각케 합니다.》

문희는 금시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렸다. 동혁의 출현은 하나의 타격이였다. 생각하기에도 괴로운 남편의 일이며 서울에서의 온갖 소란과 골치거리가 가슴을 때렸다. 그 녀자에게는 원래부터 화목하지 못했던 가정에 사회의 쓰거운 바람을 몰아넣은것도, 남편을 가난한 사람들속에 자꾸 끌고 가서는 소동의 앞장에 내세운것도 동혁의 소행처럼 생각되였다.

문희는 그를 너무 반갑게 맞이한것을 후회하면서 뚝한 얼굴로 널어놓은 화구들을 주섬주섬 모아 가방에 챙겨넣었다. 동혁은 별로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그림을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동혁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문희에게 인사를 남기고 흩어져갔다. 문희는 가방속에서 종이에 싼 꾸레미를 꺼내들고 소있는데로 가는 최영팔농민에게로 뛰여가더니 꾸레미를 넘겨주며 말했다.

《고마와요. 담배예요. 거절하심 안돼요.》

정말 농민은 손을 내두르며 거절했으나 문희는 억지로 안겨주고 총총히 돌아와서는 동혁의 량해도 구하지 않고 그림까지 거두었다.

《다른데 보실 일이 있어서 오셨겠지요?》

《곧바로 문희씨를 찾아왔습니다. 피나무아래에서 어머니를 만나 얘기도 해봤습니다. 참, 좋은 어머니이시더군요.》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면… 집으로 들어가실가요?》

《뭐 여기도 괜찮군요. 저켠 오리나무아래로 가실가요?》

《…》

《화구는 제가 들지요.》

《무겁지 않아요.》

그들은 풀기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가뭄에 노랗게 타는 감자밭머리에 기우듬히 서있는 늙은 오리나무아래로 갔다.

노상 시간을 분으로 쪼개여쓰면서 분망하게 지내는 동혁이 문희를 찾아 서울에서 이 시골에까지 찾아오게 된것은 그만큼 진수와 문희의 불행이 그의 가슴에 무겁게 얹혀있기때문이였다.

오리나무아래에 가방을 놓고 앉은 동혁은 문희가 서너걸음사이를 두고 엇비슷이 등을 돌리고 덤덤히 앉는것을 곁눈으로 살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두를것 없이 곧바로 말하지요. 사태가 이렇게 된건 속을 터놓고 문희씨를 부축해주지 못한 진수의 잘못이구 그 사람의 친구라는 내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문희씨도 자중해야 할걸 그랬어요. 글쎄, 머리가 커다란 사람들이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 문제라면 시간랑비로 될거예요. 다 끝난걸 얘기하고싶지도 않아요.》

문희는 이렇게 찾아온 동혁이가 고맙기도 했으나 그에 대해서 품고있던 반감을 삭일수 없어 일부러 쌀쌀하게 대했다.

《끝나다니요? 처자도 직업도 집도 없이 수렁창을 헤매는 진수를 생각해보십시오. 문희씨도 아이까지 데리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는 끝날수 없습니다. 난 그래도 문희씨가 고생을 겪는 사이에 값있는 교훈을 찾고 참다운 지성이란 사회를 거쳐 자기를 보는것이라는것쯤은 깨달을줄로 알았습니다.》

불행으로 자존심마저 상한 문희는 투정질하는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두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반갑지 않은 동혁이 틀림없이 째이고 위력한 론리를 펼것인데 그의 말이 정당하고 감동을 주는 경우에도 호락호락 휘여들어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다른 하나는 이 사람은 틀림없이 나를 미워하고 경멸하고있을것이므로 그 반감이나 솔직히 털어놓게 해야 이 괴로운 이야기를 빨리 끝낼수 있겠구나 하는 판단이였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재일이 아버지에 대해서 자꾸 말씀하시면 공연히 절 괴롭힐뿐입니다. 그리고 부탁은 저를 동정하지 않았으면 하는거예요. 친구를 버린 미운 녀자를 동정하신다면 위선이 아니겠어요?》

문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동혁쪽을 언뜻 돌아보았다. 담배를 붙여문 동혁은 생각에 잠겨 나무잎사귀를 한잎두잎 뜯고있었다. 문희는 말을 이었다.

《그래요, 제가 듣고싶은건 저에 대한 비판이예요. 혼자 살자면 자신을 더 잘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정말 아주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솔직히 말하지요.》

동혁은 기여가는 딱정벌레에게 돌부스레기를 하나하나 집어던지며 조용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부자집 따님이고 유한계층의 생활을 행복으로 동경한 문희씨를 진수의 좋은 〈배필〉이라고는 보지 않았어요. 진수가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서 싸우면 싸울수록 두분은 서로 상대를 용납하기 어려우리라는것도 예상했지요. 사실 문희씨는 이렇게 한심한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이쯤됐으면 내가 화김에 진수에게 뛰쳐나간 녀자따위는 돌아볼 가치도 없다, 이 기회에 인연을 깨끗이 끊어버리라고 추동했다고 해도 큰 잘못은 아니였겠지요. 그러면 일은 끝났을겁니다. 그러나 그건 진수의 치욕이고 패배지요. 문희씨에게는 가치있는 인간으로 될수 있는 마지막가능성마저 포기하는 죽음이구요.

나는 이런 장난을 참을수도 용서할수도 없습니다. 문희씨가 미울수록 세상을 그렇게도 볼줄 모르는 그 사고방식과 자기를 학대하는 그 처사가 가슴아팠습니다. 그러나 더 한심한건 진숩니다. 그 사람이 만약 민중을 위한 전위적인 투사로 솟아오를 재목이라면 응당 자기 안해부터 참다운 인간으로 개조했어야 했지요. 안해는 구원하지 못하면서 사회악은 참을수 없다고 떠든다면 이거야말로 위선이 아닐가요? 문희씨의 탈가는 이 점에서 남편을 친구들뿐아니라 그 사람을 미워하는 모든 범죄자들앞에서 또 한번 무섭게 타격하여 쓰러뜨린거나 같지요. 지나친 말일가요? 과장했다면 시정해주십시오.》

문희는 동혁의 한마디한마디가 무척 아프면서도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항의할 구실을 찾기에 급급했다.

《말씀이 다 옳다고 해둡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세상과 싸워서 얻을것이 무엇인가요? 불행밖에 더 있어요? 나도 범죄자들을 미워할줄 알아요. 그렇지만 싸우는것도 때를 맞춰야지요. 꽃이 피는것도 계절이 있지 않아요? 다시 4.19같은 큰 싸움이 터져서 거기에 뛰여든다면 뭐가 나쁘겠어요. 그러나 때도 가릴줄 모르고 유독 혼자 앞장에 나섰다가 숱한 불행만 벌어들이는것은 우둔이지 뭐예요? 전 그런 불행은 견딜수 없어요. 내가 제 생각만 해서 그런진 몰라도 그것만은 견딜수 없단 말이예요.》

얼굴을 수굿하고 문희의 말을 주의깊이 들은 동혁은 밋밋한 산마루너머 짙은 구름속에 꺼져가는 불깃한 저녁해를 노려보며 말했다.

《옳습니다.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장서서 민중을 깨우치고 피흘려 싸우면서 세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없다면 4.19도 없었을겁니다. 어려운 때에 싸우는 사람이 영웅입니다. 진수를 두고보아도 그렇게만 싸우는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르긴 하겠습니다만 얼마나 장한 사람입니까. 대중은 진수를 사랑합니다. 문희씨가 곁에서 그 사람을 지켜주고 부축해주었다면 우리모두가 얼마나, 얼마나 큰 고무를 받았겠습니까! 더두말고 모든 녀인들이 눈물을 머금고 참된 사랑의 의미를 배웠을겁니다!》

동혁은 긴 동안을 두었으나 문희는 세운 무릎을 두팔로 안고 생각에 잠겨 대답을 못했다. 동혁의 말은 껑충 비약했다.

《우리는 문희씨에게 그런 좋은 어머님이 계신다는걸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건 부탁입니다만 아버지만 생각지 마시고 어머님의 딸이란걸 잊지 말아주셨으면! 누구의 편에 설것인가? 불행한 어머님을, 어머님의 백발을 잊지 마십시오!》

문희는 놀란듯 커다랗게 뜬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동혁을 돌아보았다.

선량한 우정으로 빛나는듯 한 그의 부드러운 얼굴빛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 녀자의 눈은 천천히 눈물에 흐려져갔다. 동혁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차시간때문에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희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마을앞을 거쳐 읍으로 가는 큰길에 이어진 오솔길을 걸었다.

《그 그림을 완성하십시오. 그 새로운 화풍이 얼마나 좋습니까.》

동혁은 뒤켠에서 수굿하고 따라오는 문희를 간신히 돌아보며 말했다.

《그 그림을 보니까 훌륭한 예술은 역시 인간생명에 대한 열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밭갈이군이 성난것은 얼마나 정당합니까! 바로 그겁니다. 진보적인 리념이 사회제도와 충돌하는 세상에서는 생명의 존재방식이 반항입니다.》

《존재방식이 반항이라구요?》

문희가 반문하자 동혁은 돌아서서 밝은 얼굴로 《물론이지요. 창조를 위한 반항이지요! 그것이 삶의 의미고 아름다움이 아닐가요!》하고 대답했다.

창조를 위한 반항! 문희에게는 이 말이 우렁찬 종소리처럼 온 마음을 세차게 뒤흔드는듯싶었다. 동혁은 밝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문희는 한걸음 다가섰다.

《잠간 들려가세요. 저녁이라도 잡숫고…》

《나같이 미운 사람이야 대접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그 따뜻한 말을 고생하는 진수에게 해주셨으면!… 그 사람은 아마 끼니때마다 문희씨와 재일이를 생각할겁니다. 밥인들 목에 넘어가겠습니…까!》

롱담을 하는것만 같던 동혁의 미소어린 눈에 맑은 눈물이 피여올랐다. 그 눈물을 본 문희는 속에서 뜨거운것이 치밀어올라 끝내 돌아서서 얼굴을 싸쥐였다. 한순간이 지난 후 동혁은 또 한번 인사말을 남기더니 급하고 힘찬 걸음으로 떠나갔다.

문희는 심란한 기분을 삭일수 없어 황혼이 사라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있다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동혁의 밥까지 담아놓고 기다리고있던 윤필녀는 혼자 들어온 딸을 나무람하더니 선반우에서 파라핀종이에 싼것을 내리워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 강씨어른이 글쎄 나한테와 재일에게 선물까지 사오지 않았겠니. 얘기를 해보니 마음이 얼마나 어질고 깊은지. 그런 사람을 그냥 보내다니…》

포장지를 풀어본 문희는 그 선물이 어찌나 생활적이고도 재미있는것이였던지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그러나 그 웃음뒤에 오는것은 끝없는 생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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