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8 장


38


매국노 박정희는 미국상전들의 비호밑에 1969년에 들어서면서 나라와 민족을 모욕하는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있었다. 자신이 권력의 자리에 무제한으로 틀고앉으려는 이른바 《3선개헌》책동이였다.

두차례나 강제와 협잡으로 《대통령》을 해먹고있는 그는 계속 더 눌러앉을 야심으로 《법》까지 뜯어고치려는것이다.

박정희는 권력에 틀고앉은 첫날부터 영구집권을 노리고 모든 준비를 다해왔다. 련속적인 《특혜》놀음으로 매판재벌을 키워 틀어쥐고 민주공화당과 《국회》의 요직에 자기의 심복졸개들을 채운 박정희는 매국적인 부정행위로 숱한 돈을 긁어모았으며 이 돈으로 미국과 일본의 정계에 자기를 비호해줄 세력을 확장하였다. 한편 권력구조안에서 적수들과 반대파들을 제거하면서 사회전반을 파쑈폭압의 그물로 뒤덮어왔다.

이러한 준비에 토대하여 박정희는 《공화당의원총회》라는것을 열고 《3선개헌안》을 시험삼아 내비쳐보았는데 그사이 막후공작으로 거지반 삶아진줄로만 알았던 강경주류파가 강하게 반발해나섰다. 당안에서까지 그 형편이니 그 야망을 사회에 공개하는 경우에는 민중과 재야인사들의 맹렬한 배격을 받을것은 뻔했다. 방도는 탄압을 강화하는것뿐이였으나 그것은 반항을 더욱 격화시킬것이였다.

민중에게는 사회의 민주화가 사활적인 요구였다. 세상을 다소나마 아는 사람은 누구나 박정희를 미워하고 저주하면서 인민의 락원을 건설하고 자주통일을 부르는 북녘사회를 희망으로 바라보며 그리워하였다.

이래저래 박정희와 그 상전들에게는 앞길이 캄캄했다. 그러나 남조선을 북을 침략하기 위한 전략적인 교두보로만 알고있는 미국의 전략가들은 자기의 정책을 바꾸거나 궤도를 버릴수 없었다.

2월 어느날 미국대사관 복도로 죤 버클이 걸어가고있었다. 번들거리는 서류가방을 든 그는 힘없는 느린 걸음으로 허리를 약간 구부정하고 걸어가다가 어느 한 둔탁한 가죽문앞에 이르렀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서류를 든 은발의 젊은 녀자가 제 흥에 들떠 급히 나오다가 버클과 부딪쳤다. 그 녀자는 실수가 즐거운지 눈을 치떠빨며 요망스럽게 웃었으나 버클은 담담히 물었다.

《케인즈씨 계시는가?》

《계세요. 손님도 와있고…》

그 녀자는 샐쭉해서 저쪽으로 갔다. 버클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응접실을 거쳐 널직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일등서기관 케인즈는 ㄱ자형으로 놓인 번들거리는 커다란 책상너머에 앉아서 창문턱에 기대여 자빠듬히 서있는 진한 아마빛머리의 뚱뚱한 사나이와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버클은 일등서기관인 케인즈가 정보사업을 지휘하고있는 자기의 상관이여서 자주 만나는 사이였으나 창가에 선 사나이와는 초면이였다. 말머리처럼 길죽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한 케인즈는 버클에게 반롱조로 《죽음의 상인 함슨각하》라고 손님을 소개하면서 대만에 다녀온 견문담을 듣던중이라고 설명했다.

함슨은 쏘파에 앉은 버클을 언뜻 살펴보고는 사색하는 표정으로 돌아가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만합시다. 요컨대 대만이란 무엇이겠나. 미국의 아시아정책의 실패에 대한 립증물이거던. 대륙에서 쫓겨나서 섬이나 물어뜯고…

그런데 대만엔 무슨 놈의 백발장성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장총통을 비롯해서 온통 왕별무게에 허리굽은 로페우 같은것들이 본토에서 호랑이질하던 옛꿈에 잠겨 하얗게 늙어가는데 똑 서리맞은 메뚜기같더라니까.》

《자네의 비판론은 그닥 아름답지 못한것 같은걸.》

케인즈가 빈정거리자 함슨은 자기의 말을 주의깊이 듣고있는 버클쪽을 살피고나서 손세를 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판론이라니, 천만에. 분해서 하는 말이야. 그 무졸장군들의 백발이 미국의 대아시아전략가들의 무능에 대한 고발이고 조롱이 아니란 말인가? 정신을 차리게.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코흘리개학동들까지 경멸하는 박정희따위나 붙들고… 자네들은 그를 종신〈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한다지?》

《자네에겐 균형에 대한 감각이 없구만. 좋지 않아.》

케인즈가 직업적인 냄새를 내자 함슨은 실눈을 쪼프리고 그를 노려보더니 무뚝뚝하게 응수했다.

《자네는 머리가 퇴화됐구만, 나를 옛날 동창생으로만 아는가? 상관일수도 있다는걸 알아야지. 나는 이번 려행에서 받은 불쾌한 인상을 펜타곤에 보고할 일이 괴로와서 그런단 말요. 물론 〈한국〉형편에 대해선 딱한 점도 어느 정도는 감안해주겠소.》

함슨의 급작스러운 고자세는 케인즈뿐아니라 버클까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케인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훈시를 받는 부하의 자세를 취하였다. 함슨은 지능이 낮은 상대와 이야기를 한것을 헛일로 여기는듯 한 쓸쓸한 표정으로 한손을 내젓더니 버클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은채 방에서 나가버렸다.

자리에 주저앉은 케인즈는 어리뻥뻥한 얼굴이였다. 록키드회사의 리사진에 속해있는 무기상인인줄로만 알고 함부로 대한것이 실책이였다. 함슨이 미중앙정보국의 비밀임무를 지닌 비밀요원일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그럼 간단히 의논해봅시다. 박정희를 위한 〈3선개헌〉을 내밀기 전에 서울의 지식인들을 정리해야겠는데 동향을 다시 알아보자는거요.》

케인즈는 침울한 얼굴로 버클을 바라보더니 담배를 피워물고 말을 이었다.

《당신도 방금 보았지만 반대파들은 어디에나 있소. 그들 리상주의자들은 말로만 〈한국〉의 현 난국을 리해하는체 하지만 언제나 례외없이 모든 실패의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단 말이요. 그러나 닉슨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하고 어저께 대사는 백악관으로부터 또 훈령을 받았는데 무슨 수를 쓰던지 〈3선개헌〉은 실수없이 강행해야 한다는거요.》

버클은 대다수의 지성인들이 박정희를 증오하다 못해 경멸하고있어서 그의 인상을 호전시킨다는것은 매우 어려울것이라고 하면서 굳이 위안거리를 찾는다면 무자비하게 짓누르는 관권앞에 공포에 질린자들과 정치에 무관심한자들이 있는것뿐이라고 했다. 일등서기관은 반지를 낀 털이 부시시한 손으로 파랗게 면도질한 넙죽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기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명상에 잠길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하오. 밉든곱든 박정희는 미국의 대〈한국〉정치의 산물이요. 그보다 더 철저한 미국의 옹호자를 어데서 찾겠소. 우리는 그를 불도젤의 쇠판으로 삼아 〈한국〉사회를 우리의 전략적목표에로 최대한 밀고나가야 하오. 다른 방도는 없소. 이 말은 백악관이 보내온 훈령에 들어있는 구절이요.》

여기서 케인즈는 박정희에 대한 선전요령을 다시금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첫째로, 박정희는 강력한 북에 대한 주동적인 공격전략에 비추어 《한국인》들속에서는 가장 신임이 가는 경험있는 군인이였다. 둘째로, 외국자본의 대대적인 도입으로 경제의 자립성을 말살하면서 《근대화》를 강행하여 미국과 일본앞에 넓은 대통로를 열어놓았다는것, 셋째로, 박정희는 민족보다 반공을 우에 놓는, 오랜 세월을 거쳐 철저히 검열된 인물이며 이 점에서 그와 견줄 대상은 찾기 어렵다는것이였다.

《헌데 일반사회의 식자들은…》 하고 버클이 쏘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박의 친미행위를 매국행위로 보면서 더욱 날카롭게 공격하고있지요. 게다가 압도적다수가 이북을 바라보면서 통일을 갈망하고있는데 그속에는 반공정책에 대한 짙은 열증과 지어는 증오까지 깔려있다는 점도 고려해야지요.》

케인즈는 동감을 표시하면서 박정희의 《반공투사》로서의 장점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대상에 맞게 잘 풀이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둘은 곧 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개헌》취지를 공개하는 경우 앞장에서 반대소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학계와 언론계의 위험세력과 인물들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케인즈는 녀서기를 불러 각종 조사서류를 가져오게 했고 버클은 자기의 가방에서 인물별로 동향을 면밀히 적은 조사표를 내놓았다. 거기에는 하틀리가 작성한 언론계의 조사자료도 들어있었다. 그들은 대학들과 각종 학술연구단체, 보급단체들이며 대학생조직들, 언론출판계와 문학예술계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실무적인 복잡한 론의가 벌어졌다. 문제의 어느 학자에 대해서는 《무능》이라는 딱지를 붙여 해임시키며 누구는 경찰서나 정보부에 끌어가서 된서리를 내린후에 들어내놓으며 누구는 《용공분자》로 몰아 매장한다, 또 어느 잡지는 페간시키며 누구에 대해서는 술집작부와의 추문을 조작하여 도덕적으로 매장한다, 방법은 열백가지였다.

버클은 자기가 작성한 인물표의 한 대상을 뭉툭한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말했다.

《이 교수도 더 둘수 없는 형편인데.》

《누군데?》

《박명찬교수지요. 외세와 사대주의에 대한 랭철하고도 유력한 고발자인데 그가 퍼뜨리는 민족정신은 그대로 박정희에 대한, 또 미국에 대한 직업적인 고발처럼 울린단 말입니다. 헌데 학자로선 너무도 덩지가 큰놈이여서 우려되는 점도 있긴 하지만…》

케인즈는 자기의 서류에 몰두한채 파리나 날리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해임하시오. 지령을 떨구겠소.》

만약 어떤 불량자가 천연기념물로 등록돼있는 로목을 도끼로 찍었다면 범죄자로 락인되여 마땅하다. 그렇다면 여러 세대의 젊은이들속에 참다운 지성을 키워주며 망국적인 문화조류와의 피어린 싸움속에서 백발이 된 로학자를 주저없이 죽음의 명단에 기록한 이 신사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른봄치고는 날씨가 류달리 따뜻한 날이였다. 박명찬교수는 자기 집 서재에서 서너개의 화분을 널마루끝에 내여다 놓고 물을 주고있었다.

점심참이 방금 지난 뒤라 해빛이 어찌나 따뜻한지 교수는 엷은 내복에 솜을 두지 않은 훌렁한 명주바지저고리를 입었는데도 추운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오동나무잎무늬를 새긴 커다란 사기화분에는 대가 성큼하게 자라오른 진주꽃이 타는듯 한 붉은빛을 뿌리고있고 다른 화분들에는 란초따위들이 동면에서 깨여나 방금 흙속에서 연한 새싹을 내여밀고있었다.

교수는 겨우내 정성을 기울여서 자기가 무척 좋아하는 진주꽃을 이른봄에 보게 된것이 흡족했다. 수줍어하는 아릿다운 신부같은 그 요염한 꽃모양을 눈여겨보노라니 아득히 흘러간 청년시절의 잊을수 없는 한순간이 눈앞에 얼른거리는듯 했다.

그는 호랑이의 소리없는 미소를 지으며 추녀끝에 걸린 눈부신 하늘을 쳐다보았다. 강의가 없는 날, 열중하여 쓴 원고가 기품이 있게 잘되였다는 느낌을 지니고 잠간 즐겨보는 이런 휴식의 상쾌함은 금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것이다.

교수는 뜨락을 거닐다말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마루에 올라섰다. 이때 대문밖에 한대의 검은 승용차가 와서 멎더니 열려진 쪽문으로 자그마한 몸집에 관골이 솟은 얼굴에 침울한 표정이 굳어진 중년남자가 들어서더니 그에게 인사를 하며 마루앞에 다가왔다.

《문교부에서 선생님을 찾아서… 모시러 왔습니다.》

그는 증명서를 제시했으나 박명찬은 보지 않고 물었다.

《문교부에서? 무슨 일로?》

《글쎄올시다. 급히 협의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박명찬은 불길하다는 느낌부터 앞섰다. 당국자들이 자기를 미워하고있는줄을 잘 알고있는 그는 최근에 발표한 론문이나 강의내용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위협하려는것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부엌에서 내다보는 안해에게 간단히 알린 그는 외출복을 갈아입고 나와 차에 올랐다.

얼마후 박명찬은 문교부의 한 과장실에서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장가가는 신랑처럼 말쑥한 몸차림에 혈색좋은 과장과 마주앉았다. 그들은 잠시 담담히 마주보며 서로 상대의 무게를 가늠해보고는 여위여빠진 직선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가슴아픈 얘기입니다만, 선생은 나이도 적지 않으시니까 이젠 좀 쉬여야겠습니다.》

《해임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쫓아내는겁니까?》

《무슨 말씀을, 권고하는겁니다. 물론 놀라우실겁니다. 그러나 실망하실건 없습니다. 우린 선생께 알맞는 다른 일을 골라드리려고 하는데…》

《그만두시오. 이런 일이 있을줄 알았소. 난 가겠소.…》

몹시 노한 박명찬은 무서운 눈길로 과장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장은 따라 일어서며 놀란 얼굴에 비굴한 미소를 흘리며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앉으라고 하면서 부산을 피웠다. 그러나 박교수는 팔소매를 잡은 상대의 손을 뿌리치며 분노의 한가닥을 내비쳤다.

《당신들에게는 내가 무섭소? 무섭겠지! 무서울거요. 나는 사색하니까! 과학, 문화, 력사… 모두가 무섭겠지?… 공포는 당신들의 고향이고 무덤이니까. 정말 내가 부끄럽소!》

교수는 경멸적으로 등을 돌리고 출입문가로 걸어가더니 다시 돌아와서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개탄했다.

《진실을 무서워하구서야 무슨 사람이냐? 시궁창의 미꾸라지지! 불쌍한것들…》

과장은 위협적인 고자세로 교수를 주저앉히려고 왜가리소리로 꿱꿱거렸으나 교수는 뛰쳐나가며 문을 후려닫았다. 그는 어찌나 흥분했던지 걸음이 되지 않아서 청사의 바깥계단에 잠시 앉아서 진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그길로 대학으로 찾아갔다.

몸과 마음이 한가지로 지쳐 등을 구부정하고 무거운 발을 끌며 대학정문으로 들어간 박교수는 피곤한 눈을 들어 오후의 해빛이 반사하는 고색짙은 대학건물을 바라보았다. 지나온 생애의 한 시절이 보이지 않는 눈초리로 굽어보는 건물, 과학의 망원경으로 짙은 운무에 덮인 흘러간 력사의 높고낮은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을 투시하며 청춘들에게 지혜와 사랑, 분노의 씨앗을 뿌려온 탐구와 투쟁의 요새!…

그러나 이제는 나의것이 아니란 말인가. 학생들의 따뜻한 미소가 슴배여있던 정원엔 죽음의 독이 뿌려지고 현관에도, 복도에도, 강의실문에도 파쑈매국노의 파수병들이 지켜섰단 말인가!

말 못할 허탈감이 엄습하면서 주저앉고싶기만 했다.

한무리의 학생들이 마주 나오다가 인사를 했다. 교수도 마주 인사를 했다.

《선생님, 어데 편치않으십니까? 안색이…》

《선생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학생들이 묻는 말에 교수는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용서하시오. 난 해임되였소.…》

학생들이 너무도 놀라와서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교수는 현관에 들어섰다. 정문가에서 만났던 학생들이 급히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중앙층계를 거쳐 2층복도에 오른 교수는 학장실이 있는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학장을 만나 따지고, 필요하다면 한바탕 싸우고싶은 충동을 느꼈던것이나 생각해보니 다 부질없는짓만 같았다. 진짜 범죄자들은 다른데 있을것이며 더구나 사태는 바꿀수도 없을것이였다. 그는 늘 해오던대로 교수회의에서 해임이 통고되고 다루어져야 할것인데 문교부가 직접 나선데는 그놈들대로의 고충이 있은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실 당국자들은 박명찬같은 인망높은 학자의 해임문제를 교수들의 토의에 붙이면 위험한 혼란을 빚어낼수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대학에는 통고만 하고 본인을 직접 문교부에 호출했던것이다.

박명찬은 돌아서서 자기의 연구실이 있는쪽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그는 학생들의 뒤켠에서 마주 걸어오는 죤 버클과 구일동을 만났다.

《선생, 우리는 방금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구일동이 인사를 차리자 버클이 박교수를 복도에 달린 흡연장소로 이끌었다.

《슬픈 일입니다!》

버클이 마치도 친구의 무덤앞에나 선것처럼 두손을 마주 쥐고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히 무서운 일입니다! 대학과 학계가 선생과 같은 탁월한 두뇌를 잃는다는것은 참을수 없는 비극입니다.》

그는 얼굴을 외로 꼬면서 깨끗한 손수건을 눈에 가져갔다. 정작 그의 재빛눈은 흐려지고 실주름이 잡힌 높은 코언저리로는 한두방울의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제가 고발하여 망쳐놓은, 용납할수 없는 적수앞에서 목소리가 갈리고 눈물까지 흘릴수 있는 그의 《인간애》는 참으로 비범한것이였다.

박명찬은 내부를 투시하는듯 한 날카로운 눈길로 버클을 살펴보았다. 그는 력사속에서 보아온 미국인들의 교활한 행위와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종합된 인상으로부터 버클이야말로 자기의 운명을 짓밟은자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정적인 증거라곤 전혀 잡히지 않았으나 거의나 본능적인 반감을 느꼈다. 그러나 오직 사실자료만을 판단의 토대로 삼는데 습관돼온 그는 자기의 감정을 누르면서 다만 이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헌데 나로서 한가지 서운한것은 기쁠 때일수록 진실로 슬퍼할줄 아는 당신들의 초인적인 처세관을 미처 배우지 못한 점입니다.》

《박선생, 그게 무슨 말입니까?》

버클이 언성을 높이자 구일동은 박명찬의 팔을 가볍게 쥐여흔들며 딱해하였다.

《박선생, 어떻게 이런 오해가 있을수 있어요? 방금도 버클선생은 선생문제로 상부에 항의를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글쎄, 나에게나 욕을 한다면 몰라도…》

《?…》

박교수는 경멸적으로 구일동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구씨는 다시 박교수의 팔을 건드리며 말했다.

《나를 나쁘게만 생각마시오. 솔직히 말하여 나의 학구생활은 선생과의 론쟁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이제는 적수를 잃었느니 나까지도 붕괴란 말입니다. 진정입니다!…》

《그렇다면 한마디만 하겠소. 선생은 력사를 론하기 전에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봤으면 하오. 제 겨레, 제 민족을 위하여! 이 말에 충실할수 있다면 적수를 잃는다고 해도 자기 붕괴는 없을것이요!》

박명찬은 버클의 존재는 무시하고 스승이 락제생을 위로하는듯 한 태도로 구일동의 어깨를 두세번 가볍게 두드려주고 자리를 떴다. 버클은 전혀 표정이 없었다. 자기 감정의 능숙한 교예사인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무관심의 막뒤에 묶어두고있었다. 구일동은 소리를 내여 웃었으나 그 웃음은 텅 빈것이였다.

자기의 연구실로 간 박명찬은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있는 여러 동료들을 만났다. 력사학과 철학계의 유명짜한 교수, 박사들과 시간강사들, 다른 학부에서 소문을 듣고 달려온 몇몇의 교수들이였다. 담배연기로 숨막힐듯 한 방안에 들어서면서 친근한 동료들을 돌아본 박명찬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면서 롱담을 하였다.

《허, 반갑소. 이 집에서 누가 죽었나? 조객들이 많이 왔군.…》

《장산(박명찬의 호)! 무슨 세상이 이런가!…》

번대머리의 나이많은 석병호박사가 눈물을 쏟으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사십을 갓 넘은 철학교수 장일모가 박교수의 손을 틀어쥐고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으나 입술만 떨다가 손을 눈에 가져갔다. 방안에 있는 모든 학자들이 박교수를 중심으로 조여들었다. 젊은 강사가 분기를 터뜨렸다.

《박선생님, 맥을 놓지 마십쇼! 우리모두의 아픔입니다. 이걸 참아요? 두고보십쇼, 한바탕 터지고말겁니다!》

그들은 다른 대학들에서도 누구누구가 해임됐다느니, 어느 학술단체의 지도적인물이 검거되여갔다느니 하면서 당국의 우심해가는 탄압에 대해서 분노를 표시했다. 그런가 하면 문교부를 상대로 싸움을 펴자는 의견도 나왔다. 모두의 권고로 자기의 의자에 앉은 박명찬은 문교부에 불리워갔던 일을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때 어디선가 여러 사람들이 우- 우-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멀리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박교수의 연구실문을 열고 학부학생들이 밀려들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해임되였다는게 정말입니까?》

한 학생이 격하여 묻는 말에 박명찬은 동료교수들에게 쓸쓸한 미소를 보내고나서 립추의 여지없이 들이밀리는 제자들을 밝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는 가슴이 무너지는듯 한 절망을 체험했다. 이제는 이 젊은이들과 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창백한 얼굴을 숙인 그는 그 어떤 잘못을 빌기나 하듯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소, 그만두게 되였소.… 정말 죄송하오!…》

그 말과 함께 학생들은 체포돼가는 아버지에게 매달리는 자식들처럼 일제히 박교수에게 매여달렸다. 저마다 터뜨리는 통탄과 분노의 부르짖음으로 혼란을 이루었다. 열려진 문밖에서는 그를 부르는 목멘 부르짖음이 터졌다.

박명찬은 사방에서 달려붙은 젊은이들을 달고 문밖에 나섰다. 복도에서는 수백명의 학생들이 목멘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모여들었다.

학생들을 둘러본 박명찬은 작별의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는 갈린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십여년간이나 서있던 교단에서 백발을 이고 떠나게 되였소. 여러분들의 사랑을 잊지 않겠소. 4.19때 그리고 3.24와 6.3의 나날 함께 스크람을 짜고 폭풍우를 헤쳐가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겠소.…》

울지 않는 학생이 없었다. 교수들의 눈도 젖어있었다. 박명찬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격이 없는 교수였소. 근년에 더욱 절감하고있소만 혁신적인 인생관을 확립하지 못한탓에 여러분들에게 이 세상의 추악을 무찌르고 민족을 구원할 참다운 무기를 쥐여주지 못했소. 그러니 내가 무슨 스승이겠소.…

부탁은 용감하게, 새롭게 탐구하여 모두들 세상이 자랑으로 쳐다보도록 높이 솟아오르길 바랄뿐이요!… 튼튼한 몸으로 공부들을 잘하시오!…》

교수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들끓으며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선생님을 빼앗길수 없습니다!》

《학원에 칼질하는 매국노들을 타도하라!》

《박명찬교수를 즉각 복직시키라!》

《투쟁이다, 투쟁! 데모를 일으키자!…》

박명찬은 학생들에게 싸여 밖으로 나섰다. 대학내에서 관권을 대표하는자들은 학생들에게 교실로 들어가라고 빌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으나 젊은이들은 교수를 따라 정원으로 쏟아져나왔다.

교수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격정이 치밀어올라 눈이 잘 보이지않았다. 담배라도 피우면 다소 진정이 될것 같아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그는 담배도 물지 않고 성냥을 켜서 입으로 가져가는 자주 범하는 실수를 했다. 이런 스승을 본 학생들은 우스운 일화들을 많이 남긴 그의 건망증을 생각했다. 그 생각은 그를 잃는데 대한 통분을 새롭게 하였다.

교수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교문으로 향했다. 이때 허우대가 큰 한 학생이 급히 자기의 웃옷을 벗어 스승앞에 펴놓고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선생님, 이우로 지나가주십시오!…》

박명찬은 감격보다 놀라움이 컸다.

《이게 무슨 일이요? 어서 거두시오!…》

그런데 십여명의 다른 학생들까지 그의 본을 따서 웃옷을 벗어 주단처럼 이어놓았다.

《선생님! 이우로 걸어주십시오!…》

교수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을 내저을뿐 아무 말도 못했다.

옷주단은 진실과 정의를 주장한것으로 하여 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스승에 대한 청춘들의 열렬한 사랑의 고백이였고 지혜와 슬기를 절망에 뒤섞지 말라는 그들의 당부였다. 그 무언의 언어를 심장으로 들은 교수는 자신에게는 실망할 권리가 없으며 이 청춘들과 겨레를 위하여 이제부터야말로 진리탐구의 전투에 나서야겠다는 강철같은 결심을 다지게 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땅에 놓은 옷을 집어 학생들에게 입혀주고는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렇게 또 다른 옷을 집어들었다. 학생들은 스승에게 수고를 끼칠세라 제 옷들을 집어들었다. 이젠 마음이 가벼워진 교수는 작별의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떴다.

정문가에서 그는 정진수를 만났다. 강동혁으로부터 박교수의 해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는 정원에서 교수와 학생들간에 오고가는 사랑을 지켜보고있었다. 진수는 말없이 스승을 부축했다. 교수도 말이 없었다. 그들은 교수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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