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제 8 장


39


안개가 짙은 밤이였다. 날씨가 음산하여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이나 이따금 오락가락하는 어두운 한강변으로 코트차림에 낚시대를 든 사람이 이따금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어가고있었다. 앞쪽에 보이는 전등의 불빛에 부옇게 보이는 굼실거리는 안개속에서 키큰 사나이가 환영처럼 나타나 마주 왔다. 그들은 가까이 엇갈리면서 한마디씩 조용히 주고받았다.

《최형!…》

《두번째 란간쪽이 좋겠소.》

그들은 모르는 사이처럼 갈라지더니 얼마후에 기슭에 있는 돌란간에 강물을 등지고 나란히 섰다. 최재명과 강동혁이였다.

《나는 40분후에 신문사 회의에 참가해야 하오. 간단히 말하겠소.》

최재명이 나지막이 빨리 말했다.

《통보에 의하면 적들은 〈3선개헌〉을 강행하려고 박정희에 대한 선전공세를 펴는 한편 유사시에 대비해서 경찰기동대를 증강하고 군무력까지 끌어들이고있소.

우리의 활동방향은 명백하오. 파쑈를 반대하는 모든 군소력량을 투쟁에로 동원하고 근로민중의 각종 투쟁을 결합하는것이요. 중요한것은 이 결합이요!》

이렇게 말하는 최재명의 휘하에는 오륙명의 성원들이 속해있었는데 강동혁은 합법적인 단체인 자유동지회를 토대로 지성인들속에서 활동하고있었다.

그들의 리상은 침략자들과 매국노들을 쳐물리치고 근로하는 민중의 새세상과 겨레의 통일을 앞당겨오는것이였다.…

최재명의 말을 주의깊이 들은 동혁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박정희의 야욕과 죄행을 폭로하는 투쟁을 더욱…》

《물론이요. 그 폭로선전의 요점은 어떻게 잡았소?》

재명이 성급히 묻자 동혁은 미리 대답을 준비해둔것처럼 즉시에 명쾌히 엮어댔다.

여기서 그들은 바야흐로 고조되는 대중투쟁속에서 박명찬, 정진수와 같은 량심적인 지성인들을 정의와 진리의 길로 적극 이끌어줄데 대해서와 몇가지 실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둘은 강쪽으로 돌아섰다. 먼 불빛을 받아 바람에 밀리는 안개발사이로 검은 기름처럼 번들거리는 강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최재명은 한손을 동혁의 어깨에 얹으며 생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전에 해외에 나갔다온 한 친구로부터 전해들었는데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민족분렬의 비극을 가슴아프게 여기시며 어느 하루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신다고 하더군.… 어서빨리 온 겨레가 모여살 통일의 그날이 와야겠는데… 우리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기기위해 더욱 매진하기요.》

《우리 그날을 위하여!…》

둘은 서로의 손을 아프게 틀어쥐고 빙그레 웃었다. 얼마후 그들은 각기 반대쪽으로 헤여져갔다.

동혁은 진수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가 안개속에 부옇게 보이는 국수집 외등밑을 지나 낮은 울타리를 따라가다가 쪽문앞에 이르렀을 때 뜨락에서 조그만 아이가 그를 뚫어지게 눈여겨보더니 사랑채로 달려들어가는것이 보였다. 동혁은 소리없이 웃었다.

재일이녀석이 망을 본단 말인가!

이윽고 문소리가 나더니 문희가 나왔다.

《동혁입니다. 재일이녀석이 어떻게 된겁니까?》

빗장이 걸려있는 낮은 쪽문을 사이에 두고 동혁이 묻는 말에 문희는 빙그레 웃으며 빗장을 벗겨준다.

그들이 방안에 들어섰을 때 진수는 낮게 드리운 전등아래에 보자기에 싸서 급히 감추었던 소형등사기와 그것으로 찍어낸 몇장의 문서를 펴놓으면서 동혁을 쳐다보고 빙긋 웃었다.

《무얼 이렇게 찍는가?》

동혁의 묻는 말에 진수는 재일이와 함께 구석에 서있는 안해를 빛나는 눈길로 쳐다보더니 로라에 등사잉크를 바르며 대답했다.

《자네가 써달라던 호소문이지 뭐겠나. 원고를 써가지곤 영초에게 보였지. 그런데 인쇄소에선 오늘은 어렵겠다는거야. 그래 한무석에게 뛰여가서 등사기를 뽑아냈지.》

오늘 오후에 동혁은 지열사에서 진수를 만나 몇몇 대학들과 언론기관들에 돌릴 박정희의 《3선개헌》을 반대하는 투쟁을 본격화할데 대한 호소문을 만들어달라는 말을 했었다. 진수가 호소문원고를 쓰면 인쇄는 지열사가 거래하는 인쇄소에 비밀리에 부탁하기로 했다. 그러나 인쇄소에선 안전한 기회를 노려야 했던만큼 시간이 걸릴수 있었다. 그러니까 진수는 시간을 랑비하지 않으려고 지난날에 발휘했던 솜씨로 한무석을 통해 등사기를 구해낸것이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동혁은 일을 전격적으로 주인답게 처리해나가는 벗의 적극적인 태도가 고마왔다. 그는 재일을 덥석 안아 천정에 닿도록 높이 들었다 놓으며 껄껄 웃었다.

《너의 아버지가 일등이다, 일등! 재일이는 나가 문을 지킨단 말이지. 허 참, 너도 일등이다.》

재일은 버둥거리며 히히닥거렸으나 순간에 시뜻해졌다. 자기는 더 어려운 일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데 고작 바깥을 살피는 그런 헐한 일이나 하는걸 가지고 뭘 그러세요 하는 눈치다.

문희는 두텁게 입은 아들에게 외투를 덧씌워주고 자기의 털목도리까지 얼굴에 감아주더니 엄마가 이제 나갈테니 그사이만 더 밖을 살피라고 하면서 다시 내보냈다. 그리고는 자기들부부의 친밀해진 정을 은근히 자랑이나 하듯이 남편곁에 붙어앉아 하나의 헛동작도 없는 날랜 솜씨로 남편의 등사일을 도와주었다. 크지 않은 일이였으나 문희의 생활에서는 하나의 전변이였다.

문희는 시골에서 돌아온 이후로 남편의 일을 리해하여주고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주느라 무척 마음을 쓰고있었다. 남편에게 동료들이 찾아와서 무엇을 의논하거나 남편이 무슨 글을 쓰는 눈치만 보이면 소리없이 밖으로 나가 망을 보았다. 자기가 성한 몸으로 살아있는 한 다시는 남편이 관권의 화를 입게 할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해의 전례없는 성의와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 진수는 고맙다는 말 같은건 한마디도 안했으나 칭찬받는 소년처럼 쾌활해져서 기세를 올렸다.

어느날 밤에 문희가 잠에서 깨여보니 남편의 잠자리가 비여있었다. 초불을 켜보니 남편은 무슨 문서 같은것을 쓰다 책상에 엎드려 곤하게 자고있었다. 그는 남편을 자리에 눕히려고 조심히 흔들어깨웠다. 놀라 깨여난 진수는 빨갛게 피발이 선 눈으로 안해를 돌아보더니 다시금 글쓰는 일에 온 정신을 기울이는것이였다.

문희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이 저렇게 련일 밤을 새우는데 나는 어째 잘수가 있을가? 내가 힘닿는대로 조금이라도 도와준다면 그만큼 일이 헐해지고 잘수도 있지 않을가? 그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면 나는 왜 못하겠는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면서 새벽을 맞이했다.

그밤이후로부터 문희는 가능한대로 남편의 일을 맞들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힘을 합쳐 남다른 일을 하는것이 어찌나 즐겁고 자랑스러운지 행복이란 멀리에 있는 별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드는것이였다.

동혁은 찍혀나온 호소문 한장을 집어들었으나 그의 눈길은 등사에 열중하는 진수와 문희의 모습을 넘겨보고있었다. 비록 자그마한 일이지만 마음과 노력을 합치는 그들이 무등 사랑스러웠다. 더구나 문희가 이렇게까지 달라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비행만 일삼는 통치배들과 싸우는 남편이 정당한줄은 알면서도 탄압이 두렵고 안락이 그리워 걸음마다 그의 앞을 막아서며 너무도 작게만 살아오던 녀자가 밑바닥 시골생활을 체험하면서 모든 산 사람들을 반항에로 부르는 갖가지 참극의 언어를 읽은것인가. 량심의 명령에 따라 진실을 옹호하는것이 생활의 가치이고 아름다움이라는것을,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도 세상을 위하여 쓸모있는 가지가지 보배가 묻혀있다는것을 깨달은것인가.

문희의 새로운 생활을 마음속으로 축복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동혁은 곧 실무적인 예리한 눈길로 호소문을 읽어나갔다.

한편 문희는 부지런히 남편의 일손을 도와주면서도 감각으로 동혁의 시선을 느끼고있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했다. 남편이 저 사람과 사귀는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정의감 하나로 세상과 싸워 불행만 벌어들이는 남편을 언제나 더 무서운 일에 끌어들이는것만 같아 밉게만 여겼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알고보니 얼마나 어질고 당당한 사람인가!

문희는 동혁이 옹기골에까지 일부러 찾아왔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해가 저무는 감자밭머리에 앉아 그가 하던 고마운 말이 떠올랐다. 자기들부부의 갈등과 리별을 그는 얼마나 가슴아파했던가. 무작정 아버지만 편들지 말고 불행한 어머니를 사랑하라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충고해주었던가!

그는 무모한 소동군이 아니라 성실하고 아름다운 인간이였다. 그렇게도 마음이 바르고 아름다우니까 불행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고 죄많은 추악한 놈을 보면 싸워서 눌러버리지 않고는 참지 못하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남편이 하는 일을 성심으로 도와주어 남편과 함께 동혁의 벗으로서 옆에서나마 그들의 고상한 정신세계를 호흡하고싶었다.

동혁은 호소문을 끝까지 읽고는 주장과 문체가 매우 훌륭하다고 감탄하면서 덧붙이였다.

《자네야 맑스의 말마따나 악마처럼 재주가 있으니까 문장은 그렇다치고 이렇게 멋있는 글씨체는 언제 다 배워뒀나? 활자가 울고가겠는걸.》

《저 친구가 과오를 범하는군.》

진수가 로라를 밀면서 말했다.

《우리 집 리얼리스트인 녀류화가선생이 친히 골필을 잡았단 말이야.》

《허, 그렇구만! 이거 내가 5초사이에 5년간 자기비판할 과오를 범했구만.》

동혁의 롱담에 문희는 입을 싸쥐고 즐겁게 웃었다. 자그마한 일을 해도 자기를 치하해주면서 부축해주는 남편도 고마왔지만 자기의 밝은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비쳐줄줄 아는 동혁에게 존경이 갔다. 등사일을 마치자 문희는 곧 재일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동혁은 진수에게 차후 행동계획을 내놓았는데 그 기본내용은 바야흐로 일어나는 학생투쟁과 로동자들의 파업을 비롯한 각종 투쟁을 박정희의 《3선개헌》을 반대하는 하나의 흐름에 결합시키는것이였다. 결국 련대투쟁을 하자면 로동자들은 자기들의 대표를 대학생들에게 보내여 자기들의 참혹한 처지와 투쟁결의를 알리면서 련대투쟁을 호소하도록 하며 대학생들 역시 자기들의 대표를 공장들에 보내여 함께 투쟁할것을 호소하는것이였다.

동혁은 진수의 무릎에 손을 얹고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자네는 파업을 일으킨 〈한일자동차〉회사의 로동자들을 찾아가게. 민규석을 후려갈길 기회가 아닌가! 한무석과 김용기와 같은 로동자들과 친해둔게 얼마나 잘됐나. 그들에게 가서 사태와 목적을 잘 이야기하게. 박교수의 딸 영옥이 다니는 대학에 가서 〈한일자동차〉회사로 학생대표를 보내도록 하겠네. 알만 하지? 자유동지회의 다른 친구들에게는 또 그들의 전선이 있지.》

진수는 등사한 호소문묶음에서 몇장만을 덜어내여 웃옷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머지는 동혁에게 주고 훌떡 일어섰다.

《해보세!》

동혁은 따라 일어섰다.

《4.19때가 생각나나?》

《나도 그때를 생각했어!》

그들은 우정이 소품치는 뜨거운 눈길로 마주 바라보며 주먹으로서로의 가슴을 툭툭 쳤다.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자동차를 조립하는 민규석의 《한일자동차》회사 분공장은 파업로동자들의 앉아버티기투쟁으로 온통 마비돼있었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인간수용소인 기울어가는 창덕사건물과 그아래쪽으로 판자집들이 촘촘히 박혀있던 지대가 그사이 일본의 이마무라회사로부터 부분품을 들여다가 군수용자동차를 조립하는 공장으로 일변한것이다. 조립직장인 긴 단층건물을 배경으로 수십대의 차들이 렬지어선 주차장의 공지는 앉아버티기투쟁을 하는 수백명의 로동자들로 덮여있었다. 회색신사복을 입은 뚱뚱한 사나이가 나지막한 밀차우에 올라서서 손수건으로 얼굴과 목덜미를 연신 닦으면서 있는 목청을 다해 로동자들에게 소리치고있었다.

《여러분! 다시말하지만 이 회사도 여러분들의 딱한 사정을 풀어줄 대책을 세우는중이란 말이요. 에- 로자협조의 미풍을 발휘한다면 어떤 난관도 다 해결할수 있소. 에- 또 그러니까 이 소동을 당장 중지하고 여러분들의 대표를 다시한번…》

그의 말은 여러명의 로동자들이 주먹을 내두르며 웨치는 항의의 목소리에 삼키우고말았다.

《걷어치우라! 우리모두가 대표다. 사장을, 민규석을 보내라아!》

《배고파 못살겠다! 못살겠다! 돈을 내라! 로임을 올리라아!…》

민규석의 앞잡이는 태연하려고 애쓰면서 다시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더니 개구리를 노리는 뱀의 눈으로 군중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 호기있게 공기를 베면서 웨쳐댔다.

《중지하시오! 파업은 회사를 망치고, 회사가 망하면 여러분도 망한다는걸 모르겠소? 이런 혼란을 좋아할건 빨갱이들뿐이란 말이요.》

로동자들은 다시 격분을 터뜨렸다. 땅바닥에 앉은채로 엉뎅이를 들썩거리며 주먹을 내두르기도 하고 튀여일어나기도 하면서 저마다 된욕설을 퍼부었다. 몇사람은 밀차우에 올라가서 당황한 연설자를 끌어내렸다. 회사측 대표는 적군속에 화풀이의 대상으로 떨어진 포로병처럼 동물적인 공포에 질려 두리번거리더니 폭소의 소나기를 맞으며 빠져나갔다.

이때 군중속에서 머리를 짧게 깎은 키큰 사나이가 밀차우에 뛰여올랐다.

투쟁위원인 그는 열띤 웃음으로 군중을 돌아보며 갈린 목소리로 웨쳤다.

《여러분, 우리의 정당한 투쟁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투지가 굳세고 다른 회사 로동자들과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있기때문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여기에 용감한 학생대표들이 형제적인 뜨거운 정을 안고 찾아왔습니다. 이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투쟁위원은 응원단장처럼 박수로 대중의 기세를 돋구면서 뒤켠에 선 한무리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군중들도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거기 핵심적인 로동자들속에 4~5명의 대학생들이 섞여있었는데 그중에는 박영옥도 있었다. 투쟁위원은 그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의 권유로 처음에 밀차우에 오른것은 박영옥이였다. 간밤에 영옥은 자기를 찾아 집으로 온 동혁을 만나 그로부터 청년학생들과 로동자들이 투쟁에서 서로 지지하고 응원할 방도에 대한 의견을 받았었다. 영옥은 동혁의 부탁대로 비밀리에 녀대학생합숙에 자리를 잡고있는 ∘∘대학의 투쟁지휘부에 그의 의견을 전달했는데 거기서는 영옥에게도 로동자들앞에서 선동연설을 할 과업을 주었던것이다.

곤색양복에 흰 단화를 받쳐신은 영옥은 주저하며 연단에 올라서서 열렬한 박수갈채로 환영하는 군중에게 공손히 허리굽혀 인사를 하고는 앞으로 흘러내린 윤택한 검은 머리카락을 량쪽으로 갈라붙여 홍조어린 처녀다운 얼굴을 드러내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중대한 순간에 서있다는 의식으로 흥분한 그 녀자는 부드럽고도 힘찬 목소리로 말을 뗐다.

《저는 파업투쟁에 용감히 떨쳐나선 여러분들에게 우리 대학 전체 청년학도들의 부탁을 받고 가장 뜨거운 지지성원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다시 열렬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거듭 머리숙여 인사를 한 영옥은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연설을 할줄 몰라 한두가지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8.15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해오신 력사학교수입니다. 그런데 청와대는 문교부를 시켜 얼마전에 저의 아버지를 대학에서 쫓아냈습니다. 왜, 무슨 죄를 졌다고 그랬겠습니까.

언제나 진실만을 목숨처럼 믿는 아버지는 이 세상의 검은것은 검다고, 추악한 범죄자들은 민중의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오셨기때문이예요. 권력자들에게는 이것이 무서웠던거예요. 그래서 교단에서 머리가 희여진 저의 아버지를 파쑈의 몽둥이로 쓰러뜨렸어요. 온 과학계가 아끼고 수많은 제자를 키워내신 학자를 좀도적처럼 몰아낸거예요!…》

《죽일놈들, 박정희가 하는짓이 어데라고 다르겠소?!》

누군가 개탄하자 바람잦은 수풀처럼 고요하던 군중은 갑자기 술렁거렸다. 영옥은 말을 계속했다.

《그날 아버지와 헤여지는 학생들은 누구나 가슴을 치며 비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슬픔이 분노를 불러 마침내 투쟁은 일어났습니다. 학원에 대한 정치사찰을 반대하여, 끝없는 파쑈탄압을 반대하여 학생들은 일떠섰습니다.》

여기서 파면당한 교수의 딸은 청년학생들의 투쟁이 박정희의 《3선개헌》책동을 반대하는 치렬한 투쟁으로 발전했다고 하면서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허용한다면 이 세상은 더욱 캄캄해지고 로동자나 대학생, 온 거리가 이름도 없는 번호붙은 노예로 변한다는것을 웅변적으로 강조했다. 투쟁의 열정에 달아오른 그는 이미 긴장도 수줍음도 사라져서 두주먹을 가슴에 얹고 분해하거나 팔을 펼치고 활짝 웃어도, 어떤 자세를 취해도 그 모든 동작에 명배우도 흉내낼수 없는 풍부한 표정과 멋과 호소력이 넘치게 연설했다. 투쟁의 열정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그가 수줍게 감추고있던 모든 다채로운 능력과 청춘의 미를 흔들어깨우고 보석처럼 찬란히 비쳐주는듯 했다.

영옥은 두손을 마주 쥐고 열렬히 호소했다.

《여러분! 우리는 망국노나 노예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저 망국의 박〈정권〉을, 죄악의 덩어리인 저 략탈자, 매국노들을 반대하는 투쟁의 한대오에 선 벗들이며 형제들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투쟁은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투쟁은 여러분의 힘입니다! 견결하십시오. 이기십시오. 우리모두 어깨겯고 4.19의 그날처럼 두렴없이 싸웁시다!》

열광한 군중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웨쳤다.

《옳소! 끝까지 싸워 이깁시다!》

《박〈정권〉을 타도하라!》

영옥이가 연단에서 내려오자 이번에는 다른 대학생이 뛰여올라갔다. 불을 토하는듯 한 웅변과 호응의 웨침소리로 공장이 떠나갈듯 했다. 정문밖에서는 급히 달려온 경찰기동대와 로동자규찰대가 란투를 벌리고있었다.

한편 서울의 도심지에 위치한 ∘∘대학 정원에서는 대학생집회가 열리고있었다.

천여명의 남녀대학생들이 해빛을 등지고 앉아있는 앞쪽, 고지크식지붕이 우뚝 솟은 거무틱틱한 3층짜리 교사의 중앙현관으로 통한 널직한 돌층계우에서는 수수한 검은 양복을 입은 김용기가 연신 발을 옮겨디디며 소박한 말로 연설을 하고있었다. 그뒤에는 대학의 학생회주요성원들과 《한일자동차》회사의 다섯명의 로동자대표들이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그중에는 한무석도 끼여있었다.

《보십시오. 민규석이란 놈이 그게 사람입니까?》

용기가 표정이 험악한 얼굴을 떨어대며 웨쳤다.

《박정희와 짜고서 불도젤로 판자촌을 깔아뭉개고 그우에 왜놈을 등에 업고 공장을 짓는가 하면 박가놈에게는 쩍하면 정치자금에 보석꾸레미까지 섬겨바치면서 로동자들의 로임은 석달째나 안 주지, 그 돈으로 새 별장을 짓는가 하면 제 회사만 늘구지. 그뿐입니까. 왜놈자본가와 놀아대는 하루밤 술놀이에는 오십만원이나 뿌리면서도 로동자들이 굶어죽게 되여 로임을 올려달라고 했다 해서 밸풀이로 이백명이나 해고시켰단 말입니다!

보십시오. 매판자본가나 그놈들을 키워주는 박〈정권〉은 우리 로동자들과 민중의 심장에 주둥이를 들이박고 피를 빨아먹는 늑대들입니다! 그따위 늑대가 〈대통령〉이라구요? 거기다 세번이나 〈대통령〉을 해먹겠다구요? 빈대잡듯 콱 짓밟아버립시다!…》

용기의 수식없는 직선적인 토로는 대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가 경기에 나선 권투선수와 같은 자세로 주먹을 내두르며 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의 공동투쟁을 호소하자 모두가 자리를 차고일어나 박《정권》을 규탄하는 구호를 거듭 절규했다.

한무석은 용기까지 침착하게 연설을 잘 마치자 너무도 기뻐서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그를 그러안고 넙적한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들끓어대는 대학생들을 돌아보며 용기는 자기가 한 말이 사람들을 움직였다는것이 희한했다.

간밤에 찾아온 진수는 말재주가 없다면서 주저하는 그에게 남들이 하는 연설멋을 흉내내려고 하지 말고 자기 생각을 꾸밈없이 쏟아놓으라고 하였다. 학자나 연설쟁이가 아니라 가슴속에 불덩어리가 살아있는 로동자인 자신을 솔직히 보여주면 된다고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용기는 난생처음으로 자기의 힘을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수단도 없다고 괴로와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살 일이 아니였다. 세상사를 다루는 일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것이니 나 같은 무지렁이는 제 몸과 제 집이나 부둥켜야지 하고 울보채는 심장을 억누르고만 있을 일이 아니였다. 설음과 노여움이란 세상에 터뜨리기만 하면 얼마나 무서운 힘인가! 썩살이 앉은 커다란 손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재부를 빚어섬기려고 갖고있는것이 아니라 놈들의 낯판대기를 후려갈기기 위해서 가지고있는것이였다.

로동자들은 대학생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면서 대학을 떠났다.

대학생들은 련이어 박《정권》을 단죄하는 모의재판을 열었다. 그것은 재판정꾸밈새나 재판부 성원들의 구성과 몸차림, 피고와 검사측 증인들의 몸차림과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말그대로 실제의 재판을 방불케 하는것이였다. 다만 《박정희》라는 죄인은 이름패쪽을 가슴에 드리운 커다란 배가 삐여져나온 만화적인 모습이였는데 이러한 과장은 역시 일신의 영화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사람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박정희일당의 본질을 더욱 강조하고있었다.

재판부의 심문은 엄격하고 판결은 무자비했다. 피고 박정희의 모든 죄악이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해부를 당했다. 조선사람으로 난것을 치욕이라 개탄하여 일본륙군사관학교에서 왜놈으로 개종하고 손가락을 잘라 왜왕앞에 멸사봉공을 서약한 민족반역죄, 《특등일본인》오까모도중위로서 항일의 애국자들을 필사적으로 따라다니면서 살륙한 죄, 8.15후 려수군인들의 애국적인 투쟁을 교살한 죄, 미국의 첩자로서 4.19를 짓밟고 《정권》을 강탈하였으며 파쑈의 총칼로 이 땅의 민중을 압살한 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미국의 식민지인 이 땅을 왜놈에게 2중으로 팔아먹은 매국죄, 배족적인 매판만을 극대화하여 민족경제를 망치게 하고 아이들의 코묻은 돈까지 훑어내고 녀자들의 정조까지 팔아 천문학적거액의 부정축재를 한 죄, 외세를 등에 업고 겨레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가로막은 죄, 《헌법》까지 뜯어고치면서 영구집권을 노려 발악하는 민족모욕죄 등 백천가지 죄과가 여지없이 확증되였다.

우람한 체구에 백발이 성성한 재판장이 일어서더니 찌렁찌렁 울리는 존엄있는 목소리로 피고를 화형에 처한다고 엄숙히 선언했다. 전률한 《박정희》는 몸을 뒤틀며 버둥거리더니 난딱 자빠져서 사지를 바들바들 떨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형리들이 놈을 끌어내갔다. 아니, 역적은 청년학생들이 터뜨리는 요란한 폭소의 폭풍에 날려나갔다.

《피고 박정희를 화형하기 전에 태형부터 먹이자!》

《옳소! 태형부터 먼저 하라!》

일제히 떠드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박정희》의 커다란 허수아비가 나오고 그뒤로 팔을 걷어붙인 형리들이 몽둥이묶음을 들고 나타났다. 학생들은 환상적인 구비전설이나 민담에서나 볼수 있는 도깨비나 귀신처럼 간흉하고 요괴스럽게 생겨먹은 박정희의 허수아비를 보자 또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이 허수아비야말로 박정희와 더 흡사한 괴물이였고 저주와 웃음거리였다. 학생들은 추물을 발밑에 굽어보는 자신들의 우월감으로 웃고웃었다.

태형부터 집행하라는 재판장의 선언을 모든 학생들이 되받아 웨쳤다.

《태형부터 내리라아!》

《에-히이!》

일제히 호응한 형리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허수아비의 주위를 뛰여돌더니 왝-왝 쾌재까지 부르며 란장을 쳤다.

《매-우 쳐라아!》

군중이 소리치자 형리들은 《에-히이!》 소리를 련발하며 쓰러진 허수아비를 무섭게 내려갈겼다. 부서져나가는 허수아비를 보면서 학생들은 그냥 웃어댔다. 역적의 죽음에는 비극이 있을수 없었다. 죄악만 저질러온 박정희와 같은 파쑈깡패의 죽음에는 오직 랭소속에서 당하는 파멸과 종말만이 있을뿐이였다.

박정희의 허수아비는 다시 화형의 불길에 싸였다.

심장에 불을 달며 한껏 기세를 돋군 청춘들은 마침내 《3선개헌결사반대》라고 쓴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거쳐 항쟁의 거리로 쏟아져나갔다. 그것은 모든 세포가 분노로 숨을 쉬고 창날같은 이발마다에서 불길이 휘파람부는 하나의 거대한 청룡이였다. 그것은 악귀의 흉기에 참살당한 거인 4.19의 피맺힌 령혼이 민중의 가슴을 흔들어깨워 다시금 불러낸 4월이였다.

열어헤친 아름다운 가슴들, 붉은 얼굴의 바다, 자유와 삶을 움켜잡으려고 허공을 찌르며 휘두르는 손의 수풀, 손의 격랑, 그속에는 암흑과 설음을 넘어 희망의 아침노을을 수건처럼 머리에 감은 민중의 선명한 모습이 어른거렸다. 청춘이란 투쟁의 이름,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기치의 노래와 웃음으로 반항하는 불사조의 이름, 청춘이란 겨레의 날개, 그의 불타는 눈초리, 왕망치로도, 포화로도 부실수 없는 겨레의 기본원소, 청춘이란 투쟁에서 흘리는 붉은 피로 온 겨레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행복에로 부르는 민중의 애인, 눈부신 별들…

한낮에도 태양이 없는 거리로 그들은 노도쳐 나아갔다.

앞에는 무시무시하게 막아선 중무장한 무장경찰들, 거기선 경찰서와 정보부의 피와 인분이 게발라진 고문실과 류치장이 아가리를 벌리고,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청춘들은 맞받아 나아갔다.


박명찬은 상점매대에서 신문 한장을 사서 펼쳐들었다. 회사로동자들의 파업소식들, 청와대의 《3선개헌》책동에 대한 여야세력들의 각축전의 진상소개, 여러 대학 학생들의 항의투쟁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제목들이 눈에 띄였다. 세상은 소란했다.

한동안 분주히 드나드는 손님들속에서 착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파면당한 교수는 신문을 접어 옷주머니에 넣고 출입구옆에 놓아둔, 굵은 쇠줄에 꿴 네개의 구멍탄을 들고 상점을 나섰다. 그는 교수직을 박탈당한이래 몹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당국자들의 비밀지령이 있었는지 학보나 일반잡지에 론문은 고사하고 수필 한편도 낼수 없었다. 저축이 없었던 가정생활은 어쩔수없이 기울어지고있었다. 당장 끼니를 끓일 쌀이 떨어져서 안해가 돈을 꾸러 다니거나 낡은 옷가지를 들고 전당포나 중고품수매점에 다녀야 하였다. 이즈음에는 박명찬자신이 자기 서가에서 골라낸 책들을 한보자기씩 들고 고서점에 드나들었다. 오랜 세월 자기 집 서재에 칩거하면서 대학과 도서관길만 왕래하던 그는 려염집 아녀자들이나 품팔이군들속에 섞여 상점에 드나들며 봉지쌀이나 구멍탄을 사야 했다.

심사가 울적하여 머리를 숙이고 허청거리는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걸어가던 그는 누군가 자기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에 눈을 들었다. 김성우가 수닭꼬리처럼 늘어진 뿌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미소를 짓고있었다.

《선생님, 뵐 낯이 없습니다. 그새 이렇게까지 되였습니까? 제가 들어다드리겠습니다.》

성우는 명찬의 손에서 구멍탄을 넘겨받으려고 했으나 실직교수는 사양하면서 서글프게 롱담을 했다.

《실업자가 드는게 옳지. 명예와 이슬을 먹고사는 시인에게야 더욱 어울리지 않지.》

그런대로 성우는 구멍탄을 앗아들고 나란히 걸었다.

《부끄럽네.》

학자가 말했다.

《허전하고, 노엽고, 눈앞이 어둡고… 자네들을 만나면 더구나 죄스러운 생각이…》

《아닙니다. 선생님, 저희들의 무능이 부끄럽습니다.》

시인은 울분이 내비친 쓰거운 얼굴로 지나가는 행인들과 촘촘히 걸린 울긋불긋한 간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야만들이 선생님을 모독하도록 내버려두고있는 저희들이 바봅니다.》

《무슨 말을…》

《전 자기 환멸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권력자들을 증오하면서도 나에겐 동맹자도, 나의 언어를 알아줄 사람도 없다는 고독감이…》

《흥미있는 얘길세. 동맹자와 언어! 본질적인 문제군. …》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있을 때 가로지른 옆길로부터 중무장한 경찰들을 가득 실은 경찰차들이 련속 내달아왔다. 차에서 뛰여내린 경찰들은 순식간에 차도에 쏟아져나가 종심깊은 진을 치고 거리를 메웠다. 살기등등한 얼굴들이였다. 쇠붙이들과 곤봉, 모자채양따위들이 해빛에 싸늘하게 번들거렸다. 메돼지대가리에 코끼리주둥이를 접한듯 한 방독면을 쓴자들과 최루탄을 재운 총기들이 앞쪽으로 헤치고나갔다.

차디찬 거리는 숨을 죽이고 운명적인 파멸을 기다리는듯 했다.

박명찬과 김성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때 휘우듬히 마주 트인 거리의 먼 저쪽으로부터 학생들의 대오가 함성을 지르며 나타났다. 처음에는 굵은 선으로 보이던것이 어느새 제방을 무너뜨리고 쏟아지는 홍수의 물머리로 바뀌고 다시 끓어대는 노도로 바뀌였다. 두세폭 되는 프랑카드를 든 학생대오는 서로 팔을 끼고 횡대를 지어 목청껏 투쟁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사이로 박정희도당과 파쑈통치를 규탄하는 구호를 피타게 절규했다. 세상에 두려울것이 없는듯 온 거리를 진감하며 번개를 품은 먹장구름처럼 뒤덮여오는 그 흐름앞에 경찰들은 어슬어슬 뒤걸음을 쳤다. 청년학생들은 계속 놈들을 밀고나가며 하늘이 들썩하게 노래를 불렀다.

《장하다, 장해!》

박명찬은 엉거주춤이 구부린 무릎에 손을 짚고 그냥 찬탄했다. 그의 눈에는 학생들이 시대의 살아있는 숨결이였고 민중의 참다운 영웅들이였다. 가로수밑에 구멍탄을 놓은 성우는 맹렬한 사색에 흐려진 눈길로 자기앞으로 지나가는 청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그러더니 급작스레 긴장하며 나무에 어깨를 박고 불광이 이는 눈길로 앞을 주시했다. 학생들이 그가 창작한 가사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있었던것이다.

언젠가 진수의 거듭되는 부탁으로 지은 《반항의 청춘》이라는 제목의 가사였다.


붉은 피는 끓어 결사의 반항이다

사슬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

파쑈독재 짓밟아 짓밟고 넘어

민주와 자유의 꽃을 뿌리자

아, 청춘이여, 반항의 수리개여

우리는 우뢰와 번개의 화신이다!…


노래는 시인의 넋을 흔들었다. 수백편의 시를 고집스런 미친 흥에 잠겨 알길없는 그 어떤 우주의 언어로 락엽에만 써왔던 그는 처음으로 불길같이 이글거리는 산 사람들의 심장에 노래를 준것을 깨달았다. 자기도 이 청춘들, 이 민중에게 소중한 존재로 될수 있다는 순수한 행복을 체험했다. 물결쳐 지나가는 청춘들을 얼없이 바라보던 그는 그들속에서 자기를 알아보고 웨치는 소리를 들었다.

《시인이다! 김성우선생!…》

《〈반항의 수리개〉를 환영한다!…》

성우는 박명찬교수에게 웃어보이고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를 보냈다.

이때 대오의 선두쪽에서 격분한 학생들의 함성이 터졌다. 밀리우던 경찰들이 곤봉으로 학생들을 후려갈기기 시작한것이다. 격분한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으나 야성에 달아오른 탄압자들은 무자비했다. 놈들은 총탁과 곤봉으로 적수공권의 학생들을 무섭게 때려눕혔다. 비명이 터지고 피가 쏟아졌다.

이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던 박명찬은 두팔을 내두르며 소리쳤다.

《이놈들아, 때리지 말라!》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수백명이 필사적인 육박전을 벌리면서 절규하는 함성속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박명찬은 시인이 만류할새도 없이 격전의 복판으로 허둥거리며 뛰여들어가더니 한 학생의 잔등을 노려 곤봉을 추켜든 경찰의 손을 한손으로 틀어쥐며 다른 손으로 놈의 상판을 후려갈겼다.

《이놈! 네가 사람새끼냐?》

독이 올라 펄펄 뛰는 머리흰 그는 대승정처럼 지엄하고 사자처럼 무서웠다. 그 서슬에 맞서있던 두세명의 경찰들은 순간적으로 주춤하여 뒤걸음쳤으나 다른 놈이 달려들어 곤봉으로 로인을 후려갈겼다. 교수는 숱한 사람들이 경악하여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이마를 싸쥐고 쓰러졌다. 손가락짬으로 피가 흘렀다. 여러 학생들과 함께 성우는 교수를 부축하여 인도로 나왔다. 누군가 급히 내복을 찢어 상처입은 교수의 이마를 싸매여주었다.

성우는 너덧명의 시민, 학생들과 함께 교수를 가까운 병원으로 날라가다말고 홀로 투쟁의 거리로 되돌아왔다. 당장 한두놈의 경찰을 까눕히지 않고서는 견딜길 없었던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기로 쓸만 한것을 찾았다. 그러다가 눈에 뜨인것이 부서진 구멍탄이였다. 그는 그 덩어리들을 두손에 갈라쥐고 육박전이 치렬하게 계속되고있는 앞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격전장의 복판에는 나서지 못하고 한가녁에서 5~6명의 학생들이 두명의 경찰에게 된매를 안기고있는것을 보고 그리로 달려가더니 꺼꾸러진 경찰의 입에 탄덩어리들을 박아넣었다. 경찰은 얼굴을 내두르며 발악했으나 기를 쓰고 놈의 아가리를 석탄으로 땜질했다.

극도로 격분한 시인은 왕명으로 파견된 어사가 역적에게 사약을 먹이는듯 한 무자비성을 과시했으나 그를 보는 청년들은 부지중 웃음을 터뜨렸다. 그바람에 그의 권위는 약간 깎이우는듯 했으나 순식간에 경찰을 얼굴이 새까만 도깨비로 만들어버린 그의 조물주와 같은 솜씨는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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