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회


제 10 장


51


량성도는 천정밑까지 책이 가득 채워진 자기 집 서재의 푹신한 장의자에 누워 무슨 문서를 골똘히 읽고있었다.

몸집이 비대하고 어글어글한 눈에 괄괄한 성미가 비쳐보이는 그의 처가 울적한 기분을 드러내며 들어오더니 짜증을 냈다.

《엘레나와 송건호한테서 또 전화가 왔어요. 설희의 행방을 아직도 짐작할 길이 없는가구요.》

성도는 문서를 벌컥벌컥 뒤지며 두덜거렸다.

《넨장, 나를 뭐 수사경찰인줄 아는가. 그따위 일에 신경을 쓸 짬이나 있으면 좋긴 하겠소.》

그는 비싼 보석반지가 생긴 희소식으로 자그마한 양품점을 경영하는 안해를 기쁘게 해주고싶었으나 여러모로 고려하여 당분간은 내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안해는 방에서 나가면서 눈살을 찌프리고 말했다.

《건넌방에 좀 가보세요. 또 여우 우는 소릴 내는게 듣기가 막 무서워요. 아유, 여든한살이 뭐예요. 목숨도 질기지…》

성도의 늙은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였다. 성도는 걱정이 되여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스레한 방안에 펴있는 어지러운 이불 한 귀퉁이에 뼈가 앙상한 주먹만 한 백발의 로인이 고불통처럼 등을 꼬부리고 앉아 여러권의 얄팍한 헌책을 널어놓고 그중의 한권을 골똘히 들여다보고있었다. 성도는 낡은 롱짝과 문갑이 열려져있는것을 보고 제 아버지가 펴놓고있는것이 토지문서라는것을 알았다. 스무해가 넘도록 그렇게 보고 또 보는 토지문서였다.

이 백발로구는 왜정세월 황해도의 한 지방에서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호랑이질하던 지주로서 8.15후 북에서 토지개혁을 할 때 청산을 당하여 월남한이래 밤이나 낮이나 빼앗긴 옛땅을 두고 가슴앓이를 하고있었다.

귀까지 어두워진 로구는 아들이 들어온줄도 모르고 안경을 두개나 끼고 손때가 까맣게 오른 토지문서를 그냥 들여다보며 연해 푹썩은 한숨을 쉬였다. 그러다간 곁에 놓인 놋오강에 쭈그렁박같은 이마를 조용히 조아리며 울음섞인 가래끓는 소리로 넉두리를 하였다.

《어이구, 내 팔자야… 그 기름진 황해도 내 땅을 어찌하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머슴놈들이 그 땅, 그 낟알을 움켜들고 날뛰다니. 아이구우, 죽어서라도 기여가야지. 기여가야지!…》

옛 지주는 부들부들 떨리는 새까만 손으로 토지문서를 어루더듬으며 꾹꾹 마른 울음을 울었다. 문가에 서서 지켜보는 성도는 우울한 분노에 싸여있었다. 그의 눈에도 아비의 꼴은 화가 나도록 추해보였으나 어쨌든 그 늙은 추물은 성도자신을 만들어내고 비끄러맨 근본이였고 그에게 끝없이 범죄행위를 추동하는 검은 혼이였다. 성도는 말라죽어가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가슴속에 시퍼런 칼날이 서는것을 느꼈다. 가난뱅이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떠드는것을 보면 밸이 뒤틀리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때문에 그는 간흉한 여우로 되여 사회생활의 갈피마다에 웃음으로 감춘 피묻은 이발을 자꾸 들이미는것이였다.

성도는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자리에 눕히려고 했다. 그제야 아들이 들어온것을 안 옛 지주는 후들거리며 소리쳤다.

《이놈아, 이북으로 밀고 올라간다더니, 엉. 어째 상기도 소식이 없냐? 엉, 이 도리깨아들만도 못한 놈의 새끼야.…》

욕설에 습관된 성도는 애비를 강아지다루듯 쓰다듬어 자리에 눕히고는 귀에 입을 대고 소리쳤다.

《이북놈들을 쳐부실 날이 멀지 않았어요. 지금 미국사람들이랑, 일본사람들이랑 모두 벼르고있어요. 알겠어요?》

그러나 산송장에 반귀머거리인 로구는 《무어라구?》 하는 말만 되풀이하며 해골같은 머리를 자꾸 쳐들었다.

아비의 방에서 자기의 서재로 돌아간 성도는 많은 생각끝에 강동혁과 부딪쳐볼것을 결심하고 해가 지는 거리에 나섰다.

동혁의 안해는 날이 저물어서 서점을 닫을 생각으로 서가의 책을 정돈하고있었다. 점방에는 이날도 동혁부부에게 오래전에 정체가 판단된 정보원과 두세명의 손님들이 늦게까지 남아있었는데 그들도 떠날 차비를 하고있었다.

이때 말쑥하게 차린 량성도가 누구의 칭찬에 들뜬 사람처럼 벌씬벌씬 웃으며 들어오더니 옥림에게 인사했다.

《부인,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서 안됐습니다. 동혁형 계신가요?》

《네, 계세요.》

조옥림은 적당히 맞인사를 하고는 등뒤에 난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 곧 동혁이가 안해를 따라나왔다. 책구경을 하는체 하면서 무슨 생각에 옴해있던 량성도는 일순에 매우 사근사근해지며 갑자기 유명해진 사람을 새롭게 보며 찬탄하는듯 한 얼굴로 동혁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예고없이 안됐습니다. 책이 아주 다양하군요. 벌써 찾아온다는게 늦었어요. 뭐 감추겠어요. 늘 사귀여보고싶던차에…》

《바쁘실텐데 어떻게 이런데까지, 무슨 일이신지…》

동혁은 담담한 얼굴이다. 구청관리가 미천한 청원자를 대하는듯한, 거의 랭담에 가까운 실무적인 태도다. 량성도는 섭섭히 여기면서도 오히려 활기있게 매대에 상반신을 얹고 한쪽다리를 건들거리며 웃었다.

《제갈량이 삼고초려라더니 강재사는 고서의 수풀에 은둔인가요. 안될 말이죠. 들어오자 벌써 마음이 안스러워지거든요. 거시기 좀 조용히 할 말이 있는데 소풍삼아 나가지 않으렵니까?》

이 미중앙정보국의 고등첩자로 보이는자가 자기를 떠보려고 온것이라고 직감한 동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어차피 이렇게 된바엔 부딪쳐 보리라고 생각하고는 그의 청을 수락했다.

무릎에 통속소설을 펼쳐든채 입을 헤 벌리고 량성도의 별스러운 거동을 주의깊이 살피던 박《정권》의 하급밀정은 성도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꿩울음소리를 들은 사냥개처럼 튀여일어났다. 창문너머로 성도가 타고 온 택시옆에 가서 담배를 피워무는것이 보였다.

안채로 들어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동혁은 긴장해있는 정보원을 보는 순간 량성도가 더러운 놈이라는 단서가 잡힌다면 이 하급밀정을 역리용할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해를 안채로 통하는 어두운 문뒤로 부르고는 정보원이 들을수 있도록 속삭이였다.

《아무래도 미타하거던. 저자는 초면인데 무얼 어쩌자는걸가?》

《글쎄말예요. 적당히 그냥 돌려보내야 할걸 그러잖아요?》

《이제야 어떻게, 무슨 위험한 음모 같은 수상한 소리만 나오면 고발해치우던지 쳐넘겨버리면 되는거니까. 괜한 생각이겠지만… 그럼, 갔다오겠소.》

문뒤에서 나온 동혁은 점방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면서도 감각으로 정보원이 긴장하여 급히 뒤따라 나오는것을 알았다.

《어데로 가는겁니까?》

동혁이 묻는 말에 성도가 대답했다.

《글쎄, 석류관이 어떨지.》

《석류관?》

동혁은 정보원이 들을수 있게 되받아 외웠다. 두사람이 타자 차는 떠나갔다. 예상한대로 정보원이 뒤따라 오려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는 꼴을 차창으로 얼핏 내다본 동혁은 한줄기 불안과 함께 장난기를 느꼈다.

그들이 도착한 고급술집인 석류관은 초저녁인데도 벌써 료금이 비싼 웃층의 특별실들까지 다 차있었다. 전통적인 조선식의 세부장식에 양풍을 곁들인 방들에서는 문이 열릴 때마다 와자자 웃어대는 소리며 이야기소리, 접대원들이 아양을 떠는 소리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량성도는 주방쪽으로 가더니 홀에서 기다리고있는 동혁에게 돌아와서 나란히 쏘파에 앉으며 말했다.

《독방을 부탁했지. 한 십분 기다립시다.》

두사람은 드나드는 각양각색의 고객들을 살피며 무의미한 한담을 했다. 한 중년남자가 량성도를 알아보더니 반갑노라고 떠들었다. 성도가 이렇게 각별히 아는 사람을 만나는것은 이 술집에 들어온 후에만도 벌써 네번째인지 다섯번째인지 되였다. 그들의 값싼 환희를 우울히 감상하던 동혁은 문득 뒤따르던 정보원이 홀어구의 복도모퉁이에 나타나 이쪽을 재빨리 살피고는 순간에 시선을 피하는것을 보았다. 동혁은 아무런 눈치도 못 차린체 했다. 정보원은 주방쪽으로 사라졌다.

접대원으로서는 로련해보이는 화사스럽게 차린 중년계집이 량성도에게 와서 방이 났다고 알려주었다. 성도와 동혁은 값지게 꾸려진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갔다. 3호실이였다. 한쪽벽아래에 세워진 진귀한 물고기가 노는 커다란 수족관과 그우에 걸린 조잡한 선정적인 그림을 얼핏 둘러본 동혁은 접대원에게 료리를 청한 성도에게 말했다.

《골치아픈 방이군요. 무슨 화제인지 산보나 하는것이 낫지 않겠어요?》

성도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시위자들에 대한 당국의 탄압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폈다.

그러는중에 접대원들이 그들의 식탁을 다른것과 바꾸었다. 이미있던 상도 왕의 수라상으로도 쓸수 있을것인데 새로 들여온것은 그보다는 작으면서도 산호며 호박, 자개 등으로 환상적인 별천지를 령통하게 새긴 호화로운 상이였다.

《이건 뭐 장난인가? 아까운 시간에.》

성도는 상을 바꿔치우는것이 어째 좀 뜨아한 모양이다. 그러나 량성도와는 이미 구면인 모양인 접대원은 새로 들어온 상에 값비싼 술과 안주를 차리면서 애교를 떨었다.

《아이참, 장난이라뇨. 이것도 특별써비스란 말예요.》

로출증에 걸린 방자스런 접대원은 청춘이면 만사통과란듯이 성도의 무릎에 난딱 올라앉아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계집은 불쾌해서 금시 나가버릴것만 같은 동혁의 눈치를 살피며 공격의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강형, 아무래도 우리끼리가 좋겠죠?》

성도는 동혁을 떠보더니 제 무릎우에 앉은 계집의 잔등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가봐, 우린 좀 달라.》

계집들이 뾰로통해서 나가자 성도는 금방 울적하고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깊은 한숨을 쉬며 동혁과 자기의 잔에 술을 부었다. 그리고는 흐린 얼굴을 푹 숙인채 돌부처처럼 굳어졌다. 운명을 건 어떤 중대문제로 속을 앓는듯 한 고통어린 얼굴이다. 그 모습은 이렇게 말하는것만 같다.

(내가 인제 무엇인가 말을 한다면 괴롭게 품고있던 진정의 고백이지, 그것은 세상을 개구리 해부하듯 파헤쳐본 현자의 매우 경청할만 한 말일수밖에…)

이러한 그를 넘겨다보는 동혁은 속이 뒤틀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솔직한 사람이 아니라 연기하는 배우같은 냄새를 느꼈다. 그에 대해서 최재명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이놈이 미중앙정보국의 고등첩자란 말인가? 겨레의 량심을 매도하고 파괴하는자라면 지금 보는 괴이하고 우울한 태도는 선량한 인간의것과는 인연이 없는 허식과 엉너리뿐이란 말인가? 이자가 나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도록 만들어야지.

이렇게 생각한 동혁은 경각심을 높였다.

성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강형과 마주앉으니 맑은 거울앞에 선 기분이랄가. 생각이 많아지는군요.》 하며 그는 잔을 들고 제의했다.

《자, 듭시다. 먼저 좀 취해보는게 어떻습니까?》

《그쪽에서 많이 드시죠. 안됐습니다만 난 취하면 졸음이 와서.》

둘은 잔을 비웠다. 몇잔을 거듭했다. 도수높은 술은 곧 피를 설레이게 하고 신경을 흥분시켰다. 성도는 반지를 낀 말쑥한 손으로 드티여진 안경을 밀어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강선생이 날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거든요. 난 대체로 변화무쌍하니까 판단이 잘 안 갈지도 몰라요. 학생시위조종자다, 각종 좌익사건 련루자다, 이코저코에 걸려가지곤 감방에 곤두박히는가 하면 제3로선이다, 지성인왕국이다 해가지곤 장삼리사들을 규합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사방에 얼려맞추는 론설위원이고, 또 노랗고, 파랗고, 이렇거든요. 어떻습니까. 어디 감정할수 있다면, 허어, 허허, 흐흐흐.》

성도는 술을 부어마시며 제멋에 넉살좋게 웃었다.

《우리야 뭐 피차 접촉이나 있었습니까. 량선생이야 하늘을 날고 나야 땅을 기니까 만능명사로구나 하고 뒤골이 땅에 닿도록 쳐다나봤지요.》

동혁이 어느 정도 낯색을 풀고 말하자 성도는 어쩌면 자기의 숨은 계획이 쉽게 이루어질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얼마전부터 량성도에게는 좌익분자로 될 소질이 풍부한, 능력있고 영향력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밀고하여 체포하려는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쓰든지 자기에게 비끄러매고는 좌익적기분을 가진 사람들속에서 마음대로 활동케 하면서 장기간 밀정으로 부려먹자는 속심이였다. 그의 상전인 버클도 성도가 적지 않은 반미, 반《정부》적인 인사들을 밀고하여 체포케 한 사실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직도 그들속에서 능숙하게 활동할수 있는 믿음직한 밀정을 박아넣지 못하고있는것은 참을수 없는 결정적인 약점이라고 여러번 찔렀던것이다. 그를 측면에서 조종하는 하틀리까지도 그의 이 약점은 그가 적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리는 기본원인이며 《정보일군으로서는 충실하기는 하나 재능이라고는 꼬물도 없는 표현》이라고 치욕적인 타격을 가했던것이다. 결국 여러가지로 골머리를 앓던 그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속을 비집고 다니다가 이번에는 동혁에게 불의에 부딪치는 모험을 감행해나선것이다.

성도는 동혁의 조롱을 받아들인다는듯이 머리를 건들거리더니 간교한 언어의 그물을 펼치기 시작했다.

《비난이군요. 싸지요. 내가 하늘을 날다니, 민중을 배신했다는 공격인가요. 하지만 그 결론은 좀 이르지 않을가요?》

그는 담배를 피워물더니 다시금 겉멋이 든 우울한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하긴 난 순결하지도 못한데다가 피투성이지요. 〈한국〉이라는 이 나라처럼 말이요. 속물들은 단순하지. 그러나 뜻으로 산다는건 한걸음에 불이 오고 두걸음에 홍수가 오는 고행길이죠. 눈에 보이는건 온통 참을수 없는 역류거든요. 민족을 망친 미국의 무기와 딸라, 문화의 광란, 재탕을 하려드는 일본의 갈구리, 그우에 생활의 갈피마다에 솟아오른 저 박정희라는 길로틴… 이런 판에 이 반항아가, 민중을 애인으로 삼은 이 량성도가 자기의 기치를 공개하고 한메터라도 전진할수 있단 말이요? 그래 강형은 나의 다양성, 우회와 굴절속에 피와 눈물이 숨겨져있다는걸 모르겠단 말이요?》

성도는 안경을 벗어 상귀에 놓고는 술기운에 벌거우리해진 눈을 쪼프리고 동혁을 응시했다. 그러나 동혁은 창문너머로 검은 하늘에 반짝이는 전기조명장식을 바라보더니 성도에게 사정없이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건 뭡니까. 내가 왜 이런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엄청난 오산입니다. 충고합니다만, 내가 만사를 체념한, 직업도 없는 고서점 주인이란 사실을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한벌의 새 류행복이 탐나서 괴상한 소리를 들으면 고발할수도 있다는걸 잊지 말라 그겁니다.》

량성도는 어이없다는듯 몸을 뒤로 제치고 킬킬거리더니 안경을 다시 끼고는 너부죽한 턱을 쑥 내밀고 다가들며 말했다.

《내가 오산한다구요? 천만에요. 제발 이러질 마쇼. 추악을 편들기 싫어서 직업도 없이 가난을 택한 강형의 그 순결을 왜 모르겠소. 자유동지회의 회장이 세상사에 체념할수야 없지요. 그건 그렇다치고 로베스 피에르 같은 그 심장과 두뇌를 고서점에서 썩게 만든다는건 뭐랄가, 거시기 베토벤을 장마당청소부로 매여두는것과 같은 수치란 말이요.

내가 뭘 감추겠소. 나에겐 강형 같은 인재가 필요해요. 이길 때까지, 죽을 때까지 하나의 의지로 피와 생명을 나눌 동지가 요구된단 말이요.》

집요하고 박력있는 공세앞에 동혁은 어느 정도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성도를 맞받아 폭로하면서 그가 토하는 허위와 요설로 긴 채찍을 꼬아가지고 놈을 눈코뜰새없이 내려조기고싶은 강렬한 충동을 누른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동혁은 다행 우둔한 사람이 아니여서 골풀이치는 심장을 누를줄 알았다.

《아마 대학시절이라면 그런 말에 혹 귀를 솔깃하는 실수쯤 범할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지금은 어림도 없지요.》

동혁은 랭소를 짓고 말했다.

《어리석어도 분수가 있지. 날 뭘로 알고 이따위 수작이요?》

동혁은 생각에 잠긴 성도를 쏘아보며 차디차게 말을 이었다.

《말이 났으니, 지론도 없는 자유동지회를 노리지 마시오. 당신을 따라갈 바보는 없을거요. 감히 그따위 유해가스로 오염시키려 할 때면 청와대와 미대사관의 손을 빌어 당신에게 치명상이 가해질수도 있다는걸 경고해두겠소.》

동혁이 너무도 비타협적인데 놀란 성도는 억지로 웃어보려 했으나 오히려 무엇에 찔린것처럼 얼굴이 이지러지고말았다. 화려한 론리도 펴는 법없이, 지성도조차 가늠할수 없는 막말로만 대들다니…

동혁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한 성도는 호랑이굴에 헛들린 여우처럼 당황했다.

한편 그들이 든 3호실 맞은편 방안문가에는 정보부의 하급밀정이 외상으로 받은 눅거리술과 바닥이 난 접시를 놓고 안절부절 못하고있었다. 그는 5분이 멀다하고 복도로 뛰여나가서는 남몰래 3호실 출입문에 난 자물쇠구멍으로 방안동정을 살피기도 하고 거기에 박쥐날개같은 귀를 대여보기도 하였다. 량성도인지 개성도인지 제발 《빨갱이》거라, 그러면 승급과 상금은 떼여놓은 당상이다. 이런 생각만 머리속에 자글자글했다. 한것은 그 방에 갈아넣은 화려한 술상밑에는 그가 이 술집에 있는 끄나불의 손을 빌어 붙여놓은 도청기가 있는것이다.

그는 다시 자리에 와서 앉는다. 미닫이문 저켠에서는 여러 사나이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며 계집들과 놀아대는 소리가 소란했다. 그러나 하급밀정에게는 술도 말상대자도 없다. 그는 부자들의 환락이 부러워도 흉내도 낼수 없다. 매일같이 담당지역을 굶주린 개처럼 헤매며 물어죽일 대상을 찾아 눈을 밝혀야 하는 신세, 상관은 매일 한건이상의 정보를 제공하라니 기막힌 일 아닌가. 무능한 밥통이라고 위협과 모욕은 얼마나 당하고…

(그놈 제발 《빨갱이》거라! 그까짓것 왈칵 덮쳐서 갖다바치면 나도 세상이 뱅글뱅글 돌게 마셔대며 놀아보는거다!)

이런 생각에 그는 또 속이 부그르르 끓어올라서 복도로 나갔다. 그런데 동혁이 문을 벌컥 열며 방안에서 그의 팔을 잡는 성도를 꾸짖는것이 보였다. 정보원은 얼른 홀모퉁이에 숨어서 귀를 강구었다. 동혁의 성난 말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어리석소. 그따위 쿠데타음모에 누구를 감히…》

《하아, 이거 누가 듣겠소. 이러지 말고 조금만 더 들어보라니까.》

간청하는 량성도의 말소리와 함께 그가 억지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정보원은 너무나 놀랍고 기뻐서 주먹으로 무릎을 탁 쳤다.

《쿠데타음모? 이것 봐라. 이거 무슨 돈낟가린가!》

돌에 채워 어푸러졌다가 금항아리라도 발견한듯 무섭게 타는 눈에 눈물까지 어린 그는 너무나 흥분하여 턱을 덜덜 떨기까지 했다.

한편 량성도는 자기의 집요한 요설에 화를 내며 자리를 뜨려고 일어난 동혁에게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간청했으나 단호한 거절을 당하여 어쩔바를 모르고있었다. 늙은 여우처럼 검질기고 교활한 그는 실은 격분하고있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술잔까지 권하며 달라붙었다.

《허 참, 왜 이러쇼? 자, 이 잔만 들어요. 당장 무슨 동맹을 뭇자는것도 아니지 않소. 다만 나라는 사람은 이렇다는거니까 연구해주길 바란다는건데. 정말 믿고 다시말하지만 저 거시기 매국노들을 해치우려고.》

성도는 저로서도 아짜아짜하다는듯 손가락을 코에 대고 눈을 찌프려보이며 말했다.

《모종의 극적인 일을 준비하고있다는것만은 잊지 말라 그거요.》

성도가 거짓말을 하고있다는것은 너무나 명백했다. 도처에 도청장치가 있고 밀정들이 노리고있는 세상에서 이런 운명적인 말을 술집에서 탕탕 한다는것은 바보가 아니면 음흉한 책사일뿐이다. 이것을 확신하게 된 동혁은 술잔을 쳐들고 굳이 권하는 성도의 잔을 쳐물리쳤다. 그바람에 술이 성도의 얼굴에 끼얹어졌다.

성도의 얼굴이 노여움에 일그러졌다. 벌떡 일어난 그는 접대용수건으로 얼굴을 급히 닦으며 동혁을 노려보았다.

《햐, 이 친구가 한다는짓이…》

그러건말건 동혁은 문가로 다가가다말고 사납게 돌아보며 위협했다.

《량성도씨, 제 목이나 잘 간수하시오. 모르고 한번이지 두번째라면 당신 같은 뚜쟁이는 살려두지 않겠소!》

동혁은 야단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바람에 밖에서 열쇠구멍에 귀를 대고있던 정보원이 이마를 문에 부딪치고는 혼이 빠지게 놀라 뒤로 껑충 물러났다. 조바심때문에 행동에서 여유를 잃은 땅딸보밀정은 동혁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급히 방안으로 들어가서 랑패감에 잠긴 량성도에게 비수나 뽑아들듯 신분증을 내대며 오래간만에 승리자의 거만을 부렸다.

《호오, 당신이 량성도요? 낯판대기는 번드르르하군그래. 안됐소만 체포하겠소!》

량성도는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화에 한순간 멍해있더니 곧 화를 냈다.

《이건 또 뭐야? 허 참, 별일도… 물러가, 물러가!》

땅딸보는 주먹으로 성도의 얼굴을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요새끼 주둥일 그저, 임마! 뭐 쿠데타? 발뒤축을 목구멍으로 뽑아내야 알겠어? 이쌍 기생오라비같은 자식!…》

첫 매에 안경이 달아난 성도는 여전히 고자세로 꿱꿱거렸다. 그러나 땅딸보는 매집좋은 그를 다시금 주먹과 발길로 치고 차더니 직업적인 날랜 솜씨로 팔을 비틀어 포승을 지웠다.

반쯤 열려진 문밖에서 이 놀라운 광경을 주시하던 동혁은 막연하게 바라던 일이 정작 통쾌하게 벌어지자 얼떨떨할 지경이였다.

량성도를 체포한 땅딸보밀정은 많은것이 남아있는 식탁을 흘끔 돌아보더니 두 술잔에 넘치게 술을 부어 던져넣듯 마시고는 손으로 고기안주를 한점 쥐여물었다. 그리고는 식탁밑에서 도청기를 떼여내더니 그것을 성도의 코앞에 내대고 약을 올려주듯 뱅글뱅글 돌려보이며 입안에 든것을 쩝쩝 소리나게 분주히 씹어댔다. 그의 이러한 조야스럽고 치졸한 꼬락서니는 제노라 하던 량성도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미중앙정보국의 고등첩자는 《한국》정보부의 하급정보원에게 체포되여 끌려가게 된것이다.

손을 묶이운채 맞은 자리가 뻘건 처참한 얼굴을 푹 숙이고 끌려나가던 성도는 복도에서 구경하는 여러 사람들속에서 동혁의 눈과 마주쳤으나 아무런 허세도 꾸미지 못했다.

동혁은 진수를 만나면 그를 웃겨볼수 있는 이야기거리가 생긴것을 즐거워했다. 그는 정보원이 현관에 미리 대기시킨 차에 량성도를 처싣고 떠나는것을 보며 랭소를 지었다.

《현대광고연구소》라는 위장간판이 붙은 정보부의 고문실로 직행한 성도는 이런 경우 흔히 그렇게 하는, 찬물대접을 받는 예비심문의 《신사적인 단계》도 걸치지 못하고 처음부터 지옥의 불속에 떨어졌다. 우울해있던 악한들은 얼씨구나 하고 온갖 흉기를 가지고 그를 눈코뜰새없이 패고 비틀어댔다. 한것은 술집에서 그가 마구 지껄인 이야기를 도청기의 록음테프로 들어본 정보관리들이 성도를 매우 위험한 거물급《빨갱이》로 단정하고는 그에 대한 심의권을 상급기관에 빼앗기기 전에 자기들이 빈틈없는 조서를 꾸며서 《공》을 세우려 했던것이다. 게다가 그에 대한 조사카드에는 지난날 몇번이나 좌익사건에 관련됐었다는것이 밝혀져있은데다가 최근동향도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여서 그를 가혹하게 다루는데는 아무것도 주저할것이 없는것으로 보였다.

성도를 체포해온 땅딸보는 동료들로부터 질투어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상관은 돌격적인 첫 심문을 마친 뒤에 그를 부르더니 만족하게 치하했다.

《얼마나 큰 놈을 잡았는지 알고나 있나? 자네 그 머리털은 개털인줄 알았더니 그게 온통 안테나였군그래!》

그들에게는 량성도가 《현행범죄》가 많은 거물일수록 좋았다. 그래서 성도에게 자신을 변명하거나 변호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쿠데타음모》의 전모를 고백하라고 숨돌릴 틈없이 때리고 찌르고 비틀어댔다.

이렇게 한두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온갖 제멋을 부리며 호사와 사치를 뽐내던 이 《유명인사》의 몸뚱아리는 시궁창에 짓밟힌 개꼴이 되고말았다. 씨. 아이. 에이를 코에 걸고 취조관들을 몇번이나 위협하기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성도는 끝내 까무라치고말았다.

이렇게 류치장과 고문실로 몇번 끌려다닌 성도는 자기가 겪는 재난의 원인이 자기의 지나친 실수에 있는지, 아니면 강동혁이 꾸민 덫에 걸려든것인지조차 분간할수 없었다. 고통에 의지가 꺾이운 그는 강동혁이 무서워졌다. 그를 《빨갱이》용의자로 지목하고 달라붙었던것이 엄청난 과오처럼 보였다.

성도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자기의 목에 강동혁이가 새끼줄을 매여가지고 어덴가 맵짠 칼바람속으로 끌고 가는 환영을 몇번이나 보았다. 언틀먼틀한 얼음길에 얼굴이고 가슴 할것없이 온통 긁히우며 끌려가는 그는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어깨에 사냥총을 멘 거인인 동혁은 들은체 하지도 않고 어덴가 먼곳을 정신없이 바라보는 모양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성큼성큼 걷기만 한다.

성도는 어찌된 일인지 사냥군인 동혁에게 자기가 사람이라는것을 납득시킬수가 없다.

《여보게, 자넨 내가 메돼진줄 아나! 아니야, 난 사람이야, 나야 나! 량성도라니까!…》

만신의 힘을 다해 아우성치며 애걸해도 사냥총을 멘 동혁은 걸음을 다우칠뿐이다. 성도는 숨이 넘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는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환각속에 보이던 동혁의 모습대신에 취조관들의 악마적인 얼굴이 그의 눈을 찔렀다.

(동혁은 과연 어떤자일가? 혹시 숨은 부하들을 거느린 능숙한 정보관인지도 모른다.)

성도는 이런 생각을 곱씹으며 허탈감을 느꼈다. 자신을 개탄할수밖에 없는 그는 참을길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취조관들에게 씨.아이. 에이에 전화만 한번 걸수 있게만 해준다면 자기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겠다는 애원만 거듭했다. 그것이 효과를 보았다. 그는 취조관들의 발밑에 늘어진 몸으로 입안에 고이는 피를 퉤퉤 뱉으며 전화로 간신히 상전에게 구원을 요청할수 있었다.

버클과 하틀리는 즉시 대책을 세웠다. 현장에 나타난 그들의 《한국인》파견원은 고문실에 반주검이 되여있는 성도의 몰골을 살펴보더니 취조관들의 두목을 번개같이 후려치며 방안이 들썩하게 소리쳤다.

《X같은 짜아식, 눈깔이 멀었어? 소경 제 닭 잡아먹어도 분수가 있지. 이게 누군줄 아는가? 대아메리카의 투사란 말이다!》

결국 이 우습강스러운 사건은 량성도에게는 며칠간의 치료를 위한 입원으로 끝났으며 그를 체포했던 땅딸보는 승급과 상금이 차례진 행운의 문턱에서 그만 컴컴한 구렁속에 꺼꾸로 박히는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고서점 주인만은 무사했다. 씨. 아이. 에이조차 그를 의심한것을 《의심과다증으로 범한 실수》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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