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10 장


52


진수는 바쁜 틈에도 시간을 내여 안해와 함께 김용기를 찾아 떠났다. 최근에도 고향에 가서 김용권을 만나고 온 일을 전할겸 그를 만나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눈 일도 있었다. 사촌형을 깊이 존경하는 용기는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행동거지가 무게있는 믿음직한 청년이여서 날이 갈수록 그에게 마음이 강하게 쏠렸다.

진수로서는 그의 사상적인 성장을 위해서 성의껏 도와주느라고 했지만 실상은 소박하면서도 투쟁적인 그에게서 많은것을 배우고있었다.

용기가 근무하는 《한일자동차》회사의 로동자들과 기술진은 몇달간씩 사이를 두고 거듭 완강하게 파업투쟁을 벌리고있었다. 로임을 타지 못하는 로동자들의 생활은 비참하기가 이를데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풀뿌리를 삼키면서도, 때로는 그것도 없어 맹물로 타는 목을 추기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우고있었다.

진수부부는 용기네 살림에 보탬을 주려고 쌀 한말을 려행용가방에 넣어들고 찾아갔다. 진수는 진수대로 용기를 따로 만나야 할 일이 있었다.

느린 경사를 지어 뻗어오른 판자촌의 좁은 골목길을 급히 올라간 그들은 마침 집에 있는 용기를 만났다. 문앞에서 진수가 조용히 부른 첫마디에 밖으로 뛰여나온 용기는 언제나와 같이 반가와했다.

조촐한 방안으로 들어가니 낯선 처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총명하게 생긴 가무슥한 얼굴에 몸이 다부져보이는 처녀는 방문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용기의 눈치를 살피며 수줍게 미소했다. 용기는 약간 뽐내는듯 한 표정으로 익살스럽게 처녀를 소개했다.

《내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겨우 친한 아가씬데, 서복심이라고. 우리 회사 검사부에서 일하죠.》

그러더니 이번에는 엄숙해져서 이쪽을 소개했다.

《이분은 창덕사사건때, 알지?… 그 유명한 정진수기자선생님이고 이분은 부인이시며 화가이시며…》

웃음이 터지고 롱담이 오고갔다.

《용기가 대단한데. 왜 눈을 눈섭우에 달고 헤매는가 했더니 이렇게 고운 처녀를 고르느라고… 한턱 단단히 내야겠어.》

처녀는 진수가 덕담을 하고 문희가 자매간처럼 스스럼없이 반겨주자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여 괜히 용기를 주먹으로 때리며 미태를 부렸다. 용기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침부터 밤까지 물고기행상을 하느라고 집에 없었다.

《그래, 이번 파업에서는 이길 자신이 있나? 고생이 여간이 아니겠지. 아무튼 요즘처럼 항쟁시위가 끓어대는 때에 또 들고일어난건 잘하는 일이야.》

모두 자리에 앉았을 때 진수가 이렇게 말하자 용기는 커다란 손으로 무엇을 휘여꺾는 시늉을 하며 호기를 부렸다.

《민규석놈에게 결정타를 먹이자는거지요. 그러지 않아도 놈들은 눈에 띄게 비칠거리고있어요. 우리가 들고일어나니 회사는 뒤죽박죽이 됐지, 생산은 멎었지, 뒤를 대주던 일본의 이마무란지 하는 놈은 겁이 나서 슬슬 뒤걸음치지. 거기다 아저씨랑 여러 신문에서 흑막을 자꾸 들춰내여 두드려패는데 그놈인들 수가 있어요? 문제는 끝까지 해대는거지요 뭐.》

진수와 문희는 용기를 쳐다보았다. 이 수난의 아들은 비록 동화속에 나오는 집처럼 볼품없이 작은 판자집에 살며 입에 풀칠도 변변히 못하는 형편이면서도 권력을 업은 큰 자본가를 코끝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덕사 판자촌이 허물린 날엔 너무도 절망하여 펄펄 날리는 눈속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비애의 조각상처럼 서있던 사람이 아니였던가. 그러나 끝없이 밀려드는 갖가지 불행은 그에게 반항의 투지를 벼리여주고 투쟁의 시련은 그의 내부에 잠자고있던 분노와 힘을 깨우쳐준것이다. 한번 각성하여 일어난 이런 사람은 설사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투쟁의 자세를 허물지 않는것이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서복심도 여간한 처녀가 아니였다. 고아로서 철부지시절에 벌써 어른의 설음을 배우며 눈물겹게 자란 처녀는 정의감이 강하고 영민했다. 파업에서는 언제나 녀성들의 앞장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한무석이 언젠가 용기가 아직 이 처녀를 겉낯으로만 알고있었던 때에 그들을 신혼부부로 가장시켜 밤거리에서 삐라를 뿌릴 임무를 준일이 있었는데 그밤에 용기는 세심하면서도 대담하고 아슬아슬한 위기도 림기응변의 다채로운 기지로 재치있게 넘기면서 오히려 자신을 앞장에서 고무해주던 이 처녀에게 반하고말았다. 구태여 쑥스럽게 사랑을 고백할것도 없었다.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는것으로도 그들은 상대가 자기의 짝임을 알수 있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무등 기뻤다.

이것저것 가벼운 이야기가 오가던 끝에 용기가 책상서랍에서 자기가 쓴 격문초안을 꺼내여 진수에게 보였다.

《이거 글이 됐는지 좀 봐주세요. 이 아가씨가 명령하는 바람에 써본건데…》

《그래, 내가 읽어봐야 한다는것도 아가씨의 명령이겠구만.》

진수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처녀는 또 용기의 어깨를 때렸다. 진수가 읽어보니 제법 그럴듯한 글이였다. 정세를 살피면서 동요하는 일부 로동자들을 각성시켜 총파업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는 격문이였다. 그는 몇군데 표현을 수정해주고 한두줄 보충해주었다. 문희는 복심이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계기를 타서 진수는 눈짓으로 용기를 불러 잡동사니들을 넣어두는 자그마한 옆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용기는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이 시퍼래서 진수를 쳐다보았다.

《조용히 만나고싶었다.》

진수가 용기의 어깨에 손을 얹자 촉기빠른 용기는 얼른 사이문을 열고 복심에게 밖을 살펴달라고 눈짓했다. 두 녀인은 곧 밖으로 나갔다.

《용기, 용서하라. 내가 몰라서 너를 더 도와줄수가 없었다. 언젠가 물었지. 어떻게 하면 싸울수 있는가고.》

진수는 품속에서 정히 싼 책을 꺼내여 용기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읽어보아라. 이속엔 네가 알고싶어하는 모든 진리가 다 밝혀져있다.》

그것은 진수와 문희도 읽은적이 있는 김일성장군님의 전기인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이였다. 진수는 동혁에게 이 책을 용기와 한무석에게 읽힐 자기의 결심을 피력했었다.

책을 받아쥐고 들여다보던 용기는 《야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좋아할 때의 버릇대로 연신 숨을 들이쉬며 어깨를 들썽하니 살구고 제자리걸음을 치더니 뜨거운 눈길로 진수를 바라보며 그의 손을 틀어쥐였다. 어떻게나 아프게 틀어쥐는지 진수의 손의 뼈마디가 부스러지는것만 같았다.

《이 책을 보면 김일성장군님의 절세의 위인상을 잘 알게 될게다!》

진수가 말했다.

《알겠지? 조심해서 보되 인차 보고 한무석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용기는 천진한 소년처럼 밝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얼마후 진수부부는 들고 왔던 쌀을 남기고 이 집을 떠났다.

어슬막에 판자촌을 벗어난 그들은 거리에서 뻐스를 타고 성북구쪽으로 가다가 야외등이 켜진 자그마한 공원이 보이는 정류소에서 내렸다. 진수는 공원에 있는 한 화단앞에서 류인태교수를 만나야 할일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이 아직 십분쯤 남아있었다. 문희는 산책삼아 걸어서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안해와 헤여져서 공원쪽으로 몇걸음 걸어가던 진수는 심상치 않은 광경을 발견했다. 문득 보니 약속된 화단앞으로 어떤 남자가 허둥거리며 뛰여오더니 이쪽저쪽으로 헤매며 주위에서 오가는 사람들속에서 누군가를 급히 찾고있는것이 보였다. 교수가 나를 찾고있는것이 아닐가? 그렇다면 무슨 사고가 난것이 틀림없었다.

진수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문희를 부르고는 먼저 공원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아니나다를가 류인태교수였다.

진수를 만난 류인태는 혼란된 시선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쁜숨을 몰아쉬더니 《안한수가 어떤 사람인가? 안한수.》 하고 밑도 끝도 없이 다우쳐물었다.

《기자 안한수말인가요? 그놈은 남산끄나불입니다. 무슨 일인데?》

교수는 얼굴이 사색이 되여 더듬거리는 말로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했다.

류인태는 방금전에 자기 집 서재에서 김일성장군님의 로작을 읽고있었다. 그런데 간혹 놀러 온 일이 있는 안한수(교수는 한수의 고등학교시절의 스승으로 친분이 있었다.)가 허물없는 사이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를 찾았다. 로작을 안전한 비밀장소에 숨길 여유가 없었던 교수는 급한 나머지 서가에 꽂힌 책뒤켠에 눕혀놓았다. 그런데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 교수의 마지막동작을 본듯 한 한수는 책구경을 하며 서가의 책을 이것저것 뽑아보다가 뒤켠에 눕혀있는 로작을 찾아냈다. 우연한노릇인지 알고 하는노릇인지 알수가 없었다.

교수가 요구했으나 한수는 의외로 부둥켜쥐고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좋은 책을 왜 혼자만 보는가, 자기도 볼수 있도록 빌려달라, 써비스겸 얼른 술 한병을 사가지고 오겠다… 이러면서 너스레를 떨더니 로작을 놓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그의 행동이 수상쩍은것을 눈치챈 교수는 급히 로작을 안전한 장소에 감추고 진수와 만나기로 약속한 이곳으로 달려온것이였다.

사태를 파악한 진수는 류인태에게 급히 몸을 피하라고 이르고는 문희와 함께 멀지 않은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수색대가 몰려들기 전에 빨리 로작을 빼내야 했다. 한초가 천금같은 순간순간이였다.

교수의 집에 뛰여든 진수는 교수에게서 들은 장소에서 로작을 찾아내여 품속에 간직하고는 그 집앞에서 망을 보던 문희와 함께 골목길에 뛰여들었다.

이때 앞쪽에서 한대의 검은 승용차가 보행자들을 깔아치울듯 한 무서운 속력으로 달려왔다. 진수와 문희는 얼른 어느 집 대문귀의 검은 그늘속에 숨었다. 그들의 곁을 쏜살같이 지나간 차는 류교수네 대문앞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하더니 네댓명의 사나이들이 뛰여내려 대문안으로 달려들어가는것이 보였다. 정보부놈들이였다.

제일 위험한 고비를 넘긴 진수는 한걸음이라도 더 멀리 벗어나려고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문희를 재촉하며 다시 골목길을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메터도 못 가서 뒤걸음치지 않을수 없었다. 앞쪽에서 여러명의 사나이들이 자동차의 조명등으로 골목길을 비치며 통행자들을 모조리 붙잡고 몸수색을 하고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집집을 수색하고있었다.

진수와 문희는 옆길을 거쳐 다른쪽으로 빠지려고 했다. 그런데 이일을 어찌하는가, 그쪽에도 놈들이 지켜서있었다. 사방에서 다급한 호각소리가 났다. 놈들의 포위망은 각일각 조여들고있었다.

진수는 눈앞이 아뜩해왔다. 문희는 안타까와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다, 설사 가슴에 칼이 들어온다고 하여도 절망해서는 안된다. 무조건 구원해야 할 귀중한 로작이다. 하지만 모조리 수색을 당하는 포위망속에서 어느 틈사리로 빠져나갈수 있단 말인가?

둘은 정신없이 허둥거렸다. 그러다가 문희가 우연히 하수도뚜껑을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하수도는 지옥에서 찾아낸 유일한 탈출구였다. 가슴속에 로작을 소중히 지닌 진수는 순간에 모은 힘으로 하수도의 무거운 쇠뚜껑을 열고 그속으로 들어가며 문희에게 하수도의 어느 하구로 오라고 속삭이였다. 뚜껑은 진수와 문희의 손에 의해 소리없이 닫겼다.

그런 후 십초도 지나지 않아서 놈들의 자동차가 조명등을 비치며 나타났다. 문희는 놈들에게 모욕적인 몸수색을 당하면서도 로작과 남편이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진수는 물소리가 소란한 캄캄한 하수도속을 정신없이 기여갔다. 돌이 많은 밑바닥은 물때가 앉아 얼음판처럼 미끄러웠다. 아무것도 분간할 길 없는 진수는 로작에 물기 한점도 스며들어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조심히 그러나 전속력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따금 머리우의 땅이 쿵쿵 울리고 쇠덩어리가 무딘 소리를 내며 우는가 하면 사람들의 웨침소리와 먼 호각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럴 때면 그는 하수도뚜껑밑을 지나가고있다는것을 느꼈다.

한편 포위망에서 무사히 풀려나온 문희는 얼마후 진수와 만나기로 약속한 하수도하구가 있는, 시내물에 면한 나지막한 언덕에 이르렀다. 렬지은 가로수와 그밑으로 간혹 오가는 산보객들의 모습이 달빛과 먼 불빛에 희미하게 보였다. 시내가에 내려간 문희는 곧 개울에 떨어지는 고르로운 물소리를 좇아 하수도의 하구를 찾아냈다.

문희는 남이 눈치를 챌세라 산보하는체 하면서 근방을 어슬렁거리다가 하수도의 하구에서 얼마간 떨어진 잔디밭에 앉았다. 그렇게 한순간이 지나갔을 때 하수도의 물소리가 숨을 쉬듯 간헐적으로 리듬을 짓더니 인기척이 어렴풋이 들렸다.

순간, 문희는 기쁜 마음 하나로 조심을 못하고 그곳으로 반달음을 쳐갔다. 가쁜숨을 몰아쉬며 하수도에서 기여나온 진수는 주위를 살피며 급히 속삭이였다.

《빨리 간수하고 가오. 빨리!》

진수의 손이 어지러워서 문희가 남편의 품속에서 체온에 덥혀진 로작을 꺼내여 제 품에 간직하고 언덕으로 뛰여올라갔다. 진수는 다른쪽으로 피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서 그들의 일거일동을 눈이 빠지게 살피는 사나이가 있었다. 언제나 그곳 주변을 감시구역으로 삼고 산보객으로 가장하고 어슬렁거리고있던 정보원이였다. 탐정영화의 한 장면을 본듯 한 정보원은 총소리를 들은 노루처럼 뛰여일어나 문희를 뒤쫓아 달려가며 소리쳤다.

《서라아! 서라아!》

하수도에서 나온 사나이보다는 무슨 비밀스러운 물건을 넘겨받은 (어쩌면 은행을 털어낸 거액의 돈인지도 모르는) 녀자를 붙잡는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한것이였다.

한 사나이가 자기를 쫓아오는것을 돌아본 문희는 너무나 두려워서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달렸다.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리는 차도를 아슬아슬하게 뛰여건너간 문희는 2~3층 되는 중류급주택들이 비좁게 들어선 주민지구로 뛰여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희와 추격자와의 거리는 좁혀지고있었다. 경험있는 투사라면 이런 위기쯤은 수월히 회피할수 있을것이다. 어두운 밤인것만큼 뛰는것보다 숨는쪽이 나을것이며 그것도 어려운 경우에는 몸단장을 간단히 바꾸고 대담하게 돌아서서 통행인들속에 어울려 아닌보살하고 맞받아 걸어갈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문희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위험한 덫이 숨어있는것만 같았다. 공포와 절망은 그 녀자의 판단력을 점점 흐려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간 더 달리던 문희는 번개처럼 비쳐드는 생각을 좇아 《도적이다! 저놈 잡아라!》 하고 몇번이나 급한 소리를 쳤다.

그 소리에 집집에서 놀란 사람들이 골목으로 뛰여나왔다. 급기야 어느 한 뚱뚱한 부인이 대문밖으로 뛰여나오다가 달려오는 정보원과 맞부딪쳐서 둘 다 나딩굴었다. 정보원은 인차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숱한 남녀로소가 골목에 쏟아져나와있어서 누가 누군지 알길이 없었다. 화가 난 정보원은 쓰러져서 그때까지 꿍꿍거리는 부인의 궁둥이를 걷어차고는 사람들속을 헤치고 나갔으나 이미 《보물》을 가진 녀자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람들로 연막을 치고 추격에서 간신히 벗어난 문희는 얼마후에는 강동혁의 집에 도착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온것은 잘하는 일이 못되였으나 그 녀자로서는 다른 방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달아오른 얼굴에 땀이 줄줄 흐르는 문희의 너무도 장한 모습을 바라보던 동혁은 그 녀자의 손을 틀어쥐며 격정에 마디마디 끊어지는 소리로 치하했다.

《문희씨! 고맙소! 난 언제나 믿고있었소!…》

문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동혁이 어떠한 투쟁을 펼치고있는가 하는 구체적인 내막은 모르고있었으나 그가 남편의 절친한 벗이며 자기를 보람있는 새로운 길로 이끌어주는 미더운 사람이라는것으로 하여 그의 칭찬을 받는것이 더없이 기뻤다.

문희가 눈물이 글썽하여 웃는것을 본 옥림이 그를 억세게 포옹해주었다. 마주 그러안은 문희는 이제는 떨어질수 없는 친우로 된 옥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채 소리를 죽여 울었다.

자기 집으로 돌아온 문희는 문턱을 넘어서기가 바쁘게 맥을 놓고 주저앉았다. 너무도 지쳤던것이다.


한편 동혁은 급히 소조에 긴급사태를 알리는 한편 체포될 위기에 놓인 류인태교수의 행방을 알아내여 구출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발동하였다. 진수도 노력하였다. 했으나 류인태의 행방은 알길이 없었다. 사태는 매우 위급했다. 류인태는 이름있는 교수이기때문에 이쪽에서 재빨리 찾아내지 못하면 몇시간이내에 체포될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알리 없는 류인태는 진수와 헤여진 후 줄곧 밤거리를 정처없이 헤매고있었다. 그는 자기가 체포되는것은 시간문제라는것을 알고있었다. 교수의 기분은 한없이 불안하고 암담했다. 만회할수 없는 실수를 범한 자신이 무엇때문에 숨어다녀야겠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 자라올랐다.

(내가 네놈들이 무서워 쫓겨다닌단 말인가?)

창경원의 담밑을 지나가며 동물사의 어느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먼소리를 들은 그는 검푸른 하늘에 먹장구름처럼 엉킨 벗나무의 무성한 가지속에서 숨박곡질하는 쪼각달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신성한 진리를 다소나마 체득한 내가 천하의 추물들에게 죄진 놈처럼 쫓겨다니다니. 어떻게 이럴수 있는가. 나는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있다. 안되겠는걸. 이럴순 없어.)

그는 한동안 서서 생각을 이어갔다.

(쫓기다가 잡힌다면 그보다 더한 치욕이 또 있겠는가? 내가 그런 꼴로 친구들과 제자들의 추억속에 남는다면 나는 한생토록 쌓아온 모든 가치를 상실하는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진리를 숭상할줄은 알았으나 투지라고는 전혀 없는 나약한 선비였다고 동정이나 할것이다.

그런데 살인귀들은 나를 어떻게 볼것인가? 어리석은 그놈들은 정의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도 제놈들을 무서워한다고 우쭐해질수 있다.…)

이 마지막생각은 그의 끓어오르는 거센 자존심과 충돌하여 폭발치는 분노를 일으켰다. 그는 주먹으로 돌담을 치며 단호히 결심했다.

(나는 맞받아나가야 한다! 잡히는 순간까지, 숨지는 순간까지…)

운명적인 결심과 함께 교수는 하나의 목적지를 생각해내고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류인태가 나타난 곳은 서울의 번화가에 있는 한 회관이였다. 거기서는 풍채좋은 한 의학박사가 천여명의 청중앞에서 위생과 질병에 관한 강연을 하고있었다. 회관의 뒤문으로 들어와서 무대의 차단막뒤에 소리없이 나타난 류인태는 연단옆에 있는 사회자의 자리가 비여있는것을 보고 조용히 강연자를 불렀다.

연사가 강연을 중단하고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으며 류인태에게 다가왔다.

《밖에서 누군지 찾는군요. 아주 급한 일인가봐요.》

의학박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무대로 나가 청중들에게 잠간 실례하겠노라 거듭 량해를 구하고는 오리발걸음으로 총총히 무대뒤로 사라졌다.

그때 서둘러 연단에 나선 류인태는 어리둥절하여 술렁거리는 군중을 호협한 기상으로 진정시키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나는 한생을 총화하여 도달한 유일한 광명의 길을 자랑으로 알리고싶어 여기로 왔소!》

교수의 목소리는 더욱 쇠소리처럼 울렸다. 열정에 달아오른 그는 활기있게 손세를 쓰며 웨쳤다.

《여러분, 우리가 이 더러운 세상을 들부시고 저 박정희매국노와 양키들, 왜놈오랑캐들을 쓸어내고 가슴을 펴고 커다랗게, 빛나게 살자면 오직 한길,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가리키시는 민족자주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사상이야말로 만백성을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행복한 세계에로 인도하는 우리의 기치, 우리의 노래, 우리의 광명입니다!…》

흥분한 군중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들속에 박혀있던 사복경찰들과 밀정들은 무대앞으로 달려나오며 저놈을 잡으라고 미친듯 부르짖었다. 그러나 놈들의 소리는 군중속에서 부지중 터져오른 박수소리에 삼키우고말았다. 회관안은 온통 수라장이 되였다. 무대우에 뛰여오른 정보원들은 그때까지 온 목청으로 열변을 토하는 류인태를 주먹으로 쳐서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는 코피가 터지고 몸의 균형을 잃고 비칠거리면서도 두주먹을 내두르고 펄떡펄떡 뛰는 심장으로 무섭게 놈들을 절규했다. 몸이 온통 땀이고 불덩어리였다.

류인태는 그길로 중앙정보부의 남산지하실로 끌려갔고 거기서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 어떤 야만적인 고문도 백발이 성성한 교수의 투지를 꺾지 못했다. 그는 흉기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사자같은 기상으로 취조관들을 추상같이 규탄했다.

《이노움! 너도 사람새끼냐?》

《이 천하의 인간쓰레기같은 놈! 5천만겨레의 1억의 발길이 네놈들을 티끌이 되게 짓밟을줄 알라!》

《나를 꺾겠다고? 어림도 없다. 죽어서도 돌탕을 맞을 이 개망나니같은 놈들!…》

이런 욕설이 그의 입에서 끝없이 튀여나왔다.

놈들이 로작의 출처를 대라고 호통을 치면 교수는 이름도 알수 없는 누군가가 부산에서 우편으로 부쳐온것이라고 주장했고 로작을 어데다 숨겼는가고 물으면 네놈들에게 빼앗길수 없어서 거리에서 낯선 행인에게 선물했다고 주장했다. 무섭게 괴롭히며 열번, 스무번 물어도 같은 대답이였다.

그런가 하면 놈들이 조직을 대라고 욱박지르면 자기는 진리를 탐구하는 보통학자이며 그 어떤 조직에도 든 일이 없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그러다간 기개높은 인간의 자세로 취조관들을 무섭게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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