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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16일

평양시간


(제38회)


제 4 장


6


이른아침, 관하구분대들을 돌아보던 표무강은 우뚝 멈춰섰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맑은 물소리!

이슬이 뚝뚝 떨어지는 소나무가지를 슬며시 제끼자 두손을 모아쥔것처럼 오목한 홈타기에서 옹달샘이 솟구치고있는데 한 처녀가 주변의 검불들을 차근차근 거두고있었다.

한동안 일에 골몰하고있던 그는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희고 갸름한 얼굴이 드러났다.

표무강은 숨이 꺽- 막히는것 같았다.

뜻밖에 그는 영영 만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였던 신애였다.

《신애!》

한달음에 뛰여간 표무강은 놀라서 일어나는 처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마나, 무강씨!》

순식간에 두사람은 한덩어리가 되여버렸다.

뜨겁고 숨막히는 포옹이 끝나자 표무강은 믿어지지 않는 눈길로 처녀의 발깃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신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신애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뭘 그리 놀라세요? 제가 나타난게 반갑지 않은 모양이지요?》

《무슨 소릴 하는거요? 난 그때 신애가 벼랑에서…》

《그래요. 전 그때 벼랑밑으로 떨어졌댔어요. 허지만 무강씨를 남겨두고 그냥 갈수 없어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어요.》

정신을 잃고 떠내려가는 그를 구원해준 인정많은 배사공, 애인이 대대를 이끌고 무사히 의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눈물을 흘린 처녀…

이야기를 마친 신애는 다시 찾은 사랑을 잃을가봐 겁이 난듯 표무강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무강씨, 정말… 보고싶었어요.》

《나도 신애가 무척 그리웠소.》

련대가 남진할 때 표무강은 신애가 뛰여내린 벼랑을 찾아갔었다.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곳은 대대를 이끌고 의거하는 애인을 위하여 꽃나이청춘을 서슴없이 바친 한 처녀의 넋을 소중히 간직하고있었다. 푸르싱싱한 풀숲에도, 거부기잔등같은 바위에도 처녀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것 같았다.

그 벼랑밑에는 이 땅의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강물이 사품치며 흐르고있었다.

터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서있던 표무강은 목터지게 소리쳤다.

《신애, 내가 왔소!》

《…》

《어디 있소? 어디 있는가 말이요?》

사랑을 잃은 사나이의 부르짖음에 화답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도 절통하여 가슴을 쾅쾅 들이치던 그는 두주먹을 불끈 쥐고 벼랑을 내렸다.

신애는 죽지 않았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던 신애가 어떻게 죽을수 있단 말인가. 아마 좀 다쳐서 어느 농가에 누워있으리라.

두눈을 부릅뜨고 강줄기를 따라 펼쳐진 마을들을 발바닥이 닳도록 찾아헤맸다.

《에이구, 웬 처녀가 벼랑에서 떨어졌다는 소린 들었지만 살았다는 말은 못 들었수다.》

《그 높은데서 떨어졌으니 어떻게 살아나겠소.》

비통한 심정을 안고 떠나는 표무강의 귀전에 언제인가 신애가 한 이야기가 쟁쟁히 울렸다.

《전 인간의 한생도 이 샘과 같다고 봐요. 만약 한 인간이 민족을 위해 참된 삶을 살았다면 마음은 샘처럼 맑고 깨끗할거예요. … 전 언제나 맑고 깨끗한 이 샘처럼 살고싶답니다.》

그런데 잘못된줄로 알았던 신애가 눈앞에 서있는것이다.

부지불식간 품속에 간직한 쪽지편지, 읽고 또 읽어서 뜬금으로 외울수 있는 신애의 편지가 생각났다.

비에 젖을가봐 유지에 꽁꽁 싼 편지를 꺼내 처녀에게 넘겨주었다.

신애의 눈굽에 맑은 눈물이 가랑가랑 고여올랐다.

《이 편지를… 여태 간수하고계셨군요.》

《그렇소. 난 그 편지를 보면서 늘 신애를 생각하군 했소.》

《무강씨, 고마워요!》

솟구치는 격정을 누르지 못한 표무강은 볼수록 사랑스럽고 소중한 처녀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가쁜 숨소리가, 행복에 겨운 신음소리가 처녀의 후더운 입김을 타고 흘러나왔다.

잠시후 처녀를 놔준 표무강은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있소?》

《지나가다 보니 샘터가 어지럽더군요.》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는 처녀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된 표무강은 군복소매를 걷어올렸다.

《자, 우리 같이 거두기요.》

두사람은 제꺽 달라붙어 샘터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손길이 가닿을 때마다 샘터는 더욱 깨끗하고 순결하게 변모되였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가.

신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강씨!》

그의 어깨너머를 넘겨다본 표무강은 벌떡 일어났다.

단도를 빼든 허정효가 살금살금 기여들고있었던것이다.

《흠, 너희들이 좋아지라고 가만둘줄 알았느냐?》

독살스럽게 뇌까린 그자는 어느새 손을 뻗쳐 신애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이놈!》

표무강은 달려나가는 참으로 그자를 덮쳤다.

그러나 허정효가 날래게 피하는 바람에 허공을 그러안고 딩굴었다.

《표무강, 이 녀잔 내거야. 내거란 말이야!》

튕기듯 뛰쳐일어난 표무강은 또다시 원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에도 교활한 원쑤는 날래게 공격을 피하였다.

그만에야 맥이 빠져 숨을 헐떡거리는데 허정효는 신애를 끌고 뽀얗게 달아나고있었다.

《무강씨!… 무강씨!》

신애가 끌려가면서 안타깝게 구원을 청하고있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죽기내기로 뛰여갔지만 멀리 달아난 허정효는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고는 야멸차게 웃었다.

《으핫핫핫!》

《안된다!… 신애는 못 데려간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표무강은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온몸이 땀으로 화락하게 젖어있었다.

허 참, 꿈도.

꿈속에서까지도 원쑤의 손아귀에서 신애를 지켜주지 못한 죄스러움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 신애!

달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해만 가는 그리움이 사나이의 가슴속에 그들먹이 차올랐다.

그가 정말 다시 살아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미여지는 마음을 누를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표무강은 옆에서 새우잠을 자고있는 련락병에게 모포를 덮어주고 천막을 나섰다.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5시이다.

오늘 련대의 행군로정을 생각하며 7대대쪽으로 걸어가던 표무강은 우뚝 멈춰섰다.

꾸르릉, 꽈꽝!-

멀리에서 우뢰같은 폭음이 들려오고있었다.

한동안 귀를 기울이고있던 그는 환성을 내지르고싶었다.

그것은 우뢰소리가 아니라 그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군의 포소리였던것이다.

전선이 가깝구나!

점점 커지는 포성을 듣느라니 지나온 나날들이 주마등마냥 흘러갔다.

의거장병들을 돌려세우려던 적들의 음흉한 술책, 부닥치는 시련과 고비를 헤치며 한치한치 전진하던 나날들, 홍일남의 장렬한 최후…

이제는 그 모든것이 과거로 되였다. 래일쯤 련대는 전선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겪어온 고난과 시련이 옛말로 되여버릴것이다. 아니, 전사들은 영원히 그날들을 심장속에 새겨둘것이다. 영원히!

앞에서 돌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꿈에서 그랬던것처럼 이슬이 떨어지는 소나무가지를 슬며시 제끼고 보니 샘물우에 뜬 티검불을 걷어내고있는 처녀가 드러났다.

순간 심장이 후두둑 뛰였다.

신애가 바로 몇발자국앞에 앉아있지 않는가.

그것은 꿈이 아니였다. 자기가 구름이 감겨도는 차거운 수풀속에 서있는것과 마찬가지로 엄연한 현실이였다.

피뜩 처녀를 덮쳐안고 달아나는 원쑤의 상통이 눈앞으로 스쳐지나갔다.

안된다. 다신 신애를 빼앗길수 없다!

그는 자기가 언제 앞으로 뛰여갔으며 깜짝 놀라는 처녀의 손을 와락 잡았는지 알지 못하였다.

《신애!》

다음순간 숨막히는 비명소리가 터져올랐다.

《어마나!》

정신을 차린 표무강은 두눈을 껌뻑거렸다.

그는… 그 처녀는 뜻밖에도 한정아였다.

온몸의 맥이 아운하게 풀리며 눈앞이 핑 돌아갔다.

그 틈에 사나이의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한정아는 오똑 서서 《침범자》를 쏘아보았다.

당황해난 표무강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미안하오. 내가 그만… 사람을 삭갈렸소.》

그제서야 한정아의 굳어진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귀바퀴너머로 살짝 넘긴 처녀는 입을 열었다.

《산모한테 물을 떠주려고 왔다가 샘이 어지러워서…》

《음!》

표무강은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를 겨우 씹어삼켰다.

어쩌면 신애와 꼭같은 생각을 한단 말인가.

묘한 일치를 가져온 샘터에서 한정아를 만나고보니 그에 대한 친근한 감정이 솟아오르면서 무슨 말이든 나누고싶었다.

무슨 말을 할가? 무슨 말을…

사실 한정아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련대에 배속되라는 자기의 요구에 호락호락 굽어들지 않은 처녀, 무슨 일에서나 자신만만하여 지어 교만해보이는 처녀. 임신부의 해산문제로 어느 정도 숙어들었지만 여전히 새침한 태도를 버리지 않고있는 처녀…

리경일이 알려준 한가지 소식이 표무강의 상상속에 그려진 처녀의 인물화를 대폭 수정해주었다.

몇달전 남진의 길에서 련대는 새로 교방한 적들과 맞다들었다.

적정자료가 없이 무작정 공격한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을수 있었다.

표무강은 즉시 정찰조를 파견하였는데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속이 부질부질 타고있던 어느날 리경일이 웬 처녀의 잔등에 업히워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한달음에 달려가보니 그 처녀는 이름도 남기지 않고 가버렸었다.

리경일의 말을 통하여 표무강은 처녀가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그의 입에 피를 넣어주었고 연약한 몸으로 억대우같은 사나이를 업고 먼길을 왔다는것을 알았다. 처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살아난 리경일은 귀중한 정찰자료를 련대지휘부에 보고하였고 그에 기초하여 전투계획을 수립한 련대는 인명피해를 내지 않고 단숨에 적진을 돌파하였다.

전투가 끝났을 때 표무강은 이름모를 그 처녀를 만나지 못한것이 몹시 아쉬웠다. 후날에라도 그를 만나면 련대전사들의 이름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싶었다. 그런데 련대가 위험한 벼랑길을 통과하였을 때 리경일이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와 생명의 은인을 찾았다고 하는것이였다.

《그게 누구요? 어디 있소?》

《〈사민구분대〉를 책임진 정치공작대원입니다.》

《정말이요?》

곧장 한정아를 찾아갔으나 처녀는 자기를 피하는 눈치였다. 그 리유를 알수 없었으나 그가 자기와 만나는것을 꺼려하는것만은 확실하였다.

표무강은 기회를 보아 다시 찾아가려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휴식참에 수풀속에서 다리를 주무르고있는 처녀와 정면으로 맞다들었는데 그가 얼굴이 빨개서 피하는 바람에 또다시 헛물을 켜고말았다.

일이 그렇게 번지자 표무강은 계속 찾아다닐수 없게 되였고 그로하여 두사람의 관계는 더욱 멀어져갔다.

그런 처녀를 샘터에서 만난것이다. 이제라도 처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싶었지만 지금과 같은 형편에서는 오히려 그 말이 자신의 무례한 처신을 모면하기 위한 엉큼한 수법으로 오해받을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무강은 한정아와 이야기를 나누려던 생각을 접고말았다.

두사람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있는데 먼저 한정아쪽에서 말을 꺼냈다.

《련대장동지,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무들사이로 총총히 걸어가는 처녀를 바라보던 표무강은 가슴속에 꽉 들어찬 아쉬움을 털어버리듯 한숨을 크게 내쉬였다. …

그 시각 보초소들을 돌아보려고 나왔던 로성익은 생각지 않게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남들이 아직 깊은 잠에서 깨여나지 못한 이른아침 호젓한 샘터에서 만난 한쌍의 청춘남녀!

그들이 련대장 표무강과 누이동생 한정아일줄이야.

마침 그들은 헤여지고있었는데 표무강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확연히 어려있었다.

저들이 언제 벌써 그런 관계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려는듯 빼곡이 들어찬 소나무들사이로 바삐 사라지는 한정아를 응시하는 로성익의 눈가에 서늘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이즈음 누이동생의 태도는 그전과 달랐다.

틈이 있으면 찾아와 오빠가 전번에 준 크림은 손이 터서 아파하는 영남이한테 주었고 또 영보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는 등 종달새처럼 재잘거리군 하였는데 얼마전부터는 찾아오는 회수가 부쩍 줄어들고있었다.

일이 바빠서 그러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엊그제 천막에 찾아갔더니 누이동생은 광목천으로 무엇인가 만들고있었는데 자기를 보자 바느질하던것을 등뒤로 감추는것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것을 보자 몹시 섭섭하였다.

그런 누이동생이 남들 모르게 표무강을 만나는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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