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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16일

평양시간


(제46회)


제 5 장


4


복구건설의 벅찬 하루가 저물고있었다.

이른아침부터 혼합기소리와 함마소리, 웨침소리로 들끓던 수도의 거리는 보름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에야 조용해졌다.

그무렵 열정적인 건설자들은 보람찬 일과의 다음 장을 펼치고있었으니 아직은 손이 모자라 미처 꾸리지 못한 공원으로 땀내풍기는 작업복을 그대로 걸친 청춘남녀들이 쌍쌍이 모여들었던것이다.

봄안개마냥 따스한 빛을 뿌리던 가로등은 폭격에 흔적없이 날아나고 갖가지 꽃들이 피여있던 화단도 산산이 깨여졌으나 사랑으로 충만된 심장들은 깊어지는 밤과 더불어 세차게 높뛰고있었다.

그들중에는 고급양복을 미끈하게 차려입은 멋쟁이청년과 나란히 걷고있는 한정아도 있었다.

건설장에 취재나갔던 그는 신문사정문앞에서 오래동안 기다리던 대학동창생을 만나 이곳으로 왔었다.

이목구비가 훤칠한 총각은 아름다운 용모와 세련된 몸가짐을 한 미인과 함께 거니는것이 자못 행복한듯 웃음을 짓고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있었다.

한정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였지만 왜서인지 며칠전의 일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그날 그는 다른 단위들보다 복구건설을 먼저 끝내고 생산을 시작한 어느 한 기계공장에 취재나갔었다.

당위원회에 찾아가니 빈방을 지키고있던 젊은 지도원(당시)이 당위원장부터 만나라고 하였다. 전쟁시기 정치부련대장으로 싸운 그는 공장을 일떠세우는 전기간 현장에서 로동자들과 같이 침식하며 성실하게 일한 당일군이라고 한다.

현장에 나간 한정아는 공기함마를 붙잡고 씨름질하는 당위원장을 만났는데 뜻밖에도 그가 김흥선일줄이야.

《문화부련대장동지!》

《이게 누구요? 정아동무가 아니요?!》

반가운 나머지 두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놓을줄 몰랐다.

사선을 헤치는 험로에서 맺어진 사람들의 우정이란 그렇듯 진실하고 뜨거운것이리라.

한동안 회포를 나눈 끝에 김흥선은 불쑥 표무강을 만나보았는가 물었다.

표무강이라는 이름이 튀여나오자 한정아는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건설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 몇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자기를 정아가 아니라 굳이 정치공작대원이라고 부르는 사람!

그날 한정아는 신문사에서 급히 찾는다는 련락을 받고 건설장을 떠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설혹 자기가 그곳에 남아있었다고 해도 야속한 감정만 쌓이고 그로 하여 전쟁시기에 생긴 마음속 상처가 더 커졌을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난 김흥선은 몹시 아쉬워하였다.

《정아동무, 그러지 말구 그 친구 주소를 대주겠으니 한번 찾아가보오.》

《네에?》

김흥선은 재미있다는듯 싱글싱글 웃었다.

《허허, 내가 잘못 말한것 같진 않은데…》

한정아는 새침한 어조로 허공에서 떠도는 그의 푸수한 말소리를 밀어버렸다.

《아이참, 제가 무엇때문에 그를 찾아간단 말입니까?》

《허, 사람일은 모르지.》

김흥선과 헤여져 신문사로 돌아오는 한정아의 생각은 착잡하였다.

…전쟁시기 대학으로 떠날 때 처녀는 자기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주는 그를, 자기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놓은 무정한 남자를 영영 잊으려고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차츰 깨달았다.

어느날 대학에 전선에서 소환된 대학생출신 전사들이 나타났는데 그중에는 옆구리를 부상당한 청년이 있었다.

강의시간에 부상처를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동정의 눈길로 지켜보던 한정아는 련대군의소에 입원해있던 표무강이 생각났다.

그도 저 동무처럼 몹시 고통스러워했지. 지금 어디에서 싸우고있을가?

그러던 처녀는 시무룩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젠 그 사람은 남이야. 아무렴, 남이구말구.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혀질줄 알았던 그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또렷하게 안겨들었다.

위험한 벼랑길에서 자기를 구원해주던 름름한 모습으로 혹은 담가에 누워 련대를 지휘하던 불굴의 모습으로…

표무강의 존재는 잔잔하던 처녀의 가슴에 심상치 않은 파문을 일으키군 하였다.

그 감정은 얼마전 민족보위성에 출장왔다가 신문사에 찾아온 인민군군관 리경일을 만난 다음부터 더 강렬해졌다.

《련대장동지 군복을 기워준적이 있었다지요?… 그때 유지에 쌌던 편지가 생각납니까?》

왜 생각나지 않으랴.

유지로 꽁꽁 쌌던 그 편지!

추연한 기색을 지은 리경일은 편지에 담긴 한 처녀의 깨끗한 순정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정아는 애인의 장한 뜻을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친 신애라는 처녀의 순결무구한 정신에 감동되였고 또한 이루지 못한 그들의 사랑이 너무도 아쉬워 눈물을 머금었다. 한편 여러해가 지났지만 애인의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자나깨나 그를 잊지 않고있는 표무강이 돋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목석같은 남자라고 욕했구나!

불현듯 전쟁시기 샘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그는 사람을 삭갈렸다고 했었지. 이제 보니 그가 바로 신애였구나! 아, 그 처년 얼마나 행복할가. 죽어서도 숯불처럼 뜨거운 사나이의 사랑을 받고있으니 말이야. 그런 사랑이야말로 이 땅의 처녀라면 누구나 받고싶어하는 진실하고 영원한 사랑일거야.

그런데 오늘 김흥선을 만나고보니 건설장에서 만났던 표무강의 의젓한 모습이 안겨오면서 가슴이 마구 설레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했으나 처녀의 몸으로 먼저 찾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

《무슨 생각을 하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처녀는 상념에서 깨여났다.

《아이, 미안해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니요?》

사려깊은 눈길로 건네다보는 청년의 얼굴에는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관계없이 정아동무와 함께 나누고싶소 하는 곡진한 심정이 어려있었다.

한때 《헤염사건》으로 온 대학을 들었다놓은 차경준, 그후 외국으로 류학을 떠났던 그는 전쟁이 끝나자 지난날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것이다.

《정아동문 그새 더 아름다와졌소.》

마치 송가라도 부르듯 차경준은 처녀의 아름다움을 기탄없이 찬미하고있었다.

《아이참, 경준동지두.》

처녀가 얼굴을 붉히자 그는 두번째 송가를 읊기 시작하였다.

《결국 동문 성공했구만!》

《네?》

《대학을 졸업하고 쟁쟁한 신문기자가 되였으니 말이요.》

《…》

처녀의 얼굴을 슬쩍 살펴본 차경준은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동문 날 욕하겠지?! …전공을 배반했다고. 하지만 전후복구건설에 실지로 필요한건 서정시나 기사가 아니라 기계나 강철, 운수기재 같은게 아니겠소. 난 어문학부를 나온 덕에 류창한 언변과 림기응변으로 대방과의 면담을 능숙하게 처리해서 국가에 막대한 리득을 주고있소. 그러니 날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주오. 아, 주의하오!》

그가 소리치는 바람에 한정아는 가볍게 놀라며 멈춰섰다.

발앞에 아직 메꾸지 못한 폭탄구덩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있었다.

어둠속에서도 위험개소를 제때에 발견하고 알려준 차경준은 처녀가 그곳을 에돌 때까지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듣자니 정아동문 2천리가 넘는 적후를 뚫고 왔다고 하더구만.》

《…》

《대단하오. 처녀의 몸으로 그 먼길을 걷는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요?》

《그땐 다들 그랬답니다.》

차경준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밤대기를 타고 은은하게 들려왔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 난 자주 대학시절을 회상하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일먼저 떠오르는게 바로 정아동무의 모습이였소.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무슨 정신에 그처럼 천박하게 처신했는지 리해되지 않소. 그렇지만 그 〈헤염사건〉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상봉도 더욱 의의가 있다고 보오.》

이야기를 끊은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달빛에 번쩍거리는 외국제시계는 무역일군인 그의 품위를 돋구어주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구만.》

그러지 않아도 표무강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번거로운 한정아는 오랜만에 만난 대학동창생앞에서 자기의 속마음을 드러내고싶지 않아 그럼 먼저 실례하겠다고 말하였다.

《밤이 깊었는데 일없겠소?》

차경준은 처녀가 승낙한다면 제꺽 따라나설 자세였다.

《괜찮아요.》

녀성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남성들이 항용 그러하듯 차경준은 인자한 표정을 짓고 바래주었다.

《정아동무, 후에 또 만나기요.》

《네, 안녕히 가세요.》

그와 헤여진 한정아는 마치 둥지에서 벗어난 새가 푸른 창공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는것 같은감을 느꼈다. 오늘 저녁 차경준이 호의적으로 대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수 없었다.

처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따끔하는 아픔때문인지 아니면 가슴속에 응어리진 야속함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눈굽이 따거워났다.

문득 표무강을 만나보라고 하던 김흥선의 권고가 생각났다.

신문사에서 고급군사학교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마음만 내킨다면 언제든지 찾아갈수 있다. 그러나…

처녀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전쟁시기 대학으로 떠날 때 있은 일이 한겨울의 고드름처럼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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