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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16일

평양시간


(제47회)


제 5 장


5


세상에는 우연적인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길가에서 오랜만에 옛친구를 만난다든가 혹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편지가 책갈피속에서 불쑥 나타난다든가 등등.

그가 공원을 나서는 한정아를 띄여본것도 역시 우연이라면 우연이였다.

검찰소에서 돌아온 후 가슴속에 맺혀 내려가지 않는 억울한 심정을 묵새길수 없어 며칠동안 속을 앓다가 오늘 저녁 발길이 닿는대로 거닐던 끝에 이곳으로 찾아든 표무강이였다.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공원을 거닐자 마음이 한결 진정되는것 같았다.

까짓거, 내가 떳떳하면 그만이지.

심호흡을 크게 하고났는데 가까운 곳에서 《정아동무, 후에 또 만나기요.》 하는 바리톤음성이 들려왔다.

처음은 그저 세상에 이름이 같은 처녀도 있구나 하고 심상하게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네, 안녕히 가세요.》라고 하는 처녀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른아침 나무잎사귀에서 굴러내리는 이슬처럼 맑고 싱싱한 목소리!

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하고 생각을 더듬는데 때마침 처녀가 이쪽으로 곧추 걸어왔다.

달빛에 환히 드러난 동그스름한 얼굴!

표무강은 두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 미색양복을 산뜻하게 차려입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처녀는 분명 한정아였다.

건설장에서 만났던 처녀, 손수레를 끌고 돌아와보니 온데간데 없어졌던 한정아가 공원에 나타난것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이란 말인가?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어 처녀의 어깨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아닌게 아니라 저쯤에 고급양복을 쭉 빼입고 서있는 멋쟁이가 보였다.

그럼 저 친구가 정아의?!…

쩌릿한 전류 같은것이 온몸을 타고 흘러갔다.

사실 한정아는 총각이라면 누구나 욕심낼만 한 처녀다. 얼굴도 아름답지만 정신세계는 또 얼마나 높고 고상한가. 게다가 마음씨도 비단결같다. 그런 처녀와 일생을 같이하는건 그야말로 행복이다. 가만, 내가 여기에 왜 멍청해서 서있는가? 빨리 피하자!

생각은 뻔하지만 어떻게 된건지 두다리가 땅에 뿌리를 내린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정아가 몇발자국앞에 다가왔을 때 그는 숨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전번처럼 어리석은짓을 하지 말아야겠는데…

아쉽게도 처녀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채 앞을 스쳐지나갔다.

《?》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느라니 마음이 쓸쓸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 자기의 심중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있었다.

그날 건설장에서 한정아를 만났을 때 표무강은 가슴속에서 천군만마가 내달리듯 심장이 후둑, 후두둑 뛰였었다. 그때는 몇해만에 만난 처녀가 반가와서 그러는것이라고 짐작하였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그것만도 아니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눈을 뜨면 신애의 갸름한 얼굴이 떠오르군 하였지만 어느새 한정아의 동그스름한 얼굴로 바뀌였다. 우뜰 놀라 그 모습을 지워버리면 처녀는 다시 나타나 신애와 함께 사이좋게 샘터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조용히 군복을 깁기도 하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혹시 그 처녀를?…

자기의 심장속에는 오직 신애만이 꽉 들어있다고 확신해온 그로서는 날이 갈수록 가슴속에서 커가고있는 한정아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해님처럼 밝기도 하고 혹은 비구름처럼 어둡기도 한 그 예쁜 얼굴은 사나이의 마음을 괴롭히다가 점차 스러지는 노을마냥 자취를 감추었었다.

표무강은 자기와 한정아의 관계가 끝났다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잠시 멎어섰던 운명이라는 기차는 차단봉을 꺾어버리고 기운차게 내달리고있었다.

어느날 김흥선이 지나가는 길에 들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그는 한정아를 만났댔는가고 묻는것이였다.

《만났댔네.》

쓰겁게 대꾸하는 친구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있던 김흥선은 책망하였다.

《사내대장부가 왜 그리 옹졸한가? 그러지 말구 자네가 먼저 찾아가보게.》

그 말을 듣자 정말 신문사에 찾아가고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랬으나 한정아의 새침한 얼굴이 떠오르자 그 생각은 쑥 기여들어가버렸다.

《지금은 바쁘네.》

그랬었는데 오늘 공원에서 한정아를 띄여본것이다.

이제라도 찾을가? 그러다가 혹시…

가슴속에서 모순된 두 감정이 맹렬하게 부딪쳤지만 끝내 처녀를 만나리라고 결심하였다.

그가 금시 처녀를 찾으려는데 뒤에서 바리톤음성이 날아왔다.

《정아동무, 잠간!》

저쯤에서 또각거리던 처녀의 구두소리가 멎었다.

알싸한 고급향수내를 앞세운 멋쟁이는 보란듯이 앞을 스쳐지나갔다.

《미안하오. 한가지 잊었댔소.》

한달음에 처녀앞으로 달려간 그는 뭐라고 속삭이였다.

한정아도 알겠다는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

표무강은 마치 손에 쥐고있던 귀중한 보석을 남에게 빼앗긴것 같은 기분에 속이 허우룩해졌다.

문득 품속에 들어있는 편지가 생각났다.

보풀이 허옇게 일어서 연필로 덧쓰고 또 덧쓴 그 편지, 비에 젖을가봐 유지로 꽁꽁 싸고 소중히 간수해오는 신애의 편지!

처음은 죄의식이, 그 다음은 따스한 물결이 가슴속에 그들먹이 차올랐다.

그래, 내 가슴속엔 언제나 신애가 있다. 그러니 절대로 외롭지 않아.

마음을 다잡은 표무강은 성큼성큼 공원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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