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주체108(2019)년 9월 16일

평양시간


(제54회)


제 6 장


3


이즈음 한정아의 생활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여버렸다.

아침이면 남먼저 출근하여 사무실청소를 하고 화분들에 물을 준 다음 싱싱한 꽃향기를 맡으며 즐거운 하루일과를 시작하던 그였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시계바늘처럼 규칙적으로 흘러가던 그 일과가 마구 헝클어졌다.

다른건 제쳐놓고라도 원고지를 펼쳐놓으면 당장 써야 할 기사내용이 아니라 건설장에서 만났던 표무강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날 그들은 저녁무렵까지 맞들이로 숱한 골재를 날랐었다.

하지만 헤여질 때까지 그들이 나눈 이야기란 자기들이 산처럼 쌓아놓은 모래와 자갈에 비하면 너무도 작고 간단하였다.

《오늘 수고많았소.》

《수고야 뭐… 오히려 련대장, 아니 장령동지가 더 수고한걸요.》

그런 말은 지나가던 사람들사이라도 얼마든지 주고받을수 있는 평범한 인사말이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사이에 드리워진 어색한 분위기를 가시지 못하고 헤여졌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정아는 표무강을 탓하였다.

무슨 남자가 그 모양일가? 뭐, 오늘 수고많았다구? 그래, 동지는 그런 말밖에 할줄 모르는가요? 정아라는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기가 그렇게도 힘든가 말이예요. 하긴 동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였지요. 목석!

그 목석이 오늘은 원고지우에 나타나 사색을 방해하고있었다.

속상해난 한정아는 원고지를 탁- 하고 뒤집어놓았다.

원고지우에서 얼른거리던 《표무강》은 꿈틀 놀라 껑충껑충 사라졌다.

이젠 일없겠지 하고 원고지를 도로 뒤집고 만년필을 놀리려고 하자 또다시 《그》가 나타났다.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산란해서 기사를 한자도 쓸수 없었다.

한참후 만년필잉크가 동그랗게 퍼진 원고지를 보자 한정아는 누가 자기를 지켜보지 않는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번질지 누가 알랴.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정원에 나가 산책하였지만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한정아는 그의 존재가 소리없이 스며드는 달빛처럼 자기의 가슴속에 깊숙이 자리잡고있었다는것을 놀라움속에 깨닫고있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대학시절 한 동창생은 사랑의 발전단계를 세가지로 분석한적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첫 단계는 접근감, 두번째 단계는 애무감, 세번째 단계는 헌신감이라고 한다. 다시말하면 사랑이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고 항상 그와 같이 있고싶어하며 애인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치고싶어하는 열렬한 감정이라는것이다. 하다면 난 몇번째 단계에 이르렀을가? 두번째, 아니면 세번째?… 모르겠다. 허지만 이것이 정말 사랑이라면… 아!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두손으로 싸쥔 처녀는 세차게 높뛰는 심장이 흉벽을 터치고 밖으로 튀여나올가봐 겁이 났다.

구름이 자주 끼면 비가 오기마련이다.

한정아는 끝내 일을 치고말았다.

비록 기자년한은 길지 않지만 문제성있는 기사들을 재치있게 써내군 하는 그를 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편집부장이 큰일난것처럼 법석 고아댔다.

《믿는 도끼 발등 찍는다더니 동무가 어떻게 이런 원고를 제출할수 있는가 말이요? 이게 동무가 쓴 원고가 옳긴 옳소. 엉?》

《…》

《난 여태 동물 책임성높고 능력있는 기자로 생각해왔소. 헌데 요즘은 무슨 생각에 옴해가지구 이 모양이요?》

한정아는 너무 창피해서 바늘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싶었다.

기각당한 원고를 들고 편집부장방을 나서자 분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편집부장의 추궁이 모욕적이라고 해도 보다 괘씸한것은 표무강, 바로 그 사람이였다. 그가 원고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였고 또 곡절없이 흘러오던 자기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것이다.

한정아는 자기가 어떻게 여기저기 뻗어간 복도를 한번도 삭갈리지 않고 지났으며 두개 층이나 되는 층계를 헛디디지 않고 내려서 제 방에 들어섰는지 알지 못하였다.

걸상에 주저앉자 가까스로 지탱해온 자제력의 뚝이 와르르- 터져나갔다.

자기가 그러한 처지에 빠질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처녀는 때없이 눈앞에서 얼른거리는 표무강의 모습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자기의 무능력에 화가 동하였다. 속상해서 어쨌으면 좋을지 몰랐다.

생활의 불협화음은 집에서도 울리고있었다.

밤늦게 건설장에서 돌아오면 한정아는 작업복을 벗기 바쁘게 어머니가 차려준 통강냉이밥과 배추국 등을 맛있게 먹고는 《엄마, 아침에 일찍 깨워주세요!》 하고 인차 꿈나라로 가군 하였다.

《에구, 넌 어찌나 피곤했는지 코를 다 골더구나.》

《어마나, 내가 코를 곯아요?》

동녘하늘이 훤히 밝아오는무렵, 잠에서 깨여나 달콤하게 기지개를 켜고있던 처녀는 그 말을 듣자 부끄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고 웃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푸른 하늘에 드리운 쌍무지개처럼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그 무지개가 먹구름으로 변해버렸다. 그처럼 맛있던 통강냉이밥과 배추국이 소태처럼 쓰거웠고 어머니가 눈치챌가봐 억지로 몇술 떠넘기는 밥은 가슴을 꽉 메우고 치밀어오르는 그 무엇으로 하여 몇번이나 반복하여 넘겨서야 겨우 목구멍을 통과하군 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수저를 놓자마자 찾아가던 꿈나라는 종적을 감추었고 그나마 겨우 풋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면 탁상시계는 새벽 2시 15분이나 3시 10분을 가리키군 하였다. 책이라도 보자 하고 소설책을 뒤적거려도 글줄우에 표무강의 무뚝뚝한 얼굴이 그려지군 하였다.

나중에 처녀는 그를 알게 된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그때 벼랑길에서 그의 방조를 받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한테 군공메달주머니를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니아니, 그것도 아니야. 그래, 건설장에서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를 잊었을거야. 그런데 겨우 잊을번 했던 그가 떡 나타날건 뭐람. 정말 미워죽겠어. 헌데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속을 태우고있는줄은 알기나 할가? 흥, 알긴 뭘 알아.

그렇게 한밤을 새우고 출근하면 정신이 맑지 못하고 원고에 집중할수 없었다.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처녀의 마음은 초불심지마냥 타들어갔다.

그러고보면 《사랑》이란 인간의 감정가운데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세계인것만은 틀림없지만 그 화원속에 눈물과 슬픔도 함께 있는것이 아마도 세상리치인것 같다.

언제인가 선배기자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예요.》

사실 신문사에는 활짝 핀 진달래마냥 아름답고 청순한 녀기자의 미모에 반해서 따라다니는 총각기자들이 한둘 아니였다. 그들중에는 처녀의 집에까지 찾아와 청혼하는 대담한 축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정아의 마음은 강한 자석에 끌린것처럼 오직 한사람, 돌부처같은 표무강한테만 쏠리고있었다.

어머니만큼 딸의 신상에서 일어난 변화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며칠째 딸의 이상한 행동을 눈여겨보던 어머니는 오늘도 마지못해 밥술을 뜨는둥마는둥하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딸을 잡아일으켰다.

《정아야, 무슨 일이냐?》

아닌보살하고 피곤한 기색을 지은 한정아는 어머니목을 사르르 끌어안으며 응석을 부렸다.

《엄마, 난 막 피곤해죽겠어요.》

철부지소녀시절로 돌아간듯 품으로 파고드는 딸을 와락 밀어낸 어머니는 정색해서 따졌다.

《이 어밀 속일 생각은 말아.》

《…》

《왜 밤마다 잠 못 들고 한숨만 쉬는거냐. 응? 그 한숨소리에 방바닥이 꺼지겠구나.》

대답이 궁해버린 한정아는 몸을 돌려 이불을 콱 뒤집어썼다.

《어이구, 분명 무슨 탈이 났구나.》

일단 마음의 문을 닫아매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열지 않는 딸의 성미를 알고있는 어머니는 걱정만 하였다.

숨막히는 이불속에서 한정아는 밤을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꿈의 바다를 펼쳐놓군 하던 밤, 숨가쁜 취재와 헐치 않은 건설장일로 생긴 피로를 말끔히 가셔주고 새 힘을 안겨주던 그 달콤한 밤이 지금은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시간으로 변하였던것이다.

아, 이밤들을 모두 모아서 지구밖으로 내던졌으면.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이전페지   다음페지

도서련재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64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63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62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61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60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9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8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7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6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5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4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3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2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1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0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9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8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7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6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5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4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3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2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1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0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9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8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7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6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5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4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3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2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1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0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9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8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7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6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5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4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3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2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1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0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9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8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7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6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5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4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3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2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1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0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9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8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7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6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5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4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3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2회 장편소설 《생의 속삭임》제1회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