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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16일

평양시간


(제60회)


제 6 장


9


며칠이 지나갔다.

오늘도 행여나 하고 출입문가를 바라보던 표무강은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쩝쩝 다시였다.

나야말로 얼마나 뻔뻔스러운 인간인가? 언제는 그를 쫓아내더니 지금은 다시 왔으면 하고 기다리다니. 아마 정아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난 무엇때문에 기다리고있는가? 무엇때문에?… 그는 나더러 련대를 지휘하던 때의 기백을 찾아볼수 없다고 하였다. 비록 그 채찍질은 아팠지만 그때문에 나는 정신을 차릴수 있었다. 그렇다.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군사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해야 한다!

눈앞에 신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가? 아마 정아처럼 행동했을것이다. 그렇다면 신애와 정아가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니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어쨌든 난 바보다. 그런 훌륭한 처녀를 내쫓다니.

고개를 뽑아들고 원탁우를 넘겨다보니 먹지 않고 쌓아둔 약봉지들이 띄웠다.

이제부턴 약도 먹고 물리치료도 열심히 해야지.

약봉지를 집으려고 손을 원탁우로 뻗치자 말썽많은 허리가 또 쑤셔났다.

잔등으로 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데 그속에서도 허망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내가 과연 자리를 털고 일어날수 있을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저앉으면 안된다. 련대장 표무강, 돌격 앞으롯!

다시금 약봉지를 집으려고 팔을 뻗쳤다.

조금만 더… 조금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약봉지를 잡으려는 찰나에 옆에서 날아든 다른 손이 먼저 그것을 움켜잡았다.

표무강은 믿어지지 않은듯 두눈을 끔뻑거렸다.

약봉지를 손에 들고있는 사람은 뜻밖에 한정아였던것이다.

꿈을 꾸는것 같았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것이라고 단념하였던 정아가 이렇게 제발로 찾아오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이불속에 손을 넣고 슬그머니 장딴지를 꼬집었다.

얼마나 세게 꼬집었는지 하마트면 처녀앞에서 비명소리를 내지를번 하였다.

당황해난 그는 바보처럼 헤식은 웃음을 짓고말았다.

《동, 동무가 어떻게…》

며칠전의 일은 감감 잊은듯 웃음을 머금은 한정아는 흡사 한떨기진달래처럼 청신해보였다.

《제가 온게 반갑지 않은게군요.》

표무강은 처녀가 금시 달아날가봐 겁이 난듯 황급히 대꾸하였다.

《그런게 아니요. 너무 뜻밖이다보니…》

《그런걸 전 또 쫓아내려는줄 알았지요? 호호호.》

듣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웃음소리에 표무강은 씩하고 웃었다.

그러자 어색하던 몸가짐이 자연스러워지고 지구의 저쪽끝에 서있는것 같던 한정아도 퍼그나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점점 별나게 돼가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표무강은 어쩔수 없이 그 흐름에 빨리워들어가고있었다.

한정아의 방조를 받으며 약을 먹고난 표무강은 공연히 환자복을 매만지면서 한정아가 무슨 일로 다시 찾아왔을가 하고 생각하였다.

한정아 역시 무엇인가 터놓으려는 눈치였으나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바재이고있었다.

입원실에 어색한 분위기가 깃드는가싶었는데 한정아가 손가방에서 웬 종이장을 꺼냈다.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던 처녀는 처음은 소심하게, 마감에는 단호하게 내밀었다.

《무강동지, 여기에… 수표해주세요!》

의아해하며 종이장을 읽어내려가던 표무강은 그만 두눈이 뒤집혀졌다.

어떻게 이럴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은 놀랍게도 결혼등록신청서였던것이다!

《이게 무슨짓이요? 누가 동무한테 이런 권한을 주었는가 말이요. 엉?》

처녀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있었다.

표무강은 손에 쥐고있던 결혼신청서를 와락 집어던졌다.

《동문 처녀라는게 부끄럽지 않소? 어떻게 이런짓을 할수 있는가 말이요.》

고개를 소곳하고 서있던 한정아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래요. 전 부끄러운 일을 했어요. 허지만 이건… 신애언니를 대신하고싶어하는 한 처녀의 진심이예요.》

이렇게 토설한 처녀는 얼른 뒤로 돌아섰다.

세차게 물결치는 처녀의 동그란 어깨!

《무강이!》

숨을 거칠게 내뿜고있던 표무강은 출입문가에 서있는 김흥선을 알아보았다.

고향친구는 뭐가 불만스러운지 고개를 한쪽으로 기웃하고있었다.

《자넨 뭔가? 밤낮 우거지상을 하고 침대에 틀어박혀서 고작 한다는짓이 처녀를 울리고. 그래, 정아동무가 서푼짜리 동정때문에 찾아온줄 아나? 어떻게 처녀의 진정을 모욕할수 있냐 말일세.》

어찌나 격분하였던지 그의 턱은 덜덜 떨고있었다.

표무강은 그렇게 성을 내는 친구를 처음 보았다. 대나무숲이 우거진 고향마을에서 자랄 때도 그렇고 전쟁시기에도 오늘처럼 격한적은 일찌기 없었다.

《사나이라면 처녀의 마음을 너그럽게 받아줄줄도 알아야지. 자넨 정아동무가 어떻게 다시 나타났는지 알기나 하고 큰소리인가?》

김흥선의 말은 사실이였다.

그날… 입원실을 뛰쳐나간 한정아는 너무도 분하고 억울해서 두발이 어떻게 놓이는지도 모르고 걸었다. 설사 그가 자기의 진정을 받아주지 못한다고 해도 가슴을 그렇듯 모질게 찢어놓을줄은 몰랐었다.

혹시 그가 내 진정을 영원히 받아주지 않을수도 있지 않을가? 그럼 난 어쩜 좋아?

종시 마음을 진정할수 없어 김흥선을 찾아갔다.

《동무야 처음부터 모든걸 각오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쯤한 일에 물러나다니. 진정한 사랑은 노여움을 모르는 법이요.》

역시 전쟁시기 문화부련대장을 한 사람이 달랐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한정아의 마음속에 새로운 힘과 용기가 솟구쳐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날부터 해당 기관을 찾아다니며 수속을 거친 다음 병원에 찾아왔던것이다.

물론 표무강은 그 사실을 썩 후에야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친구의 이야기에서 한정아가 다시 찾아온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았다.

옆에서 한정아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무강동지!》

그를 바라보던 표무강은 어마지두 놀랐다.

처녀의 손에 자기가 그처럼 입고싶어하던, 다신 입을수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였던 장령복이 들려있는게 아닌가.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이게… 이게 어떻게…》

《어서 입어보세요.》

장령복을 받아들었지만 표무강은 난처해졌다.

침대우에서 상반신이나 겨우 일으키는 주제에 어떻게 제손으로 군복을 입을수 있단 말인가.

한정아가 말없이 다가와 군복을 입혀주기 시작하였다.

창피한 생각이 들어 꿈틀 물러났던 표무강은 처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와닿자 그만 잠잠해지고말았다.

한정아의 그 스스럼없는 행동은 다심하던 어머니와 헌신적이던 신애를 련상시켰던것이다.

장령복을 다 입자 한정아가 손거울을 꺼내주었다.

거울속에 름름한 인민군장령이 비쳐졌다.

이게 내가 옳긴 옳은가?

《가만 계세요!》

처녀는 베개밖으로 반쯤 나와있는 군공메달을 집어들고 장령복에 달아주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김흥선의 고개가 바로섰다.

《역시 정아동무가 안단 말이요. 허허허!》

앞가슴에서 빛나는 군공메달을 이윽토록 내려다보던 표무강의 눈길은 자석에 끌리운것처럼 처녀의 얼굴로 옮겨졌다.

희망찬 앞날을 축복하듯 밝게 빛나는 두눈, 힘을 내라고, 끝까지 애국의 길을 걸으라고 속삭이듯 방싯 열려있는 촉촉한 입술.

아, 얼마나 사랑스러운 처녀인가? 이 못난놈이 군복을 벗지 않도록 진심으로 이끌어준 처녀, 나의 생명인 군공메달을 영원히 빛내이도록 떠밀어준 아름다운 정아, 세상에 나를 이처럼 위해준 처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음순간 표무강은 두눈을 크게 떴다.

한정아옆에 미소를 지은 신애가 조용히 나타난것이다.

(무강씨, 뭘 주저하세요?)

(난… 어쨌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그 마음을 다 알아요. 허지만 정아는 나보다 더 훌륭한 처녀예요. 그런 처녀가 무강씨곁에 있다면 전 더 바랄게 없어요.)

(신애!)

(부디 정아를 끝까지 사랑해주세요. 부탁이예요!)

(신애!)

(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세요.)

(약속하오. 내 신애한테 못다한 사랑까지 합쳐 정아를 사랑하겠소.)

(고마워요. 그럼 전 마음놓고 눈을 감을것 같애요.)…

상상에서 깨여난 표무강은 한정아를 정겹게 바라보다가 그만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격정을 누르지 못한채 와락 끌어안았다.

《정아!》

비둘기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몸이 품속으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두사람은 한몸으로, 영원히 헤여질수 없는 하나의 심장으로 합쳐졌다.

행복에 취한 처녀는 숨을 가쁘게 톺으며 속삭이였다.

《전 표동지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영원히, 영원히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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