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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16일

평양시간


(제64회)


마감이야기


1980년대초 가을날 한대의 승용차가 신의주거리를 달리고있었다.

차의 뒤좌석에는 이마가 보기 좋게 벗어진 70대의 늙은이가 비스듬히 앉아 차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이 땅의 풍요로움을 노래하듯 활기있게 설레이는 가로수들, 그 너머로 하늘높이 치솟은 날씬한 고층살림집들, 아이들이 뛰노는 아름다운 공원…

가는 곳마다 거창하고 보는것마다 마음을 흥겹게 해주는 이 땅이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있던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표선배님은 지금 큰 간부를 하신다지요?》

《그렇습니다. 평안북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고계십니다.》

안내일군의 친절한 대답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이 사람은 표선배님을 찾아뵈울 면목이 없습니다.》

그의 심정이 리해되는듯 안내일군은 빙그레 웃었다.

《허 참, 그때 무슨 망녕이 들어서 못난짓을 했는지 이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후유-》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다 지나간 일이 아닙니까.》

가늘게 쪼프린 그의 눈가에 미타해하는 빛이 어렸다.

《그럴가요? 표선배님은 워낙 불같은 성미여서 이 사람을 용서해주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승용차는 신의주려관쪽으로 꺾어들었다.

한편 려관응접실에서는 표무강과 해당 일군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고있었다.

《내가 어째서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거요?》

《부위원장동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최덕근선생이 조국에 도착하자 제일먼저 부위원장동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제기했다는걸 말입니다. 그러니 부위원장동지가 그를 어떻게 대해주는가에 따라…》

표무강은 그런 소린 그만두라는듯 손을 홱 내저었다.

《진심으로 죄과를 뉘우치고 돌아오면 그만이지 내 태도가 무슨 상관이 있소?》

그때 현관쪽에서 경쾌한 경적소리가 울렸다.

《손님이 도착했는데 나가서 맞아주지 않겠습니까?》

해당 일군의 권고에 표무강은 요지부동이였다.

《왔으면 들어오라고 하오.》

《부위원장동지, 그렇지만…》

《동문 무슨 말이 많소?》

나이가 들면 고집으로 산다더니 그의 결심을 꺾을수 없다고 단정한 해당 일군은 혼자서 해외동포를 마중하러 나갔다.

얼마후 이마가 훌렁 벗어진 늙은이가 응접실에 어푸러지듯 들어섰다.

《어이구, 표선배님. 그간 귀체만강하셨습니까?》

그가 몹시 반가와하였지만 표무강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도 그 모습은 변신한 호랑이같았다.

당황해난 최덕근은 우뚝 굳어졌다.

돌연 표무강의 입술이 벙긋 열리더니 우뢰같은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다.

《왜 인제야 왔소?》

《…》

《그래, 젊었을 땐 민족을 배반하고 못된짓만 하다가 늘그막이 되니 의지할데를 찾아온단 말이요?》

해당 일군이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겼으나 그는 끄떡하지 않았다.

《원숭이도 낯짝이 있다는데 사람의 가죽을 쓰고 어떻게 그럴수 있소?》

줄줄이 쏟아지는 욕설에 어지간히 바빠맞은 최덕근은 황황히 손수건을 꺼내들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표선배님, 이 사람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늦게나마 속죄하고 새 출발을 하고싶어서 렴치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표무강의 푸르딩딩한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기야 수십년간 쌓인 노여움을 어찌 한순간에 풀수 있으랴.

그를 노려보던 표무강은 품속에서 뭔가 꺼냈다.

겉봉투에 《표선배님 친전》이라고 쓴 오래된 편지였다.

《이 편지가 생각나오?》

그가 넘겨준 편지를 읽어본 최덕근은 허리를 굽석굽석하였다.

《어이구, 표선배님은 이 편지를 여태 간수하고계셨습니까?》

《내가 그 일을 잊을것 같소?》

그의 손에서 편지를 앗아든 표무강은 와락와락 구겨던지더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해하는 최덕근에게 크고 넙적한 손을 척 내밀었다.

《최선생, 이렇게 조국을 찾아왔으니 됐소.》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최덕근은 그의 손을 덥석 그러잡았다.

《표선배님!》

《최선생!》

두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것없이 끌어안았다.

그것은 대결과 불신으로 쌓인 두터운 오해를 한순간에 녹여버린 뜨거운 포옹이였다.

《부끄럽습니다. 글쎄 표선배님이 오래전에 선택한 이 길을 이 사람은 이제야 들어섰으니…》

자책에 잠겨있는 그를 너그럽게 바라보던 표무강은 이렇게 말하였다.

《최선생, 아직 늦지 않았소. 뒤를 돌아보며 울지 말고 앞을 보며 웃으라는 말도 있지 않소.》

내노라 하고 돌아치던 왕년의 결패를 무정한 세월에 녹여버린 최덕근은 어느덧 눈물이 헤픈 늙은이로 변하여 자꾸만 손수건을 눈굽에 가져갔다.

《자, 우리 앉아서 이야기하기요.》

두사람이 쏘파에 앉자 응접실에 드리웠던 무거운 분위기는 가셔지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화기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끝에 최덕근은 이런 말을 끄집어냈다.

《전쟁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알수 없는게 한가지 있는데… 표선배님은 어떻게 수십년동안 애국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올수 있었는지 그 비결말입니다.》

《비결이라?》

문득 표무강은 손으로 자기의 앞가슴을 가리켰다.

오래된 군공메달을 알아본 최덕근은 영문을 몰라하였다.

저 작은 군공메달이 내가 알고싶어하는 비결이란 말인가?

《이건 수령님께서 나에게 달아주신 군공메달이요.》

《아, 그렇습니까?》

표무강의 두눈에 진중한 빛이 떠올랐다.

《내가 군공메달을 수여받은 시간은 길지 않소. 그러나 그 순간이 없었다면 나의 한생은 오늘처럼 빛나지 못했을거요.》

비로소 알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린 최덕근은 심중한 낯빛을 지었다.

《이 사람은 해외에 있으면서 표선배님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배님을 직접 만나고싶어서 이렇게 불원천리 찾아왔습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겠습니까. 만약 표선배님이 제 할 소리를 못하고 눈치를 살폈더라면 이 사람은 실망했을겁니다. 헌데 만나자바람에 거침없이 꾸짖으시니 그 위풍당당한 태도에 이 사람은 마음이 놓였고 앞으로 조국에 영주하려는 결심이 백번 옳았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습니다.》

《그럼 됐구만. 하하하!》

어깨를 흔들며 한바탕 웃고난 표무강은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타고 비쳐드는 해빛에 군공메달이 번쩍 빛났다.

그의 얼굴에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이 한껏 어렸다.

아, 나의 군공메달!

표무강은 귀를 강구었다.

그러자 군공메달의 속삭임소리가, 남은 여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참된 삶으로 이어가라는 절절한 당부가 똑똑히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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