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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10월 14일

평양시간


제 19 회


9


관리위원회 앞마당의 아름드리느티나무아지들에도 어느덧 신록이 짙어가고있었다.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고 수천수만의 푸른잎새들이 해빛을 머금고 미풍에도 소리없이 설레이고있다. 무엇을 그리도 끝없이 속삭이는것인지…

사무실창가에 서서 이윽토록 그 모양을 내다보고있는 준석의 마음은 심란하고 착잡하였다.

(그렇게도 믿고 의지하고싶었던 민영태부위원장이 어쩌면…)

준석은 가슴이 답답하여 후― 한숨을 내쉬였다.

오늘 아침모임때 준석은 관리일군들과 그 가족들이 어렵고 힘든 일에 앞장설뿐아니라 뒤떨어진 사람들을 진심으로 돕고 이끌어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면서 생활상 어려움이나 병약함으로 해서 따라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동지적으로 사심없이 도와나설데 대하여 호소했었다.

민영태가 솔선 3작업반에서 식구가 제일 많은 세대에 식량방조를 주겠다고 선코를 떼기 바쁘게 모두가 호응해나서 각 담당작업반의 어려운 집들을 맡아 도와주기로 결정이 되였다.

모임을 끝낸 준석은 회계장과 창고장을 데리고 정미소와 리창고를 돌아보았다. 쌀겨가 얼마나 되는가를 직접 확인해보고나서 농장원세대들에 사료로 나누어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창고장이 창고안의 쌀겨는 부위원장이 자재구입용으로 눌러놓은것이라고 했다.

《자재구입용으로?》

그때 마침 민영태가 그리로 찾아왔다.

《위원장동무와 좀 토론할게 있소. 도농촌경리위원회 자재처에 있는 사람이 급한 일루 날 찾아왔구만. 일전에 나와 전화루 얘기된게 있는데 후에 영농물자를 도움받기로 하고 쌀겨 한톤을 보내야겠네.》

준석은 딱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그럴 형편이 되겠습니까? 지금 사료가 없어 돼지를 제대로 기르지 못하는 농장원세대들에 쌀겨를 공급해야지, 화학공장에서도 비누생산용쌀겨를 요구하는데 수량이 모자랍니다.》

《아니, 그렇게 쌀겨를 다 풍겨버리면 자재구입은 무엇으로 하며 농장운영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건 개별적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는것과는 성격이 다르지 않소?》

《농장원들이 있고야 농장이 있는거지요. 농장원들부터 주고봅시다.》

준석의 결론에 민영태는 기가 막힌듯 눈이 둥그래있다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물었다. 돌아서 풀썩풀썩 연기를 빨아 내보내던 그는 아무래도 참을수가 없는듯 울기를 터치였다.

《자꾸만 농장원, 농장원하는데 그래, 아래사람들의 사정만 보아주다가 농사에 지장을 주는 날엔 어떻게 되겠소?》

《…》

준석이 미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영태는 흥분해서 거듭 들이댔다.

《그래, 대답해보우. 농사가 첫째요? 생활이 첫째요? 난 관리위원장동무가 무원칙한 인정때문에 근본을 놓칠가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요.》

《걱정해주는건 고맙습니다. 저도 농사를 잘 짓자니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영농자재구입을 그런 방법으로 하는걸 반대할뿐입니다.》

여전히 리성과 자제력을 잃지 않은 준석의 대답이였다.

《나도 모르겠소. 우에서 주는 물자나 고스란히 받아오라면 나도 신경쓸게 없지.》

민영태는 이런 말을 남기고 휭하니 가버렸다.

준석은 망연한 자세로 굳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이 뿌예지고 가슴에 묵직한것이 들어앉아 뻐근한 아픔을 주었다.

아버지의 한생에 지울수 없는 자욱을 남긴 은인인 민영태.

그가 이렇게도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것이 안타까왔다.

어째서 그 누구보다도 의지하고싶고 존경하던 사람과 매사에 의견의 불일치가 생기는것일가.

아버지에 대한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자기가 민영태의 립장을 리해하고 양보하는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처사가 아닐가?

방안을 거닐던 준석은 다시금 창가에 멈춰섰다.

우람찬 느티나무의 자태가 눈가득 안겨온다. 이번에는 수천수만의 잎사귀들이 뒤채며 설레이는 소리가 귀전에 울리는듯싶다.

《그래, 아래사람들의 사정만 보아주다가 농사에 지장을 주는 날엔 어떻게 되겠소?》

《난 관리위원장동무가 무원칙한 인정때문에 근본을 놓칠가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요.》

예리한 송곳끝에 찔리운듯 가슴이 쿡 쏘아났다. 민영태의 그 말이 무엇을 념두에 둔것인가 하는것이 새삼스레 생각키웠던것이다.

(내가 정말 근본을 놓치고있단 말인가? 근본… 관리위원장인 나의 근본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새로 부임되여왔을 때 김대일경영위원장이 그루박아 강조하던 말이 쟁쟁히 울려왔다.

《관리위원장의 기본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농사를 잘 짓는거요. 농장의 호주로서 모든 사업을 다 돌봐야 하겠지만 주선이 농사라는걸 명심해야 하오.》

(그렇다, 관리위원장의 근본은 농사를 잘 짓는것이다. 하지만 농장원들의 생활을 떼여놓고 어떻게 농사에 대해 생각할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농사는 농민들이 짓는다는것을 부위원장은 리해하려 하지 않는가?)

고향에 내려와 민영태와 손을 맞잡고 본때있게 일을 해보려던 기대가 컸던만큼 둘사이의 의견의 불일치로 인한 실망감도 그만 못지 않게 컸다.

준석은 이날 점심에 민영태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돼지우리에 뜨물을 넣어주고있던 유미옥이 반겨맞아주었다.

《아유, 위원장동지가 우리 집엘 어떻게?》

《몸이 아프다더니 좀 어떻습니까?》

준석의 우선우선한 인사말에 미옥은 일순 낯색이 굳어져 얼버무렸다.

《뭐… 요새 며칠 안정했더니… 좀 그만합니다. 어서 들어가시자요.》

그의 뒤를 따라 방안에 들어서니 민영태와 낯모를 손님 하나가 둥근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아니, 위원장동무가 어떻게?》

민영태는 뜻밖인듯 놀란 소리를 하더니 어서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아까 말한 도농촌경리위원회 부처장이라고 손님을 소개하였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맞춤한 때 왔구만요.》

준석은 자리에 앉자 누구에게라없이 말했다.

《제 언제부터 아주머니가 앓는다는 소릴 들으면서도 오늘에야 와봅니다.》

준석은 이렇게 말하면서 방안을 얼핏 둘러보았다. 그리고 집살림이 생각보다는 훨씬 수수하고 검소한데 놀랐다.

유미옥이 음식그릇을 받쳐들고 들어오며 변명하듯 말했다.

《집이라구 누가 올가봐 창피하지요 뭐. 우리 금혁이 아버진 밤낮 농장 자재 구하러 나다니기만 하구 집살림엔 영 신경을 안 쓴답니다. 그래서 이따금 제가 바가지 긁는 소릴 하는데 그때마다 뭐라는지 아세요?

〈지금은 제살림보다 농장살림을 생각해야 할 때요. 아무 소리 하지 마오.〉 이렇게 욱박으면 다예요.》

《또 또, 이 사람이… 그만하지 못하겠소? 아낙네가 아무데나 끼여드는게 아니라는데두.》

민영태가 안해에게 눈을 흘기자 유미옥은 입을 뾰족해보이고는 얼른 부엌으로 나가버렸다.

준석은 이런 민영태를 고깝게만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하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감마저 들었다.

민영태보다는 썩 젊어보이는 손님이 말을 비쳤다.

《저두 자재사업을 맡아보는 사람이지만 지금 자재일군들의 수고란게 말할수 없지요. 누가 거저 주겠다구 어서 오라는데가 있길 하나? 응당 받을걸 받으러 가는 경우에도 기다렸다 척척 주길 하나? 웬만한 수완을 가지고는 하기 힘든게 자재사업이랍니다.

하두 여기 민부위원장동지쯤이나 되니까 비벼대는거지요.》

《저두 우리 부위원장동지 능력과 수고를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많이 의지하고 힘을 받군 하지요.》

동감이라는듯 손님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오늘 제가 여기까지 내려온것두 민부위원장동지가 전화로 간곡히 부탁을 하길래 서로 돕구 힘을 받자구 해서입니다. 아무래도 비료나 기름은 주는 량만 가지곤 안될게 뻔한데 미리 약속을 해두어 예비를 조성해두는것도 좋지요.》

《부처장동무의 성의는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우리 농장 실정에서 볼 때 농장원들의 생활부터 보장하고나면 여유가 없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위원장동지와 의견상이가 좀 생겼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처장동무가 이 점을 잘 리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저야 뭐 리해하고말고있습니까? 농장실정이야 농장간부들이 알아 조처하게 돼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위원장동지?》

민영태는 노여움이 잔뜩 실린 얼굴로 준석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그래 정 안된다는거겠소?》

그 말속에는 모처럼 청해온 사람을 빈손으로 보내야 하겠는가 하는 속대사가 울리고있었다.

《부위원장동지, 농장원들보고 허리띠를 졸라매라구 호소하기보다 그들의 생활을 먼저 풀어주고 그 힘을 발동하는게 옳지 않을가요?》

《됐네, 됐어! 그만하게!》

민영태는 홱 손을 내저었다. 화가 동하는지 술을 제 손으로 부어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빈 고뿌를 탕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선언하듯 말했다.

《이젠 날보고 영농자재를 해결했다 못했다 책임을 묻지 말라구. 난 그래도 관리위원장을 진심으로 돕자구 뛰여다녔는데 그렇게 끌어들인 비료나 기름으로 내 터밭농사를 짓자는거요 뭐요? 나도 모르겠소. 어디 관리위원장 혼자서 해보라구. 이 부위원장이야 이 농장에 계시나마시나 한 허수아비니까, 어험.》

어지간히 취기가 오른 민영태는 잔뜩 비틀어진 소리를 내뱉고나서 손님을 돌아보았다.

《부처장동무, 봤지요? 우리 관리위원장이란 사람이 바루 이렇게 고정한 꼭쟁이요. 제 털 뽑아 제 구멍에 넣을 사람이란 말이요.》

부처장은 무안해하며 《부위원장동지, 너무 마신것 같습니다.》 하고 타이르듯 말했다.

준석은 이 자리에서 당장은 민영태를 설복시킬수 없음을 깨달았다.

《부위원장동지, 진정하구 좀 누우셔야겠습니다.》

그가 무겁게 자리를 일어 나오는데 유미옥이 황급히 따라나왔다.

《아니, 식사를 하고 가시지 않구…》

《많이 먹었습니다.》

《우리 주인을 리해해주십시오.》

준석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수 없어 가벼이 한숨을 내그었다.

《사실은 아주머니도 앓아서 못 나온다기에 들렸던 길인데… 이렇게 좀 나은걸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아이, 제때에 나가야 할걸… 미안하게 됐습니다.》

《난 우리 일군가족들이 남들의 뒤소리를 듣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래일부터 일을 나가겠어요.》

《좋습니다, 일을 하다 아프면 치료를 받더라두 량심껏 합시다.》

대문을 나서던 그는 점심식사하러 들어오는 금혁이와 마주쳤다. 그러나 아무말없이 지나쳐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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